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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길 (56) 송파진 ③] 받침대가 두 개라서 더 슬픈 삼전도비
(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석촌호수 가(邊) 사람 발길 드문 모서리에 서 있는 삼전도비는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마지막 하나 짚고 가자. 사진 1에서 보듯 우뚝 세워진 삼전도비(대청황제공덕비) 옆에는 그보다 규모가 작은 귀부(龜趺)가 하나 자리하고 있다. 비신(碑身)은 없다. 또 무슨 수모를 당한 비가 있었던가? 걱정되는 마음이 불현듯 일어난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곁에 내용을 설명한 돌이 하나 놓여 있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태종의 전승 기념을 위해 비를 건립하던 중, 더 큰 규모로 비석이 조성되기를 바라는 청나라 측의 변덕으로 원래에 만들어진 귀부가 용도 폐기되면서 남겨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청나라의 심기를 건드릴까 하여 전전긍긍했던 산물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약한 자의 생존 몸부림은 처절한 것이었다.
뙤약볕에 탈춤 추던 70~80년대의 추억
이제 지도 1을 따라 오늘의 발걸음을 옮긴다. 사진 속 1 지점은 삼전도비, 2는 서울놀이마당으로 송파별산대놀이가 전수되고 있는 곳이다. 3은 이미 이야기한 삼전나루 표지석, 4는 겸재 작 ‘송파진도’의 핵심 중점이 되는 송파나루 표지석이 서 있는 곳이다. 아울러 조선 후기 민간 상업의 중심지 송파장이 열리던 곳이기도 하다. 5는 송파대로를 따라 내려온 가락시장 길 건너편 비석공원이다. 오늘은 이 길을 따라 간다.
석촌호수 서쪽 호수 길로 오다보면 서울놀이마당이 자리 잡고 있다. 필자가 가락동에 살던 88올림픽 무렵에는 말 그대로 놀이마당이었는데 이제는 건물도 서고 공연장도 생기고 산대놀이 이외에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되는 것 같다. 1988년 무렵 그야말로 호숫가 마당에서 시연되던 산대극 한 마당이 아련하다. 그때 사그라진 송파산대를 되살리려던 몸부림이 피부에서 느껴졌던 것 같다. 지금은 공원이 잘 가꾸어져 있고 숲도 무성하지만 1988년 무렵에 그 공연은 주말이면 아마도 뙤약볕 마당에서 했던 것 같다.
그때 무리를 이끄셨던 분인지 공원에는 ‘한유성’이라는 할아버지 한 분의 동상이 서 있다. 내용을 보니 송파산대놀이와 송파다리밟기 인간문화재셨다 한다. 필자가 학교 다닐 때도 일찍이 우리 것에 관심을 가진 친구들 중 가면을 쓰고 덩더쿵, 팔과 다리를 들어올리는 탈춤을 배우러 다니던 친구들도 있었다. 그런 탈춤 마당이 조선말에는 장날이면 송파장(松坡場)에서 벌어졌다. 왜 그랬던 것일까?
산대놀이에 대해서는 양주 불곡산 아래 옛관아 마을과 이곳 송파놀이마당에서 어깨 너머로 구경만 한 필자는 할 말이 없다. 그래도 혹시 산대놀이를 만나게 될 분들을 위해 찾아 본 자료 몇 개 올려 본다.
송파에서 질펀히 놀이가 펼쳐졌던 이유
고려는 불교를 숭상한 나라였음은 주지하는 사실인데 불교 행사들이 적지 않았다. 많이 듣던 연등회, 팔관회, ㅇㅇ대회 같은 행사들인데, 사부대중이 모이는 곳이면 언제나 볼거리가 필요하다. 또한 궁중 행사, 외교사절 접대 행사 등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볼거리였다. 고려 시대 일찍이 옛날 중국의 나례(儺禮)와 같은 가면극(假面劇)이 성행했다 한다. 예종(睿宗) 때에 가면 춤에 이야기를 얹은 연극 형식의 산대잡극(山臺雜劇: 산디잡극)이 성행했다 하는데, 이런 고려의 모습이 목은 이색의 시(詩)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목은시고 제33권(牧隱詩藁卷之三十三)에는 “동대문에서부터 대궐 문 앞에 이르기까지 산대잡극(山臺雜劇)의 무대가 펼쳐졌는데 예전에는 보지 못하던 것들이었다(自東大門至闕門前. 山臺雜劇. 前所未見也)”라면서 그날 본 것을 칠언율시(七言律詩)로 남기고 있다.
