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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한 아들을 찾은 기쁨 비유
누가복음 15장 11-32절 / 11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본문은‘잃어버린 탕자(아들) 비유’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제목이 붙은 것은 이 비유에 앞서 다루어지고 있는 두 비유가‘잃어버린 (한 마리)양 비유’,‘잃어버린 한 드라크마 비유’와 연속되고 있는데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잃어버린 탕자(아들) 비유’라고 제목을 붙이기는 합니다만, 여기서 잃어버렸다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바깥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또는 시장 보러 나갔다가 그만 아들을 잃어버렸다는 것에서의 잃어버림을 뜻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아들은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품을 떠나 집을 나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가출한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사실 제목을 잡는다면‘집 나간 아들 비유’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앞에서의 비유와 이어지고 있는 비유이기 때문에 제목의 일련성, 곧 제목의 연속적인 통일성을 생각해서‘잃어버린 아들(탕자) 비유’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 집 나간 아들은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잃어버림에 있는 것과 다름 아닌 이유에서 이기도 합니다. 이는 본문에서 돌아온 아들에 대해 아버지가 갖는 심정의 표현에서도 그대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그런데 이 비유는‘잃어버린 아들 비유’에서 그 내용이 두 아들 중에서‘잃어버린 한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기쁨’에 있는 것이므로,‘잃어버린 한 아들을 찾은 기쁨 비유’라고 제목을 정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잃어버린 한 아들을 찾은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작은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습니다.“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지금 소유하고 계신 모든 재산을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는 아들인 저희에게 상속해 주실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어차피 언젠가는 아들들에게 물려주실 재산인데, 그 재산 중에서 제게 물려주실 몫을 지금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때까지 기다릴 것 없이 제게 돌아올 몫의 재산을 지금 나누어 주십시오.' 작은 아들의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그러한 작은 아들을 물끄러미 보시며 말했습니다.“그러냐? 알았다, 그러자꾸나.”그래서 아버지는 재산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며칠 후에 작은 아들은 자기 몫을 다 챙겨가지고 먼 지방으로 떠났습니다. 거기서 술과 여자로 허랑방탕하게 지내면서 세월을 보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돈을 다 써버렸습니다. 어느덧 무일푼이 된 그는 설상가상으로 그 지방에 몰아닥친 큰 기근으로 끼니조차 잇지를 못하고 굶고 있었습니다.
이 지경이 되자, 할 수 없이 그는 나가서 그 고장에 사는 이 집 저 집을 찾아 들어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지를 알아보며 자신을 일군으로 써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한 사람으로부터 겨우 허락을 받아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대신에 집 주인은 그를 자기의 농장으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습니다. 주인의 농장에 도착한 그는 하도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워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 그에게 먹을 수 있도록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자신의 처지에 그는 처량한 생각이 들면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제서야 제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는 지금의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중얼거리듯이 말하였습니다.“아버지가 계신 집에는 일꾼들까지도 양식이 풍족하여 먹고도 남는데 여기서 나는 굶어 죽게 생겼으니 이게 무슨 꼴이냐? 안 되겠다. 이제 내가 일어나서 내 아버지께로 가야겠다. 그리고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여‘아버지여, 내가 하나님과 아버지를 거역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제가 더 이상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이런 저를 내치지 마시고 일꾼으로라도 좋으니 이곳에 있게만 해 주세요.’라고 해야겠다.”
이 생각에 미치자 그는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계신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아버지는 집 밖에서 혹시나 오늘은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지는 않나 하는 생각에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저 멀리서 아들이 다 쓰러질듯하게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측은한 마음에 달려가 아들을 끌어안고는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참지 못하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면서 말하였습니다.“아버지, 저는 하나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습니다.”그렇지만 아버지는 모여든 종들에게 말하였습니다.“너희는 빨리 집안에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다가 내 아들에게 입혀라. 그리고 보석 반지를 끼워 주고 좋은 신을 신겨주어라. 또 살찐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내가 잔치를 열고 온 동네 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나눠야겠다. 이는 죽었다고 여긴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으며,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은 것이다.”그래서 잔치로 온 집안이 들썩거렸습니다.
