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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법문
서언(序)
정토(淨土)법문은 광대 미묘하면서도 손쉽고 간편한 수행법이다. 그러므로 깊은 지위의 보살이라도 그 높고 깊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극악한 죄인이라도 또한 해탈을 얻을 수 있으며, 많은 글을 읽은 문인이라도 이 여섯 자 "나무아미타불 밖을 벗어나지 아니하고,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늙은이도 또한 구품(九品)에 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잃고서 중생을 제도할 방법이 없고 수행인도 이것을 버리고는 번뇌 무명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이는 마치 아가타약[불사약不死藥]과 같아서 이를 얻으면 온갖 병을 고칠 수 있고, 전륜왕의 보배와 같아서 이를 타면 먼 곳까지 이를 수 있다.
다만 너무 간단하고 쉬운 까닭에 사람들에게 경시(輕視)를 당한다. 더욱이 지식인이나 과학자는 본인이 부처님의 다섯 가지 눈[오안五眼]이나 네 가지 지혜[사지四智]가 없으면서 현실에서 이를 말해 주거나 증명해 줄 것을 요구한다. 예컨대, 구더기가 거름더미 속에 살면서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수 없이 많은 나라가 있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굳이 믿지 않으려 하는 것과 같다. 참으로 연민스러운 일이다.
자기 자신이 이왕 신통과 지혜가 없으면서 신통과 지혜를 갖추신 부처님의 말씀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아만을 떨면서 도리어 자기 소견으로 지혜를 삼고 있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염불을 믿지 않는 자는 또한 극락세계가 있는 줄도 모르고 믿지도 않는다. 이 허공 가운데 이미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계가 있다면 또한 다른 세계가 있으리라는 것을 왜 인정하지 않는가? 이미 사바세계와 같은 더러운 국토가 있다면 이보다 더 정결한 세계가 있으리라는 것을 왜 인정하지 않는가?
이미 고통스러운 곳이 있다면 안락한 곳도 있으리라는 것을 왜 인정하지 않는가? 추하고 더러우며 오래 살지 못하는 몸이 있다면 존귀하고 장엄하며 장수하는 몸도 있을 줄을 왜 인정하지 않는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능히 다른 세계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왜 인정치 않는가?
우리들의 지혜나 재능이 지렁이나 달팽이에 비해 한없이 높고 많은 것을 인정하며, 제갈량의 지혜나 재능이 아두[阿: 삼국시대의 촉 나라 주인 류선의 아명]에 비해 월등히 높고 많음을 인정한다면, 부처님이나 보살이나 나한(羅漢)의 지혜와 재능이 우리들에 비해 더없이 높고 많으리라는 것을 왜 인정하지 않는가?
이 세상에서 화생(化生)하는 생물이 있는 것을 보았다면 저 세상에도 화생하는 사람이 있으리라는 것을 왜 인정치 않는가? 이 세상에 눈꽃이 하늘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다면, 저 국토에는 만다라화(하늘에서 내려오리華)가 라는 것을 왜 인정하지 않는가?
이 국토에 목질木質)의 나무가 있는 것을 보았다면, 저국토에는 금질(質)이나 은질(質)의 나무가 있으리라는 것을 왜 인정치 않는가? 이 국토에서 바람이 수목 사이에 불어서 솔바람 소리나 대바람 소리가 나는 것을 보았다면, 저 국토에는 바람이 수림(樹林) 사이에서 불어와 음악 소리를 내리라는 것을 왜 인정치 않는가?
이 국토에서 어느 곳을 가든 더러운 냄새를 맡을 수 있다면, 저 국토에는 어느 곳을 가든 향기로운 냄새를 맡을수 있으리라는 것을 왜 인정치 않는가? 이 국토의 물이 탁하고 껄끄러운 것을 보았다면, 저 국토의 물은 맑고 감미로우리라는 것을 왜 인정치 않는가?
이상과 같이 생각해 본 것은, 이 세상에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이 저 세상에는 낱낱이 없을 수도 있을 것임을 말한 것이다. 예컨대 지독히 가난한 사람이 누추한 집에서 찌그러진 사립문이나 헌 누더기만 보고 살면서, 부유한 사람에게는 높은 누각과 큰 집과 금옥으로 장식한 갖가지 장신구와 비단으로 수놓은 갖가지 아름다운 옷들이 있다는 것을 굳이 믿지 않으려는 것과 같다할 것이니, 어찌
억지나 편견을 면할 수 있겠는가? 또 어떤 사람은 매사에 반드시 두 눈으로 직접 본 것만 믿고, 두 눈으로 보지 않은 것은 믿지 않거나 부정한다. 이런 자에게는 이러한 질문을 하고 싶다.
