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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계시록!(10) : 영적 신앙 온도는 몇 도입니까?”
+ 본 문 : 요한계시록 3장 14절 - 22절 (신약 402쪽)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아멘!
오늘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일곱 번째로 라오디게아교회에 대한 말씀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는 칭찬과 책망을 함께 받은 교회들도 있고, 칭찬만 받은 교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 책망만 받은 교회가 두 교회가 있는데, 사데교회와 오늘 본문의 라오디게아교회입니다.
먼저 라오디게아교회의 지리적 위치와 문화적 종교적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라오디게아라는 도시는 소아시아에 위치해 있는데, 현재는 터키 남서쪽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지금은 라오디게아가 아니라 “에스키힛살”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성서시대에는 “브르기아” 로 불리우던 지역의 수도였던 이 도시는, 리쿠스 강(Lycus)계곡을 따라,
반경 15km내에 골로새, 히에라볼리라고도 하고 파묵깔레라고도 하는 도시와 삼각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도시 건립의 역사를 보면, 에수님이 오시기 전 241년부터 246년 사이에 수리아의 셀루시드 왕조의,
안티오커스 2세라는 왕이 건립하였는데, 왕은 자신의 아내인 왕비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왕비의 이름인 라오디게아라는 이름을 따서, 그 도시의 이름을 “라오디게아” 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1세기 당시 라오디게아는 교통의 요충지요, 상공업의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이 도시는 금융업, 양모업, 의약업 등, 3대 산업이 특별히 발달되었던 도시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고, 어디든지 갈 수 있었던 교통의 요충지요,
목화밭이 많아 모직공업이 왕성했습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매우 부유한 생활을 누렸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쓰기 35년 전, 주후 62년경에 큰 지진으로 도시가 황폐화 되었을 때에,
도시 복구를 지원하려는 황제의 선심을 사양하고, 독자적인 힘으로 도시를 복구할 정도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 라오디게아에는 명문의과대학도 있었는데, 이 의과대학의 안과와 그곳에서 만들어 낸,
안약이 유명하여 눈에 바르기만 하면 그 효과가 좋아서 세계 전역에 안질 치료로 명성이 자자했습니다.
또한 소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하고 번창하는 금융도시로 발돋움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물질의 그 풍요로움을 누리게 되었는데, 그로인해 완전히 세속화되어서,
흥청망청, 오늘만 유쾌하게 살면 그만이다라는 사고방식에 젖어 타락의 길로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소아시아에 있는 대부분의 도시들처럼, 이 도시에도 3개의 극장과 3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은,
라오디게아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 믿음보다는, 쾌락을 더 사랑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배경을 가진 도시에 세워진 교회가, 오늘 본문의 라오디게아 교회였습니다.
바로 이 라오디게아교회의 설립배경을 보면, 바울의 동역자 에바브라가 설립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골로새서 4장 12절, 13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그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거하노라. 아멘!”
이 말씀에 있는 것처럼 라오디게아 교회는 골로새와 히에라볼리 교회와 더불어 바울의 지도아래서,
성장하였는데, 특별히 주후 4세기에 중요한 회의가 이곳 라오디게아교회에서 모였다는 기록을 보아,
이는 당시 라오디게아 교회의 위치와, 그 중요성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오늘 본문에서 라오디게아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14절 말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아멘!”
라오디게아교회에 말씀하신 첫 번째 주님의 모습은 “아멘이시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아멘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칭호로 나타나기도 합니다(사 65:16).
이는 하나님께서 진리이시며, 신실하심을 나타내는데, 이러한 칭호가 그리스도에게 적용됨으로,
라오디게아교회와 성도들의 신실하지 못함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성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주님의 모습은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와 “아멘이시오.” 라는 말은 동일한 뜻을 가진 칭호입니다.
바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 하시기 위해서,
온전한 순종과 충성으로, 구약의 모든 예언을 성취하셨음을 나타내신 칭호입니다(1:5,9, 2:13).
