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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瑞山사랑, 農村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농촌사랑
달의 껍질
김 효 영
12월에 들어서 그 사건이 있고 나서는 밤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현관문이 바람에 덜컹거리거나, 늦게 귀가하는 사람이 윗 층으로 들어가는 발자국 소리에도 화들짝 놀래 깨곤 했다. 이튿날 숙취 같은 피로를 몸에 달고, 웬 할아버지가 어깨 위에 올라가 있는 것 같아 자꾸 어깨를 짚어보며 전철에 올랐다. 그런 생활이 보름쯤 이어지자 몸에서 면역이 바닥났음을 알리는 경보계가 켜졌다. 새해맞이 특별 감기에 걸린 것이다. 31일에는 연예대상을보며 보일러 온도를 높였고, 신정은 크리넥스 통을 옆구리에 끼고 보냈다. 기침할 때마다 입에서 폴폴 솟아난 감기 바이러스가 방안에 가득 찼다. 1월 2일은 공휴일이 아니었던 관계로 회사에 결근을 허락받아야 했다. 인포데스크 언니에게 도저히 몸이 아파 못 가겠다고, 우리팀이 출근하면 전해달라고 말했다. 목이 부어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나는 간신히입을 열어 저, 회사에 못 가겠어요. 라고 말했으나 자꾸 상대방은 네, 뭐라고요? 되물었다.
정말 아플 때에도 그런 전화는 대개 ‘정말 핑계’같다. 나는 ‘정말 아프다’고 말하는 순간 괜히 거짓말을 하는 사람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스물여섯으로 처음 보내는 1월, 나는 열이 나는 관자 놀을 누르며 사직서를 작성했다. 지난몇 달 동안을 고민했던 일을 갑자기 걸린 감기가 해결해 준 것이었다. 내 사직서를 오래 들여다보는 실장님의 가르마를 쳐다보며, 나는 회사가 나를 잡을 때에 대한 대답을 생각해뒀다. 아니요, 충분히 생각한 겁니다. 또는 언제까지나 출판사 직원으로 살 수는 없잖아요, 그건 너무 후지니까. 같은 말들을. 하지만 실장님의 반응은 달랐다.
“그럼 몸도 안 좋은데 그냥 오늘까지만 일하지.”
당황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려 기침을 하며 할 말을 골라냈다. 그러나 감기 기운
에 푹 잠겨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럼 인수인계는…”
“어-, 저, 인혜씨가 하던 일은 뻔 하니까, 인수인계까지도 필요 없어요.”
“네?”
미간이 찌푸려졌다. 인수인계도 필요 없는 일을 하느라 그간 야근을 밥 먹듯 하고, 매주 시장조사를 나가고, 전국 각지에 모래알처럼 흩뿌려져 있는 미대 교수들을 만나러 다녔단 말인가.
미간 사이에서 뱀 몇 마리가 씰룩이는 것 같은 표정을 짓자, 그제서야 무척 나를 배려하고 있는 듯한 말투로 실장이 말했다.
“인혜씨가 몸조리 한 다음에 다시 나오겠다면, 내가 휴직계로 돌려줄 수도 있어요.”
나는 화를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아뇨, 좀 쉬면서 천천히 생각하고 싶어요. 회사에도 폐를 끼치고 싶지 않구요.”
실장을 회의실에 놔둔 채 나는 자리로 돌아와 짐을 정리했다. 점심시간이라 사무실은 한산했다. 도망 나오기엔 최적기였다. 유자차, 커피믹스 같은, 가지고 나오기엔 짐이지만 남은 사람에게는 꽤 유용할 것들을 가장 친한 사람 책상에 슬쩍 올려두고, 남은 물건들을 가방에 구겨 넣었다. 5개월을 머문 곳 치곤 짐이 별로 없었다.
거리에 나서서 도로 쪽으로 오른손을 들었다. 2차선에 있던 노란 삼각형 모자를 둘러쓴 개인택시 한 대가 요란스럽게 내게로 왔다. 나는 그 택시에 손짓한 게 아니었다. 나를 보고 4차선으로 점잖게 다가오던 파란 삼각형 택시가 노란 택시의 뒤에서 당황해 허둥댔다.
그렇다고 굳이 내 앞에 선 노란 삼각형을 제치고 파란 삼각형에 오른다면 노란 삼각형 아저씨는 경적을 미친 듯 울려다며 지구 끝까지 쫓아올 것 같다.
“은평구청 앞이요.”
노란 삼각형에 올라타 7글자를 심호흡하듯 토해냈다. 나는 멜론에 박힌 씨처럼 얼른 찌그러진 자세를 취했다. 두 택시의 실랑이 따위 눈치채지 못했다는 듯이.
