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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가의 여인처럼
야곱의 우물-사마리아 여인의 우물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중앙 산악지대를 따라 이어지는
세바스티아(사마리아), 스켐, 실로, 베텔, 예루살렘, 베들레헴
그리고 헤브론에서 브에르 세바로 이어지는 길은 족장들의 숨결이 살아있는 중요한 성소이다.
야곱의 우물이 있는 스켐(공동번역에서는 ‘세겜’으로 번역)은 예루살렘으로부터 65km
그리고 나자 렛에서 제닌을 가로질러 족장들의 길을 따르면
도탄과 사마리아 다음으로 75km의 거리에 있다.
에프라임 산악 지방에 있는 스켐은
레위인 크핫의 자손들이 물려받은 성읍이며 살인자들의 도피 성읍이었다.
여호 21,20 (레위인들의 성읍) 크핫의 나머지 자손들, 곧 레위인 크핫 자손의 씨족들은 제비를 뽑아
에프라임 지파에서 성읍들을 받았다.
21 그래서 그들에게 에프라임 산악 지방에 있는 살인자의 도피 성읍 스켐과
거기에 딸린 목초지, 게제르와 거기에 딸린 목초지,
22 킵차임과 거기에 딸린 목초지, 벳 호론과 거기에 딸린 목초지, 이렇게 네 성읍을 내주었다.
야곱의 우물은 단단한 암반을 파서 만든 깊은 우물로 구약성경에서는 한 번도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대략 2천년 동안 종교 전승에서 유대인, 사마리아인, 그리스도인과 무슬림들은 모두 야곱과 연결시켜 왔다.
이곳은 성경의 스켐이라고 여겨지는 텔 발라타(Tell Balata) 고고학 유적지에서 76m 떨어진
아주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성경학자들은 야곱이 산 땅의 부지 위에 야곱의 우물이 파졌다고 이야기한다.
창세기에서 야곱은 ‘파딴 아람’을 떠나 ‘스켐’으로 돌아와
성읍 “앞에” 천막을 치고 그 땅을 샀다고 언급하고 있다.
창세 33,18 (야곱이 스켐에 다다르다)
야곱은 파딴 아람을 떠나 가나안 땅에 있는 스켐 성읍에 무사히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천막을 쳤다.
19 그리고 자기가 천막을 친 땅을 스켐의 아버지 하모르의 아들들에게서 돈 백 닢을 주고 샀다.
20 그는 그곳에 제단을 세우고, 그 이름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 하였다.
‘야곱의 우물’(요한 4,6)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전하는 요한복음에서 처음으로 언급(요한 4,1-42)된다.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이 우물물은 야곱이 준 우물로서
야곱과 그의 자녀들 그리고 가축들이 마신 우물이라고 말한다.
요한 4,12 선생님이 저희 조상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라는 말씀입니까?
그분께서 저희에게 이 우물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물론 그분의 자녀들과 가축들도 이 우물물을 마셨습니다.”
야곱의 샘(Fountain) 또는 시카르(Sychar)의 우물이라고도 하는 야곱의 우물은
오늘날 팔레스타인 서안 지역의 나블루스(Nablus) 시의
동쪽 편에 있는 동방 정교회 수도원으로서
성녀 포티나(St. Photina)에게 봉헌한 성지 성당이다.
전승에 의하면 복음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 사마리아 여인은
사마리아 공동체에서 예수님을 따른 첫 번째 제자가 되었다.
오래된 지방 전승에 따르면 사마리아 여인은
요셉(Josephus)과 빅토르(Victor)라는 두 아이를 가진
포티나(또는 포시나)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포티나는 그리스어로 ‘계몽된, 문명화된, 개화된’ 것을 뜻한다.
복음의 내용으로 보면 사마리아인들에게 ‘빛을 가져온 사람’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포티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3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가
카르타고(Carthago)에서 순교하였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성녀의 아들인 요셉, 빅토르와 함께
모두 네로 황제 때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순교하기 전에 네로 황제의 딸 돔니나(Domnina)와
백여 명에 달하는 그녀의 노예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켰다고 한다.
성녀의 유해는 여러 해 동안 성 바오로 대성당에서 공경되었다.
비잔틴 후기의 전승에 따르면 사마리아 성인은 나블루스의 대성당에서 공경 받았다.
이것은 808년 서로마 제국의 황제 샤를마뉴(768~814 재위, 프랑크 왕국의 왕.
서유럽의 거의 모든 그리스도교 지역을 하나의 초강대국으로 통일한 대제)의 문서에서 드러난다.