“그대는 그대의 58 대조 할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믿는가?" "그렇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그대가 직접 본 적이 없을 것인데, 무슨 근거로 있었으리라는 것을 인정 하는가?"
"이치로 따져 보아서 그런 줄 압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어찌하여 극락세계가 있다는 것을 이치로 따져 생각해 보지 않는가? 따져본 후에도 만약 있음을 믿지 않는다면, 이것은 지식이 천박한 것이다. 마치 우물속의 개구리가 바다를 믿지 않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니, 믿지 않는 것이 그대의 불신 때문이라면 바다는 언제나 바다로써 존재할 뿐이다."
또한 이런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그대는 남아메리카에 아르헨티나라는 나라가 있음을 믿는가?"
“믿고 있습니다.”
“그 나라는 그대가 직접 가 본 적이 없을 것인데, 어떻게 그런 나라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가?"
“나는 비록 가보지 못했으나 다른 사람이 가보고 돌아와서 이런 나라가 있다는 것을 말했으며, 혹은 책에서 그나라에 대해 소개한 것을 본 적이 있으므로 그런 줄 알고있습니다."
.“그렇다면 석가나 문수·보현 · 대세지 · 미륵. 관음. 아난·위제희와 부처님의 큰 제자들이 모두 일찍이 가서 눈으로 직접 극락(極樂)국토를 보고 그대에게 설한 적도 있고, 또는 경서(經書)를 통하여 그대에게 설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도 믿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남아메리카는 배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고 가서 실제로 있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극락국토는 증명할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대가 배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고 직접 그 곳에 가서 확인하는 것은 장래의 일인데, 그대는 지금 가보기도 전에 도리어 있다고 믿지 않는가? 극락국토에 왕생하는 것도 장래의 일이다. 그런데도 아직 가보기도 전에 우선 이를 믿지 않으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르헨티나를 가보고 싶으면 단지 며칠 정도가 소요되는 노정(路程)일 뿐입니다. 그러나 극락국토는 가보고는 싶으나, 실제 가 볼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그대는 만약 오늘 새벽에 목숨이 다하면 그 즉시 극락국에 있을 것이다. 아르헨티나에 가는 것보다 훨씬 가깝지 않은가?"
이렇게 일일이 이치를 들어 증명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미혹은, 중생이 이미 신통이 없고 또한 신통이 있는 사람의 말을 믿지 않는 탓이다.
예컨대 자기는 아르헨티나에 가 본적이 없으면서 일찍이
직접 가서 보고 온 사람의 말을 믿지 않는 격이다. 옹고집 같이 제 소견속에 들어앉아 굳이 이러한 국토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려 하니, 이야말로 소위, '자신은 사리에 분명치 않으면서 오히려 다른 사람을 욕한다.'하는 격이 아니겠는가?
세상의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하나의 궁극적인 목표가 있다. 천국이니 천당이니 하는 것이 이것이요, 이를 믿는 자들도 많다. 저들이 천국이니 천당이니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보여 주는 것과 같이, 불교도 역시 여러 부처님의 국토를 들어서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보여주고있다.
요즘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지혜가 옛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하면서 아만과 보잘 것 없는 총명으로 도리어 옛 사람을 비방하며 염불도 하지 않고 극락국도 인정치 않으려 한다.
그들의 생각에는, '나같이 깊은 학식을 갖춘 자가 만약 불법을 닦는다면 적어도 선(禪)이나 유식(唯識)을 공부하는 정도는 되어야 겨우 분에 맞다. 이런 정토 따위의 보잘것 없는 법은 그저 늙은이들이나 아낙네들 한테나 설해야 맞다.'한다. 이들의 이런 견해는 실로 가당치도 않은 말이다.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은 등각(等覺)보살이었으니, 《무량수경(無量壽經)》에서 “그는 가장 거룩하고 훌륭하여 그의
위신력의 광명은 널리 삼천세계를 비춘다." 하고, 《관음경》에서는 "그가 걸어갈 때는 시방세계(十方世界)가 모두 진동하며 앉아 있을 때는 칠보의 국토가 한꺼번에 요동하여 아래로 금강불찰(金剛佛刹)로 부터 위로는 광명왕불찰(光明王佛刹)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 한량없는 분신의 무량수불과 관음과 세지가 모두 운집하였다.” 하였으니, 그의 위신력과 복덕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분이 능엄(楞嚴)회상에서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염불로 말미암아 극락국에 태어났다." 하였던 것이다.
