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는 동양사상에서 최고의 존재론적 가치에 부여하는 대명사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그리스도교를 알지 못하는 시대에 이미 동양에서는 기원전부터 도를 숭상해왔다. 노자 <도덕경>에서 도는 언어로 포착되거나 형용할 수 없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표현 방식을 그리스도인들은 겸허하게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하느님을 대하는 경솔한 태도를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이해한 하느님을 타인에게까지 억지로 이해시키려는 태도는 사뭇 여리석기도 하지만 그 태도가 상대의 인격을 무시하는 듯 하고 공격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하여 안다고 떠드는 그 순간 우리는 진정한 하느님 이해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개념에 얽매이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하느님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의 방식은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성서요 하나는 자연이다.
여기서 이해는 해석한 문제에 부딪힌다.
현대의 해석학은 언어적 이해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해석학자 리꾀르가 진리의 해석에 있어서 논리적 언어보다는 상징, 은유, 이야기 형식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가 성서를 대할때도 문자적 언어의 측면보다는 언어 이민의 진리를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
예수가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할 때 비유를 즐겨 들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하느님의 나라를 직접적인 언어로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하느님에 대한 설명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을 이해 할 것인가? 언어를 넘어선 마음 세계로 하느님을 이해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때 이해한다는 것은 물론 완전한 이해를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느님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다만 감지할 뿐이다. <도덕경>에서 도의 개념을 설명함에 있어서 보아도 보이지 않으므로 이渓라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므로 희귀라 하며,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다 하여 미做라고 하듯이 말이다.
우리가 감지하는 하느님의 세계는 어떤가?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만져도 만져지지 않지만, 신묘막측神妙莫測 한 천지를 창조한 분이다.
••[신묘막측]이란?
신묘막측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신기하고 오묘하다
[시] 139: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I praise you because I am fearfully and wonderfully made; your works are wonderful, I know that full well. (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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