이 문서는 나블루스의 대 성당 안에 사마리아 여인을 안장한 무덤이 발견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마다바 모자이크에서 나블루스는 방어성벽, 극장, 대로, 그리고 여러 성당들이 새겨져 있다.
이것들 중의 하나가 사마리아 여인의 유물들이 보호되고 있었던 대성당일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로 가시면서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사준 땅에서 가까운
시카르(Sychar)라고 하는 사마리아 마을의 우물가에 앉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실 물을 청하면서
‘영원한 생명의 물’에 관하여 말씀 하셨다.
요한 4,1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하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요한보다 더 많은 사람을 제자로 만들고
세례를 준다는 소문을 바리사이들이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셨다.
2 ─ 사실은 예수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준 것이다. ─
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다시 갈릴래아로 가셨다.
4 그때에 사마리아를 가로질러 가셔야 했다.
5 그렇게 하여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시카르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 이르셨다.
6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7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8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고을에 가 있었다.
9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사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10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11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에서 그 생수를 마련하시렵니까?
12 선생님이 저희 조상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라는 말씀입니까?
그분께서 저희에게 이 우물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물론 그분의 자녀들과 가축들도 이 우물물을 마셨습니다.”
13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14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15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16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17 그 여자가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18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 대로 말하였다.”
19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
20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21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22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
구원은 유다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23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24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25 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 하였다.
26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27 바로 그때에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께서 여자와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아무도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또는 “저 여자와 무슨 이야기를 하십니까?” 하고 묻지 않았다.
28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29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30 그리하여 그들이 고을에서 나와 예수님께 모여 왔다.
31 그러는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께 “스승님, 잡수십시오.” 하고 권하였다.
32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이 있다.” 하시자,
33 제자들은 서로 “누가 스승님께
잡수실 것을 갖다 드리기라도 하였다는 말인가?” 하고 말하였다.
34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35 너희는 ‘아직도 넉 달이 지나야 수확 때가 온다.’ 하고 말하지 않느냐?
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 때가 되었다. 이미
36 수확하는 이가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알곡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씨 뿌리는 이도 수확하는 이와 함께 기뻐하게 되었다.
37 과연 ‘씨 뿌리는 이가 다르고 수확하는 이가 다르다.’는 말이 옳다.
38 나는 너희가 애쓰지 않은 것을 수확하라고 너희를 보냈다.
사실 수고는 다른 이들이 하였는데, 너희가 그 수고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39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 여자가 “저분은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혔습니다.”
하고 증언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40 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자,
그분께서는 거기에서 이틀을 머무르셨다.
41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
42 그들이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
다른 어떤 성소보다도 많은 순례자들의 기록이 남아 있는 야곱의 우물은
그것을 통하여 야곱의 우물이
어떻게 보존되고 변화되어 왔는지 그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베시파시아누스 황제와 그의 아들 티투스는 유대를 정복한 후 72년에
스켐을 ‘플라비아 네아폴리스 사마리아’(또는 플라비아 율리아 네아폴리스)라는
새로운 신도시로 만들었다.
네아 폴리스라는 명칭은 ‘새로운 도시’라는 의미이다.
295년경에 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 주교가 쓴 지명사전에 의하면
시카르라고 하는 장소는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에게 준 땅으로
시카르는 네아폴리스 보다 ‘그 전에’ 있다고 기록 하였다.
오늘날 잘 알려져 있는 이 장소는 요한에 따르면
구원자이신 주님께서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셨던 곳이다(에우세비우스 지명사전 164,1-4).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 전승에 의하면 에우세비우스 주교 시대에
이미 야곱의 우물 장소가 기억되고 있음이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향하다 보면 왼쪽에는 그리짐 산이 있고
그 맞은편에는 에발 산이 있는데 그 경계에 조금 못 미쳐 있다.
333년경의 보르도의 여정기에는 ‘1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시카르라고 불리는 장소가 있다.
그곳에는 야곱이 판 우물이 있는데 사마리아 여인은 그곳으로 물을 길으러 갔고
주님께서 그녀와 말씀을 나누셨던 곳이다.
야곱이 심은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있고
그곳에는 우물물을 받아 놓는 욕조가 하나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 욕조는 그리스도인들의 세례 장소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385년경에 파울라의 순례 여정을 쓴 편지 108에서 예로니모 성인은
‘그녀는 오늘날 그리짐 산 근처 네아 폴리스라고 부르는 스켐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야곱의 우물에 지어진 성당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주님께서 배고프고 목마르셨을 때 앉으셨던 곳이고
이미 다섯 남자(모세 오경)을 떠난 보낸 사마리아 여인의 믿음에
새로운 활력을 넣어 주신 곳이다.’라고 전한다.
