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제 107편
=====107: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이는 고대 이스라
엘에서 예식 때 낭송하던 송영구이다. 렘 33:11에 근거하면 본 송영구는 포로로부터
귀환한 자들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
었으나 원문에 나오는 접속사이자 강조사인 '그는' 앞의 '키'(* )를 살려서 실
감나게 본절을 재번역하면 '여호와께 감사하라 왜냐하면 그분은 참으로 선하시기 때문
이다. 그분은 참으로 영원히 인자하시기 때문이다'이다. 송영 시(時) 사회자가 '여
호와께 감사하라'를 읽으면 회중은 '왜냐하면' 이하를 읽었다고 한다. 본 시편과 106
편은 동일하게 본 송영으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이 두 시편의 연관성
을 연구한다.
=====107:2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 - 동일한 표현이 사 62:12에 나타나는데 그곳의 역사적
배경이 바벧론 포로 시대 이후이기 때문에 본 구절을 근거로 하여 본시의 작시 연대를
포로 귀환 이후라고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전반적으로 본시가 바벧론 포로 귀환이라는
벅찬 역사적 체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찬양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대적의 손에서 저희를 구속하사 - 여기서 '대적'이란 일차적으로는 바벧론이 되겠
으나 추상적 영향력인 '근성'따위도 될 수 있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르'
(* ) 자체가 '대적'이란 뜻 외에 '슬픔', '곤경'등의 뜻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
다. 그리고 6, 13, 19, 28절 등에서 계속 '근심'이란 표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
본문의 '차르'는 '근심'을 의인화한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Alexander).
=====107:3
남(* , 미얌) - 문자적인 뜻은 '바다로부터'이다. 구약에서 이 용어는 서
쪽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데 그 이유는 팔레스틴 땅의 서쪽 경계선은 바다인 지중해이
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앞에 '서'라고 하는 명사가 있기 때문에 '남쪽'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남쪽'과 '바다'의 개념을 연결시킨다면 남쪽 지방에 있는 '아라
비아 해' 정도가 연상된다.
=====107:4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 본문은 사막에서 그 갈 길을 잃은 대상(隊商)
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이 구절의 주어 '저희'가 누구인가라는 문제는 쉽지 않은데
'저희'를 해석하는 견해는 크게 둘로 나뉜다. (1) '저희'를 2절의 '여호와께 구속함
을 받은 자'와 연결시키는 해석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학자들은 또 두 부류로 나뉘는
데 한 부류는 본 시편을 특정 역사와 연관시키는 견해로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
를 예루살렘 함락 후 갈대아인을 피하여 광야로 도망친 유대인으로 보고 있다(렘 43
장). 뿐만 아니라 포로 생활을 마치고 귀환하던 중 사막에서 어려움을 겪은 유대인으
로 보기도 하고 포로지 자체에서 어려움을 겪은 유대인으로 보기도 한다. 또 다른 부
류는 특정 역사와 연관짓지 않고 '저희'를 좀더 넓은 의미에서 이해하는데, 곧 바벧론
포로가 아니라 이방 여행의 위험과 역경에 노출되어 있는 모든 유대인으로 보는 견해
이다. (2) '저희'와 2절의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와의 무관성을 강조하는 해석
이다. 이 견해를 따라 혹자는 이스라엘을 그 선조들의 땅으로 귀환시킨 하나님의 선
하심을 찬양함으로 본 시편을 시작하였던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명백히 드러
났던 또 다른 예들에 관하여 계속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또 다른 해석자들
은 바벧론으로부터의 귀환에 관한 언급을 위해 첨가된 서두의 세 구절은 그 뒤에 나오
는 좀더 넓은 범위의 주제와 연결시키기 위한 서론적 구실을 할 따름이라고 말한다.
이상의 견해들이 우리를 시원하게 해주지는 못한다. 따라서 한 견해를 절대적으로 의
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본 시편이 다양한 인생사를 묘사하고 있으며 포로 귀환 후의
감격적 상황을 노래한 것으로 추측하기는 하지만,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면 인간에게
닥치는 위험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인간을 구하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관하여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를 경험한 모든 자들이 그것을 감사함으로 인정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저희'를 역사 속의 특정한 무리에 굳이 고정
시켜 이해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거할 성(* , 이르 모솨브) - 문자적인 뜻은 '거주의 성'이다.
이는 다소 예루살렘이 의도되기는 했으나, 특정한 도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거주할 곳이 못 되는 광야와 대비되는 사람이 모여 사는 그 어떤 도시로 보아야 할 것
이다(7, 36절).
=====107:5
피곤하였도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티트아타프'(* )로서 원형
인 '아타프'(* )는 의복 따위로 '덮다'(65:13; 73:6), '자신을 숨기다', '어
둠이 덮다' 등을 뜻한다. 여기서는 재앙, 고통, 슬픔 따위로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상태를 가리킨다. 음식과 음료의 고갈로 인해서도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울 수 있겠다.
