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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성(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선임연구원) | ||||||||||||||||||||||||
‘자문’은 보통 위 예들처럼 ‘받다, 하다, 구하다’ 등과 잘 어울려 쓰인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자문’은 ‘어떤 일을 좀 더 효율적이고 바르게 처리하려고 그 방면의 전문가나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기구에 의견을 물음.’으로 풀이되어 있다. 간단히 말해서, ‘전문가에게 하는 질문’을 ‘자문’이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문을 받는’ 사람은 전문가가 되고, ‘자문을 하는’ 사람은 비전문가가 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1)에서 ‘자문을 받는’ 사람은 비전문가이고, (2)에서 ‘자문을 하는’ 사람은 전문가인 것을 알 수 있다.
아래 (3)에서는 ‘자문’을 ‘조언’이나 ‘답변’으로 바꾸어도 말이 통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자문’을 ‘조언’이나 ‘답변’과 비슷한 말로 잘못 알고 쓰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말을 잘하는 축에 드는 신문기자들이 하나같이 이렇게 쓰고 있다. 글쓴이는 우리말 전문가를 빼고 ‘자문(諮問)’을 바르게 쓰는 이를 한 사람도 본 적이 없다. 널리 쓰이는 말이면서도 누구나 잘못 쓰고 있는 직접적인 이유는 이 말이 어려운 한자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자문’의 바른 뜻과 용법을 제대로 교육하는 것도 좋은 생각이지만, 그보다는 이런 말을 쓰게 될 때마다 좀 더 쉬운 말을 쓰려는 태도를 가지도록 교육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된다고 생각한다.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쓰고 있는 말이 ‘자문’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3)은 아래와 같이 고쳐 써야 한다.
다음의 예들도 ‘자문’처럼 반대의 뜻으로 곧잘 쓰이는 한자어들이다.
‘수납(受納)’은 ‘돈이나 물품 따위를 받아 거두어들이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까 (4)를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보증금을 국고로부터 받아내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4)는 그런 의도가 아님은 쉽게 알 수 있다. 입찰을 할 때에는 보증금을 내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와 같이 고쳐 써야 한다.
‘접수(接受)’는 ‘신청이나 신고 따위를 구두나 문서로 받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까 (5)는 ‘신청서를 4번 창구에서 받으라’는 뜻이 된다. 물론 빈 신청서를 받아서 다시 내용을 적은 후에 내는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동사무소 직원이 이 말을 할 때는 ‘신청서를 4번 창구에서 내라’는 뜻으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신청하는 사람은 민원인이고 접수하는 사람은 직원인데도 민원인에게 접수하라고 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위와 같이 고쳐 써야 한다. 참고로 ‘창구(窓口)’를 [창꾸]로 소리 내는 이들이 많은데, 표준 발음은 [창구]이다.
‘분리수거(分離收去)’는 ‘쓰레기 따위를 종류별로 나누어서 늘어놓은 것을 거두어 가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까 (6)은 ‘사무실에서 생긴 쓰레기는 밖에 내놓지 말고 주머니나 가방에 넣어서 집으로 가지고 가라’는 뜻이 된다. 쓰레기를 종류별로 잘 정리해서 버리는 일과 그것을 수거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엄연히 나뉘어 있는데도 아무 생각 없이 글을 쓰는 바람에 이런 이상한 문장이 쓰이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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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해(경희대 교양학부 교수) |
![]() 방충망으로 꽁꽁 막혀 있는 사무실 커튼 위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손바닥만 한 나방이 붙어 있다. 뭘 없애(=죽여)버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깔이라 저걸 어떻게 치워야 하나 고민이다. 죽이기엔 그 생명이 안쓰럽고, 그냥 두자니 종일 방해를 할 것이다. 스스로 적당히 타협을 한다. 휴지로 살짝 싸서 밖으로 다시 날려주기로. 두루마리 휴지를 두 바퀴 돌렸다. 단박에 잡아야 한다. 너무 세게 잡으면 눌려 죽을 것이고, 너무 살살 잡으면 가루를 온 방에 뿌리며 난리를 칠 것이다. 적당한 힘 조절……. 성공이다! 한 번에 나방을 잡았다. 후닥닥 뛰쳐나가 주먹을 편다. 아, 그런데 이 얼마 만에 느끼는 생명의 몸부림인가. 잡았을 때의 그 낯선 느낌. 그건 생명의 꿈틀거림, 흔들림, 떨림에 대한 낯섦이다. 비가 오면 꾸물꾸물 기어 나오는 지렁이,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면 열심히 길을 떠나는 개미, 따뜻한 봄볕에 졸고 있던 병아리, 창호지처럼 얇게 전율하던 잠자리, 엄지와 검지 사이에 꽉 잡히는 개구리, 손바닥 사이에서 가늘게 퍼덕이던 송사리, 여물을 되새김질하며 질질 침을 흘리던 누렁소…. 