390년 경 예로니모 성인은 에우세비우스의 지명사전을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기념성당이 우물터 위에 지어졌다고 기록하였다(예로니모 지명사전 165,1-4).
이러한 초세기의 증언을 토대로 하여 사마리아 여인의 우물의 장소는
초세기이래 증명되고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예로니모 성인이 언급한 첫 번째 비잔틴 성당은
제르마노 주교 또는 그의 후계자에 의해 축성 되었다.
제르마노 주교는 314년의 카이사리아,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였다.
야곱의 우물 위에 지어진 성당은 시리아의 에프라임이 지은 찬미가 중에서도 언급된다.
이 성당은 사마리아인들의 반란 때인 484년 또는 529년에 대부분 파괴되었다.
그리고나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두 번째로 지어진 성당은
720년까지 유지 되었고 아마도 9세기 초까지 남아 있었다.
560년경의 만들어진 현존하는 성지 지도 중 가장 오래된 마다바 지도에서
야곱의 우물 성지는 검은 비문으로 빨간 지붕을 한 성당 장식과 함께 쓰여져 있다.
570년 경 오늘날 이태리 피아첸자(Piacenza)에서 온 익명의 순례자는 그의 여정기에서
“타볼산에서 티베리아 호수로 내려갔고 다시 한때 사마리아라고 부르던 도시로 갔다.
지금의 이름은 네아폴리스 이다.
그곳에는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셨던 우물이 있다.
이 우물은 제단 칸막이 앞에 있고 그곳에는 양동이가 하나 있었는데
주님께서 물을 마셨다고 하는 바로 그 양동이라고 사람들은 말하였다.
이곳에서 많은 병들이 치유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680년경에 성지순례를 한 프랑크족의 주교인 아르쿨프(Arculf)는 중요한 자료를 남겨 주었다.
히브리어로 스켐이라고 부르는 도시에 도착한 그는
세상의 네 곳을 가리키듯이 십자가 모양을 한 성당을 보았고 이 성당 모습을 스케치 하였다.
그는 ‘성당의 중심에는 사람들이 흔히 우물이라고 부르는 야곱의 샘(Spring)이 있는데
어느 날 정오쯤 여행을 하느라 피곤했던 주님께서 이곳에 앉으셨다.’
우물물을 마신 아르쿨프는 우물의 깊이가 40큐빗(32m.
고대의 척도로 1 큐빗은 팔꿈치에서 가운데 손가락 끝까지의 43-53cm 길이)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12세기 초의 순례자들이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성당에 대한 언급 없이 우물에 대해서만 이야기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비잔틴 성당은 십자군들이 나블루스를 점령하던
1099년 8월 이전에 파괴된 것으로 여겨진다.
12세기 후반에 십자군들은 비잔틴 성당 터 위에
대성당 바실리카를 지어 베네딕도 수도원에 위탁하였다.
예루살렘의 왕 볼드윈 2세의 큰딸이자 예루살렘의 여왕(1131-1153)이었던
멜리산드(Melisende, 1105–1161.9.11)가 1152년 나블루스로 망명해 왔을 때
성당을 지을 수 있도록 지원하여 1175년 십자군 대성당이 지어졌지만
이 성당은 살라딘이 하틴의 전투에서 승리한 1187년 이후에 파괴 되었다.
십자군 시대의 정문은 예루살렘에 있는 무덤성당의 것과 유사했지만
1927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1866년에 우물을 방문했던 육군소령 엔더슨에 의하면 우물의 입구는 좁았는데
한 사람이 팔을 들어 올리고 들어갈 수 있는 정도의 폭이라고 전하고 있다.
에드워드 로빈슨은 이 장소를 19세기 중반에 방문하였다.
그는 고대 성당의 유물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황폐하게 남아있는 유적지의 서남쪽 우물 위에는 고대의 파편들이 남아 있고
아직도 고대의 광택이 남아 있는 화강암 돌기둥들도 있었다.
현지의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성당은 남아있지 않지만 아직도 유적지를 공경하고 있다.”
초세기부터 오늘날의 야곱의 우물의 장소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를 나눈 장소로 전해져 오고 있지만
‘시카르’라는 마을을 검증하는 것은 의문의 소지가 있다.
보르도에서 온 순례자의 증언에 따르면
시카르라는 마을은 나블루스로부터 1000 걸음 떨어져 있다고 전한다.
