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에세이문학》 등단
•200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
•수필집 『바람 부는 날』, 『꽃이 왔네』, 『아직은 여백으로 두고 싶다』
•수필문예 올해의 작품상, 현대수필문학상, 대구문학 올해의 작품상 등 수상
•한국수필문학진흥회, 대구문인협회, 에세이문학작가회, 대구수필가협회, 수필문예회 회원
먼 길 돌아서 왔다. 가을볕에 익어가는 나무 내음이 구수하다. 눈 가는 곳마다 펼쳐지는 색의 향연이 봄꽃을 무색케 한다. 사람의 발길이 뜸한 만추의 산사는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더욱 고즈넉하다.
달성군 옥포면 비슬산 기슭에 자리한 용연사는 신라 신덕왕 3년에 보양화상이 창건한 절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3년 사명대사가 재건한 후 여러 차례의 중건, 중수를 거치며 오늘에 이르렀다.
바쁘다는 핑계로,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한쪽에 밀어놓았던 이곳을 여러 해 전 남편과 두어 번 다녀간 적이 있다. 돌아가신 아버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그러나 어디에서 그 근거를 찾아야 할지 막연해 사찰 경내를 돌아 부도밭을 헤매다 허탕 치고 돌아왔다. 그리고 한동안 잊고 지냈다. 최근에 집안의 질서姪壻가 적멸보궁寂滅寶宮에서 할아버지를 찾았다며 안내를 자청해서 서둘러 달려왔다.
극락전을 향하여 경내로 먼저 들어가기엔 마음이 바쁘다. 절 입구에서 왼쪽으로 꺾어 적멸보궁으로 발길을 돌린다. 오래 마음에 두고 있던 일이라 궁금증과 긴장감이 겹쳐 온몸의 세포가 곤두선다. 부처님의 훈향보다는 말로만 듣던 아버님의 흔적을, 어른의 숨결을 마주해 본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허둥거린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보물 539호 석조계단石造戒壇은 국내 8대 적멸보궁 중의 한 곳이다. 불사리는 원래 신라 고승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득도한 후 모셔 와 통도사에 봉안했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의 제자 청진이 왜적을 피해 금강산으로 옮겼다가 다시 통도사로 모셔가던 중 1673년 이 계단을 건조하고 사리 한 과를 봉안하며 이곳이 불교 성지가 되었다.
용연사에 아버님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이 가문에 며느리로 들어온 지 한참 지난 후였다. 어른에게서가 아닌 시누이한테서 들었다. 불교계의 학자였던 아버님이 끝내 침묵하고 계셨던 이유나 내가 한동안 그곳을 열외에 둔 데는 그 바닥에 나름의 아픔을 깔고 있어서다. 해방과 한국전쟁 같은 역사의 격변기를 거치며 불교계에 엄청난 분규가 있었고 그 이후 아버님이 사찰을 떠나 교육계에 몸담으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짐작일 뿐 당신의 신앙에 관한 한 아버님은 생전에 한마디의 언급도 없으셨다.
돌계단을 높이 쌓은 곳에 적멸보궁 현판이 보인다. 한적한 골짜기 안쪽, 묵직한 고요가 낯선 손님을 맞는다. 적멸보궁 전각은 휑하게 비어 있다. 법당에 불상이 없다. 전면 유리로 된 벽 너머로 좀 더 높은 곳에 앉은 석조계단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층 계단 위 사리탑에 예배의 대상인 부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으므로 달리 불상이 필요치 않다. 간단히 목례를 하고 옆으로 돌아 석조계단으로 다가간다.
석조계단은 승려들이 수계의식을 거행하는 신성한 곳으로 두 개의 기단 위에 큼직한 네모 굄돌을 놓고 그 위에 석종형 사리탑을 얹었다. 두드러진 특색 없이 수수한 품이 시골 선비를 보는 듯 점잖다. 간결하고 중후함이 아버님의 분위기와 흡사하다. 아래층 기단에는 네 모서리마다 사천왕상을 세웠고 위층 기단에는 팔부신상을 돋을새김하였는데 그보다 나는 아버님의 흔적 찾기에 바빴다. 정면 왼쪽 돌난간 석주에 새겨진 어른의 성함을 확인하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 왔다. 너무 늦은 대면이 송구스러웠다.
