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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과 존재: 테아이테토스편과 소피스트편
중에서 소피스트편. 217-247.
인식과 존재: 테아이테토스편과 소피스트편.
박홍규, 형이상학 강의 1: 박홍규전집 2, 민음사, 2007(1995) pp. 176-247(P. 524) .
박홍규(1919-1994), 1986년 12월 28일 강의(녹음),
* 존재에 관한한 명사(이름)의 주제이다. 그런데 인식에 관한한 명제로서 다룬다. 그러면 누스(Nous)는 존재 실체에 과한 것이고, 로고스(logos 말씀)에 관한 것은 기호학(la sémiotique)에서 다루어야 할 것 같다. 그러면 말씀을 표현한 명제는 의미를 다룬다는 면에서 의미론(la sématique)에서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의미론이 정보와 규범인데 그 속에는 명령의 차원이 있을 것이고, 기호학은 속성이 드러나는 사물화 또는 현실화가 아닐까? 그렇다면 전자에서는 제국과 야만이 함께하고, 후자에서는 삶의 진솔함이 있지 않겠는가? (51WLH)
*
높이에는 기호(symbiole, 상징)이며, 이다 아니다. 존재론: 온자기(Soi) 문제
- 표면에서 현존의 이중분절을 다룬다. soi/moi 사회문제가 제기된다.
깊이에는 생성(영혼)이며, 있다 없다. 다양체(apeiron): 온자아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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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에서 존재는 무(μὴ ὄν, le néant)와 대립된다.
- 표면의 현존은 여러 다양한 인식으로 학문들의 위상(천문 물리 생물 심리)이 있다.
깊이에서 실재성은 비-존재(οὐκ ὄν), 아무것도 아님(Rien), 아페이론(무한정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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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토지: 생명체에 깊은 새김(각인: 대표적 생체시계와 유전자)
표면, 토지(저항) 대 국가(야만), 사회의 탈영토화, 국가의 강압적 억압(위협, 착취)
높이, 토지+사회+교환: 자본(제국), 이것임의 탈영토화, 제국의 전제(공포, 잉여)
(51WKH)
# 존재론에도 위상(또는 범주)가 있다. 우선 형상(정지) 존재론과 질료(운동) 존재론이 있다. 이 두 극은 순수 논리에서 성립하며 ‘있다’가 아니라 ‘이다’이다. 즉 형상이다 질료이다. 그 다음으로 현존에서 논의가 있으며, 당위 존재라기보다 실재성의 현존이다. 이 현존은 양면성, 이중화, 이중분절이 있을 수밖에 없다. 대상으로 영혼과 신체, 재인으로서 기억과 습관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존재론들의 위상을 보면 형상론의 명사를 논하는 수학(유클리드 기하학)이 있고 질료론에 다양체(비유클리드 기하학)가 있다. 그리고 중간참으로 현존론이 있는데 동사와 형용사의 변화의 기호에 닮았다. 여기에 물리학, 화학, 생물학이 있다. 이에든 안정적 단위가 있다. 형상과 질료와 달리 이 단위들의 조합과 결합은 여러 변형(변이)의 차이 대 차히를, 미분화 대 세분화를 형성한다. (51W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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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식과 존재: 테아이테토스편과 소피스트편
중에서 소피스트편. 217-247.