전승에서 동일시하는 곳은 오늘날 야곱의 우물에서 가까운 에발산 근처의 아스카르(Askar)이다.
아스카르는 시카르의 음위의 변화에서 온 것으로 그
리스어에서 온 것이 아니라 군사용어에서 온 것이다.
현대의 몇몇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이것은
요한복음 4,5절의 시카르를 아스카르와 동일시하는 것을 부인하는 이유이다.
성지 복구를 위한 역사는 예루살렘의 그리스 정교회에서
사마리아 여인의 우물 폐허지를 1860년에 매입하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오스만 터키 통치 하에서 바로 성당을 복원할 수 없었고
1915년까지는 우물을 청소하고 관리하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더구나 1915년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나고 설상가상으로 후원자였던 러시아 정교회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그마저도 끊겼다.
야곱의 우물은 완벽하게 고고학 발굴이 이루어진적은 없고
1966년에 예루살렘에 있는 프란치스칸 성서대학의 바가티(B. Bagatti)에 의해 조사 되었다.
제단 아래쪽에 있는 야곱의 우물 경당 중앙에 있는 우물의 깊이는 32m 이다.
가장 오래된 흔적은 우물 그 자체로써 우물 안에서
헬레니즘 시대의 항아리들과 세라믹 도자기 파편들이 발견되었다.
이것으로 보아 우물은 예수님의 활동 시대 동안인
1세기 이전에 이용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3세기의 아마존 강의 방패와 석관,
3-4세기 때의 모세의 십계명을 복제한 사마리아 비문이 발견 되었다.
비잔틴 시대의 것으로는 모자이크, 비문, 세라믹, 머리기둥 등이 있다.
예수님 시대의 것이라고 하는 우물의 원형 보호난간은
558년에 유스티누스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콘스탄티노플로 가져갔고
그것은 여러 세기동안 거룩한 지혜에게 봉헌한 성 소피아 성당에서 경배 되었다고 한다.
십자군 시대의 것으로는 제대, 문의 조각, 성수반, 기둥의 토대와 3개의 머리기둥도 발굴 되었다.
십자군 시대의 우물 난간(75cm x 115cm)의 일부분은
현재의 우물 형태로 만들던 1893년에 사라져 버렸다.
유적지는 보존 상태가 엉망이었기 때문에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 바닥의 일부는
현대 바실리카 외부의 앱스 동쪽에서만 볼 수 있다.
성당 밖에서 뒤쪽으로 돌아가면 모자이크를 볼 수 있다.
2000년 대희년에 완공되기를 기대했던 대성당은
인티파다(Intifada, 팔레스타인들의 반 이스라엘 투쟁)가 일어나는
정치적인 격동으로 말미암아 2007년에 마무리 되었다.
예루살렘의 그리스도 총대주교좌와 꿋꿋하게 이 일을 완수한 수도자들의 공적이다.
▼ 양 옆 난간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면 야곱의 우물 경당이 나온다.
야곱의 우물 성당은 유스티노스 신부에 의해서 다시 새롭게 복원되었는데
새로운 성당은 십자군 시대의 모습을 따라
성당 제대 아래쪽 지하에 야곱의 우물을 배치하였다.
우물은 성당 안으로 들어가 제단 양편으로 나 있는 한쪽 계단을 내려가면
작은 경당의 중앙에 우물이 위치해 있다.
우물 위에는 도르래에 달려 있어 물받이를 내려 물을 길을 수 있다.
성당을 들어가 중간 쯤, 왼쪽 기둥에는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던 사마리아 여인인 성녀 포시나와 관련된 항아리가 있다.
바티칸 박물관에 보관되던 것인데 그리스 정교회와 친교의 나눔 차원에서
다시 야곱의 우물 성당으로 선물한 것이다.
오늘날 성지를 책임지고 관리하는 사람은 유스티노스(P. Iustinus) 신부이다.
유스티누스 성인을 주보 성인으로 모시고 있는 그의 이름은
오늘날 나블루스라고 하는 네아폴리스의 유명한 순교자인
유스티누스(St. Justinus, 100/110-165년. 교부, 순교자. 축일은 6.1일)를 상기시키는 이름이다.
순교 성인이자 교부인 유스티누스 성인은
사마리아 지방의 네아폴리스에 있는 이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스토아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피타고라스 철학
그리고 플라톤 철학 공부에 몰두하였지만 만족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카이사리아의 바닷가를 산책하던 중에 한 노인을 만나
인간의 모든 사상, 플라톤 사상에도
한계와 부족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로마에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에 항의하는
2편의 호교론을 쓴 첫 번째 그리스도교 호교론자이며
그리스도교에 대한 장문의 글을 남긴 최초의 평신도이기도 한 그는
2세기 호교론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한 신학자였다.