=====107:6
부르짖으매 - 궁핍 상태를 절실하게 느낄 때일수록 인간은 하나님께 매달려야 한
다. 기도는 의인의 자원일 뿐 아니라 고통 중에 있는 모든 자의 자원이다. 그리고
건지시고에 해당하는 '이칠렘'(* )은 '나찰'(* )의 사역형(히
필형)으로서 하나님이 당면한 모든 종류의 환난들로부터 구원하셨음을 뜻한다.
=====107:7
바른 길로 인도하사(* , 야드리켐 베데레크 예솨
라) - 문자적인 뜻은 '그는 그들에게 곧바로 길을 만들어 주셨다'이다. 즉, 하나님은
당신을 찾고 의뢰하는 백성에게 그들이 거하게 될 땅으로 가는 가장 안전한 지름길로
인도하셨다는 뜻이다.
=====107:8
본절에서 찬송하도록 권고받고 있는 대상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거할 성에 이르
게 된 자들(7절), 혹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 그리고 나아가 양자(兩者) 모두를 가리킬
수 있다. 일부 사람들에 의해 체험된 개별적 구원의 경험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
든 이들을 위한 구원 체험을 대표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Anderson).
=====107:9
본절은 렘 31:25을 상기케 한다. 여호와는 그의 백성의 모든 필요를 완벽하게 공
급할 수 있는 분이시다. 여기서 '사모하는'은 5절의 '목마름'에 상응하는 용어이다.
(사 29:8).
=====107:10
흑암 - 이것은 일차적으로 감옥에 갇힌 자의 침울하고 암담한 상태를 가리키나(사
42:7; 49:9) 절망, 비참, 혹은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사 5:30; 8:22; 9:2 등).
곤고와 쇠사슬 - 본 구절에 함축된 내용을 좀더 충분히 공개하는 구절로는 욥 36:8
이 있다 : "혹시 그들이 누설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 한편 본절에서부터
16절까지의 내용에 대해 탈굼역(Talgum)은 시드기야와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바벧론 포
로지에서 당한 일로 번역하며, 반즈(Barnes)같은 주석가는 바벧론 포로민들의 불행과
구원에 관련짓는다. 이 구절들의 정확한 역사적 배경을 확정짓기란 쉽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 범죄한 자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조치가 있기까지 흑암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레 24:12; 민 15:34 참조).
=====107:11
말씀...뜻 - 후자는 '아차트'(* )로서 '권고'가 적절한 의미이다. 이 두
용어는 율법에 주어진 하나님의 계명들과 그의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된 그의 권고를
뜻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본절 전체가 풍기는 뉘앙스가 이스라엘의 신정 국가적
성격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절이 염두에 두는 대상은 좀더
넓게 확장시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양심에 기록된 법, 내적 계시를 통해 준 교훈
(16:7)을 무작정 배제해 버릴 이유는 굳이 없겠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입장을 돕는 단
서로는 '멸시 함이라'가 신정적(神政的) 차원 내에서의 신성 모독을 가리킬 때 (민
14:11, 23; 16:30; 신 31:20) 뿐만 아니라 좀더 일반적인 의미로 곧 지혜로운 권고의
거절을 가리킬 때(잠 1:30; 5:12; 15:5)에도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107:12
수고로(* , 베아말) - '아말'(* )은 수고뿐 아니라 골칫거리,
고통, 실망, 패배, 슬픔 따위 모두를 포함하는 말이다(창 41:51; 신 26:7; 욥 3:10;
16:2).
저희 마음 - 그들의 자만심, 자기 만족성 등을 뜻한다. 그들은 하나님 없이도 모
든 일을 잘 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상적인 경험이나 자원
들을 의존하며 스스로 만족해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이 헛됨을 보
이시기 위해 그들을 비참케 만드셨다.
=====107:13
부르짖으매...구원하시되 - 본 시편은 크게 네 부분(1-9절; 10-22절; 23-32절;
33-43절)으로 구분되는데 본절과 같은 내용이 10-22절에 또 한 차례 반복되는 것(19
절)을 비롯하여 두 부분에 한 차례씩 반복되고 있다(6, 28절). 이러한 유사 구절의
적지 않은 반복을 통해 우리는 본 시편이 인간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섭리뿐 아니라 인
간들의 탄원 및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강조하는 시임을 알 수 있다.
=====107:14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 - 이것은 감옥수의 해방을 그리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
다. 10절의 주해를 근거로 할 때 이 표현은 영적인 의미 혹은 실제적인 의미, 둘 모
두로 해석될 수 있다.