파란 삼각형은 내가 씨앗만큼 작은 존재로 변신을 마치기도 전에 노란 삼각형 앞을 급히 막았다. 파란 삼각형은 급출발과 급정거, 급핸들 조작을 통해 노란 삼각형을 피해 달아난다. 파란 삼각형이 신호에 걸려 드디어 따라오지 못하게 되자 노란 삼각형은 걸죽한 욕을 뱉는다. 개새끼..., 분수나 알고 덤벼. 죽을라고.
내 몸이 개새끼의 ‘끼’에 앞으로 휙 쏠렸다가, 분수나 알고의 ‘분’에서 원위치 되었다가. 죽을라고의 ‘라’와 ‘고’ 사이의 어디쯤에선가 오른쪽으로 심하게 기울었다.
103.5에 맞춰져 있는 라디오에서 이상은의 옛 노래가 울려퍼진다.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질 않았네- 흐르는 선율을 따라 택시가 밤거리를 미끄러진다.
언덕은 택시기사들이 올라오기를 꺼리는 곳이다. 이 노란삼각형의 기사도 언덕 중간쯤, 작은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는 곳까지는 잘 올라오다가 집들이 빌라촌으로 바뀌자 짜증을 냈다. 급기야 차는 언덕을 100미터쯤 남겨놓은 곳에서 세워졌다. 재개발 붐이 불랑 말랑 하는 산꼭대기 집으로 휘적휘적 돌아와 방에 엎어지자 외출 동안 보일러를 꺼 둔 방은 냉랭했다.
성탄절을 앞두고 생활형 주거침입범죄가 급증한다는 말이 뉴스를 타고 전해질 즈음의 어느 날 밤, 미친 듯이 친구와 깔깔대며 통화를 마쳤을 때 부엌 창문을 열고 집안을 들여다보는 한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서울에서 여자 혼자 산다는 것이, 더구나 반지하에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살아보고 알았다. 여자 혼자 산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할수록, 귤 하나를 먹어도 꼭 사래들려 여자의 기침소리를 콜록 내뱉었고, 이불을 세탁기에서 건져다 베란다로 가져가다가도 가구 모서리에 찧어 급작스러운 비명이 나왔다.
나는 내가 사는 곳이 지구가 아니라 달의 껍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공포를 갖고 있다. 누군가 몸을 부르르 떨어 나를 관계 밖 우주 속으로 털어버릴지 모른다는 위태로움. 사람들을 만나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함께 웃을 때에도 나는 달 껍질에 붙어사는 사람처럼, 때때로 불안정하고 예민해졌다. 겨울은 차갑고, 사직서를 내고 오는 서울의 겨울은 더 차가웠다.
내게 남은 것들을 헤아려본다. 한 달 치 월급과 바닥난 체력, 빈 손바닥을 펴 보이며 부끄럽지 않다는 듯 웃을 수 없게 된 지금의 나이, 같은 것들.
보일러가 다시 웅, 작동을 시작하려는 예고음을 보내온다. ON 램프에 빨간 불이 들어온다. 실내의 온기가 몸을 감아 돌자 내게 남은 목록표에 ‘그림’을 넣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화가’라는 단어에서 나는 늘 원래부터 이질적이지 않은 내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전세 3천짜리 이 언덕 끝 빌라 반지하나, 키보드 사이로 먼지가 히떡히떡 내려앉은 제조3년차 내 노트북처럼. 그건 전도유망한 청년이 창창한 앞날을 내다보는 것과는 다른 얘기로, 우연히, 자연스럽게, 내게 스며드는 예감 같은 거였다.
멍하니 형광등을 보고 누워 있다가 문득, 지난 번 서점에서 '가방도 무거운데 책을 더 사기엔 어깨가 너무 아플 것 같아서' 그냥 나왔던 《월간미술》 12월호와 인터넷에서 주문하려다가 '월급날도 미뤄졌는데 신용카드로 결제하긴 싫어서' 장바구니에 넣어뒀던 『이상은의 art&play』를 '당장'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홱 고개를 쳐들었다.
장바구니에 그동안 찜 해놨던 책들이 수두룩이 쌓였음에 식겁한다. 적당한 보일러 온도와, 이 책들만 있어도 이번 겨우살이는 족할 것 같다. 몇 권을 삭제하고 그림 잡지와 대학 선배가 최근 낸 소설집을 추가해 구입하기 버튼을 누른다. 얼떨결에 두 번에 나눠서 결제가 된다. 책들은 하루 뒤 한 택배기사의 품에 안겨, 우리집 현관문을 노크할 것이다. 하지만 뜯는 맛은 두 배겠지. 나는 두 덩이로 포장되어 올 책들을 생각하며 흐뭇하게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탁자 위의 탁상시계가 내 스물여섯의 정초는 너무도 여유로움을 증명해주며 재깍 재깍 움직인다.
