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활옷의 아랫단 안감이 해진 틈으로 비치는 글씨. 활옷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옷감 사이에 넣은 종이로, 분석 결과 1880년 과거시험 때 쓴 답안지인 것으로 확인됐다.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어, 글자가 있네?”
내시경·적외선카메라로 밝혀내
예복 만드는 데 종이 재활용한 듯
‘창덕궁 활옷’ 일반에 최초 공개
지난 2016년, 국립고궁박물관 지류직물실에서 ‘창덕궁 전래 활옷’을 들여다보던 김선영 연구사와 이정민 연구사(당시 연구원)의 눈에 낯선 무늬가 들어왔다.
뒷깃 안감이 해진 틈으로 ‘而(이)’ ‘歸(귀)’ ‘三(삼)’ 등 먹글씨가 보였다. 왕실 여성이 예식 때 가장 겉에 입는 옷인 활옷은 빳빳한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옷 전체에 종이심을 넣었는데, 이 활옷의 종이심은 하얀 새 종이가 아니라 글씨가 쓰인 이면지였다.
옷감 사이 종이를 분석하기 위해 내시경으로 찍은 사진.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글씨를 더 확인하기 위해 활옷 안쪽을 들여다보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적외선카메라와 내시경을 동원해 풀어낸 활옷 안쪽
의 종이는 1880년 헌종비의 생일을 축하하는 과거가 열렸을 때의 답안지였다. 유생들이 작성한 과거시험 답안지가 왕실의 예
복을 만드는 데 재활용된 것이다.
활옷 속 종이에는 같은 내용의 글들이 반복되고 있어,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의 답지를 가져다 쓴 것으로 추정됐다. 국립고
궁박물관 임경희 학예연구관은 “한자 각각은 다 알아볼 수 있는데 해석이 도저히 안 되는 문장”이라며 “낙방할 수밖에 없었던
답안지들”이라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7일 과거시험 답안지가 들어있는 ‘창덕궁 활옷’을 일반에 최초로 공개한다. 10월 31일까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
리는 ‘안녕(安寧), 모란’ 전에서다. 궁중 장식에 많이 쓰였던 모란을 테마로 한 전시다.
복온공주 활옷의 전체 모양. 김정연 기자
이 활옷은 ‘창덕궁 연화창고에서 발견됐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채 1980년대부터 고궁박물관에 보관돼왔다. 보
관 상태가 좋지 않아 전시를 위한 보존처리도 하지 못하다가, 고궁박물관에 직물 담당 보존 전문가가 생긴 이후 2016년부터 보
존작업을 위한 조사를 시작했다. 이정민 연구사는 “구멍이 많이 나고 상태가 좋지 않은 편이었다”며 “깃에 해당하는 동정 부분,
겨드랑이 부분 등에 오염도 그대로 남아있었다”고 전했다.
창덕궁 활옷은 제작 연대가 확인된 두 번째 활옷이 됐다. 제작 연대가 알려진 최초의 활옷이었던 ‘복온공주 활옷’도 이번 전시
에서 함께 공개된다. 조선 순조의 둘째 딸이었던 복온공주(1818~1832)가 입었던 옷으로, 공주가 시집을 간 안동김씨 김병주의
집안에서 대대로 물려와 제작연대와 착용자가 모두 확인된 유일한 활옷이다.
열 세 살에 혼례를 치른 뒤 열 다섯살에 사망한 복온공주의 활옷은 길이 129㎝로 다소 작은 편이다. 이정민 연구사는 “초등학생
이 입을 만한 사이즈의 활옷이고, 모란 자수가 깔끔하게 잘 남아있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이번 전시에선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인 모란 병풍 11점과 모란을 소재로 한 문화재 120여 점도 함께 볼 수 있다. 전시
공간 안에 꾸며놓은 ‘모란정원’에는 지난 4월 창덕궁 낙선재 앞에 핀 모란에서 채집한 향을 채워 자연 속에 있는 느낌을 연출했
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왕실 활옷 뒷깃 속 종이심, 알고보니 과거시험 낙방 답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