세 번째 주님의 모습은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의 최고의 근원을 나타내는 이 칭호는, 그리스도의 또 다른 칭호,
즉 알파와 오메가에서 알파에 해당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피조물 가운데 처음이란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자이시며, 모든 창조의 근본이 되심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15절 말씀을 다함께 봉독하겠습니다. /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이 말씀 중에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보시고, 모든 것을 다 아시며,
세밀히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라오디게아교회 성도들의 모든 신앙의 삶을 다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신앙과 형편과 처지를 다 보시고, 다 아시며, 세밀히 감찰하십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다 보시고, 다 아시며, 세밀히 감찰하시는 주님께서 라오디게아교회 성도들이,
열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것, 즉 영의 상태가 죽었음을 책망하는,
말씀으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 하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차지도 아니하고” 라는 말은 라오디게아의 물 사정이 좋지 않아 약 14km 떨어진 골로새로부터,
냉수를 공급받게 되었는데, 수로를 통해 오는 동안 미지근해지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라는 말씀은, 인접한 히에라볼리의 온천수를 염두에 둔 것으로서,
이웃 도시 히에라볼리의 온천수가 라오디게아 도시까지 약 10Km를 흘러 들어오는 동안 식어 버려,
뜨거운 온천수가 아니라, 차지도 뜨겁지도 아니한 미지근한 물이 되고 말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골로새에서 온 찬 물도, 히에라볼리에서 온 온천수도 다 미지근해져서, 마시면 구역질이 나고,
그래서 토하여 낼 수밖에 없는 물이 되고 만 것처럼, 라오디게아교회 성도들의 신앙과 삶의 상태가,
냉수도 아니고 온천수도 아닌, 이것도 저것도 아닌, 미지근한 신앙이 되고 말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강력하게 책망하십니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무기력과 무관심, 권태로움과 타성에 젖은 신앙에서 벗어나, 열정적인 신앙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그런 신앙에서 벗어나라는 말씀입니다.
말로만 믿는 신앙이 아니라, 오직 주님 사역에 온 몸으로, 행동으로 충성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과 충성, 열정적인 뜨거운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중립이 있을 수도 없지만, 중간 쯤 적당하게 타협을 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과 충성, 열정적인 뜨거운 예배가 없었고,
중간 쯤 적당하게 타협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던, 라오디게아교회와 성도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 이 말씀은 정말로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버림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무서운 일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마태 24:40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아멘!
마태 27:46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아멘!
그렇다면 주님의 책망과 심판을 받고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 영적 상태는 어떤 상태일까요?
오늘 본문 17절 말씀을 다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 하는도다.”
“부요하여” - 라오디게아교회 성도들은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부자로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머나 교회와는 정반대로, 물질적으로는 정말 부자였으나, 영적으로 가난하였습니다.
“곤고한 것과” - 이 말씀은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약탈되거나 파괴당했을 경우를 묘사한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가련한 것과” - 칭찬을 받지 못하고, 쫓겨나서 슬피 울게 되는 경우를 두고 말합니다.
그리고 “가난한 것과” 라오디게아교회 성도들은 상공업과 금융업의 발달로 물질 풍요를 누렸습니다.
그 다음 “눈먼 것과” -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보지 않아도 될 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 이 말씀은 물질적 풍요로 인해, 당시의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유명한 양털로 만든 아주 비싼 옷을 입었지만, 영적인 헐벗었음을 가릴 수가 없었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실상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물질적인 부요함에 취하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혀 알려고도 하지를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영적으로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은,
한마디로 불신앙적인 세상의 죄악된 것들이 우리의 삶에 들어와, 영적으로 병든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병든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해, 주님께서 세 가지로 권면을 하십니다.
영적으로 병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신 주님의 첫 번째 권면은, 오늘 본문 18절 말씀입니다.
다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아멘!
라오디게아 지방은 금이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금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영적으로 가난한 라오디게아교회에게, 시련을 통해 얻은 금과 같은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 라오디게아에서 많이 생산 되는,
광택 있는 검은 양모가 아닌 흰옷 - 곧 의의 옷을 입고, 영적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라는 말씀입니다.
영적으로 병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신 주님의 두 번째 권면은, 오늘 본문 19절 말씀입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아멘!
먼저 여기서 “책망” 이라는 말은 낮춤을 의미하는데, 말로서 교훈하고 다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징계하노니.” 라는 말씀은, 책망이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히 12:5).
주님은 이런 의미로 “책망하고 징계하노니 지금 곧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권면하신 것입니다.
영적으로 병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신 주님의 세 번째 권면은, 오늘 본문 20절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20절 말씀을 다함께 봉독하겠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아멘!