머리맡의 벽지에서 동물의 눈코입이 튀어나오는 것을 눈을 가늘게 떴다 크게 떴다 하면서 바라보다가 문득 스킨이 떨어졌다는 생각이 들어 또 고개를 홱 쳐든다. 반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노트북도 내 급한 손길에 따라 고개를 쳐든다. 윈도우가 부팅되는 것을 보며 나는, 집이 좁아서 동선은 짧은데 왜 내 움직임에는 효율이 없을까를 고민한다. 이렇게 스물여섯의 1월은 이불과, 내 방의 풍경과, 인터넷 쇼핑몰 페이지와, 날아온 쇼핑상자들로 채워지는 것은 아닐까.
다음날 우리 동네 사람들은 모두 '김인혜씨'가 한 동네에 살며, 지금 이 순간 집에 있고, 택배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택배기사 아저씨들은 나이를 더 많이 잡쉈을수록, 송장에 찍힌 번지를 못 믿는다. 번지대로 와 보면 그 집은 나오는데도, 동네 어귀에서부터 받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 재낀다. 세상사 다 못 믿겠다는 듯.
어쨌거나 나는 오전부터 인터넷 서점의 선물을 '두 개'나 받아 기분이 좋다. 서둘러 부엌 가위로 충격방지용 뽁뽁이를 잘라낸다. 부엌가위가 부엌 이외의 곳에서 쓰임을 허락받는 것은, 주문한 물건들을 뜯을 때 만이다. 나는 거문고의 줄을 튀기고, 그 음을 유지하기 위해 한 손으로 음을 타는 악사처럼 책을 뜯는 여운을 오래 맛보기 위해 두 번째 덩이를 뜯으며 한껏 여유를 부린다. 포장지 안에서 잉크 냄새 묻어나는 새 책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의 희열. 책장을 처음 펼쳐들 때, 눌려있던 책장들 사이로 공기가 들어가며 비로소 숨을 쉬는 것 같은 소리- 파득파득. 종잇장들이 재배치되는 소리.
책들을 읽으며 나는 ‘다소’ 성장하고 싶었다. 혹여 내 자아가 언제든 성장을 마치고 몸을 뜯고 나와 세상 속으로 둥실둥실 떠간대도 나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으며 안녕 잘 가, 손을 흔들어 줄 정도로 자아에 대한 배려가 있었다.
학교 선배의 소설책은, 아쉽게도 나와 코드가 맞지 않는다. 만약 말 ‘더럽게’ 안 듣던, 중딩 소년들에게 내가 아직까지 미대 입시 대비 과외를 하고 있었더라면 그들에게 물들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 이거, 좆나 재미없네."
나는 이 사실을, 선배의 생계를 위해 극비에 부치기로 한다.
그래도 선배는 소설가가 되겠다던 약속을 지켜냈다. 나는 적어도 10년 후에야 '화가'가, 혹은 뭐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아 불안해진다. 10년 후 명함 속 내 이름이, 한낱 출판사 직원인 건 너무 시시하다고 던져놓고 나온 사직서가 어딘가에서 폐지처분을 기다리며 날 응원해줄까.
나는 선생님에게 쓰다듬어지길 기다리는 착한 학생 같은 얼굴로 잡지를 들여다보고 있다. 펜을 잡고 내 마음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에서 나는 가끔 생의 기적성을 맛본다. 잡지 속의 그림들이 헤쳐 모였다 흐늘흐늘 풀어지며 종이 속의 세계를 마음껏 누빈다. 그림들이 내 시선을 따라 먹이를 기다리는 붕어 떼처럼 우르르 몰려들었다, 사르르 흩어진다. ‘미대 졸업예정자’라는 타이틀로 미술잡지를 만들어내는 출판사에 취업해 5개월 동안 시간을 보냈다. 반년 전 노트에는 대학생인 내가 가득했다. 수업 시간 졸면서 그어진 낙서와, 시간을 때우기 위해 필기하는 교수님을 스케치 한 것, 옆에 앉은 친구와의 종이 위 잡담 같은 것들. 인생의 갈피를 여전히 잡지 못한 채로 반년이나, 살아냈다. 적당히 소시민적 인생을 감내하는 대가로 시원찮은 벌이를 받았다. 평균치인 인생으로 대한민국의 평균을 형성하며 이럭저럭.
