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여성 찬드라에게 사죄해야 하지 않겠는가(1)
이 글은 최성각님이 풀꽃세상 사무처장 시절, <풀밭>5호와 <녹색평론> 2002년 3-4월호를 통해 세상에 '범국민 참회모금운동'을 제안한 글입니다. 이후 2002년 3월부터 6월까지 풀꽃세상에서는 참회모금운동을 벌였고, 같은 해 4월13일과 10월22일, 두 차례에 걸쳐 모금총액 18,200,000원을 찬드라씨를 방문해 직접 전달했습니다. 네팔인 찬드라씨와 한국사회와의 만남은 다시 떠올리기 힘들 정도의 '악몽의 만남'이었으나, 풀꽃세상의 작은 노력으로 '사람과 사람의 만남'으로 다시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솥이끼 ==========================
범국민 참회모금운동을 벌이며 네팔여성 찬드라에게 사죄해야 하지 않겠는가(1)
최성각 -- 작가
네팔여인 찬드라 꾸마리 구릉(46)이 단기비자로 한국에 처음 온 때는 1992년 2월9일이었습니다. 이후 서울 광진구 자양1동에 있는 대신섬유공업에 입사해 일하다가, 찬드라 꾸마리 구릉(이후 찬드라)은 이듬해인 1993년 11월 21일(일요일), 실종됩니다. 찬드라가 용인정신병원에 있다는 것이 발견된 때는 그로부터 ‘6년 3개월 26일’ 후인 2000년 3월 18일이었습니다.
찬드라는 한국에 돈 벌러 온 외국인노동자였지 걸리지도 않은 정신병을 고치려 온 정신병자가 아니었습니다. 실종될 때 찬드라의 신분은 당시 발효중인 외국인노동자 출국유예조치로 인해 합법적인 체류상태였습니다.
이 믿어지지 않는 일은 바로 ‘우리’가 태어나서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멀쩡했던 찬드라가 정신병자로 오인되어 6년 4개월여 동안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있었던 세월 앞에서 ‘우리’라는 초국가적 민족개념은 부끄러움의 극치, 비례(非禮)의 극치, 인권유린과 후안무치, 그래서 야만의 절정에 달하고야 맙니다. 이 사건 앞에서 그야 말로, ‘우리’는 더 이상 이 나라가 문명국가라고 믿고 있거나 그리로 가고 있다는 말을 하기가 무색해지면서 내면에서 치솟아오르는 부끄러움의 열기와 만나게 됩니다. 지난해 말, <녹색평론> 10주년을 맞이해 한 신문사의 인터뷰 요청으로 인해 대구에 갔던 필자는 김종철 선생님과 점심 후, 필자가 일하고 있는 환경단체 풀꽃세상의 근황을 이야기하던 중, ‘찬드라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선생님은 충격으로 얼굴빛이 변하는 것 같았습니다. 김선생님의 얼굴에 번진 참괴스러운 놀라움은 태생적으로 어쩔 수 없이 그 일부로서 벗어날 길 없는 ‘우리’에 대한 절망감의 표정,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잘못 읽을 수도 있었겠지만, 필자는 그렇게 읽었습니다.
이 글은 풀꽃세상과 찬드라가 만난 이야기, 그리고 그가 정신병원에서 나온 뒤 한국인의 이름으로 우리가 그에게 드렸던 참회의 시간, 그리고 찬드라의 생존소식을 알고 네팔에서 날아온 그의 아버지와 친척을 모시고 함께 했던 해후의 시간들에 대한 짧은 기록입니다. 그리고 1년 후 찬드라가 ‘대한민국 외 1인’을 피고로 손해배상 소송을 걸어 재판이 진행되던 중, 네팔에 찾아가 찬드라에게 재판소식과 속죄의 인사를 다시 드리고 돌아온 뒤, 2002년 3월 현재 아직도 재판이 진행중이라, 재판과 관계없이 혹시 우리가 할 일은 뭐 없을까, 답답한 마음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못난 한국인의 이야기입니다.