그때 큰 아들은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하던 일을 끝내고 돌아오던 큰아들은 집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자기 집에서 사람들이 춤추며 흥겨워 부르는 노랫가락이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종 하나를 불러 물어 보았습니다.
종은 매우 기뻐하면서 대답하였습니다.“`주인님, 이제 돌아오십니까? 마침 잘 돌아오셨습니다. 좀 전에 주인님의 동생이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주인님의 아버님께서 아들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동네 모든 분들과 함께 축하하시고자 살찐 송아지를 잡아 큰잔치를 벌이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큰아들은 몹시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큰 아들을 보고는 아버지가 나와서 달랬습니다. 하지만 큰 아들은 화가 풀리지 않은 모습으로 아버지에게 투덜거리며 말했습니다.“아버지, 이럴 수가 있습니가? 저는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위해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동안 아버지께서 제게 말씀하신 것 중의 어느 하나도 거역한 일이 있습니까?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잖습니까? 그런데도 지금까지 제게는 친구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라고 염소새끼 한 마리 내어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재산을 들고 집을 뛰쳐나가 창녀들한테 빠져서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며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 버린 동생이 돌아오니까 그 아들을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 주시다니요.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저, 너무 서운하고 속상합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가 말하였습니다.“애,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고, 잃었다가 다시 찾았으니 이 기쁜 날을 잔치를 벌여 즐거워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
예수님이‘잃어버린 한 아들을 찾은 비유’를 말씀하신 의도는 반복해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24절과 마지막 절인 32절에 있습니다.“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예수께서‘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은 기쁨 비유’와‘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은 기쁨 비유’에 이어서 연속해서‘잃어버린 한 아들을 찾은 기쁨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탐욕으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반대하여 따르지 않으며 예수께서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는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자리를 갖고 식사를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비난하는 것에 대해“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15:7),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15:10)를 말씀하시는 것에서입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로 돌아온 자들로 인한 기쁨으로 베풀어지는 잔치와 같다는 것입니다. 앞서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사람 하나가“하나님 나라 잔치의 떡을 먹는 자는 참으로 복 있겠습니다.”(14:15)라고 말하였는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서 보는 장로들의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지요. 하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비롯해서 사람들이 멸시하는 세리들과 죄인들일지라도 그들이 예수께 나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 주이심을 깨달아 알고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은 그들을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온 아들로,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은 아들로 받아들이시고 그 아들을 찾은 하나님의 기쁨에 하나님이 함께 하는 모든 사람이 참여하여 기쁨을 함께 하는 즐거움에 있을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이죠. 세리들과 죄인들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여 잔치의 떡을 먹는 즐거움의 복을 함께 누림에 있지 못하는 것은 아닌 것이죠.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듣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지 그 의도를 곧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멸시하는 세리들과 죄인들도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하나님의 받으심에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통해서, 사실상 세리들과 죄인들을 멸시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정작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에 있지를 않고 탐욕에 있는 악함으로 집 밖으로 버려지는 맛을 잃은 소금과 같아 사람들의 발에 밟힐 뿐이 될 것(14:34-35)임을 책망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은 기쁨 비유’,‘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은 기쁨 비유’, 그리고 본문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잃어버린 한 아들을 찾은 기쁨 비유’에서 보는 것과 같이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온 죄인 한 사람을 인하여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으로 하나님 나라의 모든 백성이 함께 기뻐하며 그 즐거움을 누림에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서기관들이며 바리새인들이기 때문에 들어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에게서 멸시받는 세리들과 죄인들이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서기관들이고 바리새인이든, 세리들과 죄인들이든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온 자들이 하나님이 기르시는 양이며, 하나님이 맞이하시는 신부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들입니다.
