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스님의 벽암록 맛보기] <1> 들어가는 말
①선과 친해지기
“목숨 던져 의심해 들어가야만 참된 자성 볼 수 있다”
벽암록은 대표적인 선어록
禪 이해하고 참선법 알아야
벽암록 100칙 선문답 가운데
자신과 인연되는 것이 있다면
목숨 던져 의심해 들어가야만
비로소 참된 자성 볼 수 있어
닭이 달걀을 품듯이 화두를
품고 가는 것이 곧 ‘看話’
절박한 경계 ‘은산철벽’에 비유
제아무리 강한 철벽일지라도
쉼 없이 부딪치면 부서지기 마련
<벽암록>은 대표적인 선어록(禪語錄) 중 하나이다.
선어록과 만나기 위해서는 선(禪)에 대한 이해가 되어야 하고,
또 참선수행(參禪修行)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선어록은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직접 몸으로 부딪쳐 들어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벽암록 100칙(則)의 선문답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자신과 인연이 되는 것이 있다면,
거기에 목숨을 던져 의심해 들어가야만 참된 자성(自性)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선(禪)과 교(敎)
불교는 부처님의 마음과 행을 보여주는 가르침이며,
그 가르침을 통해 스스로도 부처가 되게 하려는 종교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단순히 학문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기특하게 보지 않는다.
부처가 되는 것이 쉽지 않으므로
처음에는 부처님을 닮는 것으로 시작하되,
결국에는 부처가 되는 것만을 참답게 여긴다.
흔히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선은 곧바로 부처님의 마음과 만나려는 행위이고,
교는 부처님의 마음을 설명한 것이면서
동시에 그 마음을 찾아가는 방법을 설명한 것이다.
깨닫기 전에는 아무도 부처님의 마음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준비도 없이 아무렇게나 부처님의 마음을 만나겠다고
무조건 좌선(坐禪)만을 한다면 길을 잘못 들기 십상이기에
교(敎)를 겸해야 한다.
또 설명 듣는 것에만 만족하여 경론(經論)을 이론적으로만 연구하면서
부처님의 마음을 만나려 나서지 않으면,
뜬구름만 붙들고 있는 격이니 선(禪)을 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로 수행을 해보면 선(禪)과 교(敎)
둘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선(禪)의 전래와 간화선(看話禪)의 확립
부처님은 세 번에 걸쳐 가섭존자에게 마음을 전하셨다고들 얘기한다.
물론 이것은 후학들에 의해 정리된 말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근거를 가지고 얘기하는 것이니만큼
무시할 성질도 아니다. 그렇다고 마음이라는 것이
어떤 물체처럼 전해주고 받을 수 있다는 망상을 일으키면
정말 엄청난 불행이 벌어진다.
선(禪)이 부처님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달마조사(達摩祖師)로부터 비롯되는 중국선풍(中國禪風)이다.
인도의 수행법이 사유(思惟)의 성격이 강했다면
중국의 선풍(禪風)은 직관적(直觀的)인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중국 선사들 중에 사유의 성격이 강한 분들이 있긴 하지만
주류(主流)에서 빗겨나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도 직관적인 선풍이 강한데,
비록 가장 뛰어난 방법이긴 하지만 단점을 꼽자면
접근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일반인들이 사유의 성격이 강한
인도적수행법을 더 쉽게 생각하고 따르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도 분별에 떨어져 버릴 수 있는 단점이 있다.
달마조사로부터 비롯되는 중국의 선가(禪家)는
점차 공안(公案=話頭)을 중시하게 되고 이윽고
그 공안을 참구하는 간화선풍(看話禪風)이 형성된다.
어떻게 보면 간화선풍은 화두(話頭)만 두고 사유(思惟)가 붙을 자리를 없애 버린 셈이다.
오로지 화두라는 의심뭉치(疑團)만을 두는 것이다.
닭이 달걀을 품듯이 그 화두를 품고 가는 것을 간화(看話)라고 표현한다.
그러니 더더욱 어렵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흔히 이를 ‘은으로 된 산과 쇠로 만든 벽’이라는 뜻의
은산철벽(銀山鐵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언어적인 설명으로도 그 어떤 생각으로도 도저히 통할 수 없어서
오도가도 못 하는 절박한 경계를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강한 벽일지라도 다 허물어지게 되어 있다.
