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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9:1-20
찬송가 338장 ‘내 주를 가까이’
선지자 호세아는 재력과 국력으로는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영적으로는 패망하기 직전이었던 시기에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그는 북이스라엘의 쇠락을 보며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외형적인 삶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기에 호세아 선지자의 말은 북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렸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진정 망해가고 있었고, 그 이유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북이스라엘이 갖지 못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대체 어떤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책을 쓴 미국의 어느 신학자는 “신앙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신앙’은 말 그대로 하나님에 대해 머리로 아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하기는 하지만 이런 신앙은 하나님을 가늠하는데 그치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은 많지만, 인격적인 교제가 빈번하지 않다는 것이 큰 문제로 작용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아는 신앙’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통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가질 뿐만 아니라, 의지적으로 순종하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몸소 경험하는 신앙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구조화하여 말과 언어로 표현하는 일에는 서툴지 몰라도 그의 인생 속에 하나님이 녹아계시므로,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또 어느 형편에 처하든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나님화 되어 가는 것’입니다.
두 가지 형태의 신앙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요구하신다면 둘 중 어느 모습이기를 바라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이런 점에서 욥이 하나님에 대해 알았던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아는 것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광대하신 하나님을 말하는 욥(1-14)
(1-4)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그는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힘이 강하시니 그를 거슬러 스스로 완악하게 행하고도 형통할 자가 누구이랴
모든 일은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른다며 죄 용서를 구하라는 빌닷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욥이 대답하였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 1절은 짧은 한 문장이지만, 원어 성경에서는 ‘욥이 대답했다. 그리고 욥이 말했다’라는 두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는 앞선 빌닷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욥의 말이 치고 나왔음을 알려줍니다.
이와 같이 격앙된 어조로 욥이 한 말은 먼저 2절부터 3절에 기록된 대로 자신도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무한하신 지혜와 전능하신 힘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군신지 모르는 욥이 아닙니다. 그분을 온전히 인정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정확하시고 지혜로우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욥은 더 절망스럽다는 점입니다. 차라리 공의롭지 못한 하나님이시라면, 지금 자신이 처한 현실이 이해가 될 겁니다. 또 반대로 빌닷이 말한 것처럼 자신에게 있는 죄가 인정된다면 지금의 상황이 이해라도 될 겁니다.
그런데 욥은 도무지 이해가 안됩니다. 자신의 과거가 이처럼 고통스런 현재를 만들만한 모습이 아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신도 일편 의롭지 못한 사람임을 인정합니다. 2절과 3절에서 감히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척할 수 없고, 사람이 하나님과 변론한다면 그분의 말씀에 한 마디 대답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며 어떤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욥에게 가장 큰 의문이요 해결되지 않는 아픔입니다. 자기가 아는 한 가장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신데, 왜 현재 자신에게 이와 같은 부당한 고통을 허락하셨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항상 사람이 이해할 만한 일을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5-10)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 그가 땅을 그 자리에서 움직이시니 그 기둥들이 흔들리도다 그가 해를 명령하여 뜨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가두시도다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 북두성과 삼성과 묘성과 남방의 밀실을 만드셨으며 측량할 수 없는 큰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느니라
5절과 6절에 기록된 ‘산을 무너뜨리시는 일’과 ‘땅을 자리에서 움직이시는 일’은 자연재해 즉 지진과 같은 현상을 의미합니다. 또 해를 가리고 별들을 가리시는 일은 일식이나 월식과 같은 일 혹은 구름과 폭풍이 천체를 가리는 일을 말합니다. 8절에 하늘을 펴고 바다 물결을 밟는다는 것은 창세기 1장에서 기록된 천지창조의 기록 중 둘째 날과 관련한 하나님의 사역이고, 9절의 각양 별들을 만드셨다는 것은 넷째 날에 이루신 하나님의 사역과 관련한 고백입니다.
욥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머리로 정확히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크면 클수록 오히려 연약한 자신과 더욱 비교되어 괴리감만 커졌습니다. 크고 광대하신 하나님이신 것은 알았지만, ‘그 광대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신가?’라는 의문이 생긴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욥의 의아함은 도무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11-14) 그가 내 앞으로 지나시나 내가 보지 못하며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하고 누가 물을 수 있으랴 하나님이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시나니 라합을 돕는 자들이 그 밑에 굴복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감히 대답하겠으며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택하랴
욥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소통의 단절이 일어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고, 그분이 깨달아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욥의 슬픔이요, 고통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크고 기이한 일, 즉 사람이 헤아릴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심을 고백한 욥이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자기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크심은 도리어 비천한 자신이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할 이유가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13절에서 언급된 라합은 교만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입니다. 욥은 그런 존재라도 하나님 밑에서 굴복할 수밖에 없는데, 감히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무슨 말을 하겠느냐고 말합니다. 이는 할 말은 많지만 말할 수 없는 현실이기에 답답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너무 큽니다. 또 하나님은 너무 완벽하십니다. 그러니 흠 많은 자신은 그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겠다는 식입니다.
