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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이냐, 기술이냐
“살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라고 외친 햄릿의 고민은 펜을 들고 백지 앞에 앉은 시인의 고민이기도 하다. 시를 써야겠다는 그 순간부터 시인은 햄릿처럼 고민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집단과 개인 사이에서, 성자와 창녀 사이에서, 수다와 침묵 사이에서, 욕망과 해탈 사이에서, 감성과 지성 사이에서, 내용과 형식 사이에서, 관조와 참여 사이에서, 예술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에서, 시인은 정처 없이 흔들리면서 고민하는 자다. 그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서 갈등하는 사람, 그가 시인이다.
시를 가슴으로 쓸 것인가, 손끝으로 쓸 것인가? 습작기에 이런 주제를 두고 누구나 한번쯤 입씨름을 해봤을 것이다. 사소하지만 쉽게 해답을 찾기 어려운 화두 중의 하나다. 작품의 진정성(가슴)을 중요하게 여길 것인가, 표현기술(손끝)에 심혈을 기울일 것인가?
굳이 나누자면 나는 손끝의 문학을 먼저 배운 축에 속한다. 시에 처음 눈을 뜬 고등학교 시절이 그랬다. 나는 시를 쓰는 소년이 아니라 ‘만드는’ 소년이었다. 어쩌다 새로이 하나의 단어와 문장을 만나면 그것들이 주는 울림 때문에 몇 날 며칠 아팠다. 어떤 단어는 환각제 같았고, 어떤 문장은 하느님 같았다. 그것들은 나를 꽁꽁 묶어 꼼짝달싹 못하게 했고, 목마르게 했고, 그러다가 어느 때는 또 하염없이 나를 해방시켰다. '측백나무'라는 말을 만나면 나는 측백나무의 모양과 빛깔과 향기에 취해 다른 나무들을 볼 수가 없었다. '이마' 라는 말도 그 무렵 나를 사로잡은 말 중의 하나다. 어느 날 이 말이 나를 강타했다. 이마는 “얼굴의 눈썹 위로부터 머리털이 난 아래까지의 부분”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를 훨씬 뛰어넘어 나를 설레게 했다. 이마는 때로 '밝다' 라는 형용사의 변형된 명사형이었고, 햇빛이 비치는 아침의 연못이었고, 내가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찰랑이는 머리카락이었다. 언어가 아니라 마치 무슨 환상의 기호 같았다. 나는 말에 사로잡혀 말을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말의 감옥 속에서 행복했으므로 거기를 벗어나기 싫었다. 나는 말이 지시하는 대로 손끝으로 또닥또닥 시를 만들 뿐이었다.
1980년, 스무 살이 된 나에게 세상은 손끝으로 시를 만드는 일을 회의하게 만들었다. 대학 선배들은 이렇게 말했다.“가슴으로 쓴 시가 진짜 시다.”
시를 합평하는 자리에서도 술집에서도 나는 그 말을 들었다. 선배들은 또 이런 말도 했다.
“시를 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시를 살아야 해.”
아아, 시를 쓰지도 못하는데 시를 살아야 한다니! 손끝으로 시를 만지작 거리던 나는 난처해서 얼굴이 붉어졌다. 삶과 시의 일치를 강조하던 그 시기에 나는 선배들의 조언이 문학적 허영의 표현에 불과하다면서 슬쩍 대들어보기도 했다. 그런 나를 향해 선배들은 일침을 가했다.
“자네 시는 뒷심이 약해!”
이때 들은 '뒷심'이라는 말 때문에 나는 거의 1년 동안 뒷심이 강한 시란 뭘까, 하고 혼자 고민을 거듭했다. 나를 고민 속으로 몰아넣은 그 선배는 심각한 얼굴로 이런 말도 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을 어제 다 읽었는데 말이야, 삶의 고통이 뭔지, 죽음이 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그리하여 나는 서서히 문학의 무거움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늘 손에 들고 있던 박목월과 서정주와 김춘수와 정현종 시집을 내려놓고 선배들이 권하는 역사와 사회과학책들을 집어 들었다. 시집으로는 고은과 신경림과 김지하와 이시영의 이름이 든 것을 탐했다. 그리고 시학 강의실에 일찌감치와 앉아 있던 보들레르와 바슐라르 같은 서양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이 잦아졌다. 꼭 그런 것도 아닌데 왠지 그렇게 해야만 시를 가슴으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작가 황석영이 한 인터뷰 자리에서 자신은 “소설을 엉덩이로 쓴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것은 작가가 소설에 투여하는 집중적인 시간과 인내의 중요성을 말한 것일 터이다. 어찌 소설뿐이랴. 시를 쓰려거든 당신은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쓰고, 엉덩이로도 쓴다고 생각하라. 가슴으로는 붉고 뜨거운 정신을 찾고, 손끝으로는 푸르고 차가운 언어를 매만질 것이며, 엉덩이를 묵직하게 방바닥에 붙이고 시에 몰두하라.
감성을 앞세워 쓸 것인지, 지성을 바탕으로 쓸 것인지도 고민하지 마라. 김춘수는 “일상 속에서 무엇을 얼마만큼 느끼느냐 하는 능력”을 감성이라 하고, “비교하고 대조하는 작용”을 지성이라 한다면 그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면 안 된다고 하였다. 당신은 감성이 녹슬지 않게 신체의 감각기관을 항상 활짝 열어두고, 지성이 바닥나지 않게 책읽기를 밥 먹듯이 하라.
그리하여 시를 쓸 때는 감성과 지성이 비빔밥이 되도록 골고루 비벼라.
시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고민도 끝까지 당신을 따라다닐 것이다. 추사 김정희는 문장을 배우는 사람은 먼저 형식을 배우라고 권한다. 그는 문체의 종류를 ‘신神 · 리理 · 기氣 · 미美 · 격格 · 율律의 여덟 가지로 나누면서 앞쪽의 넷이 문장의 내용을 이루고 나머지 넷이 형식을 이룬다고 설명한다. 문장을 배우는 자는 옛사람의 글에서 처음에는 형식을 만나고 중간에는 내용을 만나고 마지막으로 내용에 따라 형식을 버리기도 한다는 것이다. 형식이라는 틀을 버릴 수 있을 때까지 형식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⁹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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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김정희, 『완당전집 II』, 민족문화추진회, 1988, 367-368쪽.
-안도현의 시작법「가슴으로 쓰고 손끝으로 써라」중에서
2025.2. 23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