그럼에도 흔히 이를 오해하여 세리들과 죄인들에서 보는 그 모습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렇다면 말이죠..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 24-31절에서 말한 바인,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에 있었던 자들은 아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과연 이 본문의 32절에서는“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하는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상실한 마음에 있는 이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우상 숭배에 있는 마음 그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버려진 마음에 있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온갖 죄가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육체에 현저한 죄악을 도모하는지요. 그래서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인지요. 아닙니다. 그러기 전에 이미 그들은 하나님이 없는 마음이라는 사실이 말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에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데 따라 그 마음에 차 있는 것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육체의 욕망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렇게 죄의 사람으로서는 의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그들의 마음에 차지되고 있을 때,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 회개에 있을 때,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던 죄악이 깨끗이 없어졌으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으므로 하나님께로부터 버려진 마음에 있어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우상 숭배에 있으며 육체에 현저한 죄악을 도모하며 이런 저런 온갖 죄가 가득 차 있던 모든 죄는 사하심을 받습니다. 그러니 사하심을 받는 이것으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거나, 사하심을 받는 이것으로 지옥에 들어간다거나 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결코 사하심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며, 지옥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무슨 죄를 짓든지, 무슨 신성 모독적인 말을 하든지, 또한 예수님을 거스르는 말을 하든지 그 모두는 사하심을 받을 것입니다만, 성령을 모독하며 거역하는 것은 사하심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에 있습니다(마 12:31-32, 막 3:28-39, 눅 12:10). 거룩한 하나님의 영을 거부하여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에 없고서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가 그들에게 있을 수 있는지요. 그러면 어떻게 그들은 그처럼 그들에게 구원의 복음이 지닌 능력을 가지고 찾아오신 거룩한 하나님의 영을 모독하고 거역할 수 있는지요. 이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그들의 마음을 완악함에 두심으로 그 마음이 강팎하여 완고한 때문입니다.
해서 말입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라서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라도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 잔치의 떡을 먹는 기쁨에 있습니다. 가령, 삭개오가 그러하죠. 그는 세리장으로서 세리 중에서도 높은 지위에 있었고 또한 부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삭개오는 사람들 사이에서 죄인으로 소문이 자자하였습니다. 그러니 사람들 중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실 때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키가 작았던지라 군중들 속에서 예수님을 뵙기가 쉽지 않자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에 올라가 지나가는 예수님이나마 보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에게 다가와서는 그의 집에 머물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의 집이 구원을 얻었으니 그가 잃어버렸던 아브라함의 자손중의 하나임을 알려주시며, 인자는 이와 같은 이들을 찾아서 구원하러 온 것이라며 예수님 자신이 무슨 일을 하기 위해서 오신 것인지를 사람들 앞에 드러냈습니다(눅 19:1-10). 예수님이 삭개오에게서 무엇을 보았기에 그와 같은 말씀을 하셨겠는지요.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고자 함은 단지 명성이 자자한 위대한 인물을 보고자 함이거나 오늘날의 사람들에게서 보듯이 유명한 연예인을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자 하듯이 하는 것에서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 중의 한 사람으로서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그의 마음에서 올라오고 있는 믿음의 싹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자손이요 또한 다윗과 맺은 언약의 주로 오신 분이심에 대한 관심과 그 생각을 예수님은 보셨을 것입니다.
