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는 사막을 걷는 것 같은 내 작업 속에 틈틈이 만나는 오아시스이다. 그 영화들 틈새 틈새에 ‘소설과 만화’를 자주 만나고 싶지만, 그 틈을 내기가 쉽지 않다. 그 없는 틈을 내어서 요즘 허영만의 [말무사](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 징기스칸)를 애독하고 있다. 지난 겨울엔 박시백의 [만화/조선왕조실록]16권을 열독하였다.( 태조에서 정조까지. 남은 이야기를 나머지 4권에 실을 예정이란다. ) 일반 사람들이 읽기엔 어렵거나 지루한 대목이 있다. 중학생들에겐 무리스럽고, 역사 이야기에 호기심 많은 고등생이나 대학생쯤은 되어야 볼 성 싶다. 아니, 그 깊은 맛을 제대로 알려면, 세상사를 보는 안목이나 정치적 식견을 상당히 갖추어야 하고, 조선시대나 儒學에 얼마쯤 익숙해야 한다. 그의 다양한 역량에 많이많이 놀랐다.
<박시백의 대중강연 2분 동영상> http://www.tagstory.com/video/video_post.aspx?media_id=V000115966&feed=DM
<한겨레 신문>의 박재동 그림판에 얼마나 감동했고 얼마나 고마웠던가! 박재동을 뒤이어서 박시백의 그림판을 만났다. 박재동보단 못해도, 많이 좋았는데 아쉽게도 그만 두었다. 이 만화를 만나면서, 그가 이 만화를 그려낼 욕심으로 ‘한겨레 그림판’을 그만 두었다는 걸 알고선, 그 중요한 마당을 버릴 정도로 이 만화가 소중할까 의아스러웠지만, 이 만화에 깊이 빠져들면서 이 만화를 욕심낸 그의 열정과 결단에 큰 박수를 보냈다. 시사만화는 깊은 안목과 다양한 능력을 요구한다. 그의 ‘한겨레 그림판’이 매우 좋았기에 그의 안목과 능력을 이미 인정하고 있었지만, 이 만화로 그가 훨씬 큰 그릇이고 훨씬 큰 능력을 가진 사람이란 걸 알게 되었다.
이 만화는 우리가 지금까지 만났던 만화와 많이 다르다. 조선왕조 5백년을 도도하게 흘러가는 대작이다. 권수가 많다고 해서 대작이 아니다. 그 내용과 뜻하는 바가 웅장하고 깊어야 한다. 그는 조선왕조의 정치사만을 다루고, 그 자료를 야사野史에 전하는 이야기는 취하지 않고 왕조실록에만 기대어서 이끌어가고, 단순하게 그 자료를 요약하고 정리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자기 주관적인 해석을 과감하게 담아보겠다고 선언한다. 아무리 정치측면만을 다룬다고 했지만, 정치가 萬事이기에 조선시대를 다양한 모습을 두루 건들이면서 조선의 시대상을 아주 잘 그려냈다. 주관적인 개인 생각을 말한다고 하지만, 그게 결코 범상치 않다. 그와 다른 견해도 찾아보아야 하겠지만, 조선시대를 좀 더 제대로 생각하고 이해함에 많은 시사점을 보여준다. 그 동안 조선왕조 이야기를 이렇게 저렇게 배우고 보고 듣고 읽어왔지만, 이 책에서야 비로소 좀 더 자세하게 알게 되었고 더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다가갈 수 있게 해 주는 내용이 많았다. 조선시대를 진지하게 알고 싶은 사람에게 좋은 길라잡이가 될 만한 책이다. 미처 알지 못한 사건들도 많았고, 안다고 하더라도 잘못 알고 있거나 어설프게 알고 있는 게 많았다. 새로 알면서 새로 생각하게 된 것도 많았고, 오해하거나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도 많았다.
더구나 조선의 5백년 이야기가 그 옛날 옛적에 묻혀 있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세상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온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실감난다. 지금까지 읽고 보아온 이런 저런 역사소설이나 역사물 중에서 이처럼 많은 생각과 생생한 실감을 만난 적이 없었다. 대단하다. 역사적 사실을 그저 나열함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수없이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겉모습은 조선시대이지만 속모습은 지금 세상과 거의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그것은 그가 사료를 보고 생생한 인간의 삶을 그려내기 위해서 많은 사색을 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지금 현실의 세상사를 읽어내는 안목이 뛰어나다는 걸 뜻하기도 하리라! 그래서 이 작품은 ‘충실한 역사만화’이기도 하거니와 ‘예리한 시사만화’이기도 하다. 우리 역사 중에서 가장 중요한 조선왕조 역사에, 그동안 내가 알고 이해하고 있었던 수준이 많이 부끄러웠다. 나의 반성도 반성이지만, 실은 한국사나 역사를 연구하거나 가르치는 사람들이 “대중을 위하여, 지금까지 어떤 일을 했는가?”를 많이 반성해야 할 책이다.( 이런 반성이 어찌 역사분야뿐이겠나? 학자들 모두가 반성할 일이다. )
박재동 그림체와 엇비슷해서 짝퉁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박재동 그림체보다 좀 더 간결하고 여백이 더 헐렁해서 좀 더 소박해 보인다고 할까? 그림 실력이 좀 떨어진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림체가 둘 다 우리 토종맛이 물씬 나서 참 편안하고 친근하다. 불만은 딱 한 가지, 조선시대 특유의 갖가지 한문어투 용어들이, 처음 나올 땐 반드시 한자를 함께 써주어야 하겠고, 만화책의 여백에 틈을 내어서 그 짤막한 뜻이나 어감을 살려서 풀이해 주어야 하겠다. 그리한 것도 없지 않지만, 열에 한 두 개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문맥의 흐름으로 그 어감을 잡아낼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그러하기 어려운 것도 많아서 답답했다. 사소한 것이니 꼭 그렇게 해 주기 바란다.
그 내용을 빠싹하게 꿰어내고 싶다. 적어도 3번 이상은 보아야겠다. 박시백님, 그 노고에 깊이 감사드리고, 그 열정을 높이 존경하옵고, 그 능력이 무지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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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새백의 뉴스툰에 들어가면, 그의 만화세상에 관한 이런 저런 소개가 있습니다.
http://www.newstoon.net/sub.html?section=section125
그 일부분, 세종실록에서 '홀로 서는 세종'만 보여드립니다.
* 제4권 : 세종실록의 목차와 '홀로 서는 세종'편
[제1장] 임금 위의 임금
1. 이중권력
2. 계속되는 왕비가의 수난
3. 대마도 정벌
4. 모두 다 이루었으나
[제2장] 태평성대를 꿈꾸며
1. 새 임금 길들이기
2. 홀로 서는 세종 : 아래에 만화내용을 덧붙였습니다.
3. 세종의 철학
4. 새로운 카리스마
5. 사대외교의 설움
[제3장] 백화만발의 시대
1. 학문의 융성
2. 과학기술의 도약
3. 두 천재 음악가
4. 북방 개척의 시대 1
5. 북방 개척의 시대 2
6. 세종어제 훈민정음
7. 세종 시대의 백성들
[제4장] 명군을 도운 명신들
1. 황희 정승
2. 과학혁명의 주역들
3. 북방의 영웅들
[제5장] 준비된 임금, 문종
1. 성군을 위한 준비
2. 비극의 서막
3. 말년의 세종
4. 어린 단종을 남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