그러니까 소피스트편으로 가. 그러면 소피스트편이 뭐냐? 모든 사물에 대해 소피스트는 명제(logos)로 허상[simulacre?]을 만들어서 사람을 속인다고 했어. .. 거기서 뭐라고 하느냐면, 우리의 말(onoma)이 대상에 대해서 지시하는(refer) 것이 없으면, 그것은 소용없는 말이 되는데, 지시 한다는 것은 대상과 같아지는 것이냐, 대상과 전혀 관계없는 것이냐는 질문을 던지고 전혀 관계없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같은 것도 아니라는 말을 한단 말이야. 말도 사물(pragma)이야. (217)
모든 것을 설명하고 나서 학문을 이룬다는 것은 쓸데없는 얘기란 걸 알아둬야 돼. 벌써 아까의 [영혼의] 재인도 설명이 안 되는데? 그렇다고 상기설을 가지고 설명할 것이냐? 상기설에는 파이돈편에서 보듯이 운동이나 허위에 대한 형상이 없거든. (217)
기종석: ... 궁극적으로 직관이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 아닙니까? .. / 박: 그렇지. 하나든 둘이든 어떤 복합체든 간에 존재(on)에 대해서만 직관이 되지. 운동이니 시간이니 이런 것은 직관이 안 되고 인식도 안 돼. (217) [플라톤에서 이데아가 직관의 대상이며, 플라노메네 아이티아는 사물 그림자와 같다. 그런데 벩송은 움직이고 변화하는 플라노메네 아이티아 같은 영혼은 직관이고, 이데아는 상징, 기호, 기표인 셈이다. 즉 운동, 시간, 삶(생명)은 무매개적 자료로서 파악된다. (51ULJ)]
박홍규: 이렇게 손을 움직였을 때, 지각되는 것은 그때그때 공간의 위치에 있어서 그 사물의 공간의 변화야. 운동 자체는 인식이 안 돼. .. 어째든 항상 고정된 상만 받아들여. (218) [벩송에서는 외적 지각에서 공간화된 운동을 파악한다. 그러나 내적 지각은 움직임이라는 것을 파악한다. 그래서 그것을 이마쥬라고 해보자는 것이다. (영혼의 작동(acte)인) 이미지 작용(l’imagination)이 재현을 개념화 또는 관념화하는 것이 지성이다.]
박홍규: 아니, 여기서[소피스트편]도 그 이론이 나와. 인식되는 것은 존재(on)뿐이야. 존재는 생성(genesis)과 대립돼. 실재 운동은 내가 실제로 운동하는 것, 그것뿐이야. (218-219)
박홍규: 여기서 플라톤이 존재(on)라고 했는데, 우리가 [신체를 통하여] 받아들이는 것은 항상 상(像)이거든. 결과로 보면 존재화돼. 따라서 운동은 빠져. 베르그송이 얘기 하자면 말이야, 사람을 빼놓고 보면 형용사 아니면 부사만 남는다는 거야. 이런 유동설(flux theory)에서는 명사로서 딱딱 구별되는 존재는 없고, 흐름으로서 형용사적인 것만 있다고 해. .. 명제가 성립하려면 동사하고 명사가 결합되어야 해. 그러나 이 대화편에서 보듯 이 명사에 <있다(esti)>도 <없다(ouk esti)>도 붙일 수 없다고 했어. <있음>이 어디에서 성립하며 또 어떻게 인식돼? 운동자체는 인식이 안 돼. (219) [플라톤의 약점: 운동자체는 인식이 안 돼]
박홍규: 아! 순수 운동이란 것은 사실은 없어. 허구야. 그러니까 생성에는 존재가 반드시 들어 있다는 플라톤의 말이 맞아. (220)
박홍규: 서로 대립되는 두 측면이 어떻게 공존하느냐 하는 비밀을 우리는 모른다는 말이야. 어떻게 해서 우리는 동사와 명사가 합해진 명제를 듣고 그것을 통일된 어떤 것으로서 이해하느냐는 것은 설명이 안 돼. 다만 우리가 그것을 이해한다[느낀다]. 그것뿐이야. (220)
박홍규: 생성의 순수한 상태는 존재[형상]가 빠진 것이고 자신의 동일성을 전혀 갖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 저항(objicere) 안 하는 것이야. 따라서 그것은 인식이 안 돼. (221) / 윤구병: 전혀 방해 받지 않는 것이 무(無)지요. / 박: 아니 무가 아니라도, 순수한 가능태(dynamis), 순수한 무규정성(apeiron)의 <a->는 인식이 안 돼. 규정성(peras)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자기 내용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그것이고 나는 나로 구분되고, 그렇기 때문에 저항을 해. 그런 것만 인식이 돼. (221)
윤구병: 순간 순간 하나의 질은 성립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재인은 되지 않아서 대상으로서 나타나지는 않지만 순간에서 성립하는 감각 대상이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에게 정하는 측면이 있다고 봐야 하지 않느냐는 거죠. /../ 박: 그러나 그것은[순간들] 운동이라고 안해. 순간에 성립하는 것은 연속성[succession]이라고 하지. (222)
박: .. 들어봐. 무규정자(apeiron)의 <a->라는 접두사는 영속성을 의미해. 순수한 연속성에는 어떠한 구별도 없어. 순전히 형이상학적으로 설명하면, 우리 인식이란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는 것이야. 따라서 순수한 연속성 그 자체는 인식에서 빠져. 알겠지? 그것을 쪼개는 분자, 요인, 그것만 우리 인식에 들어와. 그것이 존재(on)야. 그 연속성이 사실은 운동(pherestai)의 원인이야. (222-223)
박: .. 플라톤 철학처럼 비합리적인 철학이 없어. /../ .. 지금까지 얼마나 비합리적이 었나. 그의 철학에는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이 섞여 있어. 꿈 얘기 했다가, 예전에 시인이 이런 얘길 하지 않았느냐고 했다가, 뭐 국가편 같은 데서는 비교해서 보자고 했다가, 작은 것은 큰 것을 통해서 봐야 드러난다고도 하지. (223-224)
<<<224. 윤구병: 그걸 학문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 문제지요. (일동 웃음)
박: 서술 방식도 말이야, 대화체라서 딱딱 분류해서(classify) 정리되어 있지도 않고 아까도 말했듯이 운동의 원인이 왜 여기서는 꿈이 되고, 이렇게 상대적으로 됐느냐에 대해서 하나도 설명이 없잖아.