=====107:15
문장 구조를 살필 때 10절에서부터 본절까지는 커다란 하나의 절(節)의 형태로 되
어 있으며 본절에 와서야 전체 구분을 대표하는 동사가 나타남을 알 수 있다. 10절의
'사람이...앉으며' (개역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으나 원문에는 '...에 앉아 있는 사
람'으로 되어 있다)를 분사적 주어로 볼 때 그 동사는 본절의 '찬송할지로다'가 되겠
다. 이렇게 보면 11-14절은 하나의 삽입구가 되겠는데 이 삽입구를 좀더 분해해보면
11, 12절은 주어의 이유를, 13, 14절은 분사적 주어에게 당면되어진 징벌 상태 이후의
일들을 각각 담고 있다. 이상의 주해를 놓고 볼 때 10절에서부터 본절까지에서 강조
하는 바는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았던 자가 하나님께 '찬송을 드려야 한다'는 사실
이다. 물론 그가 그처럼 부정적인 상황에 있었다가 그 상황으로부터 회복된 사실도
중요하다. 그러나 문장 구조를 살필 때(10-15절) 보다 중요한 것, 보다 강조되고 있
는 바는 그가 찬양을 드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본 시편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환난과 곤고로부터 새로이 구출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리는 일
은 너무도 마땅하고 중요한 일임을 강조해서 가르치고 있다.
=====107:16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 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 - 성경에서 '놋'은 강함과 견고함(렘
1:18; 15:20), 목이 곧고 패역함(사 48:4), 로마 제국(단 2:32, 39), 바벧론 제국(렘
15:12) 등을 상징한다. 여기서 '놋문'이 깨뜨려졌다는 말은 바벧론이 멸망했다는 것
을 의미한다. 바벧론이 멸망했으므로 그 나라에 포로되었던 민족이 해방을 얻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은 바사 왕 고레스에게 본문과 유사한 용어들을 사용하여
바벧론 멸망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선포하신 바 있다 :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사 45:2). 이는 고레스를 사용하여
바벧론의 세력을 멸망시킬 것을 예언한 내용이다. 아마 본 시편 기자는 그 냉용에 익
숙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에 의하면 바벧론 성벽
에는 실제로 청동으로 만들어진 문이 무려 100개 가량이나 있었다고 한다.
=====107:17
미련한 자(* , 에월림) - 육신적인 탐욕에만 몰두하는 자를 흔히 이렇
게 부른다. 그는 경고에 귀가 멀고 훈계를 멸시하는 세상적이고, 육욕적이며, 이기적
인 마음을 소유한 자이다(잠 1:7; 12:15).
범과(* , 데레크 피쉬암) - 직역하면 '범죄의 길'이다. 이 표현
은 어떤 악한 행실의 과정, 어그러진 생활 습관 등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곤난을 당하매(* , 이트아누) - 원문을 직역하면 '그들이 스스로 그들
에게 고난을 가져오고 있다'이다. 이는 미련한 자가 징벌을 받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그에게 책임이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표현법이다. 그 의미사의 차이는 약간 있지
만 동일한 동사형을 사용하고 있는 구절로는 왕상 2:26을 들 수 있다. 한편, 원문에
는 현재를 나타내는 미완료형의 시제가 사용되고 있는데 그 까닭은 미련한 자의 고통
당하는 모습을 좀더 강력하고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서이다.
=====107:18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구원하시되 - 이에 대해서는 13절 주석을 참조
하라.
=====107:19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고치사 - 마치 병중에 있던 히스기야 왕에게 이사야 선지
자를 통해 하나님이 기쁨의소식, 즉 '완쾌된다'는 말씀을 들려주신 것처럼(왕하 20:4;
사 38:4) 간접적으로 말씀을 전하여 낫게 하시거나, 직접 말씀하사 낫게도 하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능하신 권능을 지니기 때문에 말씀하신 그대로 성취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적 치유에서 보다 확연
히 드러난다. 한편, 이와 유사한 표현이 나오는 곳으로는 105:19; 147:15, 18 그리고
사 9:8; 55:11 등이 있는데 이 구절들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말씀을 그리스도 곧 하
나님과 동일시하는 교리(요 1:1)의 구약적 암시를 읽을 수 있다. 참조로, 어떤 학자
는 '말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바르'(* )를 '데베르'(* , 역병)
로 읽어, 본절을 '그가 역병을 보내셨으나, 그들을 고치시고 악성 종기들로부터 구해
내셨다'라고 해석하기도 하나(Dahood) 무리한 해석이라 하겠다.
위경에서(* , 미쉬히토탐) - 영역본 NIV는 '무덤으로부터'(from
the grave)로 번역하고 있는데 문맥이 죽음에 가까이 있는 상태를 암시하고 있다는 사
실 때문에 그런 것 같다(18절). 그리고 KJV나 RSV 등은 '파멸로부터'(from
destruction)라 번역한다. 어떤 구약 학자는 고통받고 있는 자가 빠져 있는 고통을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인 '구덩이들'로 이해하고 있다(Delitzsch). 그리고 또 다
른 학자는 그들이 고통받는 까닭은 결국 범죄 때문이므로 '죄악들'로 번역하기도 한다
(Hitzing).
