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효공주는 제3대 문왕 대흠무의 넷째 딸이다. 1980년 10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현 용수향 용해 용두산에서 발굴되었는데, 정혜공주무덤과 마찬가지로 비석이 나왔으며, 특히 벽화가 나와 발해의 사회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를 안내하는 가이드가 한번도 오지 않은 곳이어서 정효공주묘를 찾는데 많은 애를 먹었다. 발해의 무덤군이 있는 곳으로 잘못가서 산을 헤메고 다니기도 했다. 중국에는 이정표 같은 도로 표지판이 잘 되어 있지를 않아서 특히 이런 시골 산간벽지에 있는 중국인들이 생각하기에 소수민족의 국가였였었고 망한 제국의 유적을 찾아 다니는 것은 아주 어렵고 힘든 일이다.
정효공주묘에서 멀지 않는 거리에 있는 발해국의 무덤군으로서 이미 파괴와 도굴이 되어 버린 상태다.
샘학회 학생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인데 하는 후회감이 엄습을 했다. 작은 동산 같은 산위에 올라보니 한 눈에 조선족 아주머니로 보이는 분이 나물을 캐고 있어서 정효공주묘의 위치를 물었더니, 자기도 이곳에 온지가 얼마 되지를 않아서 잘 모르는데, 용해에 그런 무덤이 있다고 하였다. 용해로 내려 가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용해를 지나서 저수지 부근까지 윗 마을로 와서 정효공주묘를 찾아 헤메었던 것이다. 길을 모르면 물어서 찾아야 하는데, 우리의 가이드나 운전사는 잘 물어 보지를 않는 셈이었다. 이것이 언어장벽에서 오는 어려움이고 그리고 이런 산간벽지까지 찾아 오는 이들이 없기에 더 정보가 빈약한 것이다.
다시 차를 왔던 길을 되돌아서 용해로 내려 갔다. 도중에 한족 및 조선족을 만나서 길을 물었는데, 한족은 대답을 잘 해주질 않고 조선족 아즈바이가 나와서 길을 알려 주더라고 하면서 가이드가 길을 안가르켜주던 한족을 두고 "에이 되넘이라고" 하여 모두 웃었다. 도로변에 폐교와 같은 소학교가 있었는데, 그 학교 윗길로 들을 가로 질러서 그리고 내(川)를 건너서 가니, 차가 겨우 들어가는 농로 길이 있었는데, 역시나 운전사는 더 이상 전진을 하지 않으려고 몸을 사리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차에서 내려서 걸었다.
눈이 녹아서 질퍽 거리는 진흙길은 바로 구두에 진흙이 달라 붙어서 발을 떼어서 걷기조차 불편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돌아 가고 싶었지만, 이 번 여행은 지난 해에 실패하여 다시 벼루고 벼러서 온 여행인지라 끝까지 참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용두산 입구에 오니, 발해 무덤 안내석이 보이고 차가 들어 올수 있는 다른 길이 보였다. 소학교 밑에서 내(川)를 건너서 와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길도 역시 아주 작은 농로길이었다. 운전사는 빈차를 끌고 산 입구에 있는 한족의 집앞까지 왔었다.
우리는 질퍽거리는 길을 따라서 산을 올랐다. 눈이 녹으면서 땅은 질퍽거렸고 구두에 진흙이 달라 붙어서 발을 옮기는데 무게가 더 하여 상당히 불편하였다. 정효공주의 무덤이 원형데로 남아 있으리라는 나의 기대는 정효공주의 무덤 및 안내석에 도착하자마자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고, 속에는 무엇인가 분노가 부글 부글 끓어 올랐다.
발해국의 3대왕 대흠무의 넷째딸인 정효공주의 무덤을 알리는 묘지 안내비
이번 역사탐방 여행에 일행으로 따라나선 이사장도 이젠 드러 내놓고 중국에 대한 비판의 이야기를 하였다. 정효공주묘는 이미 발굴이 되면서 파괴가 되었는지 콘크리트 건물로 묘 전체를 완전히 봉쇄를 해 놓아서 어디가 무덤인지 전혀 알수가 없었고, 그 건물안에 정효공주의 무덤이 있을 것이라고만 여겨졌다.
정효공주묘를 뒤덮고 있는 벽돌건물로서 중국의 유적 관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발해국의 3대왕 대흠무의 넷째딸인 정효공주의 무덤으로서 하룡시로 가는길의 용해에 있는데, 이 무덤을 찾아가기가 정말로 힘들었다. 그런데, 이 중국의 무식한 작자들이 무덤을 아예 파헤쳤는지 주위에 기와 파편들이 널려 있고 사진에서와 같이 벽돌 건물을 지어서 무덤을 덮어버려서 아예 접근이 되지 않도록 막아 놓았다. 과연 이 유적이 주류민족인 한족들의 유적이었다면, 이런식으로 무분별하게 발굴하여 파괴가 되도록 하였을까? 중국은 이런 문화제 관리의 속 좁은 행동을 보면 절대로 강대국이 될 수 없음을 알수가 있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 보니, 발굴 당시에 정효공주의 무덤이 얼마나 심한 파손이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기와 파편들이 무더기로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다. 무무뉘 기와조각들이었다.