예수님께서 문밖에 서서 전에도 두드렸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두드리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도 주님은 계속 초청하고 계신다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라오디게아교회 성도들은 물론 오늘 우리도, 회개함으로 심령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면,
주님은 내 음성을 듣고 들어오시므로 주님과 함께 더불어 교제를 나누며 친밀한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영국의 화가인 윌리암 홀먼 헌트가 20절의 말씀을 토대로 그린 세상의 빛이란 그림이 있습니다.
이 헌트가 단단히 잠겨 진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는 그리스도의 그림을 막 완성하였을 때였는데,
한 친구가 그림을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보게, 그림을 잘못 그렸네. 문고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헌트는 “나는 그림을 잘못 그린 것이 아닐세. 그 문고리는 안쪽에 있다네.” 라고 하였습니다.
문밖에 서서 안에서 문을 열어 주기를 노크하며 기다리시는 주님의 안타까운 표정을 그린 그림입니다.
주님께서 오늘날 많은 교회의 문밖에, 그리고 우리의 심령 문밖에 서서 계속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이렇게 우리의 심령의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놀라운 약속을 해주셨습니다.(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믿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예배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은 주님께서 심령의 문을 두드리실 때,
우리의 심령의 문을 활짝 열어 주님을 영접하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심령의 문을 활짝 여심으로, 자녀가 누릴 풍성한 축복을 받아 누리고 사심도 믿습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가 심령의 문을 열면, 주님은 내 심령에 주인으로 들어와 나의 삶을 주관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로는 세상일에 너무 분주해서, 주님께서 문밖에 서서 두드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혹 영접했어도, 내 안에 계신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해 자녀의 권세와 축복을 누리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걸 아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을 주장하시는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복의 근원인 우리로 복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심령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심령의 문을 열어 주지 아니하시면, 섭섭히 돌아서시고 말 것이며,
우리 자신은 그 축복의 문을 열지 못함으로, 주님이 예비하신 큰 축복을 얻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결론으로 라오디게아 교회와 성도들의 결말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라오디게아교회는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한 신앙을 고치지 못함으로, 그 결과,
그 도시 전체가 현재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져 내린 폐허의 도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믿음의 승리자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도 있습니다. 21절 말씀입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 주님과 함께 보좌에 앉게 되는, 왕적 지위를 허락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들어야 합니다. 아멘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정리하면서, 여러분에게 진지하게 한 번 묻고 싶습니다.
지금 여러분 한 분 한분의 신앙온도를 재본다면, 몇도 쯤 됩니까? 지금 신앙의 온도가 미지근합니까?
아니면 뜨겁습니까? 나만 뜨겁습니까? 아니면 남도 뜨겁게 할 만큼 내 신앙의 온도가 뜨겁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나도 뜨겁고, 다른 사람들도 뜨겁게 만드는 실천, 곧 적용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이것입니다. 말씀과 기도생활에 충실하십시오. 그런데 더 좁혀 새벽기도를 시작해 보십시오.
새벽에 일어나서, 먼저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내 인생을 맡기며 이렇게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새벽에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주님께 내 인생을 맡깁니다.”
특별히 교회에서는 물론 집에서도 성경보고 기도하는 아빠 엄마의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자녀의 이름 부르며, 축복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뜨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기도하는 부모님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내 삶과 신앙이 있었다고 말할 것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든 새벽 기도는. 기도의 간절한 영성의 밝음이 빛나는 시간입니다.
뜨뜬 미지근했던 내 삶과 신앙이, 기도로부터 새롭게 뜨거운 불로 솟아나는 가장 귀한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살아가다가 내 삶이, 내 신앙이 뜨겁지 못하고 미지근해졌거나 차가워졌다는 생각이 들면,
다른 것을 다 제쳐두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 하나님께 기도드리겠다는 각오로 교회로 달려 나오십시오.
교회사역을 하다가 힘들고 열매가 없다면, 새벽기도나 작정기도로 뜨겁게 달군 후 새롭게 시작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이란? 뒤를 돌아보며 만족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끊임없는 미래를 향한 도전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믿음의 행진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로 무장한 후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결단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지금 초청하며 말씀하고 계십니다.
“미지근하지 말라. 차겁지도 말라. 기도와 말씀으로! 성령 충만으로! 심령을 뜨겁게 달구어라!
그 뜨거운 심령으로! 그 뜨거운 믿음의 열정으로 도전하여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와 축복을 누리라!”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