산 같은 무대 얽으니 봉래산 같구나 山臺結綴似蓬萊
과일 바칠 신선 바닷가에서 오네 獻果仙人海上來
여러 사람 북과 징 온통 땅을 뒤흔들고 雜客鼓鉦轟地動
처용의 소맷자락 바람 쫓아 돌아가네 處容衫袖逐風廻
긴 장대 위 사내는 땅처럼 노닐고 長竿倚漢如平地
하늘로 솟는 폭죽은 빠르기가 번개로다 瀑火衝天似疾雷
태평시대 기운 제대로 읊고 싶다마는 欲寫太平眞氣像
늙은 내 필력이 재주 없어 부끄럽네 老臣簪筆愧非才
산대(山臺)란 말은 무대를 산 같이 높게 만들어서 생긴 말인 듯하다. 고려 때에는 봉래산(蓬萊山) 연화대(蓮花臺)처럼 무대를 만들었다고 한다. 조선에 와서도 무대를 우뚝 세워서 공연을 우람하게 보이려 했는데 그러다 보니 높은 무대에서 떨어져 심하게 다치는 일도 있었다.
탈춤이 마당으로 내려온 것은 이 연희(演戱)가 민간에게로 넘어온 이후일 것이다. 이처럼 산대의 역사는 짧지 않다. 중종 3년 실록 자료를 보면 반정공신 박원종이 아뢴 내용에 황해도 황주(黃州) 고을 이야기가 나오는데, 중국 사신(天使)이 오면 이를 접대하기 위해 황주에서 하는 산대(山臺) 공연이 평양보다 적지 않아 애로가 있다는 기록이 전한다.
황주 또한 한 도(道)의 큰 기관이므로 만약 중국 사신이 오면, 산대(山臺) 및 선위(宣慰) 등의 일이 평양부와 비슷합니다 (黃州亦一道巨府, 若天使出來, 則山臺及宣慰等事, 與平壤府相埒).
인종이나 광해군 때에도 산대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런 수요로 인해 국가에서 산대도감(山臺都監)을 설치했는데 1634년(인조 12) 도감(都監)이 관장하던 산대극이 나라의 수요에 의해 공의(公儀: 공식 공연)로 상연되는 일이 폐지되었다 한다. 이렇게 되자 여기에 종사하던 연희인(演戱人)들이 생활의 기반을 찾아 놀이패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그러면 이곳 송파별산대는 어떤 과정을 통해 자리 잡은 것일까?
‘한국 전통연희 사전’은 송파산대의 연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놓았다.
송파산대놀이는 조선 후기 서울 근교의 발달된 상업 도시가 지닌 경제력을 바탕으로 생성된 가면극으로, 서울 지방의 산대놀이 중에서도 뛰어난 놀이판을 형성하고 있었다. 송파산대놀이는 서울 중부 지방에서 전승되어온 본산대놀이를 계승한 가면극으로 그 유래가 분명하다. 서울을 중심으로 중부 지방에 전승되어 온 가면극은 애오개(아현동), 녹번, 사직 등지에서 본산대놀이로 발달하여 구파발, 노량진(노들) 등지로 확산되어 송파, 양주, 퇴계원 등지로 전파되었다. 따라서 송파산대놀이는 양주별산대놀이와 함께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의 대표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송파산대놀이는 가면극의 구성이나 내용 면에서는 양주별산대놀이와 거의 유사하나 양주별산대놀이에서 사라진 해산어멈, 신할미, 무당 등 산대도감 가면들이 배역과 함께 대부분 보존되어 있어, 양주별산대놀이보다 비교적 고형(古型)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송파산대놀이의 춤은 중부 지방의 무용적 전통을 전형적으로 계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춤사위가 40여 종으로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다. 춤사위는 장단의 유형에 따라 나눌 수 있는데, 타령 장단의 깨끼춤이 발달한 것이 특징이다.