윤구병: 그래서 플라톤 공부하는 사람이 아둔한 것 같아요, 허허. 플라톤 자체가 너무나 비합리적이어서 연구 대상이 아닌데‥…, (일동 웃음)
박: 플라톤을 자세히 읽어보면 기본적인 것이 들어 있어. 여기에서도 벌써 생성(genesis)속에는 반드시 존재(on)가 들어있다는 것이나, 그것이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은 기본적인 것이야. 이것을 우리가 배워야 돼. 그러면 명제로 다시 돌아가서, 형상(idea)을 상기하느니 하는 것 가지고서는 명제가 설명이 안 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가.
기종석: 그렇지요. 명제는 상기의 대상은 아니지요.
박: 운동이 어떻게 해서 실재성을 가지느냐는 것부터 따져야 돼. 잘 들어봐. 플라톤 철학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데가 어디냐? 플라톤이 <무엇인가(ti esti)?>[이뭣꼬?]를 물으면서 본질(ousia)과 생성(genesis)을 나누었거든? 그래서 우선 본질이 무엇이냐를 찾지만, 생성이 무엇이냐도 찾아. 플라톤은 양쪽 다 찾아. 그리고 생성이 무엇이냐를 찾는 것이 플라톤 철학을 발전시킨 커다란 요인의 하나야. 그런데 둘로 나누어 놓고 보니까 이 둘의 실재성을 어떻게 확보하느냐가 문제가 돼. 그런데 <무엇인가(ti esti)?>를 따질 때에는 자기 동일성과 정의가 나와, 지금부터 말하는 대목이 대단히 중요한 대목이다. 그러면 정의란 무엇인가? 그것[이름, 이데아[무엇]는 타자와 관계를 맺지 않아. 타자가 옆에 공존하거나 말거나 그것은 상관 안 해. [타자에 관해, 무에 관해] 무관심해(indifferent). 다른 것과의 연속성이 끊어지니까. 딱 떼어내어서(horizein) 여기까지가 이것의 영역[범주]이라고 말해. 삼각형에 <자체(auto)>를 붙이는 것도 그 까닭이야. 여기서 여기까지가 삼각형이고, 그 밖에는 무엇이 오든지 상관없어. 내가 「고별강연」때 한 얘기도 그거야. 정의가 성립할 수 있는 공간에서는, 정의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인식되든 안 되든 모든 것이 공존할 수 있고[동연적으로] 나타날 수 있어. 무차별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것이야. 정의의 세계에서만 그렇지? 소피스트편은 사실 어려워. 나도 해방 후부터 몇 십 년을 읽었지만 어려워. 처음에는 아는 것 같아. 아는 것 같은데, 거 지독히 어려워. 그러니까 플라톤 전체를 자꾸 생각해야 돼. 플라톤 철학에서 소피스트편의 위치를 알려면 이것까지 관련시켜야 분명해져. 유클리드 기하학을 생각해봐. ...(224-225)>>>
박: .. 모든 형태를 취급할 수 있는 공간은 무슨 공간이냐, 그런 문제가 나와. / 양문흠: 그것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간이겠지요. / 박; 그렇지. 그런 공간은 실재(real)이 아니라 정의(definition)의 대상으로서 나타나는 공간이야. (226)
박:... 요컨대 그 공간은 정의에 의하여 성립하는 공간, 즉 기하학으로서 모든 기하학적인 형태를 받아들이는 공간이야. 그것만 알면 돼. (228)
윤구병: .. 지금 선생님이 말씀하시려는 것은 하나의 동일성이 성립하려면, 즉 하나가 정의된다면 그것은 다른 것과 구별이 되어야 하는데, 모든 기하학적 형태의 동일성을 보장하려면 동시에 다른 것들도 전부 정의가 되는 그런 공간이 있다는 거지. / 박: 응 정의가 되는 공간이 나와야 된다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실지로 우리가 물리적 공간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어. 그러나 물리적 공간은 전부 상호 침투되어 있으니까 떼어낼(isolate) 수가 없어. (229) [떼어내어서(horizein)=떼어낼(isolate) ]