정신병원에서 강제치료를 받게 된 네팔 여성
(사진:네팔 히말라야의 어린이들) 찬드라 구릉 소식을 처음 필자에게 알려준 이는 네팔인 케이피 시토우라였습니다. 케이피는 필자가 히말라야를 들락거리며 준비중인 개인작업 때문에 한국에 있는 네팔인 노동자를 찾던 중 알게 된, 한국말을 잘 하는 30대 초반의 네팔청년입니다. 그 역시 다른 외국인노동자들이 그 나라에서는 대단히 진취적이고 능동적이며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들인 것처럼 무사계층의 높은 카스트로서 네팔의 트리뷰반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이른바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케이피는 옷도 깔끔하게 잘 입고 아리안계라 콧대도 높고 키도 큰 미남청년으로서 네팔 카트만두에 코리안 드림이 만연했던 1992년께에 한국에 온 대표적인 ‘한국통 네팔인’이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그는 필자를 정확한 발음으로 ‘형님’이라 부르고, 저 또한 그를 아우처럼 대하는 사이라 자연스레 필자가 일하는 환경단체의 한 회원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를 처음 만나던 당시, 8년여 한국 체류기간 내내 그는 돈 벌 생각은 않고 직장을 계속 옮기면서 섬유쪽의 일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봉재의 기본부터 디자인까지 배워 장차 네팔의 섬유산업에 기여하겠다는 게 케이피의 야무진 꿈이었습니다. 한국인에게 뿌리 깊이 박혀 있는 인종주의, 즉 GNP 수치와 백인문화 우월주의에 바탕해 형성된 나라간 위계서열의식 때문에 온갖 모욕을 참고 고생해서라도 돈만 벌면 돌아가서 경제적 중상층이나 상층으로 신분상승을 꾀하려는 여느 외국인노동자들과 달리, 번 돈을 공부하는 데 다 쓰고 있는 케이피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형님, 찬드라 구릉이라는 네팔 여성이 정신병원에서 발견되었다. 이근후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풀꽃세상에서 할 일은 뭐 없을까?” 케이피가 전화를 걸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때가 2000년 3월말께였습니다. 정신과의사이며 단체 회원이신 이근후 선생님은 당시 이화여대에 출강하면서 이대부속병원에 재직중이었습니다.
3월 29일에 가졌던, ‘찬드라 꾸마리 구릉 실종사건 진상조사와 이주노동자 인권보호대책 기자회견’ 때 부천외국인노동자의 집의 이란주 사무국장이 정리한 공식적인 경과보고에도 드러나 있듯이 찬드라가 용인정신병원에 강제입원되어 있다는 사실을 바깥에서 최초로 알게 된 이가 바로 이근후 선생님이었습니다. 용인정신병원의 황태연 박사가 이근후 선생님에게 “네팔 여성이 우리 정신병원에 있다”는 것을 알린 날은 3월18일, 그 소식을 접한 이근후 선생님이 풀꽃세상 단체활동으로 구면이었으며, 재한네팔인공동체에서 총무로 일하고 있는 케이피에게 그 사실을 곧바로 알렸던 것입니다. 찬드라가 네팔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의사는 이근후 선생님이 20여년 이상 네팔의료봉사활동을 하고 계시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자, 혹시나 네팔인에게 연결되지 않나 해서 연락했다고 합니다. 당시 양재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던 케이피는 찬드라 소식을 접하자, 그 사실을 풀꽃세상과 함께 부천외국인노동자의 집에 알렸습니다.
