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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군산군도의 한 섬 명도(明島)!!
배용재 선생이 나를 만나자고 한 사연은 이러했다.
연대 종교음악과를 졸업한 그는 재학때, 이름깨나 날렸던 럭비선수였다고 한다. 연고전(고연전)에 나가서 많은 팬을 확보하기도 했던 그가 ROTC출신 장교로 월남전에 참전, 총상을 입고 제대했다. 그래서 정부로 부터 원호금을 받게 되었는데 자신은 그 돈을 가사(家事)에 쓰지를 않고 뜻 있는 곳을 찾아 성금으로 쓴다는 것이었다. 내가 쓴 잡지속의 글을 읽고는 그 섬마을에 악기를 보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만나자고 한 사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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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디온 멜로디카 하모니카 각 8개씩이 섬마을로 보내졌고 섬마을 분교장 고석구 선생은 8명의 학생들이 이 악기들을 잘 연주할 수 있게 지도했다. 이 이야기가 전라북도 일대로 퍼져 나갔고 군산에 있었던 서해방송에서는 이들 8명의 '연주단'을 출연시켰다.
당시 서해방송은 서울의 TBC방송(중앙일보 소유 라디오와 TV)과 제휴관계에 있었고 TBC라디오 '가로수를 누비며'에서는 고석구 선생과 나를 출연시켰다. '가로수를 누비며'는 아침 출근시간대에 나갔던 대단한 인기프로로 지금은 '국민MC'가 되어 일요일 낮 시간 KBS 1TV의 전국노래자랑 사회를 맞고 있는 일요일의 사나이 '송해'가 진행했었다.
(9)
악기가 보내지고 8명의 미니연주단이 탄생하게 된 섬마을 이야기가 전파를 타자마자 3 곳에서 섬마을 사람 모두를 서울로 초청하겠다는 제의가 내 앞으로 왔다. 섬마을 사람들을 초청하겠다는 3 곳 중에서 나는 '관광버스운송노동조합'을 선정, 섬마을 사람들이 '꿈에 그리던 서울구경'을 하도록 주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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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버스운송노동조합에서는 군산으로 관광버스 한대를 보내어 명도 섬사람들을 서울로 '모셔 왔다' 그 때 그 시절 시골사람들이 서울로 오면 둘러보는 단골코스가 고궁(창경원)과 남산이었는데 이들 섬사람들 중 8명의 꼬마연주단은 TBC TV에 출연하는 등 다양한 일정을 소화했다. 가는 곳 마다 많은 성금과 선물들을 받게 되었고 그 성금은 '섬마을이 잘 살게 될 살림밑천'이 되었다. 3박4일의 초청일정이 끝나면 서울~군산 열차편으로 귀환길에 오르도록 일정이 잡혀 있었는데 서울에서 받은 선물들이 너무 많고 부피가 커서 부득히 초청자 측에서는 관광버스를 한번 더 군산으로 보내게 되는 '계획수정'까지 해야만 했다.
(후기)
이러한 일련의 일들로 서해바다의 작은 섬 명도(明島)가 세상에 크게 알려졌고 이후 MBC TV에서는 '아름다운 작은 섬 명도'라는 프로를 내어 보냈다. 청와대(박정희 정권)에서는 명도의 '숙원사업'이 무엇인지를 조사해서 지원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로서는 엄청난 예산으로 큰 방파제 공사를 해 주었다. 해군홍보단에서는 미 8군 장교부인회에서 모아진 성금 500만원을 '두 개의 작은 섬'으로 보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며 객관적인 안목으로 그 두개의 섬 선정을 나에게 의뢰했었다. 나는 서슴치 않고 전북 고군산군도 '명도'와 경기 덕적군도 '굴업도'로 결정, 통보해 주었다. 두 섬에서는 당시로서는 큰 돈이었던 250만원으로 경운기를 구입했었는데 알고 보니 경운기의 용도가 '경운'만이 아니라 수송과 발전 등으로 다양했다. 이렇게 섬마을이 잘 살도록 한 중심에는 국민학교 분교의 고석구 선생의 헌신적인 노력이 지대했는데 고석구선생은 자신의 봉급을 담보로 '축협'에서 융자를 받아 명도에서 사슴을 키우게 한 장본이기도 했다.
벌써 한 세대 30년 전의 일로 흘러 갔지만 이 글을 여기에 남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차고 행복해진다.
2009 02 09 정월 대보름 새벽에 수원 우만 아파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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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국내 여행지 30곳 / 나의 고군산군도의 한 섬 명도(明島) 이야기 (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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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2.02 23:53 / http://cafe.daum.net/hankangforum
(1)
고군산군도의 한 섬 명도(明島)!! 나에게는 참으로 소중한 섬이었다.