현관문 밖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난다.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 용기가 없어졌음 깨닫는다.
왜지ㅡ?
머리가 떡져 있는 것과, T셔츠의 목 부분이 늘어났다는 것과, 코를 푸느라 왼쪽 콧구멍 부분이 헐었다는 것과, 오늘 일어나서 양치를 안 했다는 사실은 조금 전과 다를 바가 없는데.
왜,지ㅡ?
이유를 찾기 전까지 몸을 일으킬 용기가 나지 않는다. 이불 아래에서 저기, 발을 뻗으면 이불 끝자락이 걸리는 자리에 양말 두 쪽이 뒤엉키고 있다. 아…. 그제야 발바닥의 맨살이 이불에 닿으며 부끄러워하는 감촉이 전해온다. 나는 양말을 벗었단 사실에 놀란다.
이 야밤에, 문이 덜컹거리는데, 언제 도둑이 또 올지 모르는데, 마치 곧 잠들 사람처럼, 무장해제된 사람처럼 양말을 벗었다니. 서둘러 양말을 다시 신는다. 양말을 신고, 문단속을 확인하고, 문이 열리면 알람이 우는, 현관문에 달린 경보기가 ON에 맞추어져 있음을 확인한 뒤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온다.
나는 잡지에 실린 늙은 화가의 ‘향수’ 라는 작품을 보다가 못 견디게 고향으로 가고 싶어졌다. 고즈넉한 시골집을 그린 그림, 나는 그 그림을 통해서 내 유년을 읽는다.
지금 고향집은 동네에서도 눈에 띄도록 예쁘게 지어진 2층짜리 전원주택이다. 이 집을 짓기 위해 엄마는 유일한 노후 대비 재산이던 1억 5천짜리 집 뒤 동산을 팔았다. 집이 지어질 동안 나는 캠퍼스를 누비고, 남자친구와 연애하고, 도서관에서 능률 없는 공부를 하고, 틈틈이 그림 과외를 했다. 그리고 집이 다 지어지자 고향집에 내려가, 널따란 거실에 배 깔고 누워 엄마에게 왜 굳이 시골에서 2층집으로 지었느냐고 심드렁히 물었다.
“니들이 나중에 결혼할라고 사람 데려오면, 그 새신랑이 물을 거 아니냐, 왜 외가는 있는데 처가는 없어?”
그러니까, 엄마는 굳이, 2층으로 올려 나무 계단을 경계로 외가와 처가를 나눠 떳떳하고 싶었던 거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엄마를 떳떳하게 하는 그 2층집이 아니라, 그 집에 의해 쳐내진 옛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지나가던 트럭이 클러치와 악셀을 잘못 밟기라도 하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던 옛날 써금써금한 그 집으로.
안방에만 보일러가 들어와서 겨울이면 안방을 벗어나지 않던 그 게으름과, 그때의 폭신하던 이불, 외할머니가 한쪽 구석에 빚는 술 때문에 습하고 달콤하던 방안의 냄새, 온도 같은 것들. 눈 온 날 아침 할머니가 싸리빗자루로 토방을 쓱- 쓱- 비질하던 소리와, 양철 지붕에 익은 감이 툭- 떨어져 내리면 갑자기 공부하다 말고 머리털이 곤두서던 그 곳으로.
나는 노화가의 그림을 들여다보다 말고, 내일 아침 엄마에게 전화를 해야겠다, 고 생각한다. 내 인생이 젊디젊다는 것에 은근한 자부심과 묘한 불안을 동시에 갖고 있을 엄마에게. '내 자식 서울에 있다'는 말만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약간의 당당함을 보장받고 있을 엄마에게.
내가 왜 뿌리가 없이 이 삭막한 서울에서 떠다녀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다고 징징거려볼까. 아직은 내 유년과 멀어지고 싶지 않다고 사정해볼까. 그러나 언니는 말했었다. “네 유년은 애저녁에 끝났거든!”
고향집엔 구정이 다가오는 이 맘 때- 조청을 푹 고와, 시내에서 튀겨온 쌀알 부풀린 것과 뒤적뒤적 섞어 '오꼬시'와 '과줄' 같은 것을 만들었다. 아침이면 옆 집 할머니가 자신의 늦잠 자는 손자들에게 야- 이 노무 새끼들아- 외치는 소리가 들려 잠에 깼고, 헛것에 홀리는 우리집 흰둥이가 꼬물대는 소리를 들으며 학교에 갔다.