필자는 케이피로부터 이 놀랍고도 비극적인 소식을 접하자, “이럴 수가?”,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이상하게도 두 편의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알란 파커 감독의 <미드나이트 익스프레스>였고, 다른 한편은 스티브 매퀸이 주연했던 <빠삐용>이었습니다. 참으로 뜬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미드나이트 익스프레스>는 터어키에서 일어났던 실화로서 한 미국청년이 공항에서 마약범으로 잡혀 감금-탈옥-다시 체포의 과정을 통해 수십년간 터키감옥에 갇혔다가 탈출하는 이야기였습니다. <빠삐용>이야 소설이나 영화로 너무나 유명한 탈출기라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엉뚱한 연상을 한편으로는 부끄러워하면서 필자는 이런 있을 수 없는 일이 바로 이곳 대한민국, OECD에 포함되어 자랑스럽다느니, 올림픽을 치른 뒤 득의에 차 있는 탈근대(?)의 대한민국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고, 팔뚝에서부터 힘이 빠지면서 나중에는 아득해지기까지 했습니다.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회의와 함께 더 이상 이 야만의 나라에서 ‘희망’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찬드라 사건을 압축하고 있는 3월 25일자 한겨레 보도를 살펴봅니다.
멀쩡한 네팔인 정신병원 감금 --서툰 한국말 오해, 행려병자로 6년간 수용
한 네팔인 여성이 경찰과 병원등의 어처구니없는 행정착오로 한국인 정신병자로 둔갑돼 6년 넘게 정신병원에 수용돼온 사실이 드러났다.
용인정신병원은 24일 선미야라는 이름으로 정신병동에 수용돼온 환자가 확인 결과 네팔인 찬드라 쿠마리 구릉(40)으로 밝혀져 본국으로 송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찬드라는 94년 7월 24일 서울시립부녀보호소에서 용인정신병원으로 넘겨졌으며, 이에 앞서 93년 11월 서울 동부경찰서에 의해 1종 행려자로 처리돼 서울 청량리정신병원에 수용됐다. 당시 경찰과 부녀보호소, 병원 등은 찬드라가 서툰 한국말로 네팔인이라고 주장하자 한국인이 정신질환에 걸려 헛소리를 하는 것으로 보고 정신병원에 수용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용인정신병원 오석배 원장은 “보호소에 넘어올 때 한국인으로 처리돼 있었고, 본인이 네팔인이라고 주장했지만 일본에서 살다 왔다는등 워낙 횡설수설하고 지능도 낮아 어쩔 수 없이 정신분열증으로 치료를 했다” 고 말했다.
용인정신병원쪽은 최근 찬드라의 주치의 황태연 박사가 주한 네팔인 모임인 ‘네팔공동체’에 연락해서야 겨우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93년 검거될 당시 찬드라는 한 가게 주인과 음식물 계산문제로 다투다 동부경찰서에 넘겨졌으며, 곧바로 1종 행려자로 처리돼 청량리 정신병원으로 이송된 것으로 나타났다. 네팔공동체 총무인 시토우라는 “경찰이 하룻만에 찬드라를 바로 정신병원으로 옮겼다”며 “한국말이 서투르다고 외국인을 정신병자로 몰아 가든 사실이 당혹스러울 뿐” 이라고 말했다.
찬드라는 92년 2월말 한국에 입국해 서울 광진구 자양동의 한 섬유공장에서 다른 네팔인들과 함께 일해왔다.