1978년 가을, 나는 해군홍보단의 일원이 되어 군함 LST를 타고 1개월간 고군산군도와 덕적군도의 작은 섬 25개를 돌게 되었다.
정말 하늘이 내려 준 기회로 알고 즐거운 마음으로 인천에서 승함 절차를 밟고 LST '북한함'을 탔다.
해군홍보단은 1년에 낙도 100개를 선정, 순회하면서 의료와 위문공연 그리고 반공교육 등의 사업을 펼쳤는데 나는 당시 정부의 '인구정책 홍보요원'이 내 직함이라 '낙도의 가족계획' 계몽을 위해 참여하게 된 것이다.
직장에서는 당초 나를 차출한 것이 아니라 다른 젊은 요원을 차출했었다. 그런데 그 요원이 울쌍이었다. "내가 가면 어떻겠소" 했더니 얼굴색이 환해 지면서 "술을 사겠다"며 교체해 주기를 간절하게 원했다. 사실은 내가 술을 사면서 교체해 주기를 바랄 처지였는데..
(2)
출발전날, 해군본부(당시는 서울 대방동에 소재)로 신고차 들렸는데 그곳에서 K해군대령을 만났다.
그 K대령을 통해서 함장(해군중령)과 홍보단장(해군중령)이 '박재곤'이라는 사람이 그 K대령과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동기 동창으로 절친한 사이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광으로 1개월간의 함상생활에는 전혀 불편함이 없는 아주 대단한 특별대우를 받게 되었다.
두분 해군중령은 K대령이 앞으로 대한민국 전 해군의 수장인 해군참모총장(해군대장)이 될 것으로 예견했고 실제로 K대령은 뒷날, 참모총장이 되었다.
(3)
나에게 부여된 하루의 일정은 매우 단조로웠다. 함상 장교식당에서 조반을 마치면 작은 섬으로 출동을 한다.
수천톤급의 군용 수송선에서 아주 작은 배(군용)로 인구 수 십명 수준의 작은 섬으로 올라간다.
대개의 경우, 학교(분교)가 활동무대가 되는데 한쪽에서 해군군의관의 의료봉사가 실시되고 다른 한쪽 큰 마당(운동장) 이나 큰 교실에서는 해군홍보단의 위문공연이 펼쳐진다.
모두가 군복차림인데 나하고 또 한사람 반공강연요원은 민간 인이고 복장도 군복이 아니었다.
민간인 두 사람은 아주 편안한 분위기에서 섬사람들을 만난다. 특히 나는 섬사람들이 살아가는 가정사를 듣고 비록 짧은 시간 이지만 그들의 '인생상담역'을 했었다.
(4)
그해 가을, 30개 가까운 섬을 둘러 본 이야기는 300페이지 짜리 책 한권을 쓸만도 했다.
여기서는 그 섬들 중에서 고군산군도의 한 섬 명도(明島)에 얽힌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명도는 11가구 57명 인구의 작은 섬으로 섬에는 배 한척도 없이 가난했다. 이웃 섬으로 나가서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는 품팔 이를 하는 것이 생계의 수단이었다.
이런 환경인데도 학생수 8명인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분교 가 있었고 분교에는 두 분의 교사가 봉직하고 있었다.
참으로 대한민국의 '문교정책'은 대단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한 단면이었다.
(5)
명도에 도착했던 시각, 작은 선착장(방파제 겸용)에는 섬사람 모두가 도열해서 우리를 반겨 주었다.
그런데 다른 섬들에서 볼 수 없었던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분교생 8명 중 한명이 북을 치고 7명이 피리로 '고향의 봄'을 연주(?)하며 해군홍보단을 환영했었다.
서울로 돌아 와서 명도에서 받았던 8명의 연주단(?) 이야기가 200자 원고지 6매 분량으로 '멀리 퍼져 나가는 작은 섬마을의 메아리'라는 글로 '가정의 벗'이라는 월간지에 실렸다.
(6)
이 글이 나가고 얼마지 않은 어느 날, 전화 한통을 받았다. "선생님의 글을 읽은 독자인데 저녁에 시간을 좀 내어 달라"는 것이었다. 미리 내 신상을 소상하게 조사를 했었던가 보다.
만나자 말자 맥주집으로 안내를 했었다. 그러고는 자신을 소개 했다.
수원의 어느 여고 교사 '배용재 선생' - 그는 몇년전 그 여고의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임을 하셨다고 들었다.
무슨 과목을 맡고 계실까? 궁금했다. "혹 체육담당 선생님?" - 하고 결례(?) 되는 질문부터 했는데 "남들이 모두 그렇게 알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은 내가 음악선생"이라고 하는데는 약간 놀랐다.
그러고는 만나자고 한 사연들을 털어 놓는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