때때로 할머니가 복지관의 금요 수업 반에 가시거나, 동네 친구 분들 댁으로 슬렁슬렁 마실 가실 때에, 할머니와 통화하기 위해 걸려오는 친척들의 전화를 받으며
"으응, 네가 막내로구나."
수화기 저 편에서 들려오는 어르신들의 목소리로부터 내가 할머니의 전화를 대신 받을 '명백한 자격'을 갖춘 막내 손녀딸이라는 사실을 인정받는, 그런 따뜻함이, 온 몸 가득 퍼져서
그게 곧 나쁜 기운으로부터 면역이 되는, 내 유년들이 그 곳에 있었다. 언제부턴가 나의 문제들에 대해 네가 알아서 해라, 로 답하는 엄마는 내가 고향집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한숨을 푹 쉴까.
“엄마 엄마, 나 휴학하고 공부할까요-?”
"엄마 엄마, 나 이사할까요?"
졸업 전까지만 해도 사소한 일조차, 내게 오랫동안 잔소리를 높이던 엄마는, 이젠 "네가 잘 생각해서 해라." 외의 의견은 말해 주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지금 어느 때보다 어른들의 지혜가 필요하다. 어른이 된다는 건 문득, 어른들이 했던 말들을 어느 날 갑자기 아, 인정하게 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닐까. 요구르트는 밑둥치를 뜯어서 거꾸로 짜먹는 게 제일 맛있지만, 그 밑둥치는 무척 비위생적이라는 어른들의 주의를 기억해내고 기꺼이 그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처럼. 비가 올 것 같은 날 엄마는 우산을 쥐어주며 말했다.
“어른들 말 들어 하나 손해 날 것 없다”
비가 오지 않아서 가져갔던 우산을 그대로 대문 옆에 떨구어 놓는 날 보면서는
“팔 운동하고 좋았지 뭐”
게임에서 진 패자처럼, 엄마 품으로 파고 들어가는 상상을 한다. 요구르트 두 병을 원샷하고 내일 아침에 집에 전화를 걸자, 고 머리맡에 포스트잇을 붙혀둔다.
그림을 계속 들여다본다. 쓸데없이, 지나치게, 아름답다.
고향집을 떠올리자 갑자기 몹시 밥이 해먹고 싶어졌다. '밥'이라고 발음할 때 주는 온기와, 속이 꽉 찬 느낌과, 제대로 살고 있는 인생이라는 안도 같은 것들을 느끼고 싶어졌다. 나는 허기와, 이불을 걷고 일어나야한다는 귀찮음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런데 밥을 해먹고 싶다고 생각하니, 된장찌개도 먹고 싶고, 계란찜도 먹고 싶고, 자반고등어도 구어 먹고 싶어진다. 그러니까, 구색을 갖춰 내 나름대로 차려놓은 한 끼 밥을 해먹고 싶어진 거다.
밥 해 먹는 대신 야식집에 전화를 걸까, 고민한다. 하지만 막상 ‘식사 왔습니다! 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식욕은 오간데 없이 달아나고, 그 후 살찌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쓸데없는 지출이었다는 후회가 시작될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냉장고에서 굴러다니던 감을 깎아왔다. 누군가 ‘에유, 지도 먹고 살겠다고’ 라고 혀를 차는 것 같아 괜히 주변을 둘러봤다. 감은 내 허기와 공복이 외로움 때문이라고 말한다. 감기가 잘 낫지 않는 것도 외로움이 면역력을 약화시켜서라고. 나는 괜찮다고, 감을 다 먹고 나면 배고픔도 가실 거라고 대답한다.
감을 다 먹고 났는데도, 그러나 나는 여전히 밥을 해먹고 싶다. 감은 너무나 도도해서 내 위장의 허기를 가시는데 일말의 도움도 주지 않았다. 씹는 순간 공기 중에 분해되어버린 건 아닐까, 싶게 내 위장은 순진무구한 채로 비어 있다. 나는 감이 곱게 씨를 뱉어준 것의 고마움을 모른다고 생각한다.
확 씨 채 갈아 마셔 버리는 수가 있었어―, 라고.
나는 참을 수가 없어져 결국 한 상 가득 ‘뽀지게’ 먹기로 결심한다. 층간 소음이 제대로 전해지는 낡은 빌라에서, 남들 잘 밤에 상추를 씻고, 달그락거려 삼겹살과 마늘을 꺼낸다. 후식으로 내 깜깜한 뱃속을, 씹힌 상추와 돼지고기와 함께 유영할 요구르트도 함께. 밥을 하는 사이 고기를 올려놓고, 상추를 씻는 사이 고기를 뒤집는다. 삼겹살이 열을 너무 많이 받아 바짝 오그라들었다. 고기가 딱딱하고 질기게 씹힌다. 나는 자꾸 할머니가 말씀하시던 “돼지는 털 적은 짐승이라…”라는 말이 떠올라 고깃점을 형광등 불빛에 이리저리 비춰보며 먹는다.