다만 허물어질 때까지 부딪치지 않기에 그 벽을 부수지 못하는 것이다.
화두(話頭)의 뜻과 공부하기
화두란 무엇이며 어떻게 공부해야 할까?
화두(話頭)는 선종(禪宗)에서 고칙(古則)·공안(公案)이라고도 한다.
공안은 공부안독(公府案牘)의 약칭으로,
옛날 국가에서 확정한 법률안으로서 국민이 준수해야 할 사안(事案)을 뜻하는 말이다.
선가(禪家)에서는 조사(祖師)들의 말씀이나 문답 등
부처님·조사님과 인연된 핵심적인 글귀를 수록하여 고칙 또는 공안이라 하고,
선(禪)의 과제로 삼아 인연화두(因緣話頭)라고 했으며, 줄여서 화두라고 한 것이다.
즉 이 화두는 부처님이나 스승들이 제자 또는 후학들에게
무엇인가 근본적인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한 역설적 언어나 행위를 일컫는다.
그러므로 사전적인 해석을 따를 것이 아니라
감춰진 핵심을 의심하며 추구해 가야 하는 것이다.
화두공부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막막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여기 간단하게 단계를 설명해서 공부에 도움이 되도록 한다.
의정(疑情, 의심을 일으킴) 첫째로 화두에 대해 의심하는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간절한 의심이 없이 그냥 화두를 암송하듯 하는 것은 아무 효과가 없다.
의심을 일으키는 첫 단계는 법문을 듣다가 혹은 어록이나 경을 보다가
단어나 문장의 뜻은 알겠으나 숨은 뜻은 도저히 모르겠다고 생각되는 것을 택하면 된다.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인가?” 혹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로 시작하면 될 것이다.
정말로 참선공부를 하고 싶다면,
그 의문을 여기저기 물어보지 말고 직접 뚫고 나가보라는 것이다.
의단(疑團, 의심 덩어리) 공부를 계속하다보면 의심이 모였다가 흩어졌다가 한다.
그래도 꾸준히 밀어붙이면 점차 의심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흩어지지 않게 된다.
의단독로(疑團獨露, 의단이 홀로 드러남) 비록 의심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긴 했지만
이것이 계속되지 못하고 자꾸 끊어져 버리는 일이 생긴다.
그렇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집중하노라면, 의단이 완전히 계속되는 단계에 이른다.
이때는 의심덩어리(疑團)만 남게 된다.
이 단계가 되면 자고 먹는 것도 거의 잊어버리는 몰입이 된다.
은산철벽(銀山鐵壁, 콱 막힘) 의심덩어리만 남은 상태가 지속되다가,
어느 순간 더 이상 언어나 생각이 미칠 수 없는 오갈 수 없는 경계가 된다.
앞으로 가려하나 문이 없고 물러나려고 하나 길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화두타파(話頭打破, 툭 터짐) 은산철벽의 상태가 지속되다가
기연(奇緣-특별한 인연 또는 계기)을 만나면 은산철벽이 무너지고
모든 것이 환하게 드러나는 깨침의 경지에 이른다.
필자 송강스님은…
1976년 부산 범어사에 한산 화엄선사를 은사로 득도했다.
화엄, 향곡, 성철, 경봉, 해산, 탄허, 석암 큰스님들로부터
선교율(禪敎律)을 지도받으며 수행했고,
범어사불교전통강원과 중앙승가대학을 졸업했다.
1987년부터 7년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국장, 재정국장 등을 역임했다.
BBS불교방송과 BTN불교TV 등에서 ‘자비의전화’와 기초교리강좌 등을 진행했고
불교신문에 ‘백문백답’과 ‘다시보는 금강경’ 등을 연재했다.
부처님생애와 금강경, 초발심자경문, 신심명 등을 강설한 책을 비롯해
미얀마 성지순례, 발칸·동유럽 문화탐방기 등 순례기와
은사 화엄스님의 생애, 경허선사 깨달음의 노래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4년 저서 <부처님의 생애>로 중앙승가대학교 단나학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현재 서울 개화사 주지로서 기초교리부터 선어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강좌를 진행하고 있으며 차, 향, 음악, 정좌, 정념 등을 활용한
법회를 통해 마음치유와 수행을 지도한다.
[불교신문3668호/2021년6월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