석촌호수나 양주 옛고을에 갈 일이 있을 때에는 산대극 한 마당 만나고 오도록 하자. 놀이마당이다 보니 공연이 끝나면 주객 없이 마당으로 나와 모두 한 바탕 춤출 수가 있다. 덩더쿵~. 요즈음은 코로나로 잠시 쉬고 있으니 아쉽다.
특권 상인과 민초 상인의 대결
이제 지도 1에 번호 4로 표시한 송파나루 표지석을 찾아간다. 잠실 네거리에서 송파대로를 따라 내려오면 석촌호수 동호(東湖) 코너에 있다. 정자 송호정(松湖亭)이 세워진 곁에 송파나루터 표지석이 있다. 겸재의 송파진 그림에는 단지 나루로 그려져 있지만 영조 대를 지나 정조 연간으로 넘어가면 이곳에 커다란 장터가 형성되었다. 한양이 나라의 중심으로 자리 잡으면서 한양의 상업은 종로 운종가의 시전상인(市廛商人)들에게 허락되었다. 이들은 독점배타적 상업권뿐 아니라 다른 이들이 임의로 장사하는 것을 금지시킬 금난전권(禁亂廛權)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에 따라 조세를 납부할 책임을 부여받았다. 그런데 17세기로 접어들면서 이어서 많은 인구가 한양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가난한 백성들은 애당초 시전상인들의 육의전(六矣廛)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생겨난 것이 남대문 밖 칠패시장(七牌市場)과 훈련원 옆 배오개(梨峴)시장이었다. 운종가 시전상인들이 그렇게 원치 않던 난전(亂廛)의 시대가 온 것이다.
상권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뱃길과 육로를 따라 경조(京兆, 사대문 안)와 한성부 밖 요소요소에 생겨났다. 우리 입에 익숙한 마포 새우젓 동네는 젓갈, 소금 거래의 중심지가 되었고 경흥대로를 따라 서울로 들어오는 도봉산 길 다락원에는 함경도 해산물의 큰손들이 자리 잡았다. 다락원 큰손들이 마음만 먹으면 한양 양반들이 제사상에 오를 포(脯)를 구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상권의 확대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강(江)을 따라 경강상업(京江商業)의 시대가 열렸다. 한양의 보급로는 한강 물길이었고 한양으로 들어오는 강원, 경기도 물산은 나루를 건너야 한양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물자를 다루는 상인들은 강상대고(江上大賈: 한강가 큰 상인)로 자본력을 키웠고, 배로 물건을 나르는 선주들도 부를 축적했으며 하역운수업(荷役運輸業)에 종사하는 이들도 마계(馬契), 운부계(運負契) 등을 조직하여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였다. 쉽게 말해 마부와 지게꾼들의 이익단체였다.
우리 역사를 둘러볼 때 아마 이들에게는 제일 좋은 시절이었을 것이다. 이런 다이나믹한 시대가 열리니 자연 나루를 중심으로 장터가 열렸다. 송파나루는 경기도 광주와 한양을 잇는 큰 나루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다이나믹한 시대도 풍상을 겪었다. 아마도 시전상인의 이익을 대변하는 목소리였을 것이다. 홍상한의 주청에 의해 송파장을 폐쇄하도록 영조의 명이 떨어졌는데 목민관 광주유수가 반대의 소를 올렸고 좌의정 김상로(金尙魯)가 다시 힘을 실었다. 정조가 왕세자로 있던 시기였다.
영조 31년(1755년) 1월 실록 기록이다.
아뢰기를,
“광주(廣州)의 송파 장시(松坡場市)는 일찍이 평시 제조(平市提調) 홍상한(洪象漢)의 진달한 바로 인하여 혁파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유수(留守) 서명빈(徐命彬)이 장계로 도로 설치하도록 청하였으니, 그것은 대체로 송파가 바로 보장(保障)의 요진(要津)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경시(京市)의 이익을 상실한다는 것으로 문득 진변(津邊)의 교역(交易)을 혁파하게 한다면 질서 없이 모여 사는 주민들이 장차 이익을 잃게 되어 흩어지는 염려가 있을 터이니, 수신(守臣)의 청원은 정말로 이상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 재상들에게 널리 물어서 처리하심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왕세자가 입대(入對)하는 비국 당상에게 일일이 하문하였으나 의논이 동일하지 않았는데, 유독 한익모(韓翼謨)가 그것을 금지할 수 없음을 극력 말하므로 왕세자가 대조(大朝)께 품처(稟處)하도록 하였다. 뒤에 김상로가 임금에게 아뢰어 윤허를 받았다.