“아버님! 며느리를 잘못 두신 탓에 이제야 찾아뵈었습니다.”
내가 집안의 종교를 따라 불교를 신봉했으면 이 걸음이 오늘에 이르도록 늦어졌겠는가. 죄인 된 마음으로 석주를 안고 한참 넋 놓고 서 있었다. 1934년에 계단 주위에 돌난간을 두르는 공사를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때가 아버님이 사찰의 책임자로 이 일을 주관하실 때였고 그 업적을 기려 새겨놓은 듯하다.
반세기 전 천주교 신자인 내가 이 집의 맏며느리가 되었다.
“얘야, 거기 좀 앉아라.”
신행 온 지 사흘째 되던 날, 시어머니께서 나를 불러 앉히셨다.
“천주교도 신성하고 좋은 종교인 줄 안다. 그러나 여자는 결혼하면 시댁을 따라야 하느니라.”
시어머니의 한 말씀은 단호했고 엊그저께 시집온 새며느리가 대답할 말은 없었다. 가족들이 거의 불교도인 가정에 불협화음을 내지 않으려고 나의 신앙은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었다. 심중에 무엇을 담고 계시는지 침묵 일관인 아버님과 신앙은 구중심처에 묻은 채 색깔 없이 경계에 서 있는 나, 성실한 불교도인 시어머니와 형제들, 우리 가족은 이 삼각 구도 안에서 용하게도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큰 부딪침 없이 지내왔다. 서로의 마음 밑자리를 알은체하지 않는 것은 무언의 약속이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아버님의 흔적을 찾아 극락전으로 발길을 옮긴다. 한때 승려 오백여 명이 머물렀다는 지난날의 번영은 간데없고 인적 없는 마당에 삼층 석탑만이 오롯하다. 바람 한 자락 불어와 잠시 탑신에 머물다 무심히 떠나간다. 어딘가에 또 있을지 모를 어른의 발자취를 찾아 기록이 새겨져 있는 곳은 눈을 부릅뜨고 살핀다. 극락전 옆 비석에서 또 아버님을 뵈었다. 시어른이 1902년생이시니 그 당시에 삼십 대 초반인 듯. 푸르렀던 아버님의 시간이 차가운 돌 안에 머물러 아직도 청청하다. 석조계단 석주에, 사리탑 앞 비석에, 또 이곳 극락전 옆 용연사 중수비에. 눈 감고 정좌하여 고요히 명상에 든 생전의 모습이 땅거미 내리는 산사에 어린다. 언제나처럼 오늘도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한결같던 모습, 좌선坐禪의 화두가 무엇이었을까. 존재의 근원을 묻는 물음이었을까, 아니면 당신의 신앙, 또는 며느리의 신앙에 대한 고뇌였을까, 그도 아니면 무심의 경지에서 무하유無何有의 세계를 노니는 한유閑遊였을까. 그것이 무엇이었든 아버님은 내가 오직 태산같이 믿고 기대었던 언덕이었다.
훗날, 당신 평생을 바쳐 공부하고 닦아 왔던 소중한 학문이자 신앙을 며느리를 향하여 비워내시며 천주교를 다음 세대의 종교로 허락해 주셨다. 그러고는 시어머니께 며느리를 따르라고 명하셨다. 가슴에 묻어 놓고 간절한 바람을 품었을 뿐 단 한 번도 무릎 꿇고 청을 드린 적이 없었는데…….
그즈음 아버님은 한없이 가벼워진, 내면을 다 비워내신 공空의 세계에서 도道의 경지에 이르렀을까. 이것이면 어떻고 저것이면 어떠한가, 삶에 정성을 다하는 것이 곧 신앙이라고 나에게 무언의 설법을 보내셨을까.
그 당시 나는 그저 황송하도록 고마울 뿐 득의만면해서 내게로 건너온 것의 무게를 속속들이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것은 세상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큰 사랑이었음을, 자신의 전부를 내어놓으신 그 사랑의 무게를 오늘 가슴 뻐근하도록 느껴 본다.
그간에 터널이 뚫리고 사찰로 이어지는 새 도로가 생겼어도 내게는 길이 아니었다. 이제 이곳으로 새 길이 열리리라. 아버님이 못내 그리운 날, 나는 이 길을 달려 산사로 갈 것이다. 그분의 자취가 살아 숨 쉬는 그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