정효공주 무덤가에 무더기로 널려 있는 무무늬의 기와조각
정효공주묘 주위에서 발굴 당시의 파괴로 보이는 듯한 기와조각들이 주위에 널려 있었는데, 사진의 기와 조가은 그 기와조각 중의 하나이다. 중국 정부에서는 이 무덤을 발굴하면서 아마도 거의 파괴를 한 듯하다.
앞으로 돌아가니 무덤 건물 앞문에 누군가 정효공주묘를 참배를 하고 갔는지, 철창문에 꽃아 둔 진달래가 보였다. 아마도 우리 민족인 누군가 이곳을 방문을 하였으리라. 그리고 들어 가 볼수 없는 안타까움에 주위에 핀 진달래를 철창에나마 꽂아두고 공주의 혼을 위로 하였으리라.
정효공주 무덤을 덮고 있는 벽돌건물 철창문에 누군가 공주의 영혼을 위로 하려는 듯 진달래를 꽂아 두었다.
이 사장이 진달래가 꽃혀 있는 철창문을 사진으로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자고 하여 그 장면을 디카에 담았다. 정효공주의 무덤에서는 발해사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될 벽화 및 비석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무덤을 건물로 막아 버리고 철문으로 봉쇄를 하였었다. 주위에는 발굴당시의 참상을 말해 주듯이 흩어져 있는 기와조각들이 중국정부의 아주 교묘함을 느끼게 하였다.
발해국의 3대왕 대흠무의 넷째딸인 정효공주의 무덤으로, 붉은 벽돌 건물로 뒤덮은 이 모습이 정말로 말이 안되는 유적의 관리인 것이다.
대국으로서 선진국을 꿈꾸는 중국 그리고 소수민족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는 중국, 모두를 어우르는 그런 중화의 정책을 펴는 중국이, 이렇게 그들이 말하는 소수민족의 문화 유적을 관리 하는 것만 보아도 이들은 결코 선진국이 될수가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고구려도 발해국도 자기네들의 역사로 뜯어 고치면서 정작 이 귀중한 문화유적들은 왜 이렇게 파괴가 되고 방치가 되는지 알길이 없는 그들의 속좁은 마음을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이런 문화정책을 보고 있노라면, 그들은 선진국이 될수 있는 자질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문화재들이 명이나, 당과 같은 고대 한족 국가의 것이었다면, 과연 이런식으로 파괴와 같은 발굴이 되고 그리고 이런식으로 관리를 하였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일행인 이 사장은 이런 현상을 보고 중국은 결코 선진국이 될수가 없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하는수 없이 건물과 안내석만 바라다보다가 산을 내려 와야만했다. 돌아서서 산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너무도 허탈 했다. 한국의 남쪽에서 한반도의 최북단 지역과 마주하는 이곳으로 발해의 정효공주 및 정혜공주의 묘 및 유적들을 답사하기 위해서 그
먼길을 날아와서 기껏 보고 간다는 것이 철창으로 가려진 붉은 벽돌의 건물 및 안내석 뿐이니, 가슴에서 끓어 오르는 분노와 함께 허전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중국이 세계의 선진국이 되지 못하는 이유를 쉽게 알수가 있었다. 앞으로 더욱더 분노가 치미는 것 들을 많이 만나고 보게 될 것이다. 차로 돌아와서 화룡으로 가면서 나는 같이 간 이 사장에게 흥분을 하지 말 것을 이야기 하고 앞으로 더욱더 이런 현상을 더 많이 보게 될 것을 얘기 해 주었다. 특히 집안에 있는 고구려의 유적들을 보면, 더욱더 분노가 치밀어 오를 것임을 이야기 해 주었다. 그리고 이 곳은 외국이니, 안타까운 마음은 많으나 어쩔수가 없다는 것을 이야기 해 주었다.
우리는 씁쓸한 뒷맛을 이 용두산 정효공주묘역에 남겨두고 길을 재촉을 하였다. 화룡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다시 길을 재촉을 하여 독립군이 왜놈군대를 상대로 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청산리대첩격전지를 둘러 보고 그리고 해가 지기 전에 숭선으로 가야 함으로 차를 재촉을 하였다.
정효공주여 고이 잠도소서!!! 언제 다시 한번 와 보게 될지 모를 아쉬움의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