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뉴스는 ‘완전 거짓’ 아닌 ‘반쪽 진실’로 당신을 홀린다
[책으로 이슈 읽기] 폭스 사태로 본 가짜뉴스의 메커니즘
폭스 포퓰리즘
리스 펙 지음 | 윤지원 옮김 | 회화나무 | 476쪽 | 2만2000원
2020년 미국 대선에 대해 개표기 조작 가능성을 수차례 보도했던 폭스사(社)가 투·개표기 제조 업체에 1조원에 달하는 돈을 물어주기로 합의했다. 언론·출판의 자유를 규정한 수정헌법 1조를 절대 가치로 여기며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해온 미국에서 언론 보도 관련 재판이 이처럼 거액의 배상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본지 20일 자 A1면〉
“평화가 왔다.” 미국 폭스사(社)와 약 1조원의 손해배상 합의를 이끌어 낸 투·개표기 제조 업체 도미니언 보팅 시스템 측 변호인의 말이다. 폭스뉴스는 2020년 미국 대선에 사용된 개표기 조작 가능성을 반복적으로 보도하며 트럼프의 대선 결과 불복에 힘을 실어줬다. 이듬해 1월 워싱턴 DC 연방 의회에 트럼프 지지층이 난입하는 등 가짜 뉴스의 폐해를 극에 달하게 했다. 그러나 정말 평화가 온 걸까.
가짜 뉴스의 단죄도 중요하지만, 시청자들의 안목을 기르는 일 역시 중요할 것이다. 미국 뉴욕시립대 미디어문화학과 교수 리스 펙은 ‘폭스 포퓰리즘(Fox Populism)’을 통해 폭스뉴스가 상업적, 정치적으로 성공하게 된 역사와 원인을 분석한다. 2019년 미국에서 출간된 책이라 개표기 조작 의혹을 제기한 방송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폭스뉴스의 성공은 가짜 뉴스의 성공과 궤를 같이 한다.
지난 18일 투·개표기 제조 업체 도미니언 측 변호사들이 델라웨어 고등법원에서 폭스뉴스와 합의한 후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AFP 연합뉴스
◇”엉터리 속임수 아닌, 정교한 정치 커뮤니케이션”
미국 최대 보수 성향 뉴스채널인 폭스뉴스는 2000년대 초반부터 시청률 1위를 줄곧 유지해 왔다. 그럼에도 방송의 품격, 연출적 요소와 관련해 ‘오락거리’ ‘영리한 마케팅’ 같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그러나 이는 폭스뉴스를 얕본 것이다. 저자는 “폭스뉴스를 ‘엉터리 속임수’ 정도로 치부할 게 아니라, ‘근래 미국 역사에서 가장 정교하며 문화적으로 교묘한 정치 커뮤니케이션의 사례’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폭스뉴스 성공 비결은 포퓰리즘을 영리하게 이용하는 것. 방송에서 당파성, 혹은 주된 시청자층이 보수 성향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쓴다. 앵커 빌 오라일리를 비롯한 출연자들은 노동계급이 사용하는 상징, 문화적 코드를 수시로 이용하며 친밀한 느낌을 유도한다. 전문적 지식을 전달할 때도 자신을 엘리트 계층과 차별화하면서, 노동계급의 언어로 번역해 말한다. 이를테면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 정치 평론가 글렌 백이 자신을 소개하며 “그냥 고등학교만 졸업한 남자예요”라고 말하는 식이다. 폭스뉴스는 보수를 이른바 ‘노동계급의 브랜드’로 연출해 보다 많은 시청자를 확보해 온 것이다.
◇ “거짓보다 무서운 절반의 진실”
거짓보다 무서운 건 ‘절반의 진실’이다. 저자는 폭스뉴스의 포퓰리즘 전략이 “진짜 경제적 불평등을 가리기 위해 전략적으로 미국의 계급 위계질서와 관련해 제한적인 개념만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본다. 하나의 사례는 2009년 3월 10일 방송된 토크쇼 ‘오라일리 팩터’. 폭스뉴스의 간판 진행자였던 빌 오라일리는 ‘소득 재분배’ 정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물론 저는 제게 공정하게 부과된 몫은 기꺼이 지불하고 싶어요. … 하지만 제가 원하지 않는 것은 제가 죽고 난 뒤 누군가 제 집에 들어와서 이미 제가 세금을 모두 지불한 물건들을 … 자격이 없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거저 주는 거예요.” 소득 재분배 정책에 대해 말하는 듯하면서, 정책을 강도 행위에 비유해 정부의 이미지를 폭력적으로 그려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폭스뉴스에 등장하는 지식의 출처다. 진행자는 전문가에게 수차례에 걸쳐 확인을 구하는 ‘연출’을 한다. 통계 등 출처가 지식의 정확성을 표면적으론 보장해주지만, 편향되거나 누락된 경우가 많다. 문제가 된 개표 조작 의혹 방송도 마찬가지였다. 앵커 숀 해니티는 2020년 11월 12일 뉴스에서 프린스턴대 컴퓨터공학과 앤드루 아펠 교수의 논평 등을 언급했다.
◇ “문제는 내부에서 터져나올 것”
책은 2017년 무렵 빌 오라일리, 로저 에일스를 비롯한 폭스뉴스의 간판 언론인들이 성추문 사건에 잇따라 휘말리던 이야기로 끝난다. 이들의 성추문이 수년 전부터 알려진 사실이었으나, 내부 폭로로 마침내 크게 시동이 걸렸다는 것이 ‘가장 큰 아이러니’라고 평가한다.
폭스사는 약 3조5600억원 규모의 명예훼손 소송을 앞두고 있다. 투표 기술 보유 회사인 ‘스마트매틱 USA’가 2020년 대선 부정 투표 방송과 관련해 소를 제기했다. 최근 1조원의 손해배상 합의가 이뤄진 것은 도미니언 측에서 폭스뉴스 출연자 등이 주고받은 이메일을 입수한 덕분이다. 표현의 자유가 크게 보장되는 미국에선 언론 보도에서 ‘실질적 악의’(actual malice)가 인정되지 않으면 책임을 묻지 않는 관례가 있다. 폭스사가 다시 대규모 손해배상을 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누군가는 폭스뉴스를 보고 있고, 시청률은 여전히 높다. 화면 안의 ‘가짜’를 찾아낼 능력이 과연 우리에게 있을까.
출처: 조선일보 이영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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