그는 로마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 하였다.
성 필루메노스
(† St. Philoumenos, 1979.11.16/29)
새로운 순교 성인이 오늘날 나블루스라고 부르는
팔레스타인 도시에 있는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인 야곱의 우물 성지에서 탄생했다.
필루메노스의 순교는 과거 로마 황제시대나 공산주의 시대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한복판에서 일어난 순교이다.
필루메노스 신부의 지상 순례 여정에 순교의 왕관이 씌워진 것은 1979년 11월 16/29일
(앞의 날짜는 정교회에서 사용하는 율리아누스 달력에 따른 것이고
뒤의 날짜는 그레고리아누스 달력을 쓰는 우리의 날짜이다.)
성 마태오 사도의 축일에 일어났다.
수세기 동안 지켜 왔던 거룩한 성지인 야곱의 우물 경당에서 저녁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극단적인 유대교 광신자들이 들어와 그를 손도끼로 살육하였다.
순교 당하기 며칠 전에 한 무리의 광신적인 시오니스트들이 야곱의 우물 수도원으로 들어와서는
이곳은 유대인들의 거룩한 성지이니까 십자가와 이콘들을 치우라고 요구하였다.
그러자 필루메노스 신부는 그들이 서 있는 계단을 가리키면서
이곳은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이전 4세기경에 비잔틴 황제에 의해 성당이 지어졌고
16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성지로 공경하는 성지이고,
그전에는 사마리아 인들이 8세기 동안 차지하던 곳임을 상기 시켰다.
그러자 이들은 성지의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적으로 당하는 것처럼
무례하게 온갖 욕설을 퍼붓고 떠나갔다.
그 후 며칠이 지난 뒤 1979년 11월 16/29일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던 날
한 무리가 수도원으로 다시 쳐들어왔다.
성인은 이미 저녁기도를 위해 영대를 매고 있었다.
그들은 수도원으로 쳐들어 와 손도끼로 필루메노스를 십자가 형태로 학살 하였다.
그들은 세로로 그의 얼굴을 내려쳤고
다시 한 번 수평으로 볼에서 귀가 있는 데까지 내리쳤다.
그의 눈은 뽑혀져 나왔고, 성호경을 긋는 오른쪽 손가락은 난도질당하였다.
살인자들은 무죄한 수도자를 학살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성당을 모독하기 시작하였다.
십자가는 파괴되었고 성찬용 도구들을 사방으로 흐트러뜨리면서 성소를 짓밟았다.
성호경을 긋는 세 손가락을 따로 잘라낸 것은
그의 신앙을 단념하도록 고문한 것으로 보인다.
성인의 시신은 학살된 지 6일 후에 되돌려 받았고
그의 시신은 예루살렘 시온 산 무덤에 묻혔다.
성인의 유해는 정교회의 관습대로 4년 후에 발굴되었다.
그의 시신은 부패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었고 향긋한 향기가 났다.
그의 부패하지 않은 시신은 그가 천상 예루살렘으로 순례한 순교 장소인
야곱의 우물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예루살렘 총대주교좌 종교회의에서는 2009년 9월 11일,
제50차 회기에서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2009년 11월 29일 예루살렘 총대주교(테오필로스 3세)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성인으로 선포되고 장엄한 예식이 거행되었다.
필루메노스 성인은 성지에서 46년간 봉사하고 그의 나이 66살에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11월 16/29일이다.
성 필루메노스 성인의 이콘에는 왼손에 그리스어로 쓰인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마태 10,28; 루카 12,4)는 두루마리가 들려져 있다.
이스라엘 정부에서는 범인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한 조사를 실시한다고
당시 발표하였지만 어느 누구도 체포되지 않았다.
야곱의 우물에 가까운 북쪽에 요셉의 무덤이 위치해 있는데
회색 둥근 지붕으로 만들어진 오스만 터키 시대의 건물이다.
여호 24,32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집트에서 가지고 올라온 요셉의 유골을 스켐에,
야곱이 스켐의 아버지 하모르의 아들들에게 돈 백 닢을 주고 산 밭에 묻었다.
그곳은 요셉 자손들의 상속 재산이 된 곳이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요한 4,13-14)
야곱우물교회
세겜과 야곱의 우물 (Shechem and Jacob's 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