王世子行次對于時敏堂. 左議政金尙魯奏: “廣州 松坡場市, 曾因平市提調洪象漢所達, 有革罷之命, 而留守徐命彬狀請還設, 蓋爲松坡卽保障要津也. 若以京市之失利, 輒罷津邊之交易, 則烏合居民, 將有失利渙散之慮, 守臣之請, 果無怪矣. 廣詢於諸宰而處之爲宜.” 王世子歷問入對備堂, 議不一, 獨韓翼謩力言其不可禁, 王世子令稟處于大朝. 後尙魯白上蒙允
결국은 여러 신료들이 힘을 합쳐 송파장 폐쇄를 막아낸 것이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몰리니 공연 패거리들도 몰렸고 소리꾼들도 왔으며 협잡꾼, 야바위꾼들도 몰렸다. 이런 활력 있는 곳에서 탈춤극이 질펀하게 한 바탕 벌어졌을 것이다. 가식적인 양반, 점잖은 스님이 호박씨 까는 모양을 가만둘 리 있었겠는가? 그런데 점잖은 양반님들 눈에는 탈춤을 추며 세상 추한 일을 들추고 다니는 산대패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하다.
정조 23년(1799년) 3월 가뭄이 심했다. 이에 정응삼(鄭應參)이라는 선비가 상소를 올렸다. 그 일부를 한 번 보자.
지극히 공정한 것이 하늘이니, 혹시 벌 줄 악인이 있어서 가뭄을 내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윤상(倫常)이 해이해져 예의가 거의 사라졌으니, 하늘이 어찌 가뭄이 들게 하지 않겠습니까. 명분이 무너져 상하가 뒤섞여 어지러우니, 하늘이 어찌 가뭄이 들게 하지 않겠습니까. 사치가 성행하여 먹고 입는 것이 분수에 지나치니, 하늘이 어찌 가뭄이 들게 하지 않겠습니까. 향대부(鄕大夫)를 두어서 교화하거나 풍속을 바로잡는 관직을 두어서 징계하여 예의를 경장(更張)하고 명분을 다시 바로잡고 사치하는 풍속을 모두 없앤다면 하늘이 마침내 화에 응하여 가뭄이 들지 않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놀고먹는 자로는 중이 가장 많습니다. 스스로 머리 기른 중이라고 칭하면서 목탁 치고 돌아다니며 염불을 하고는 남의 재물을 취하고, 가짜 배우도 산대(山臺) 하는 무리라고 하면서 장을 따라다니며 놀음판을 벌여 남의 돈을 탐하니, 하늘이 이것을 미워하여 가뭄이 든 것이 아니겠습니까.
夫至公者天或有罰惡而降旱歟方今倫常解怠禮敬幾廢天何不旱名分頹敗上下雜亂天何不旱奢侈盛行服食過濫天何不旱或置鄕遂之官而敎化之或置正俗之官而懲戢之使禮義更張名分復正奢侈盡革則天乃應和而可不旱歟方今遊食最多尼徒自稱有髮僧而鼓行念佛取人財物假優亦謂山臺黨而從市設戲貪人錢貨天應惡此其爲旱歟
가뭄의 원인을 세상 인륜과 도덕이 무너져 그렇게 되었다 한다. 그 원인 제공자로 첫째가 승려, 둘째가 산대패라 꼽고 있다. 산대에 대한 세상 시선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당시 지도층의 고루한 생각들
다산(茶山) 선생은 어땠을까?
목민심서는 목민관(牧民官: 백성을 다스리는 지방관, 군수, 원님)이 새겨야 할 기본적인 내용을 집약한 저술인데 그 중 형전(刑典) 6조의 5번 째 항목 금포(禁暴) 조 설명에 산대에 대한 선생의 견해가 실려 있다.