박홍규: 어째서 공간이라고 그랬겠어? 아리스토텔레스 같으면 그것은 지적 질료(hylê noêtê)라고 하고 ... / 윤구병: <구획짓는(horizein)> 것이니까 공간 개념이 되지. .. / 윤구병: 아니, 한계(peras)라는 개념이 공간 개념이거든. (229)
박홍규: 공간은 무규정성(apeiron)의 성격[내용]을 가지고 있거든. 그렇기 때문에 여러 곡률을 가질 수 있어. 그런데 학문의 동일성을 취급하려면 무규정성이 빠져야 돼. /../ 박: 무규정적 성격이 있기 때문에 비유클리드 기하학적 공간이 자꾸 나오는 거야. 그런데 유클리드 기하학은 무규정성을 될 수 있으면 빼버리는 기하학이야. (231)
윤구병: 그런데 선생님 생각은 유클리드 기하학에 있어서는 그런 무규정성을 전부 빼버리고 정의가 가능한 데 비하여, 로바체프스키나 리만 기하학의 경우에는 공간의 여러 형태에 대한 가설을 더 세워야 하는데, 이 가설이 많다는 것은 그 만큼 무규정성의 측면이 더 많이 들어간다는 생각이신 것 같아. (234)
박: .. 요컨대 정의의 공간에는 좌우간 정의만 되면 모든 것이 다 들어가. 인식되든 안 되든, 운동이고 시간이고 공간이고 허위고 무고 뭣이고 모두 다 들어가. 그런데 철학은 모든 것(panta)을 취급하고, 그 모든 것은 사물(pragma, πρᾶγμα)로서 나타나야 되잖아. 그러니까 바로 정의가 가능한 공간에서 정의의 대상으로 나타난 것만을 이제 비로소 철학은 취급할 수 있게 되는 거야. (236)/ 박: 그 다음에 무엇이 문제냐? 정의가 올바르다면, 그 정의의 내포(implication)의 관계에서 나온 것은 모조리 성립해. 이것은 대단히 중요해. 그런데 이건 소피스트편의 존재론에 대한 내 해석이지만, 거기서 플라톤이 말하기를 무라고 하는 것은 전혀 대상(pragma)이 안 된다는 거야. .. 그렇다면 대상(pragma)의 기본 정의는 <있다>는 것이 돼. 이것이 존재론의 가장 기본이야. 그런데 그 <있음>은 어떤 있음이냐? 파르메니데스에서와 같은 존재는 아니라는 거야. 소피스트편에서는 말이니, 허위니, 진리니, 이런 것들이 모두 대상(pragma)이거든. 그 속에는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에서는 모든 것이 진리가 된다는 뜻이 숨어 있어. (237)
파르메니데스는 존재가 등질적(homoion) 그래서 멜리소스는 파르메니데스가 존재는 구(球)라고 했는데, 구가 아니라 무한하고 해버린 거야. 그러니까 소피스트편의 주인공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로는 허위가 설명되지 않는다, 진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진리와 허위를 구별해 놓고 나가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야. 결국 가장 기본적인 것은 어떻게 해서 구별 일반이 가능하냐는 문제야. 이게 제일 중요해. 아주 중심점(key point)이야. 그러니까 모든 대상(pragma)의 첫째 기본적인 정의는 <있다>는 것이다. (237)
플라톤은 허무와 상대적 무(mê on, μὴ ὄν)를 구분했지. <진정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 것(ouk ontôs ouk on)>은 관계를 맺는 존재야. 타자, 무규정자(apeiron)야. 그러면 구별할 때에는 무엇이 필요하냐? A와 B를 구별해 주는 것은 A도 아니고 비-A(non-A)도 아냐. 전에 내가 설명했어. 차이(diaphora), 라틴어로(differntia)야. 이것이 플라톤 존재론의 기본이야. 라틴어로는 아주 분명해. A와 B를 구별해주는 것은 A도 아니고 비A(nonA)도 아닌 것, 즉 존재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이야. (237-238)