=====107:21
그를 찬송할지로다 (* , 요두) - 거의 죽음의 경계에까지 갔던 자가 회
복되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대목의 글이므로 감정을 넣어 '오! 그분을 찬송하라'로 번
역하는 학자도 있다(Barnes). 이 같은 번역은 생명을 위협하던 질병으로부터 회복된
뒤 부른 히스기야의 찬양의 일부를 연상시킨다 :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니 우리
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노래하리로다"(사 38:20).
=====107:22
감사제(* , 제바흐) - 교제 혹은 나눔의 제사를 뜻한다. 본 제사의 특징
은 제물의 일부분, 예를 들면 기름 덩어리만 번제단 위에 불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에
게 돌린 몫을 제외 하고는 예배에 참석한 대중이 함께 나누어 먹는다는 데에 있다.
희생 제물은 암수 관계없이 소, 양 혹은 염소 등에서 취했다. 문맥상 본 제사가 기록
된 핵심은 '나눔'에 있다. 죽음의 지경에까지 갔었으나 회복된 자는 개인적으로만 하
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릴 것이 아니라 예배 공동체와 함께 고기를 나누며 자신이 경
험한 바 하나님의 구원을 전해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리도
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107:23
선척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영업하는 자 - 본 시편이 그리고 있는 장면은, 사
막에서 방황하는 자의 모습에서 감옥에 갇힌자의 모습으로 그리고 본절로부터는 깊고
큰 바다를 오가며 장사하는 해상 무역인의 모습으로 바뀐다. 저자는 본절에서부터 32
절까지에서 해상 무역상들의 경험을 시의 소재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구약 당시에 이스라엘이 차지하고 있었던 가나안 땅에서 바닷가와 접하고 있었던 땅은
서쪽이었는데, 이 해안 지대의 상당 부분은 블레셋 및 가나안 민족이 차지하고 있었
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주로 정착했던 곳은 산간 지대나 트랜스 요르단 지역이
었다. 따라서 히브리인들 중에 해상 무역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자는 거의 없었다.
해상 무역에 종사했던 자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이방인인 페니키아인, 블레셋인 등이었
다. 그러므로 23-32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을 문자 그대로의 해상 무역인들로 볼 경
우 이들은 다름 아닌 이방인들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볼 경우 그 해석은 난관에 봉착
하고 만다. 그들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대목이 나오기 때문이다(28절). 우리는 이 문
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본 구절들이 특정한 직종에 종사하고 있는 자가 아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고해와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모든 자들을 그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즉, 23-32절은 고해와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인간의 위험 및 구
원을 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107:24
여호와의 행사와 그 기사 - 파도로 하여금 하늘에 닿을 듯 뛰어오르게 하는 강풍과
그 파도를 봄날의 부드러운 공기처럼 잔잔하고 고요하게 만드는 미풍을 주관하시는,
자연계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연상케 하는 말이다.
=====107:25
여호와께서 명하신즉 -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묘사하고 있는 창 1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이다. 105:31, 34에서도 동일한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바다 물결을(* , 갈라) - 문자적인 의미는 '그곳으로부터 온 파도들을'
이다. '그곳으로부터 온'의 히브리어 대명사적 접미사는 좀 떨어진 23절에 있는 명사
'바다'를 가리키는데 히브리어에서 이 같은 예는 보기 드문 경우가 아니다.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예로 111:10을 들 수 있는데 그곳에서 '그 계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복수 대명사는 111:7에 있는 '법도'를 가리킨다. 어떤 의미에서 본절의 대명사적 접
미사는 24절에 있는 명사 '깊음'(개역 성경에는 '바다'로 되어 있으나 원문에는 '깊
음'으로 되어 있다)을 동시에 가리킬 수 있다.
=====107:26
저희가 - 이것은 휘몰아치는 파도에 휩쓸리는 배에 탄 선원들을 가리키는 것이 분
명한데, 왜냐하면 본절 말미의 주어가 '그 영혼'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깊은 곳에 내리니 - 원어상으로 24절의 '바다'(* , 메촐라)와는 다른
'깊은 곳'(* , 테호모트)이란 용어가 사용되기는 했지만 그 의미하는
바는 동일하다. 바다 혹은 대양은 그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본문은, 인간이 마치 그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바닷 속으로 가라앉듯 그 끝을 알 수
없는 위험과 고통의 무저갱 속으로 떨어져 버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표현이기
도 하다.
그 위험을 인하여 그 영혼이 녹는도다 - '녹는도다'에 해당하는 '무그'
(* )는 '녹아 내리다', '부드러워지다'등을 뜻하며 두려움이나 공포 때문에
그 용기와 활력을 잃은 마음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하는데 여기서 바로 이 같은 의
미로 사용되었다(출 15:15; 수 2:9, 24; 나 1:5).
=====107:27
이리저리 구르며(* , 야호구) - 문자적인 뜻은 '빙빙 돌며'로서 하나
의 원 주위를 계혹 맴돌며 춤을 추는 모습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된다.