또한 보현보살(普賢菩薩)도 등각보살이었으니, 백옥과 같은 몸에 여섯 이빨을 가진 코끼리를 타고 있었다. 《화엄경>에 그가 선재동자를 위하여 십대원(十大願王)을 설하여 널리 선재와 화장해(華藏海) 대중으로 하여금 서방 극락세계에 회향 왕생하여 거룩한 부처님의 과덕(果德)을 기약하게 하였던 것이다.
용수보살(龍樹菩薩)은 능히 용궁(龍宮)에 들어가서 《화엄경》을 가져왔으며, 철탑을 열고 비밀장(祕密藏)을 전하였던 분이다. 그리고《대지도론》·《회정론》·《육십여리론》.《중론》·《십이문론》·《칠십공론》·《십주비바사론》·《대승이십론》·《자량론》등을 지었으니, 그의 학문에 대한 조예는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입능가경(入楞伽經)》에서 세존이 미리 수기하시기를, “대혜여, 너는 잘 알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미래 세상에 반드시 나의 법을 부지할 자는 남천축국의
대명덕 비구이니, 그의 이름은 용수이다. 유·무(有ㆍ無)의 종지를 깨뜨리고 세상에 나의 위없는 대승법을 밝히고 환희지(歡喜地)를 얻어 안락국에 왕생할 것이다.”하였다.
또한 세친보살(世親菩薩)은 5백 부의 소승론과 5백 부의 대승론을 지었으므로, 그를 천부논사(千部論師)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로써 그의 학식의 깊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지은 《왕생정토론(往生淨土論)》첫머리에서, “세존이시여, 저는 일심으로 온 시방의 한없는 여래에게 귀명하옵고 안락국에 태어나기를 원하옵나이다."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대보살들도 오히려 모두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발원했거늘, 우리들은 생각해보면 저들의 몸에 난 털한 올 만치에도 미치지 못하면서 오히려 교만을 떨며 정토법을 우습게 여길 뿐만 아니라,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원하지도 않으니 어찌 해괴한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일찍이 어떤 불교를 배우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그는 그저 아침부터 저녁까지 경론을 연구하며 온 생애를 다 바쳐 하나의 해박한 지식만을 구할 따름이었다. 또 어떤 사람은 그저 이론을 좋아하여 입을 열면 마명(馬鳴)이나 용수·무착(無着)·세친을 말하며 공(空)을 말하고 유(有)를 설하며 상(相)과 성(性)을 연구할 뿐이었다.
어쩌다 이런 사람이 절에 가서 어떤 사람이 머리를 땅에 조아리고 절을 하거나 불상 앞에 한 오리 향을 사루며
'나무아미타불' 하고 염(念)하는 소리만 들어도 차마 듣지 못할 말을 들은 듯이 하며, 다른 불사(佛事)는 아예 입에 담지도 않으려 했다. 저들은 실로 마음은 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의지 해야만 비로소 생기는 것이며, 더럽거나 깨끗한 여러 가지 경계가 모두 하나로 돌아가는 것임을 알지 못하였다. 당초에 이왕 더러운 경계를 따라 더러운 마음이 생겨 삼계를 유전(流轉)한다면, 이후에는 깨끗한 경계를 따라 깨끗한 마음이 생겨 삼계(三界)를 초월하는 것임도 인정해야 된다.
그러므로 거룩한 삼보에 의지하여 정성과 존경의 생각을낼 때 그 훈습(薰)의 힘으로 인하여 능히 제8 아뢰야식의 더러운 종자가 정체하여 행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또 한편으로는 능히 재빨리 깨끗한 종자가 익어서 무명(無明)의 껍질을 깨뜨리고 부처님의 정토에 태어나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손을 들거나 머리를 숙이며 향을 사루거나 염불을 하는 등 육근[六根: 눈 귀 코 혀 몸 의식 등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의 총칭으로 짓는 모든 청정한 모습들이 얼른 보기에는 모두 밖에 있는 것 같으나, 사실은 모두 안에 있는 것이다.
