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7:1-8 “아브람이 구십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1. 들어가는 말
“세상은 숨을 멎은 듯 고요했다. 그는 이렇게 평화로운 곳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고요한 정적을 깨뜨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그의 귀를 울렸다. 그것은 개 짖는 소리였다. 그때 갑자기 어린 사슴 한 마리가 나무숲을 헤치면서 온 힘을 다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광활한 들판을 숨쉴 틈없이 달리는 어린 사슴의 모습은 너무나도 애처로워 보였다. 사슴이 금방 뛰쳐나온 그 나무숲을 사냥개가 통과하여 질주하고 있었다. 다급해진 사슴은 사방을 둘러보다 마침내 그를 발견하게 되었다. 잠깐의 망설임 끝에 사슴은, 여전히 울타리에 멈춰 서 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사슴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동정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어린 사슴은 그에게 다가가 그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어 버렸다. 마침내 생명의 보호자를 만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에 숨겨진 비밀』케이 아더 지음 )
사랑하는 주안의 성도 여러분, 만일 오늘 우리가 이러한 생의 위기를 만난다면 우리는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근심, 곤경, 두려움이라는 사냥개가 쫒아오거나 유혹, 타락, 죄악의 맹수들이 들이닥칠 때, 연약함 속에서 더 이상 달려갈 기력이 없을 때, 우리는 어디로 피하겠습니까 ? 여기 잠언 기자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잠 18:10) 그렇습니다. 우리의 생의 가장 큰 위기의 순간이 닥쳐올 때 우리가 달려가서 의지할 분은 오직 한 분,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 ! “엘 샤다이”입니다.
2. 본문의 배경
오늘 본문은 아브람이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시 나타나 후손을 약속하시는 장면입니다. 사실 아브람은 75세 때에 하나님을 만나 이런 놀라운 약속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약속하십니다. 창세기 15장에서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데리고 나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세라고 하시며, 그의 자손들이 그와 같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창 15:5 ) 그러나 24년이 흘러 아브람의 나이 99세, 사라의 나이 89세가 되었을 때, 그들에게는 더 이상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식을 얻을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아브람이 이렇게 자식에 대한 모든 희망을 포기하려는 바로 그 순간, 전능하신 하나님, “엘 샤다이”의 하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순간은 성경에서 “엘 샤다이” 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엘 샤다이)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3. 엘 샤다이는 전능하셔서 모든 것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엘 샤다이”는 “엘”과 “샤다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엘”은 신을 뜻하는 단어로서 그 속에는 “힘” 또는 “능력”의 의미입니다. 그 복수형이 “엘로힘”이라는 단어입니다. “샤다이(shaddai)”는 본래 “가슴이 있는(breasted)”을 뜻하는 단어인데, 히브리어 “샤드(shad)”에서 파생되어 나온 말입니다. “샤드”는 “가슴(breast)”,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엄마의 젖가슴”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두 단어가 합쳐진 “엘 샤다이”는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마치 어머니가 젖을 물려서 아이들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풍성하게 갖추고 계신 분으로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고 부어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엔드류 쥬크스는 그의 책 『하나님의 이름』에서 “엘 샤다이”는 “모든 것에 넉넉하신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표현한 바 있습니다. “샤다이라는 이름에 표현된 생각은 능력을 묘사한다. 그러나 그것은 강포를 위한 능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관대하고 풍부한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어머니의 가슴”과 “전능하다”라는 단어가 조화를 이루수 있을까 싶지만, 젖먹이 아이가 끊임없이 울 때 그 울음을 그치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어머니의 젖 밖에 없습니다. 어머니의 젖만이 아기에게 생명력을 계속해서 공급할 수 있으며, 아기를 성장시킵니다. 그러므로 젖먹는 어린아기에게 어머니는 무한한 능력을 소유한 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엘 샤다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안의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나님은 바로 “엘 샤다이” 하나님이십니다. 전능하셔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풍성하게 공급해주시며, 어머니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람의 나이 99세, 모든 꿈을 접어야 했던 절망의 끝에 찾아오신 “엘 샤다이”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문제들을 결코 외면치 않으시고 그 따뜻한 능력의 품안에 안아주실 것입니다.