한국사회에는 충격적인 인면수심의 일들이 매일같이 다반사로 일어나,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엔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을 정도로 충격에 면역이 되어 있는 판인데, 왜 그토록 찬드라 사건이 필자의 마음을 둔중하게 때렸는지 곰곰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아마 그동안 여러 차례 히말라야 산중을 헤매면서 필자가 탐욕과 경쟁, 경제지상주의에 오염되어 있는 조국의 이웃들과 달리 아직 산업사회에 진입하지 않아 사람이면 누구나 형제처럼 대하는 그들 히말라야의 라다키나 구릉족, 티베탄들에게서 더 깊은 인간애를 느껴왔던 터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마침 그즈음, 푸스카르 사하(32)라는 네팔 젊은이가 자전거를 타고 전세계를 돌고 있었는데, 그가 3월말 어느날 자전거를 끌고 풀꽃세상에 찾아왔습니다. 찾아온 이야기를 들어본즉, 90년대초 네팔 민주화운동 때 총상을 당한 사하는 1998년 자전거를 타고 네팔을 떠난 뒤, 아시아를 돌다가 마침 한국에 당도해 있었습니다. 발목 총상이 치료되자 그는 세상에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해야겠다고 결심, 네팔의 자전거회사로부터 자전거 한 대를 얻어타고 온 세상을 돌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풀꽃세상은 마침 사하도 네팔인이기에 찬드라 사건과 함께 이 소식들을 묶어 다시금 세상에 알리기로 작정했습니다. 거기에는 일부 신문에 찬드라 사건이 이미 보도되었지만, 찬드라가 아직 퇴원하지 못한 상황인데다 이미 보도되었지만 그의 퇴원을 열망하는 초조감도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풀꽃세상이 마련한 기자회견의 명칭은 ‘풀꽃세상과 함께 하는 위로와 격려의 네팔티타임’이었습니다. 찬드라 소식을 병원으로부터 최초로 연락 받은 이근후 선생님이 네팔 차를 준비했고, 찬드라 소식을 접하자마자 진상보고 작업에 달려든 부천외국인노동자의 집 일꾼들과 케이피를 포함한 재한네팔인들이 풀꽃세상 회원들과 함께 모였습니다. 한국에 일하러 왔다가 정신병자로 몰려 정신병원에서 강제치료를 받고 있는 찬드라에게는 참회와 위로의 마음을,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방문한 사하에게는 격려의 마음을 전달하면서,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가 더욱 강조한 일은 찬드라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는 기자회견장에서 찬드라가 기자회견장에 참석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설명들었는데, 그것은 신원이 확인된 이후 케이피를 포함한 네팔 동족을 만난 정신적 충격과 당장의 거처와 여러 수습할 일들이 남아 있어서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근후 선생님은 “지금은 사건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생각할 때다”라는 말이 나온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것은 6년 4개월만에 동족을 만나 네팔 말을 하게 된 찬드라의 충격에 대한 설명 같았습니다. 아무렴, 왜 충격이 없었겠습니까. 말도 안 통하는 이국땅에서, 그것도 개화 이래 백인들에게는 꺼벅 죽으면서 유색인 중에서도 못사는 나라에서 오면 도무지 사람 취급 않는 ‘이상한 이국땅’의 정신병원에서, 받을 필요가 없는 강제치료를 받으며 보낸 6년 4개월여 시간. 어디가 지옥일까요? 지옥이 죽어서야 가는 하늘에 있을까요? …찬드라가 6년 4개월여만에 케이피를 만나 네팔어로 처음 “나는 미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케이피가 “그래, 넌 미치지 않았다는 걸 우리가 알어!” 했을 때, 그 다음에 찬드라는 마음놓고 쓰러져도 되었을 것입니다. 혼을 가진 생명체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다시 만난 빛 때문에 생긴 정신적 충격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찬드라 사건의 경위를 기자들에게 알렸고, 즉석에서 회원들로부터 모금한 368,300원을 양분해 반은 사하에게 전달했고, 나머지 돈은 케이피를 통해 병원에 있는 찬드라에게 전달했습니다.
