라떼는 말이야 / 文耕 양귀순
“라떼는 말이야”라고 하면 직장에서도, 집에서도 꼰대라는 소리를 듣는다. 나는 “라떼는 말이야” 하며 이야기하면 잘 듣는다. 나는 공감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요즈음 직장문화는 그런 소리 하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얼마 전에 은행에서 현금을 찾을 일이 있었다. 현금을 거의 사용하지 않아 찾지 않았는데 통장 만기 해지였다. 현금으로 찾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오만원권, 만 원권, 천 원권을 한꺼번에 돈 세는 기계에 넣는 것을 보았다. 기계로 짜르르 세더니 오만원권 얼마, 만 원권 얼마, 천 원권 얼마 하여 정답이 나왔다. 격세지감이었다.
예전에 여상을 다니는 친구를 보면 돈 세는 연습을 한다고 했다. 종이로 돈 크기만 하게 만들어 빠르게 돈을 세었다. 그게 실력이었다. 나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않아 엄지와 검지만 놀리며 돈을 헤아렸다. 제대로 세려면 약지로 튕기며 새끼손가락까지 바지런하게 움직여야 했다.
월급날이면 은행에 돈 찾으러 가는 분은 부장님과 과장님이 운전기사 대동하여 다녀왔다. 여직원은 보호를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라 내부에서만 일하고 외부에 다니는 것은 모두 남자직원들이 했다. 다녀와서 찾아온 돈을 전체 직원 월급 총액과 맞는지 확인하고 직원들 월급봉투에 두 사람이 짝이 되어 확인하여 넣기 시작했다.
직원들 근무시간을 정확히 산출해서 급여 대장에 시간을 적어서 서무팀에서 넘어오면 경리과 직원들은 주산을 놓아 월급계산을 했다. 그 후 전자계산기가 흔해질 때까지 주판알을 튕기어야 했다. 아니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보다 주산을 놓아 가감산하는 것이 더 정확했다.
펜촉에 잉크를 찍어 장부기장을 하던 시절이었다. 70년대 후반까지 펜을 사용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 수작업하다가 1991년도부터 급여 프로그램을 프로그래머에게 의뢰하였다. 그때 프로그램 개발비가 백여만 원이 더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월 사용료도 주어야 했다. 지금은 급여 프로그램이 거의 표준화 되어있다.
그렇게 서서히 컴퓨터화되어 지금은 컴퓨터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 1990년에 무전기만 한 핸드폰 한 대가 몇백만 원이었다. 무스탕 옷을 입고 벽돌 크기만 한 핸드폰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그야말로 사장들이었다. 카폰까지 사용했다. 1991년 삼성 애니콜 전화기는 백이십만 원이었다. 그 당시 기업들 신입사원 월급 초봉은 4~50만 원이었다.
많은 사람이 필요했던 사무가 사무자동화가 되어 많은 사무직원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만 나와도 다 하던 일이다. 대학 진학률이 높아져 좋은 일자리를 찾다 보니 마음에 드는 일자리가 없다. 누구를 탓하랴. 인간들이 더불어 살아가려는 마음보다는 덜 시달리는 길을 택한다. 키오스크라는 기계를 발명해 음식점에도 계산대가 필요 없다. 주문은 화면의 메뉴를 선택하고 카드로 계산하면 음식은 자동으로 주문되어 나온다.
세상은 아주 단순한 일과 고급인력의 두뇌만 있으면 돌아간다.
이제 젊은이들은 선택해야 할 시기가 온 것 같다. 생산직으로 세상을 살 것인지, 개발하는 두뇌로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도 역시 산업화 시대를 살았다. 졸업하면 당연히 돈을 벌어야 했다. 마음에 들지 않은 직장이었지만 그냥 내디뎠다. 나를 책임져야 했기에. 지금처럼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았다. 적성에 맞는 직장을 다녀야 한다고 한다. 그 말은 배부른 소리다. 자녀들이 적성이 안 맞아서 학교에 다니다가 휴학을 하고 다시 공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부모들이 그런다. 적성보다는 성적으로 학교와 학과를 선택했고, 선택한 것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무책임한 자녀들에게 내색도 못한다.
“라떼는 말이야” 그 말에 공감하며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대 간 서로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을 텐데.
나는 엄마의 기록을 남기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KBS에서의 캠페인 ‘기억을 기록하다’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다. 가끔 짧은 기억을 들으면서 나도 엄마의 기억을 정리해 놓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후회한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 내 일상을, 내 사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