지각이 혼돈하도다.(* , 칼 하크마탐 티트발라) - 문
자적인 뜻은 '모든 그들의 지혜는 바닥이 났다'이다. 말하자면 항해사들의 배를 조종
하는 모든 기술이 무익한 상태에 처했다는 것이다. 항해사들은 지식적으로 배운 항해
술과 바다를 항해해 본 경험을 가지고 능숙하게 배를 조종하기 마련인데 이제 그 능력
들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파도 앞에 항
새사들의 보잘것없는 지식 및 경험은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위급한 상황
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파도를 명령하는 자이신 하나님께 호소하는 일뿐이다.
고해와 같은 인생을 사는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스스로 쌓은 지식과 경험으로
헤쳐 나갈 수 없는 위경을 만나기 마련이다. 그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
지, 하나님 앞에 엎드려 도우심을 호소하는 것뿐이다.
=====107:28
근심 중에서...부르짖으매 -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
할때 인간은 믿는 자건, 믿지 않는 자건 초월적 존재에 의존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의존 대상은 하나님뿐이시다. 그러나 본절이 난관에 봉착했을 때만 하
나님을 의존하라고 가르치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여기서 위경으로부터의 탈출에
서 분명히 목격한 하나님을 순탄할 때에도 의존하라고 하는 가르침을 읽어낼 수 있어
야 하겠다. 하나님이 위경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좀더 하나님을 의존하게
만들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많은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의존, 그와의 동행
에서 오는 기쁨과 평안을 주요한 주제로 삼고 있다 (73편 등).
=====107:29
광풍을 평정히 하사 - 이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예수께서도 이 일을 행
하심으로써 그가 하나님이심을 입증하셨다(마 8:26). 말씀 한마디로 거칠게 뛰놀던
폭풍을 잠잠케 하는 능력만큼 하나님의 능력을 가시적으로 입증하는 것도 드물다 하겠
다.
물결(* , 갈레헴) - 문자적인 의미는 '그들의 파도들'이다. '그들'을
'바다'로 본다면 그 '바다'란 23절의 '큰 물'을 말하며, '선원들'로 본다면 '파도들'
이란 선원들을 그 위에 올려 놓고 이리저리 내던지며 위협하던 그 파도들을 말한다.
=====107:30
평온함(* , 솨타크) - 폭풍 후의 바다의 고요함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
지만(욘 1:11, 12) 다툼의 종식을 뜻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잠 26:20).
소원의 항구 - '항구'로 번역된 '메호즈'(* )가 구약 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용어이기 때문에 본문을 해석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소원'으로 번역된
'헤프참'(* )이 '소망하는 대상'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용어임이 분명하기
때문에 본 구절 전체는 '바라던 그 목적지'등으로 보면 되겠다. 바라던 목적지로는
기업, 태어난 고향, 선조의 무덤이 있는 곳, 처자가 있는 곳 등을 들 수 있겠다. 본
문의 항해를 일종이 인생 여정으로 보는 어떤 학자는 이것을 '죽음'으로 해석하기도
하나 다소 어색하다. 아무튼 본절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 올바른 삶
의 도리를 배운 인생들을 그들의 바라던 곳,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이 있는 목적지로
그들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이다.
=====107:31
기이한 일 - 이것은 바다의 위험 가운데서 인도하신 일을 말한다(8, 15, 21절과 비
교).
=====107:32
백서의 회에서 -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개인적으로만 간직하지 말고 공개하라는 의
미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공개자가 경험한 일은 그의 이야기를
듣는 모든자들도 경험할 수 있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장로들의 자리에서 저를 찬송할지로다 - 여기서 '장로들'(* , 제케님)
은 수염이 난 모든 성인(成人)들, 좀더 명확하게는 가정의 가장들을 의미하기도 하며
(삿 20:2; 렘 26:17) 한 종족이나 지파를 대표하는 지도급 인사들을 가리킬 수도 있다
(Kraus). 본절에서는 전반절에 '백성의회'가 나오므로, 일반 백성들과 구분하여 지도
자적 위치에 있는 자들로 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107:33
강을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 '강'(* , 네하로트)은 일반적으로
그 흐름이 끊어지지 않는 긴 하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하수를 물 한
방울 없는 바짝 마른 광야로 바꾸는 일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본문은
자연계를 향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암시해 준다.
=====107:34
거민의 악을 인하여 - 뒤에 이어질 불행한 결과의 원인이 제시되고 있는데, 불행한
결과를 묘사하는 대목에 '염밭'이란 용어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
도성을 녹여버렸던 징벌 사건을 회상할 수 있다(창 19장; 신 29:23; 사 1:9).
옥토(* , 에레츠 페리) - 문자적인 뜻은 '열매의 땅'이다. 말하자
면 수확거리를 풍성히 내는 땅을 가리킨다. '수확거리'란 특정 품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땅이 낼 수 있는 모든 품종을 말한다.