그럼 왜 그런 가장 기본적인 최고류(megista genê)가 나오느냐? 플라톤은 그런 것 설명하지 않아. 존재(ousia)에 관한 <거인들의 전쟁(gigantomachia)>이라는 것을 끌어들여 가지고 과거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빌려서 결론을 내려, 정지를 진정한 존재로 주장하는 사람, 운동을 진정한 존재로 주장하는 사람 등을 논하면서 한 사물이 동시에 양쪽 다(amphoteron) 그러니까 내가 비학문적이라는 거야. 허허. 사실 존재는 비존재[le néant]에 대한 존재인데, 플라톤은 <진정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 것(ouk ontôs ouk on)>[non-être, apeiron, Rien]을 놓고, <허무(mêdamôs mê on)>[le néant] 놓지 않았거든. 그러니까 결국 <진정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 것(ouk ontôs ouk on)>에 대한 존재[현존]밖에 나오지 않을 것이고, 그것과 관계 맺을 때 존재는 여러 가지로[여러 현존재로] 분열되어서 구별이 되더라 하고 설명해야지. 그렇잖아? (238)
윤구병: 선생님, 비존재(mê on)[무(無)]의 근가가 어디에 있는가는 질문할 수 있지요? 박: 그렇지 소피스트편에서 그것을 읽어야지 운동과 정지는 연장성[extension]에서 성립하는 것이지. 같은(tauton)과 다름(heteron)은 연장성을 떠나서는 성립하는 존재[현존]의 측면이고, 존재도 무도 아닌 것은 존재와 무를 넘어서 제3자로서 끊어지는 것이 아니지. 거기서 자꾸 구별(difference)되어 나간다고 보면 운동이야. 연속적[successif]이라는 것은 구별의 집합이 아니라 언제 시작하는지 모르게 변하고 또 같게 된다는 말이야. 운동과 존재가 구별이 안된다는 얘기야. 이것을 딱 유(genê)로 구별해 놓으니까 비로소 운동과 정지가 나오는 것이지. 이 존재론이 다른 존재론 보다 아주 기본적인 거야. 상기설이나 다른 것 가지고는 설명이 안돼. 핵심적인 것이야. ... 그러면 허위[fiction, 또는 거짓]라는 것은 무엇이냐. 정지한 것은 정지한 것이라고 해야 돼는데 운동이라고 바꾼 것(allodoxia)을 허위라고 해.
그러면 플라톤은 영혼(psychê)을 어떻게 봤느냐? ... 운동의 동일성은 지난 학기 읽었던 파이돈편에서 보듯이 <불사적(athanaton)>이야. 영혼이 다른 사물로부터 운동을 받으면 연속성 아냐? 그러나 영혼은 운동을 하되 자기 자신을 버리지(apoleipô)않아. 그래야 자기 동일성이 성립할 것 아냐? (239)
운동이란 A에서 B로, B에서 C로 자꾸 타자화되는 것 아냐? 그런데 그런 것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을 수 있어? [/] 또 자신을 버리지 않기 위해 과거를 그대로 현재에도 갖고 있어야 할 것 아니야? 그걸 [1]기억이라고 해. [/] 그 다음에 연속적으로 변하면서도 자기의 근원적인 것으로, 그 이전의 상태로 뛰어 넘는 것, 기억이든 뭣이든 정적(static)으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운동해. [2]역운동을 해. 역기능는, 그것은 연속성을 뛰어넘는 기능이라야 돼. 이 뛰어넘는 기능이 있어야 해. [/] 그 다음에 필연적으로 과거로 가는 것 아냐? 그러니까 미래 지향적이야. 이 세 가지가 나와. (239)
[1] 영혼에는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게 되는 기능이 들었다는 거야... 가만히 있으면 죽지. 불가능한 것이 가능해지는 것, 연속성을 넘어서는 기능, 기억이 영혼 속에는 있어. 플라톤은 이런 말을 하지 않아. 플라톤 당시에는 생물학 같은 것이 아직 발달 안 했으니까. (240) [플라톤은 생물학의 세포를 몰랐고 진화론은 더군다나 몰랐다.