이 상황은 마치 드라마에서 어느 흙수저 여주인공이 금수저 재벌집의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그 남자는 너무 대단한 사람이라 자신이 사랑할 수도 없고, 다가갈 수도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욥의 하나님을 향한 지식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크고 광대하며, 완전하신 하나님이 맞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크고 완전하며 광대하시지만, 그렇다고 강하여 완전한 사람에게만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한번 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하나님은 항상 약자의 하나님이셨고, 언제나 연약한 자의 도움이 되어 주신 분이셨습니다. 이사야 25장 4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사 25:4) 참으로 주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요새이시며, 곤경에 빠진 불쌍한 사람들의 요새이시며, 폭풍우를 피할 피난처이시며, 뙤약볕을 막는 그늘이십니다.
애굽에 속박되어 노예가 되었던 히브리인들이 날마다 고통을 호소하며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그들의 신음을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강자의 요구만 들으시고 약자의 호소에 귀를 닫으시는 분이셨다면,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탈출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이 되신 것은 언제나 연약한 자에게 지대한 관심을 두시는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욥은 전능하시고 광대하신 하나님을 인식하였지만, 현재 어둠의 터널 한 복판을 지나는 자신과 여전히 함께 하고 계시다는 사실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높고 존귀하시지만, 언제나 낮고 가련한 것들에게 관심이 있으시고, 그들에게 온 마음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의 낮고 비천함은 오히려 높으신 하나님께 나아갈 충분한 이유입니다. 의원은 건강한 자에게 필요 없고, 아픈 사람에게라야 소용이 된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신음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더욱 집중하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변론할 수 없음을 원망하는 욥(15-20)
욥은 하나님께 할 말이 많았지만, 모두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었기에 감히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욥이 이런 현실을 내색하며 택한 것이 아쉽게도 푸념과 원망입니다.
(15-20)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대답하지 못하겠고 나를 심판하실 그에게 간구할 뿐이며 가령 내가 그를 부르므로 그가 내게 대답하셨을지라도 내 음성을 들으셨다고는 내가 믿지 아니하리라 그가 폭풍으로 나를 치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깊게 하시며 나를 숨 쉬지 못하게 하시며 괴로움을 내게 채우시는구나 힘으로 말하면 그가 강하시고 심판으로 말하면 누가 그를 소환하겠느냐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온전할지라도 나를 정죄하시리라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자포자기한 심정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특히 18절에서 욥은 하나님을 자기 숨통을 조이시는 분, 괴로움을 채우시는 분으로 여기는데, 이는 그가 당한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지를 알게 하는 대목이자, 그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이 오해되고 있는 장면입니다. 욥은 고난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정확히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고난을 당하기에는 자신이 무죄함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싶었고, 그래서 한 번이라도 변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시종일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변호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인생은 없으므로 사람이 하나님과 변론하는 것은 웃긴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울 수는 있습니다. 온 관심이 가난하고, 병들고,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집중되어 계신 하나님께 울며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시편에는 온통 자신의 처지를 돌보아 달라는 호소들로 가득하지 않습니까? 또 잠언에는 어떤 상황에서든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따르는 것이 지혜라고 알려주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죄가 없다고 변론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존귀하고 우리는 비천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의미없다고 좌절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자의 심정으로 부르짖는 것, 도움을 구하며 인생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 그렇게 자신의 처절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아니면 안된다며 끝까지 하나님만 의지하기를 바라십니다. 야곱, 요셉, 모세, 삼손, 룻, 다윗 등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의 공통점은 하나님만이 나의 유일한 도움이심을 알았기에 그분께 간구하기를 긍휼히 여겨달라고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비천한 상황에서 부르짖는 사람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반응은 항상 똑같습니다. 이사야 49장 15절부터 16절까지 새번역 성경말씀입니다.
(사49:15-16) "어머니가 어찌 제 젖먹이를 잊겠으며, 제 태에서 낳은 아들을 어찌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비록 어머니가 자식을 잊는다 하여도, 나는 절대로 너를 잊지 않겠다. 보아라, 예루살렘아, 내가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네 성벽을 늘 지켜 보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욥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변론이 아니라 긍휼입니다. 욥이 겪는 고통의 백배, 천배로 자신이 더 아파하시며 욥을 고쳐주지 않고는 안되는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도 이와 같지 않겠습니까? 나를 향해 긍휼을 베풀고자 준비하는 주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대단하다고 자꾸 그 앞에서 변론을 준비하는 것일까요? 그저 조용히 머리숙여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면,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그의 광대하심과 엄위하심을 입으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그리고 순종으로 인정해 드린다면 그것이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사람의 모습이 되지 않겠습니까?
머리로만 하나님을 아는 어리석음에서 떠나십시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고, 현재의 고통이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왜곡시키지 못하도록 주님께 우리 상황을 간절히 부르짖으며 그분께 담대히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낮고 천한 우리들, 약하고 가련한 우리에게서 눈을 돌린 적이 없음을 기억하며 오늘 하루 하나님을 향해 담대히 창문을 열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크고 광대하신 하나님이심을 머리로만 이해하며 살지는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며, 지금 내 신음과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시는 분이심을 다시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비천한 삶의 형편이 존귀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막는 걸림돌이 될 수 없음을 선언하며 이 하루도 주님께 창문을 활짝 열겠습니다. 말씀에 용기를 얻어 이 시간 주님께 우리의 모든 상황을 아뢰며 부르짖을 때, 들으시고 응답하시며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주님과 더욱 친밀히 사귀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빌닷의 말을 들은 후 욥은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2. 욥이 고백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요약하여 말해 봅시다.
3. 욥이 하나님께 나아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4. 욥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서 간과되고 있는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작성: 황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