‘털 적다잖아.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쓰신 말이 아니잖아’ 중얼거리면서, 하필 털의 세계가 결핍된 돼지가 불쌍하게 느껴진다. 할머니의 말은, 감기엔 돼지고기가 별로 좋지 않으므로 주의해서 먹으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나는 왠지 삼겹살에 돼지털이 붙어있는 것 같다는 망상에 시달린다.
바람이 집들을 다 날려버릴 기세로 부는 밤이다. 창밖으로 시비 거는 듯 부는 바람에게 나는 창문을 벌컥 열고 시끄러!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받는다.
공기 중에 닿는 내 몸이 모래알갱이처럼 서걱서걱하게 느껴진다. 코가 조금 뚫려 내 몸에서 앓고 난 사람의 시큼한 땀 냄새도 나고 있음을 알아챈다. 나는 오늘 중에 꼭 목욕탕에 다녀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리고 ‘대중목욕탕’에 가는 백수는 왠지 문학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
오후 늦게 느리적 느리적 언덕을 내려가 4천 원짜리 ‘일심탕’으로 들어갔다.
목욕탕의 덥고, 습습한 공기 속에서 어릴 적 ‘호텔훼미리’ 목욕탕에 가던 때를 떠올린다. 시골인 탓에 목욕을 하기 위해선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가야 했다. 우리가 목욕을 끝내고 나오면, 엄마는 회사 옆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시켜주고 다 먹을 때까지 지켜보다가 사무실로 돌아갔다. 집에서도 보는 엄마를 그 동네에서 보면 어쩐지 더 반가웠다.
언니들과 나는 목욕탕의 온도에 볼이 빨갛게 되어서는, 지금 딸기 우유를 먹어야 더 맛있을지, 초코우유를 먹어야 더 맛있을지를 고민하다가 할머니한테 딸기우유를 사달라고 졸랐다. 우리는 우리 몸, 그 중에서도 다리와 팔, 앞 몸통을 닦으며 헉헉 거렸으나, 우리의 때타올 질이 잠시 더뎌진다 싶으면 어디선가 할머니의 억척스러운 손길이 날아왔다. 우리보다 힘이 세다고 여겼던 할머니는, 사실, 어떠한 ‘책임감’이 좀 더 있었을 뿐이었다.
‘호텔훼미리’ 처음 생겼을 땐 뭔가 세련된 발음으로 시골 사람들을 달뜨게 만들던 그 목욕탕 이름도, 실은 꽤 저렴한 뉘앙스를 풍기는 이름이었다는 걸 중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알게 됐다.
*
목욕탕에서 1시간동안 열심히 타올을 비벼 온 몸이 벌게진 채 탈의실에 와 옷을 입었다. 브래지어 후크를 채우는 사이, 뒤에서 아주머니들이 TV앞에 모여 떠든다.
“어머, 자기는 피부가 백옥이야.”
“그러게, 은혜 엄마 신랑은 진짜 복도 많어.”
“백옥은 무슨, 희원 엄마도 부러우면 진주 마사지해. 2만원에 해줄게.”
“우리 희원아빠가 그러는 거 있지. ‘피부가 장난인데-? 소보루 빵 대신 자기 얼굴 떼다 팔아도 되겠어!"
남편의 낮은 음성을 흉내 내는 모습에 다른 아주머니들이 끼루룩 웃는다. 거울에 슬쩍 내 얼굴을 비춰본다. 내 얼굴도 떼다 팔아도 되겠다.
목욕탕을 나와 근처 교회 소 예배당에 들어갔다. 할머니 한 분이 이가 송송 빠져 새는 발음으로 웅얼웅얼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나도 열심히 기도를 했다.
“저 앞에 앉은 할머니 기도를, 죄다 들어주세요.”
예배당에서 나오자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빈 집으로 들어가기 왠지 싫었다. 나름 환자니까, 환자 같은 대우를 받고 싶은데 빈 집에는 어떠한 대우도, 서비스도 없잖은가….
혼자 살아서 좋은 점은 휴일에 뭔가를 시켜먹을 때 내가 끌리는 것과 좀 안 끌리지만 상대방이 끌리는 메뉴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아도 될 때나, 새벽녘 막 잠들었을 때 내가 사다놓은 너구리나 짜파게티를 이거 먹어도 되냐고 방문을 벌컥 열어 내 잠을 깨우는 사람이 없다는 정도로 순간적이었고, 반면 혼자 사는 외로움은 끝도 없이 길었다.