4. “엘 샤다이”는 온전함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엘 샤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살펴보면, 아브람의 나이 75세 때에 하나님의 약속과 부르심을 받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갔습니다.(창 12:1-4) 그러나 10년이 지나도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자, 그들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스마엘을 얻었습니다.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세였더라”(창 16:16) 오늘 본문 뒤 계속되는 장면을 보면 창세기 17:17에서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오”라고 말하며,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 17:18)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아브라함의 아브람의 태도와 고백은 하나님 앞에서 불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에게는 분명 그가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와 그의 후손을 통해 온 민족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이었습니다.(창 12:1-3) 그리고 그 후손들 가운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계보를 잇는 바로 그 분, 약속의 메시아가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중간에 그 목표를 잃어버리고 자기만족과 자기도취에 빠져 결국 13년 동안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도덕적 윤리적으로 완전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스마엘을 붙들고 있는 그 손을 놓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다시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려는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살아갈 때 풍성케 하시는 “엘 샤다이” 하나님의 역사가 그에게 부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안의 성도 여러분,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가정(기업)이 주안에서 번성하고, 우리의 자녀들이 아브라함과 같이 복의 근원으로 살 것을 원하십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풍성하게 베풀어주시는 “엘 샤다이” 하나님께서 그 풍성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먼저 받은 우리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먼저 부르신 이유요, 주안교회로 인도하신 이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습니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에 “엘 샤다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뜻대로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주신 사명을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여 온전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5. 어떻게 완전한 삶을 살 수 있는가?
이제 우리가 마지막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완전한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씀은 즉,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 때에 완전한 삶을 살 수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를 강조했던 존 칼빈은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를 생의 모토로 삼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매일 매 순간을 하나님 앞에서 산다면, 즉 하나님을 의식하고 산다면 우리의 삶은 분명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많이 의식합니다. 회사에서는 직장상사, 학교에서는 선생님, 심지어 교회에서도 목사님과 장로님, 그리고 권사님들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언젠가 80년대 말에 북에 다녀온 목사님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북에 가기 전, 안기부에서 교육을 받을 때, 북한에 가면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니깐 조심해야 한다고 하며, 모든 호텔방에 도청장치가 있다고 했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목사님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호텔방에서 잠을 잤는데, 한 목사님은 아예 양복까지 입고 잤다고 하더랍니다. 그 목사님이 말하길 “야, 공산당이 보고 있는데 어떻게 빤스 바람으로 자느냐?”라고 하더랍니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라는 것은 정말 우리의 삶을 다르게 만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나의 행동 하나하나를 다 보고 다 듣고 계신다고 생각하면 우리의 말과 행동은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6. 나가는 말
사랑하는 주안의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눈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귀를 만드신 분이십니다.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시 94:9) 전능하신 하나님은 다 보고 다 듣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 순간도 혼자가 아닙니다. “엘 샤다이”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불꽃같은 눈동자로, 때로는 자상한 어머니의 근심어린 눈길로 우리를 돌아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 앞에서 완전한 삶으로 한 걸음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주안의 성도들아, 너희들은 언제나 내 앞에서 살아가도록 하여라. 내가 항상 너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도록 하여라.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생각하며 살아라. 나의 뜻이 무엇인지 항상 추구하면서 살아라. 그리고 그 뜻에 순종하는 바른길을 가도록 하여라.”
사랑하는 여러분,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의 평생의 삶이 전능하신 하나님, “엘 샤다이”의 임재를 의식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문제가 있을 때 마다, 삶의 위기가 있을 때 마다,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시편 121:4 ) “엘 샤다이” 하나님의 품에 나아가 그 품안에 안겨 그가 주시는 참 평안과 풍성함을 누릴 수 있기를 축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