[2] 아까도 말했듯이 색깔이 이리로 들어온다는 것은 불가능해. 심리적 기능은 물리학으로는 설명 될 수 없는 역기능적인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 우리 영혼의 기능 속에는 [신체 때문에] 불가능 한 것이 드러나. 그런데 그때 불가능하다는 것의 기준을 연속성이야. 우리 설명하는 것은 연속성에 기반을 둔 것이니까 (240) [계속으로 이어지는 것을 다 합하면 다른 것이 아니라 이것임이 되는 정체성]
[3] 또 저기 있는 것을 본다는 것은 항상 연속성을 넘어서 미래 지향적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야. 항상 미래로 감으로써만 현재가 존재해. 필연은 과거로 흘러내려가고 있으니까, 그것을 상쇄함으로써만 현재가 주어져. 심리학에서는 그걸 지향성이라고 해. (240)
파이드로스편에서 자꾸 기술(techne) 얘기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야. 그런 사실 플라톤은 기술에 대한 의식이 없다. 영혼(psychê)에 대해서만 기술이 성립해. 왜냐하면 영혼만이 멀리 있는 것을 미리 향할 수 있는 지성을 가지고 거기에 가려고 하는 연속성의 공간을 메우는데, 이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기술이니까. 영혼만이 기술을 갖고 있어. 저기서 상이 오면 여기서 나간다는 것을 심리학적으로 지향성이라고 하지. 후설(Husserl, 1859-1938)은 지향성을 내재적으로 달리 사용하는데, 심리학에서는 내가 설명하는 대로야. 삐아제 이론에서 생물은 항상 지향적이라고 하는데, 이 미래 지향성이 없으면 인간은 멍청한 병신이 되어버려. 지향함으로써만 겨우 현재가 존재해. (241)
박홍규: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서. 아까 말한 심리적 기능(psychic function), 또 기억이란 과거의 보존이거든. 그 기억은 오직 생물에만 있어 현대말로는 정보라고 해. 생물이 무생물과 다른 점은 종이 가지고 있는 정보에 의해서 자기 조절해 나간다는 점이야. 미래 지향적으로. 살기 위해서. (241)
박: ... 그런데 생명체에는 물리학적 관계와는 다른 생물학적인 관계가 있더라는 거야. .. 생물학에서는 분명히 물질현상만 가지고는 설명 안되는 측면이 나오거든. 그게 바로 지향성이야. 아까 [말한] <본다>라는 것도 곧 지향성이야. 기장 본원적인 지향성이고 또 심리적 기능이야. (241-242)
물리학은 다만 생명체에서 물리학적인 어떤 체계에 맞는 것만, 실험에서 되풀이 되는 측면만 설명하는 거야. .. 그래서 생물학에서는 그러한 작용함-작용받은(poiein-paschein)을 그냥 작용함-작용받음[천체 운동의 작용-반작용]이 아니라, 자극과 반응(stimulus and reaction)이라고 하지. 생물은 같은 자극이라도 반응하는 방식이 자꾸 달라져. (242)
내 판단이지만, 근세에 들어와서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것은 다 떨어져 나갔어. 플라톤은 남았지만 형상이론은 없어져 버렸어. 그러면 유동설(flux theory)이 나오는데, 그것을 기반으로 인식론을 세우는 데에는 테아이테토스편 밖에 없거든. 데카르트나 칸트 같은 사람들이 어디서 출발하느냐 하면, 이 책 뒤의 유동설로부터야. 그 사람들은 <운동(pherestai)>[정념의 운동]에서 출발해. 그래서 그 사람들은 대상이 분명하지 않다(dunkel), 의심스럽다는 말을 하고 들의 철학을 현상주의(phenomenalism)라 하지. 칸트처럼 감각의 대상이 불분명하다면, 그것이 인식론이 되기 우해서는 불분명하다는 것이 어떻게 인식되ㅡ냐는 것부터 먼저 밝혀야 할 것 아나? 그것은 밝히지 않고, 불분명하다고 그냥 놓고 나가, 허허허. 그러면 인식론이 안 돼. 그 뿐만 아니라 불분명은 분명(klar)에 대한 불분명이야. 그래서 이 책을 읽어야 된다는 거야. 인식은 항상 존재(on)에 대한 인식이야. 비존재(mê on)는[에 대해서는] 존재가 이러니까 비존재는 이런 것이다, 하고 나가. 사실 실증과학에 대하여 칸트나 데카르트의 인식론이 무슨 소용이 있어? (243) [표면 위의 철학이기에 현상주의이다. 깊이의 학문은 현대 각 학문이 탐색하고 있다.]