기자회견 이후, 사하의 자전거 순례소식과 함께 찬드라 사건은 동아일보, 한겨레, 한국일보 등 주요 일간지와 시사저널, <말>지, 코리아헤럴드, 여성신문 등에 다양한 형태로 보도되었습니다. 한 방송국에서는 취재를 왔으나 바로 방영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날 우리는 찬드라의 사진을 벽면에 걸어놓고, 마침 기자회견장에 참석한 네팔인 노동자 10여 명에게 네팔 티를 대접하면서 머리도 숙이고 허리도 숙여 사과했습니다. 한국인의 일그러진 인종주의와 이민족과 함께 살아가는 데 서툴기만 한 무례함과 야만성에 대해 우리는 진심으로 사과했습니다. 이는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회복하자’는 풀꽃세상의 추구와 먼 거리에 있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연(인간)에 대한 무례한 태도가 환경문제를 비롯한 모든 문제들의, 나쁜 원인들의 뿌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베트남 양민학살을 참회하는 데 30여년이 걸렸다면, 우리 시대에 일어난 야만적인 인종주의는 그때그때 곧바로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우리가 찬드라 사건을 세상에 다시 알린 때는 4월 11일, 찬드라가 퇴원한 때는 찬드라 사건이 세상에 보도된 이후인 2000년 4월 18일이었습니다.
우리가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세상에 찬드라 사건을 알리는 10여일 동안, 부천외국인노동자의 집과 경제정의실천불교시민연합은 풀꽃세상의 케이피와 함께 진상조사에 들어갔습니다. 찬드라와 면회를 하고, 담당의사를 만나고, 그가 용인정신병원에 오기 전에 있었던 서울시립부녀자보호소도 방문하고, 그가 잃어버린 6년3개월의 세월을 보상받기 위한 소송준비에 들어갔습니다. 또한 찬드라가 어떻게 정신병원에까지 가게 되었는지 최초의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그를 병원에 처넣은 동부경찰서 청문감관실을 방문하여 진상조사를 요구했습니다. 실종 당시 제작해 배포했던 포스터를 발견하면서 경찰에서 찬드라를 처음 청량리정신병원에 넣어버렸던 병원을 방문, 의사를 찾기도 했습니다. 진상조사와 함께 명백히 이 사건은 경찰의 업무상 과실임이 드러나자, 찬드라를 원고로 대한민국과 청량리정신병원을 피고로 하는 소송준비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이후, 법무법인 덕수의 이석태 변호사가 찬드라로부터 사건을 일임받아, 2002년 3월 현재, 재판중이라는 것은 앞서 말씀드렸지요.
‘Gurung’과 ‘Gorum’은 다른 이름이기 때문에
요약된 기사를 통해 살펴보았지만, 찬드라는 정신병원에 강제입원되기 전에, 자양1동 파출소로 연행됩니다. 1993년 11월 21일이면 이미 쌀쌀해진 날씨, 자양동 언저리의 한 식당에서 음식을 먹은 뒤 음식값 때문에 식당주인과 실랑이가 붙자 주인은 112에 신고를 하고, 식당에 출동한 자양1동 파출소의 경찰은 몇 마디 말을 붙이다가 ‘성명 주소 불상의 행려병자’로 찬드라를 분류하여 청량리정신병원에 수용 요청을 합니다. 찬드라는 스스로 자신을 ‘네팔인’이라고 밝혔습니다. 구릉족이라 코에 코걸이 자국이 있고, 알 수 없는 나라 말을 중얼거리는 이 남루한 여성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주의를 기울였다면, 행려병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찰은 소통을 위한 노력도, 신원 파악을 위한 노력도 충실히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실, 이 일은 어렵지 않게 짐작됩니다. 같은 한국인이라도 말이 잘 안 통하고 행색이 초라한 사람들이나 장애인들이 이 땅의 멀쩡한 사람들에게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가를 짐작해 보면. 졸지에 행려병자가 되어버린 찬드라는 연행되던 당일 저녁 7시30분경에 청량리정신병원으로 옮겨집니다. 그 순간은 한 멀쩡한 네팔여성이 6년3개월여 기간 동안 말끔하게 세상에서 소거되는 ‘결정적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청량리병원에서도 찬드라는 “나는 (이 잘난 나라에) 돈 벌러 온 네팔사람이다. 나는 합법적인 체류자 자격이 있다. 내가 일하는 공장에 가봐라. 거기 여권이 있다”고 울부짖었습니다. 병원 직원의 바지자락을 움켜쥐고 부르짖었습니다. 