나는 빈집대신 교회에서 청년부 모임을 할 때 한 번 가본, 동네 카페로 향했다. 푹푹 꺼지는 낡은 소파가 꽤 인상적이었다. 카페로 가는 길에 있는 해장국집은 오늘도 따뜻하고 평온해 보인다. 내가 매일 퇴근길에 유리창 너머로 들여다보는 집이다. 유리창에 콩나물해장국 3,500₩ 뼈다귀해장국 5,000₩이 써 붙은 종이 두 장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며 하루가 끝났다, 는 느낌을 받았다. 그 자리에 있는 게 해장국집이라 다행인 것이, 최고급 이탈리안 레스토랑, 프랑스 요리 전문점, 베트남식 연어샐러드집, 하와이안 랍스타 전문점 같은 곳들이었다면 유리창 안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내 모습은 꽤 추하거나, 추하기 일보 직전일 것이다. 해장국 집 이라서, 아버지를 찾으러 집 앞에 튀어나온 큰 딸 같이 유리 안을 기웃거려도 누구도 의심어린 눈빛을 보내오진 않았다. 귀가 시간이 늦거나, 야근을 하게 될 때도 24시간 해장국집은 늘 내 귀가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주기 위해 꿋꿋히 불을 밝히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하여, 나는 언 속을 녹이는 기사들의 얼큰한 표정에서부터, 은행 직원들이 유니폼을 입은 채 우르르 몰려나와 함께 저녁을 먹는 모습을, 또 때론 퇴근길에 저녁을 때우고 가는 회사원들까지, 그들이 해장국을 마주 대한 표정에서 내 하루분의 마침표를 얻었다.
카페는 밖의 어둠이 파고들어 꽤 어두웠다. 스케치북을 꺼내 밑그림을 그리는 것을 발견한 카페 주인은 쎈스있게 벽면의 할로겐을 켜 주었다. 그게 내가 앉은 깊숙한 자리의 유일한 빛 이었다. 나는 연필 끝에 침을 묻혀 연애편지를 쓰던 옛날 사람처럼 자꾸 스케치북을 코 앞에 대고 선이 제대로 그어졌는지 확인하며 그림을 그렸다. 음악은 루즈한 통속가요였고 주인은 ‘카페모카’라는 내 주문에 ‘아, 핫 모카커피에 생크림 올라간 거 말씀하시는 건가…?’라고 되물었다. 나는 싱긋 웃으며 맞다고 대답했다. 유치원 때 우리 집에 있던 것 같은 커피 잔에, 초등학교 때 버린 것 같은 티스푼이 올려져 커피가 나왔다.
좀 지나자 음악이 자꾸 거슬렸다. 그러나 음악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내 집중력이 그만큼 두텁지 못하다는 뜻이며, 그동안 내 정서라고 믿고 스케치하던 것들이 실은 카페의 음악이 무척 아름답다든가 하는 지극히 타성적인 자극에 의한 것이라는 증명에 다름없는 말이라고 나를 다독인다. 하여, 나의 불만은 잠시 움츠러든다. 이 산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카페이므로, 카페에 적응하기로 한다.
10분쯤 뒤에 할머니의 전화가 걸려왔다. 할머니는, 자신의 손으로 키워온 손녀에 대한 감으로 다 알면서 모르는 척, 내 입으로 직접 말하도록 은근히 떠 본다.
“오디냐-? 집이는… 안 올리?"
평소처럼 바쁘냐고 묻지 않는다. 바쁘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일까. 나는 사실대로 모든 걸 고백한다. 할머니 손녀딸 백수 됐다는 것과, 감기 몸살로 떼굴떼굴 굴렀다는 것과, 아직도 감기는 안 나았다는 것과, 한 1년 동안 고향집에 내려가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싶다고. 그리고 언니가 돌아오면 비로소 혼자 살지 않아도 될 때 서울로 올라오겠다고.
성탄절 즈음에 밤마다 도둑이 왔었다는 것과, 부엌의 방범창은 두 가닥 뜯겼다는 것과, 서울살이 무섭다는 것과, 몸도 마음도 지쳤다는 얘기는 하지 않는다.
나는 말썽을 부린 뒤 “제가 깨뜨렸어요." 고백하는 어린아이처럼, 납죽 엎드려 할머니의 처분을 기다린다.
할머니는
“얼른 내려오너-” 를 명하신다. 중요한 귀중품(이런 게 있을 리 없지만)과 입고 내려올 옷, 갈아입을 옷 한 벌 들고 창문 꼭꼭 잠그고 집 보러 오는 사람들 보여주라고 부동산에 키 맡기고 내려오라신다.