지금 만약 이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고 오로지 이(理: 절대평등의 본체]만을 탐하고 사事: 만유차별의 현상계]를 버린다면, 마치 배가 고파 금방 쓰러질 듯한 사람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그저 각종 음식의 조리 법만을 연구하고
앉았거나 식당의 메뉴판만 들고 줄줄 내리 읽으면서 앞에 차려놓은 음식은 먹으려 들지 않는 것과 같을 것이니, 이런 일들을 경전에서는 “음식을 말로만 해서는 배가 부르지 않다."라고 하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저들이 비록 경·율·론 삼장(三藏)의 전문을 능히 기억하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저들을 한 글자도 이해하지 못하는 장경각 속의 좀벌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런 자를 볼 때마다 안타까운 탄식만 보낼뿐이다.
반면에 불상 앞에 나아가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거나 오체투지 하며 참회하는 자나, 시끄러운 시장바닥에서도 아무상관 하지 않고 온 정성을 기울여 염불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나는 진정 찬탄하고 공경해 마지 않으며, “아! 이 분들이야말로 나의 스승이다." 하고 생각하며 이를 본받으려 애쓴다. 아울러 이들은 정념(正念)은 점점 익어가고 혹업(惑業)은 점점 녹아져서 얼마 후에는 반드시 번뇌가 다하여 무위(無爲)의 큰 깨달음에 들 것임을 나는 분명히 확신하고 있다. 저들이 목전(前)에는 비록 우리와 같이 한 곳에서 살고 있으나 순식간에 극락국의 아라한이 되어, 저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과 비교하면 마치 임금과 구걸하는 거지와 같을 것이니, 더욱이 어찌 우리들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들도 부지런히 염불하여 장래에 저들과 함께 극락세계에 태어나는 것이니, 어찌 상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간절히 바라건대, 음식을 말로만 해서는 배가 부르지 않으니, 한갓 장경각 속의 나무 좀 같은 것에
뜻을 두는 무리들을 본받지 말라. 결론적으로 말하면, 신[信: 믿음] · 해[解: 이해] · 행[行:실천]·증[證: 깨달음]이 수행의 네 가지 단계인데, 해(解)를구하는 것은 행(行)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행을 원치 않는다면 굳이 해를 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니, 마치 여행을 원치 않는다면 굳이 날마다 지도를 보면서 노정을 찾을 필요가 없는 것과 같다. 더욱이 머리털이 희끗희끗해진 지금 아직까지 해만 구하고 있으니, 행과 증은 내생에나 실천해 보려는 심사인가?
“그대들에게 권하노니, 하루빨리 수행의 길을 찾으라. 한번 사람 몸 잃으면 만겁(萬劫)이 지나도 어려운 일이다. ”한 것이나, “늙어서 비로소 도를 배우겠다고 기대하지 말라. 보라! 외로운 무덤에 저 많은 소년들을!" 이라고 한 글을 읽어보라. 어찌 정신 차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선종(禪宗)은 깨달음의 문제이니, 말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만약 깨닫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부질없는 짓이되고 말 것이며, 정토종(淨土宗)은 다만 행의 문제이니, 또한 말로써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행하지 않으면 역시 모든 것이 부질없는 짓이 될 뿐이다.
참으로 진실하게 '나무아미타불'이 한 구절을 밥 먹듯이, 옷 입듯이 매일 부를 수만 있으면 계(戒)ㆍ정(定)·혜(慧)가 구족하고 경(經)·율(律)·론(論)이 완벽하게 갖추어질
것임을 보장할 수 있다. 또한 교를 배우든 배우지 않던 이런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고, 목숨이 다한 후에 극락에 태어날 것임을 보증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막중한 책임을 내가 감히 질 수 있는 자격이 된다는 뜻은 아니다. 아미타불은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려는 48대원(大願)을 세우셨으므로 ‘접인도사(接人導師)’라고 부르니, 이 분이 제일 첫째 보증인이며, 제일 첫째 책임자이시다. 또한 석가모니불도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을 설하시어 널리 정토를 권하셨으니, 이 분이 두 번째 보증인이며 두 번째 책임자이시다.
더욱이 시방의 갠지스 강 모래수와 같은 모든 부처님도 모두 정토법문을 찬탄하시고 《아미타경》을 호념(念)하셨으니 그 분들이 모두 보증인이며 책임자인 것이다.
이와 같이 무수한 부처님이 보증인이 되고 책임자가 되셨으니, 이러고도 만약 거듭 믿지 않는다면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땅을 치고 통곡할 뿐 더 이상 어떻게 할 도리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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