염밭(* , 멜레하)은 '소금기가 많은 습지'를 뜻한다. 아마도 '열매의
땅'과 대비를 이루는, 산성이 많아 쓸모가 없는 땅에 대한 은유적 표현일 것이다. 사
해 부근에는 이런 종류의 땅이 많다고 한다. 본절은 그 땅 거민의 악행을 두고 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엄정한 심판을 암시하고 있다.
=====107:35
본절을 형성하고 있는 용어들은 사 41:18, 19 내용과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준다.
어떤 학자들은 본절을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과 연결시켜, 33, 34절은 유대인의 바벧론
포로로 황량해진 본토를 묘사하는 것이며 본절은 그들의 귀환으로 변경된 본토의 상황
에 대한 묘사라고 한다. 이들은 이 같은 주장의 근거로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
방 시대들 같이 돌리소서" 라고 읊고 있는 126:4을 들고 있다. 이러한 견해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본절이 특정한 역사적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고만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본절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크신
은총을 나타낸다고 하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도 이해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
의 눈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가능케 하실 수 있다.
=====107:36
주린 자로 거기 거하게 하사 저희로 거할 성을 예비케 하시고 - 굶주린 자들이 비
옥한 땅에 정착하여 번영을 누리며 도시를 건설케 된다는 것이다. 고대에는 특히 팔
레스틴과 같은 곳에서는 식수나 용수(用水)가 잘 조달되고 토지가 비옥한 지역에 인구
가 번성하기 마련이며 도시가 번창하기 마련이었다(VanGemeren).
=====107:37
소산을 취케 하시며 - 정직하게 땀흘려 열심히 일하는 자는 과거의 굶주림에서 벗
어나 하나님의 축복의 산물인 땅의 산물을 얻게 될 것이다(사 49:19; 54:1; 겔 36:30,
33-36).
=====107:38
저희로 크게 번성케 하시고 - 당시 자식의 수가 느는 것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총의 증거로 후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을 것이라는 약속을 자주 족장들에게 하셨다(창 13:16;
22:17; 26:4; 32:12).
=====107:39
다시...저희로 감소하여(* , 얌아투) - 문자적인 뜻은 '저희들은 그
수가 줄어짐을 당하여'이다. 수동적 의미가 강한 용어이다. 말하자면 모든 것이 하
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지시 하신다. 번영이 있
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 온것이요, 그 상황이 역전되었다 해도 그것 역시 하나님의 손
아래서 되어진 일이다. 인간은 항상 번영할 수 없다. 그의 인생 여정에는 변화와 불
행과 실망과 슬픔이 있다. 하나님은 때로는 징계의 목적으로, 때로는 연단의 목적으
로 환난을 허용하시는 분이다. 만일 하나님이 인류에게 항상 번영만을 주실 경우, 인
간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더 나아가서는 그것이 하나님께로 온 것을 잊고 결
국엔 하나님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위험에까지 이르게 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의 간섭과 통치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이기 위하여, 그리하여 인생들로 하나님만 전
적 의지케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들에게 번영을 주기도 하시고 역경을 허락하기도
하신다. 본절을 40절의 조건절로 보는 학자도 있는데 그럴 경우 원문상 서로 다른 주
어를 취하고 있는 이 두 절의 호응 관계는 어색해진다. 따라서 본절을 조건절로 보는
견해는 바람직하지 않다. 도리어 본 시편 기자가 자주 취하고 있는 대조법의 구도 속
에서 본절을 보는 것이 무리가 없다. 저자는 33, 34절을 그리고 38절과 본절을 그리
고 40절과 41절을 대조시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107:40
방백들에게 능욕을 부으시고 - 본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묘사하고 있는
일련의 분사적 문장들의 일부인 욥 12:21 내용과 밀접한 연관성을 드러낸다. 여기서
는 후속절에 대한 직접적 대조를 형성하기 위함뿐 아니라 36절에 대한 대조를 암시하
기 위하여 소개되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방백'(* , 네디빔)은 귀인
(貴人) 곧 지도층 인사로 보면 무난하겠으나, 본 문맥상으로는 특히 유다의 마지막 두
왕 곧 여호야긴과 시드기야를 연상하게 만든다(왕하 24:8-20). 하나님은 사회적 신분
이 높은 방백들에게도 차별없이 동일한 대우를 하시며 신분이 높은 자와 낮은 자를 동
시에 그의 통치권 아래 두시고 있다.
길 없는 황야(* , 토후 로 다레크) - 여기서 '토후'
(* )는 창조 전 '혼돈'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던 용어이다(창 1:2; 렘 4:23).
그렇다면 본 구절은 앞뒤 좌우를 분별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비유할 수 있는
인생 여정의 일부를 연상시킨다 하겠다.