“그렇게 아픈디 왜 혼자 설서 있어. 얼른 와잉?”
‘그렇게 아프지는 않은’ 나는 몇 번이나 대답을 채근 당한다.
나는 힘들고 지칠 때 돌아갈 집과 머무를 고향이 있다는 것에 경이로운 감동과 감사를 느낀다.
할머니는 우리를 키우시면서 사투리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셨지만 잘 안됐다. ‘할머니’를 발음하면서 자꾸 ‘할미’가 튀어나왔고 멸치를 며르치라고 하지 않기 위해 말을 다시 반복하셨다. 가끔 일본어 단어를 물어보면 자신이 뭔가 가르칠 것이 있다는 사실에 좋아하셨는데, 특히 이다다끼마쓰,를 발음하면서 내는 목소리는 천진하고 낭창낭창했다.
나는 겨울철 유독 감기와 자주 친구가 되곤 했다.
“휴지 장수가 지 할아밴 줄 알어.”
라며 할머니는 짚으로 가만가만 덮어뒀던 생강 종자를 언 밭에서 캐와 생강차를 끟여주셨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가끔 코감기에 걸려서 일하다 말고, 얘기하다 말고 코를 풀어야 할 때 민망하게 웃으며 먼저 선수 친다.
“휴지 공장 사장님이 할아버지라서요.”
*
카페에서, 나는 그림을 1장도 완성하지 못했다. 카페에서 나와 집으로 올라오는 언덕길에서 나는 서울에 남은 사람들 하나, 둘, 에게 안부를 보냈고, 그들의 답장과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서산에 있는 내 그리운 사람들 하나, 둘, 에게 '나 곧 서산으로 뜬다.'를 소문냈다.
내가 공무원이나 군인 또는 경찰이 되지 못하고,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회사에 다니던 것의 즐거움이 이런 게 아닐까. 언제든 훌훌 떠날 수 있다는 여유, 그리고 자유. 아르바이트를 정리하듯, 간단한 절차만으로 묶인 끈을 풀고 달아날 수 있다는 담보된 무책임성. 적당한 타이밍에 끊고 달아나면, 술래는 나를 잡지 못하는 아주 쉬운 게임 같은 것.
열이 오르는 것 같아, 체온계를 겨드랑이에 꽂고 기다리다 방바닥에 구겨져 설풋 잠이 들었다. 인혜야 그만자고 일어나, 밥 묵어야지… 마침 배가 고팠는데, 할머니가 ‘밥’을 차리시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 수저 부딪히는 소리, 나는 얼른 일어나 할머니를 도와야겠다고 생각하고, 말을 듣지 않은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린다. 그러나 서울 집이다. 언덕 위의 반지하, 나는 여기서 1년을 살았고, 영양부족과 곰팡이 알러지를 얻었다. 끼익, 꿈에서 들리던 예의 그 금속 마찰음에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목이 텁텁하고, 온몸에서 열이 난다. 겨드랑이에 꽂았던 체온계를 빼내어 온도를 확인한다. 액정에 37도 9부가 나타난다. 38선에 맞먹는 숫자다. 순간, 아이씨… 낮게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무심코 생각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 주네. 순간 머릿속에서 핑- 뭔가가 지나가는 느낌을 받고 그제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현관문을 노려본다. 목소리의 존재를 확인하기 전까진 곤두 선 온 몸의 신경들이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몸이 덜덜 떨린다. 감기가 다 낫지 않았는데 찬바람을 쐬며 목욕하고 온 것이 잘못이었는지 온 몸이 둔기로 얻어맞은 것처럼 욱신거린다. 현관문 밖에서 운동화를 신은 사람이 무게중심을 바꾸는 듯 발 디디는 마찰음이 들렸다. 나는 침대 끝에 널부러진 양말을 황급히 주어 신는다.
“누… 누구세요? 거기?”
현관문 저 쪽 뒤에선 미동이 없다. 나는 용기를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관문을 냅따 발로 찬다. 현관문을 긁던 금속성 물체를 떨어뜨리고 발자국 소리 하나가 빠르게 멀어진다.
관자놀이 터질 것처럼 뛰고, 몸에 또 열이 솟는다. 한 손으로 핸드폰을 잡고, 이 땅 위 분단의 고민과는 전혀 상관없이 112에 신고를 한다. ‘어디십니까 선생님?’ 상황실의 다급한 물음에 나는 한마디를 남기고 고꾸라진다.
“여기…, 37도 9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