그러한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옴에 있는 회개에 있으면 말이죠. 그들 또한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여 떡을 먹는 기쁨에 있습니다. 가령, 니고데모가 그렇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유대교 최고 의회 기관인 산헤드린의 의원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었습니다(요 3:1-21, 7:50-51, 19:38-42). 또한 사도 바울이 그 한 사람입니다. 그는 본래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으로서 유대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던 사람입니다(행 22:3, 26:5; 빌 3:5). 그러하지만 그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의 사도가 되게 함으로 온 세상에 하나님의 복음인 생명의 주를 전파하실 것의 작정으로 하나님은 그를 그리스도인의 박해자에서 불러내어 주의 사도로 삼으셨습니다(행 22:14-15; 고전 15:9; 고후 1:1). 그러니 말입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라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라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 모두도 이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순종함으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믿음에 있음으로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말이죠. 세리들과 죄인들이라도 그들 죄인 중 한 사람이 하나님께로 나아와 자신이 어떤 자였는지를 말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입고자 하면 하나님은 그를 기뻐하십니다.“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으며, 잃었던 내 아들이 다시 돌아왔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회개에 있게 하시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으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분이 말하는 음성을 듣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을 따르게 하십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인“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 19:21)라고 하신,“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27, 33) 라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지 못함에 있고, 그래서 그분을 따름에 있지 않으며, 예수님을 반대함에 있는 그 악한 죄로 영원히 사하심을 받지 못함에 따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며, 지옥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찬송가 542장(통일 340장)에서 노래하고 있는 대로“심히 기쁜 일일세.”입니다. 왜냐하면,“구주 예수 의지하여 죄악 벗어 버리네.”에 있는 것이며,“구주 예수 의지하여 구원함을 얻었네.”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찬송가 544장(통일 343장)의 노랫말 가사 대로“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우리는 찬송가 305장(통일 405장)의 노랫말 가사에서 보는“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헤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의 기쁨에 있습니다. 우리는“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의 경배에 있을 것입니다.“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물 삼으시고 죄용서 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304장. 통일 404)의 경배에 있을 것입니다.
지옥!, 이 말은 우리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쓰이는 용어가 아닙니다. 천국, 하나님의 나라, 그렇습니다. 이 말이 우리에게 해당되며 우리에게 쓰이는 용어입니다. 우리가 어떤 자이기에 말인지요.“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우리가 서기관으로 살았는지 또는 바리새인으로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습니다. 우리가 멸시 받는 세리로 살았는지 또는 이런 저런 비난 받는 죄인으로 살았는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습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시는 유일한 관심은 서기관의 신분이었든 바리새인의 신분이었든, 또는 세리의 신분이었던 죄인의 신분이었든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따르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판단]하여 우리를 찾은 기쁨에 하나님 나라의 온 백성이 있게 하십니다. 그와 같이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반대하여 따르지 않는 자들을 그들이 따르지 않는 그것으로 심판[판단]하여 그에 따른 처벌에 있게 하십니다. 그들이 서기관이었으며 바리새인이었을지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으며 그분을 따름에 있음으로 세리들과 죄인들로 있었던 것에서 가져왔던, 또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보여 왔던 그 악한 죄로부터 나와 하나님께서 언약의 주를 통해 제시해 주셨던 의에 속한 자로, 그러한 빛의 자녀답게 자신을 드려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으며 그분을 따름에 있음으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로 있었던 것에서 가져왔던 탐심에 가득 차 있었던 자기 의로부터 나와 하나님께서 언제나 제시해 주셨던 의에 속한 자로, 그러한 빛의 자녀답게 자신을 드려갑니다. 의의 실체이시오 빛의 실체이신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 세상의 주님이 되심을 드러내는 증거로 살아갑니다. 이러한 것에서 이전에 육체를 따라 살던 목숨에서 생명을 보려고 하였던 가치관은 다하여 끝났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명이 다하는 것을 죽음에서 보며 수명이 다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관점에서는 육체가 여전히 살아있어도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그에게 주어진 참생명이 새로운 생명으로 주어진 시점에서 보게 됩니다. 이 생명이 주어짐으로 그에게는 옛사람은 날마다 죽고 새사람으로 날마다 사는 신비한 날이 시작됩니다. 그에게 주어진 참생명에 의해 죄값인 사망을 짊어지고 있는 육체의 생명은 삼킨바 되는데, 마침내 죽음도 영원히 삼킨 바 됩니다. 그러기에 더 이상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 자가 아닙니다. 이제는 우리에게 새로이 주어진 새로운 생명이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를 위하여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 하나님의 정하심에 있는 것에서 우리의 생명은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이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함이 없습니다. 의의 자녀요 빛의 자녀로서, 그 의가 영원하고 그 빛이 무궁한데 따라 영원무궁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