어릴 적 다른 생명체들은 그렇게 낯설지 않게 우리 손을 드나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이가 들수록 다른 생명체를 ‘잡아’ 본 적이 별로 없다. 이제는 그들이 너무 낯설다. 낯설 뿐만 아니라 두렵고 피하고 싶고 더럽다는 느낌마저 든다. 모기, 파리는 신문으로 팍 ‘쎄려잡고’, 그렇게 좋아했던 강아지들도 그냥 발로 밀어낼 뿐, 그 꿈틀거리는 생명을 손으로 직접 만지려 들지 않는다. 이물감이 불편해서일까? 아무래도 구체적 생명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 듯하다. 사람들이 도시로 스며들고 나서 점점 더 추상적으로 살게 된다. 도시는 추상성이 범람하는 곳이다. 추상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다. 붕 떠 있다. 모든 사건과 정보는 화면을 통해 전달되니 직접 뭔가를 대면하는 것이 도리어 뜸하다. 추상적으로 사니 역설적이게도 세상 근심이 모두 내 근심이다. 모두의 문제가 내 문제이고, 모두의 문제를 풀어내고 싶어한다. 하지만 모두를 위해 산다는 건 아무도 위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모든 걸 감싸 안을 수 없으면서 모든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추상이 주는 환락일 뿐이다. ‘하나는 모두를, 모두는 하나를 위한다’는 혼연일체의 꿈은 진정 아름답지만 하나가 하나만을 깊고 깊게 위하는 것도 지극히 아름다울 수 있다. 전체를 생각하는 마음을 버려서도 안 되겠지만, 구체적인 생명의 꿈틀거림을 내 손 끝으로 직접 만지지 않으면 그건 그 아무것도 구하지도, 아무런 힘도 보태지 못하는 것이다. ![]() ![]() ![]() 요즘 동물원이나 수목원, 미술관, 박물관에 가보면 엄마나 아빠의 손을 잡고 온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옛날엔 설렁설렁 무덤덤하게 지나쳤다면, 지금은 그 반대로 엄마 아빠가 줄기차게 설명을 하고 아이들은 그걸 공책에 받아 적는다. 예전에 비해 자상해진 엄마 아빠는 식물원에 가면 나무와 꽃 이름, 그것의 생태, 특징, 모양새에 대해 끊임없이 말을 한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아이들은 동물원 우리 앞에 쓰인 안내문을 보며 ‘저게 이름이 뭐구나’라고 한다. 아이가 꽃 이름을 말하기라도 하면 감탄사를 연발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이렇게 사물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사물을 기억하고 분류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만큼 잃는 것도 많다. 이젠 언어 없이는 세상을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의 ‘하나의 몸짓’을 온몸으로 느낄 기회가 사라진다. 나에게 어떤 이름의 꽃이 되기 전에 그것의 촉감, 냄새, 소리, 맛을 경험하지 못한다. 기차가 내는 진짜 소리, 매미가 내는 진짜 울음소리를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지식은 쌓이지만, 자연과의 대화를 통한 경험은 쌓이지 않는다. 이름을 외우고, 다른 것과 어떻게 다른지 구별할 줄 알기 위해 자연으로 가는 건 아닐까. ![]() 그래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충분히’ 느끼지 못한다. ‘이름’과 ‘분류’와 ‘특성’을 되뇌는 것만이 아이들이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의 전부이다. 그러나 이름은 ‘이름표’에 불과할 뿐이며, 이름 너머에 있는 사물과의 대화는 단절된다. 이름을 통한 간접 경험의 과잉은 아이들의 지식량을 늘릴지는 모르지만, 사물과의 대화와 놀이로 얻게 될 몸의 언어를 상실한다. 언어는 과거의 축적물이다. 언어는 새롭기보다는 상투적이다. 지금 당장 만들어진 물건이나 솟구치는 생각을 오롯이 담기 어렵다. 그것을 조금씩 흔들어 새로운 언어로 변모시키는 사람들이 있지만, 태생적으로 언어는 고루한 그릇이다. 이름 모를 꽃에 이름을 붙여준다고 ‘의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름 모를 꽃을 만지고 동물들과 함께 놀 때 진정 몸에 박히는 의미로 남는 것이다. 어느 유치원에서는 아이들에게 언어의 상투성을 뛰어넘어 스스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느껴보라고 아이들을 농장이나 동물원에 데려가서 동물들이 내는 ‘진짜’ 울음소리를 받아 적어 보게 한다고 한다. 우리도 동물원에 가서 “저게 호랑이야”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가만히 있어 보면 어떨까. 아이들은 곧 호랑이의 크르렁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에 전율하게 될 것이다. 들판에 핀 꽃을 아이에게 “저건 해바라기야”라고 말하지 말자. 그 냄새를 호흡하며 노란 잎들의 보드라운 촉감, 원을 그리며 촘촘히 박힌 씨들의 규칙성, 솟대처럼 뻗은 줄기를 보고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른들부터 더욱 구체적으로 살아야 한다. 말은 줄이고…….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
첫댓글 잘못된 한자어가 많네요. '자문을 구하다.'라는 말은 흔히 들었는데...언어가 인간에게 편리함을 주기도 하겠지만 그 본질이 왜곡될 수 있겠지요. 어쩐지 지식은 넘쳐나고 지혜는 줄어드는 느낌이... 자료 감사합니다.~
올리는 자료를 열심히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올리지만 저도 몰랐던 내용들이 참 많아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