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보르작 Dvořák
Songs My Mother Taught Me
어머니가 가르쳐 주신 노래
https://youtu.be/sEbm17xCWDI?t=190
'죽음'이란
어떤 말로 위안을 삼는다 해도
인간에게 있어서는
두려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종말을 의미하며
어느날 불쑥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것이므로.
내가 아주 꼬꼬마였을 때
갑자기 죽음의 공포가 흑암으로
엄습해 오면서 짧은 순간이나마
가늠하기 힘든 두려움을
강렬하게 느꼈던 적이 있었다.
세상 모르는 철부지에 불과했던
내가 마주했던 죽음의 심연은
마치 뭉크가 그린 <절규>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비명도 나오지 않을 만큼의
절망감이나 공포, 그 자체였던 것 같다.
쉽게 잠이 들지 않는 밤에는
왜 이리 잠 드는 게 힘든 걸까.
인간에게 있어 잠이란 무엇이길래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는데
영적으로 봤을 때 날마다 미리
죽음을 연습하게 하신
창조주의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얼마 전에 영화 <위트>를 보았다.
말이 필요 없는 명배우 중 명배우,
엠마 톰슨이 비비안 베어링이란
영문학 교수를 연기했고
특이하게도 카메라를 응시하며
관객에게 스토리텔링을 하다가
등장인물들과 대화를 나누는
독특한 기법으로 내용이 전개되는
비비안의 투병기록이라 할 수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읽어주던
동화책 속에서 언어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매료되었던 비비안은
평생을 바쳐 17세기 영국의 시인,
존 던의 시를 연구하였고
그 분야의 대가가 되었으며
이성과 지성으로 무장한 지식인답게
모든 면에서 냉철한 면모를 지닌 사람이다.
'죽음아, 네가 죽을 것이다!'
(death shall be no more;
Death, thou shalt die!)
강인한 정신력과 예리한 이성으로
중무장한 그녀는 존 던의 시에서
언급된 죽음을 강의하면서
이러한 견해를 보이는 반면,
그녀의 지도교수인 애쉬포드는
“죽음은 무대 위에서
느낌표로 공연되는
그런 것이 더 이상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쉼표, 휴지이다.”
(death shall be no more,
Death thou shalt die.)
라고 말하며 도서실에 틀어박혀 있는
비비안에게 밖으로 나가서
자신의 삶을 즐기라고 권고했지만
그녀는 햇빛을 쬐이며 어울리는
삶이 아닌 도서관을 선택하는 삶을
선택하였으며 죽음을 하나의
관념으로 대했던 것 같다.
애쉬포드 교수의 말처럼
죽음이란 하나의 쉼표,
죽음과 죽음 이후의 삶 사이에
놓여있는 징검다리가 아닐까?
애쉬포드 교수의 관점에 동의하며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존 던의 시는
그녀에게 육화되어 나타난다.
난소암 말기 판정을 받은 그녀는
암연구의 실험대상이 되는 것을
별 거부감 없이 수락한다.
학구적이었던 그녀는 아마도
자신의 이성적인 면모를 과신했던 것 같다.
죽음조차도 그녀는 위트로 받아들였지만
이는 그녀의 오만이었다.
그러나 죽어가는 자신의 몸을
흥미로운 교과서 쯤으로 취급하는 이들이
자신의 몸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쑤시는
행위에 대한 수치를 감내해야 함과
자신은 하나의 연구과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대상에 불과하다는 씁쓸한 현실과
또한, 자신을 극한의 고통으로
내모는 것은 암이 아니라
사실은 그 암을 죽이기 위한
강력한 화학요법이었음을 깨달으며
모든 과정을 견디어 냈지만
결국은 죽어가고 있다는
상황에 대해 이전에 자신이 가졌던
모든 확신은 무력감으로 변해버린다.
이제 남은 것은 하루가 다르게
쇠락해져 가는 몸과 지독한 육신의
고통과 함께 병실에서 맞이하는
죽음이 확실하다는 처참한 결론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만다.
한 때 비비안의 제자였으며
환자를 생명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암 그 자체에 몰두한 젊은 의사 제이슨의
냉정한 태도에서 비비안은
다름 아닌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깊은 밤, 갑자기 찾아온 고통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비비안에게
하드를 먹겠냐고 묻고 같이 먹으며
이런저런 시시한 대화 -예전의 비비안이라면
가치 없다고 여겼을-를 나눠주는
간호사 수지의 존재와 같이
개인적인 접촉과 친밀감이
마음의 위안을 주는 유일한 것이었다.
육신의 고통이 극심하여
그저 어린아이처럼 울부짖고 있을 때
비비안을 방문한 애쉬포드 교수는
존 던의 시를 읽어줄까 하고 묻지만
비비안은 싫다고 한다.
애쉬포드 교수는 동화책을 꺼내어
옛날에 아버지가 그랬었듯
나직하게 읽어주고 비비안은
자장가를 듣는 것처럼
그 품에 안겨 마지막 잠을 잔다.
죽음의 문 앞에 이른 사람에게
수준 높은 지성이나 냉철한 이성은
구겨진 휴지조각에 불과했다.
죽음과의 투쟁에서 백기를 들고
항복할 수 밖에 없게 된 비비안에게
소박하지만 인간적인 친절함과 배려,
그것만이 가장 절실한 것이었다.
죽음은 무엇일까.
그것은 영원한 종말이 아니라
찬란한 부활을 위한
쉼표가 아닐까?
우리는 매일 죽음과 같은
잠을 자게 되지만 깊은 밤의
어두운 터널을 지난 후에는
기적과 같이 밝은 아침을
날마다 맞이하게 된다.
어김없이 반복되는 이 현상은
죽음 이후에 찬란한 부활이
있음을 소망으로 남겨주신
창조주의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카페 게시글
용띠들동행
영화 <위트>를 보고
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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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70
23.10.29 19:08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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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무비님
오랜만에 반가워요
요즈음 죽음에 대한 생각을
정말 많이 하는데 글을 읽으며 부활이란 단어에 멈추어 봅니다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삶은 너무나 비참하고 허무해요.
감사합니다^^
저는 불로장생 한다구 하든데요?죽음이 없는 영원한 삶.
신끼가 있능거 같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