하지만, 남루한 옷에 묻은 때와 냄새는 ‘위생상태 미흡’으로, 내보내달라는 호소는 ‘고집이 센 정신병자의 특성’으로 기록되어 더욱더 그를 늪속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병원에 감금-‘입원’을 감금이라 표현하면 의사선생님들은 비위가 상하겠지만, 푸코가 병원이나 학교나 감옥이 사실 상당히 비슷하다고 말한 적도 있으므로, 더욱이 찬드라의 경우에는 ‘감금’이라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된 지 사나흘 후에 찬드라는 정신질환자에게 나라에서 분류하는 ‘1종 생활보조대상자’로 낙인되면서 ‘선미야’라는 한국이름을 얻습니다. 강제치료 상태로 돌입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나지막하게 묻게 됩니다. 히말라야 산골여성 찬드라가 언제 대한민국 정부에 정신질환의 강제치료를 요청한 적이 있었는가를.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요구를 할 턱이 없는 노릇이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찬드라가 외국인일지도 모른다는 논란은 열흘즘 후에야 벌어졌습니다. 병원에서는 동부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대책을 요구하였으나 경찰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길 잃은 외국인의 경우, 경찰은 출입국관리소에 연락하게 되어 있었건만 경찰은 직무를 유기했습니다. 만약 그가 백인이었다면, 단지 영어를 한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이 나라 학원가에서 상상할 수 없는 대접을 받고 있는, 영어권의 백인이었다면 상황은 전혀 달리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1994년 7월 20일 찬드라는 청량리정신병원에서 서울시립부녀자보호소로 옮겨집니다. 그곳에서도 찬드라는 정신질환자로 감정받아 8일 후, 용인정신병원으로 옮겨집니다. 이후 황태연박사가 평소 네팔의료봉사를 하고 있던 이대병원의 이근후박사에게 전화를 걸었던 2000년 11월까지 ‘찬드라의 감옥’은 용인정신병원이었습니다.
왜 그가 발견되는 데 그토록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
황박사는 찬드라가 네팔인이라는 것을 안 뒤, 주변에서 네팔인을 만나기 위해 적잖이 애썼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한 파키스탄인을 만났는데, 그때 그가 ‘선미야’가 아니라 ‘찬드라 꾸마리 구릉Chandra Kumari Gurung’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찬드라와 서툰 우르두어(지역언어)로 의사소통을 한 파키스탄인은 찬드라가 발음하는 대로 ‘Chandra Kumari Gorum’이라고 써 주어 의사는 그 이름으로 출입국사무서에 공문을 보내 조회를 요청했으나, 출입국관리소는 ‘신원확인이 되지 않는다’라는 간단한 회신만 보내왔다고 합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영문철자가 일부 틀렸기 때문이었습니다. ‘Gurung’과 ‘Gorum’은 스펠링이 확실히 달라 할 말이 없긴 합니다. 관료주의는 고골리 시대에만 무서웠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히말라야 산간지대에 흩어져 사는 구릉족은 몽골리안으로서 불교를 믿으며, 우리 한국인과 외모가 아주 비슷합니다. 병원이든 출입국관리소든 ‘구릉족’이 히말라야의 몽골리안들이라는 것만 알았어도, 이런 비극이 조기에 마감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신원을 찾아주기 위해 명백히 애썼고, 나중에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이근후박사에게 연락해 결국 찬드라를 다시 세상에 내놓은 황태연박사는 분명 좋은 일을 했음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황박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세상에 다시 나오는데 걸린 너무나 긴 시간에 대한 충분한 설명으로는 아무래도 미흡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책임은 용인정신병원만의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아니, 그 책임을 서울시립보호서에도 청량리정신병원에도 동부경찰서에도 돌리고 싶지 않은 마음마저 입니다. 그 책임은 온전히 우리 ‘한국사회’가 져야 한다고 보는 것이 그래도 양심과 상식을 가진 사람이 가질 생각이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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