플라톤은 생명 현상을 <불사적(athanaton)>이라고 했는데 베르그송은 불사라 하지 않고 영원[잔존]하려고 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더 논리적이야. 그냥 <불사>라고 하는 것은 헤겔이야. 헤겔을 가능적인 것을 필연화시켰어. 베르그송은 반대로 불가능한 것이 가능화된다고 해. 불가능한 것에서 가능한 자신을 만드니까, <영구 운동(aeikinêton)>이 아니고, <자기 창조(se créer)>라는 말을 써. 자신의 실존(existence)을 창조해. 창조란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야. (243-244)
박: 또 아까 생명은 연속성을 넘어선다고 이야기했지? 그걸 비약[도약]이라고 해. 창조도 비약[도약]이야. 베르그송 철학은 파이드로스편으로부터 나와. 그 대화편은 생물학의 기본적인 형이상학을 다루고 있어. 그것을 보면 플라톤의 존재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어. ... 그리고 파이드로스편에서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생물은 정지하면 죽는단 말이야. 정지하면 죽어. 따라서 생명은 불사(athanaton)을 추구하지만 항상 운동의 영원 속에서 자기 동일성[정체성]을 찾을 수밖에 없어. 이런 점에서 소피스트편의 존재론이 얼마나 중요한가 알 수가 있어. (244)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체(sôma), 베르그송의 신체, 플라톤의 신체를 비교해야만 비로소 사회(sosiety)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알 수 있어. 사실 이번에 그걸 하려 했는데 ... / 아무튼 여기서는 살아 있는 것이 무엇이냐, 이것을 파악해야 돼. 존재를 취급하고, 재인이 꼭 있어야 된다는 것도 알아둬야지. 명제는 소피스트편으로 간다. 소피스트편에서 생성의 질재성과 같은 것은 인식이 되지 않아도 정의에 의한 방법으로 파악한다. 이것은 존재론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Z편의 존재론과는 전혀 다르지. 그것은 이미 어떤 존재가 있다고 가정하고 나가는 것이지만, 이건 안 그렇지. 소피스트편의 존재론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야. 그런 존재론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영혼을] 마음대로 묘사하고 의식화 시키고 하는 것이지. (245-446)
세계를 구성하는 것.. / 박: 꼭 감각이라기보다도 사물(pragma)이지. (246)
박: ... 오늘 가장 중요한 것은 소피스트편에 나타난 존재론이고, 다음은 영혼과 물질의 가능성(dynamis, 역동성), 즉 작용함-작용받음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야. 그리고 영혼을 플라톤이 정지(static)으로 봤느냐 역동적(dynamic)으로 봤느냐를 살펴보았어. 정적으로 본 것은 지금 다 죽어 버렸지만, 역동적으로 본 내용은 현대 철학이나 생물학의 기초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돼. .. 플라톤을 모르면 베르그송도 모르고 현대 생물학도 이해가 안 돼. 기초는 파이드로스편과 소피스트편에서 존재론이야. 거기서부터 죽 나와. 그런 점에서 플라톤은 기초를 놓은 사람이야. 정의(definition)에 의한 존재론(ontology), 이건 머리속에 꼭 집어넣어 두어야 돼. / (녹음, 1986년 12월 28일) (246-247)
(10:24, 51WKI) (11:02, 51WL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