배우(俳優)의 유희와 괴뢰(傀儡)의 재주, 그리고 나악(儺樂)으로 시주를 청하며 요사한 말로 행술하는 자는 모두 금해야 한다.
남쪽 지방의 이속과 장교들은 그 사치한 것이 풍속이 되어 봄, 여름철 기후가 화창할 때만 되면 곧 배우의 익살부리는 연기 - 방언으로는 덕담(德談)이라 한다 - 와 꼭두각시의 장대 희롱으로 - 방언으로 초라니(焦蘭伊)라 하고 또 산디(山臺)라고도 이름한다 - 해가 지도록 밤이 새도록 놀면서 즐기는데, 목민관이 금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법정(法庭)에 끌어들이며, 심지어 내아의 권속들까지 발을 드리우고 그 음탕하고 외설한 것을 구경하니 크게 무례한 일이다. 이런 것으로 백성에게 보여 주니 백성이 거기에 빠지지 않을 수 없고, 남녀들은 물결처럼 몰려다니면서 난잡하게 황음(荒淫)한 짓을 자행한다. 창고의 곡식이 축나고 세납을 도둑맞는 것이 대개 이런 일로 하여 생기는 것이니, 목민관은 마땅히 방을 붙여 백성에게 효유하여 이런 잡것들이 지경 안에 들어오는 일이 없게 하여야만 민간 풍속이 조용해질 것이다. (중략) 사당패가 북을 치고 염불을 하면서 민간 재물을 구걸하는 자도 역시 엄중히 금지하여야 한다.
俳優之戲. 傀儡之技. 儺樂募緣. 妖言賣術者. 竝禁之.
南方吏校. 奢濫成風. 每春夏駘宕. 卽俳優滑詼之演. 方言云德談. 窟櫑棚竿之戲. 方言焦蘭伊. 亦名山臺. 窮晝達夜. 以爲般樂. 牧不唯不禁. 時亦引入於法庭. 甚至衙眷. 垂簾聽其淫褻. 大非禮也. 以玆示民. 民罔不溺. 士女奔波. 荒淫無度. 倉逋稅竊. 多由此種. 牧宜榜諭下民. 使此雜類. 毋納四境之內. 庶乎民風甚靜矣. (중략) 優婆擊小鼓. 唱梵語. 以乞民財者. 亦當嚴禁.(기존 번역 전재)
그 당시 사회지도층의 시각이 이러했다. 송파나 양주를 가면 그나마 이렇게 살아남은 산대(山臺)놀이가 고맙고, 안성에 가면 모질게 견뎌낸 남사당(男寺黨)패가 대견하다.
발길을 마지막 답사지로 돌린다. 아쉬움에 호수를 한 바퀴 돌아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한다. 석촌호수는 커피집, 식당이 비교적 합리적이고 깨끗한 곳이다. 가락시장역으로 이동하여 3번 출구를 나오면 100여 미터 앞 언덕에 비석거리공원이 있다. 아니 뚱딴지 같이 뭔 비석공원? 11기(基)의 비석이 있는데 목사(牧使), 부윤(府尹), 성주(城主)의 공덕비들이다. 전 회에 소개했듯이 광주 구읍(舊邑)의 읍치(邑治)가 어느 때인가 중대면 즉, 가락동에 있었다. 이 주변에 세워졌던 그때 목민관(牧民官)의 공덕비를 이곳에 모아 놓은 셈이다.
연대를 알 수 있는 비에는 숭정(崇禎) 4년, 숭정 8년이 기록되어 있다. 숭정은 명나라 마지막 임금 의종(毅宗)의 연호이니 숭정 4년은 1631년, 숭정 8년은 1635년이다. 이 비석들은 1637년 1월 엄동설한에 황망하게 항복의 길로 나아간 조선 임금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겸재의 송파진도를 보며 그림에 담겨 있는 켜켜이 쌓인 시간들에 마음을 빼앗긴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 되었으면 좋겠다. 나랏일 하는 분들, 정말 잘 했으면 좋겠다.
제677호 이한성 옛길 답사가 2020.06.12 15:3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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