=====107:41
궁핍한 자는 곤란에서 높이 드시고 - '높이 드시고'는 '예사게브'(* )로
'높게 되다'(20:1; 69:29)를 뜻하나 본절에서처럼 강의형(피엘) 동사가 쓰이면 흔히
'보호하다', '지키다' 등을 뜻하게 된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사회적 약자들을 계속되
는 고통으로부터 보호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물질적으로 부유한 방백으로 멸시
를 당케 하고 앞뒤 좌우를 분별할 수 없는 난관에 넣으셨던 하나님은 대조적으로 가난
한 자들을 계속되는 빈곤으로부터 보호하신다.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통치적 섭리가
다시 한번 강조되고 있다.
=====107:42
정직한 자는...기뻐하며 모든 악인은...입을 봉하리로다 - 하나님의 역사 개입은
항상 이렇듯 두 부류의 대조적인 반응을 낳기 마련이다. 성도들의 궁극적인 소망 역
시 하나님의 최종적인 판결에 두어져야 함이 마땅하다.
=====107:43
개역 성경에는 생략된 원문 초두에 있는 의문사 '미'(* )를 넣어 본절을 제
대로 직역하면 이렇다 : '이 모든 것을 목도하고 여호와의 인애를 이해할 지혜자가 누
구이겠는가?' 이 같은 결구적 의문문은 호세아 선지가 그의 선지서를 마감하면서 던진
말을 상기케 한다 :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
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호 14:9). 저자는 자신이 본 시편에서 밝힌 바, 온 인류의 삶
을 통치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을자가 많지 않을 것을 암시하는 듯한 의문
형의 결구(結句)를 사용함으로써 역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일에 전심을 기울일 것을
촉구하고 있다.
시편 제 108편
=====108:1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 57:7에는 이 구절이 두 번 반복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한
번만 언급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심령으로 감사 찬양을 드리겠노라고 하는 시인의
신념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내 심령으로 찬양하리로다 - 맛소라 본문(MT)을 보면 본절의 '내 심령'이나 57:8의
'내 영광'이 동일한 히브리어 '케보디'(* )로 되어 있으나 서로 다른 문
맥에서 나타나 있다. 여기 '카보드'(* )는 '영광' 또는 '심령'의 뜻으로
번역될 수 있으며, 이는 한 사람의 인격의 가장 고귀한 부분을 가리킨다. 그리고 본
절에서는 찬양으로 감사제를 드릴 것에 대한 시인의 확신에 찬 신념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고 57:8에서는 찬양에 대한 계속적인 촉구의 문맥에서 사용되었다.
=====108:2
새벽을 깨우리로다 - 새벽은 하루를 새롭게 여는 가장 신선한 시간이다. 이런 새
벽 시간에는 심령이 더욱 정결하고 경건해질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시인이 이같이
고귀한 마음 상태로 여호와를 찬양할 것을 다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신앙 자세
가 어떠함을 짐작케 된다. 즉, 그는 여호와가 인간의 가장 고귀하고 숭고한 전인격의
중심(카보드)으로 찬양을 드려 마땅한 분임을 신앙하고 있는 것이다.
=====108:3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 57:9에서는 '여호와여'(* ,
예화)가 아니라 '주여'(* , 아도나이)를 쓰고 있다. 여기서 시인이 '만민
중에서' 찬양할 것을 다짐하는 말은 9, 10절에 비추어 해석해 볼 때 종말론적으로 여
호와께서 온 세상을 통치하게 되리라는 확신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108:4
대저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 위에 광대하시며 - '주의 인자'(헤세드)는 6, 12절에
언급되는 바 구원의 근거가 된다. 57:10에는 '...에 마치고'라는 뜻의 '아드'
(* )가 쓰였으나 여기에는 후기 히브리어에서 주로 사용되는 '...위에' 라는 뜻
의 '메알'(* )이 쓰였다.
=====108:5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으시기를 원하나이다 - 여기에 다시 '영광'
(* , 케보드)이 언급되고 있는데 1절의 케보드('심령'으로 번역됨)와는 달
리 하나님의 위엄과 고귀함을 나타낸다. 그리고 '온 세계 위에'는 만방 위에 뛰어날
이스라엘의 영광을 암시한다고 이해해 볼 수도 있겠다.
=====108:6
주의 사랑하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 이는 60:5과 동일하다. 그러나 본시에서는
'주의 사랑하는 자'가 1절의 '심령으로 찬양하는 자'와 연관이 있으나 60편에서는 다
른 문맥에서 연결되고 있다. 한편, 이 구절은 '주의 인자하심'(4절)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그의 영원한 인자와
언약에 대한 성실하심 때문인 것이다.
=====108:7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 여기서 '거룩하심'이란 만유 위에 뛰어나
신 주의 초월성과 온 세계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주의 거룩하심은 또한 하나님의 주권의 기초가 되는 것이며 구원의 보증이 되는 것이
다. 한편 NIV에서는 이 구절을 '그의 성소로부터 말씀하시되'(has spoken from his
sanctuary)로 번역하고 있는데 성소가 '하나님의 통치와 영광이 비롯되는 곳을 상징하
는 초소임을 고려할 때 이러한 번역도 의미가 깊다.
내가 뛰놀리라 - 대부분의 영역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승리의 기쁨을 나타내는 뜻
으로 번역하고 있다(I will rejoice, KJV; with exultation. RSV). 그리고 혹자는 특
별히 이 단어가 전쟁에서의 승리를 얻은 기쁨을 나타낸다고 한다(Dahood). 9절의 '내
가 외치리라'도 승리의 기쁨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또 어떤 사람은 이 단어를 '내가
그곳으로(성소로) 올라갈 것이다'로 해석하기도 하는데(C.R. North), NEB 성경도 같은
견해이다.
=====108:8
길르앗...므낫세...에브라임...유다 - 이 네 도시는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의 주요
도시인데 본절은 다윗에 의해 통일된 이스라엘 국가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하에서 번
영되기를 원하는 시인의 소망을 담고 있음과 아울러 장차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원형
으로서 이스라엘이 소개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나의 홀이며 - '홀'(笏)은 왕의 권위(에 4:11), 지도자(창 49:10), 약속된 메시야
(민 24:17), 그리스도의 통치(히 1:8) 등을 상징한다. 이로 볼 때 본문은 유다 지파
가 하나님의 권한을 대리하여 이스라엘을 주도해 나갈 것을 뜻하며, 아울러 예표적인
측면에서는 유다 가문을 통해 오실 메시야(마 1:1)의 구원 사역을 암시한다.
=====108:9
블레셋 위에서 내가 외치리라 - 60:8에는 '블레셋아 나를 인하여 외치라'로 기록되
어 있다. 이는 본 시의 수집자가 블레셋에 대한 승리를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수정하
였을 것으로 본다(Rawlinson). 한편, 본래 60:8은 약간의 풍자를 띤 구절로서 블레셋
이 여호와로 인하여 두려워 외치게 될 것을 암시한다고도 이해 가능하다(Delitzsch).
=====108:10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 맛소라 본문(MT)을 보면 60:9의 '견고한'
이란 뜻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로 '마초르'(* )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바
위로 된'이란 뜻이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미브차르'(* )가 쓰였고 이는
'요새화된'이란 뜻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미브차르'가 더 자주 쓰이며, 창 36:42
에 언급된 에돔 족장 가운데 한 사람이 '밉살'(* )이다. 따라서 여기서
'견고한 성'은 곧 '에돔의 성'을 가리킨다.
=====108:11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 이는 60:10과 완전히
일치한다. 7-10절에서 보여 주었던 승리의 확신과는 달리 본절에서는 다시 현실로 돌
아와 접전(接戰)중에서 느끼는 시인의 당혹감과 여호와의 도우심에 대한 절실한 요청
이 잘 나타나 있다.
=====108:12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 11절에서 보여 주었던 당혹감은 본절에서 간절
한 기도로 승화되었다.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 이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요청으로서 궁극적인 구
원은 인간의 손으로가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함을 시사한다.
=====108:13
저는...대적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 - 시인의 이러한 확신은 '주의 인자하심'(4절)
에 기초한 것으로서 60편과 약간 다른 각도에서 해석된다.
시편 제 109편
=====109:1
나의 찬송하는 하나님이여 - 본시의 주제가 환난에 대한 탄원이기 때문에 '찬양의
노래'란 말이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 시 전체
에 흐르는 분위기는 다소 우울하고 슬픈 음조를 띠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은 자
신의 이러한 불평과 탄원이 하나님께 상달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당히
찬송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이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앙의 지조를
버리지 않는 성도의 바른 자세를 더욱 고무시키며 성도의 눈물마저도 하나님께 찬양의
노래가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키는 구절이라 하겠다.
잠잠하지 마옵소서 - 자신을 해하려고 덤비는 대적들을 그냥 두고 보시지 말고 막
아달라는, 즉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을 호소하는 탄원이다. 이는 자신이 당하는 환
난과 핍박에 대해 하나님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실제로 하나님은 눈
을 떼지 않고 계시리라는 믿음을 역설적으로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대적들
로부터 이유없이 비방을 받고 악한 자로 여김을 받는다 하더라도 하나님만이 자신의
무죄를 아시고 판단해 주신다면 주를 찬송할 수 있다는 굳건한 신앙의 면모를 엿보게
한다.
=====109:2
대저 - 히브리어 '키'(* )에 해당되는 말로서 원인이나 이유를 나타내는 접
속사이다.
악한 입과 궤사(詭詐)한 입 - 30절에는 시인이 입으로 여호와께 감사한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어 본절과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악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솨'
(* )는 구체적인 악행을 나타내며 허망한 풍설(風說)을 전하거나 무함(誣陷)
하는 증인인 악인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출 23:1). 그리고 '궤사한'의 히브리어
'미르마'(* )는 다분히 추상적인 행위를 나타내고 있다. 이말은 '속삭이
다', '기만하다'(beguile, deal treacherously with)는 뜻의 '라마'(* )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지적하는 중에 거짓 제물로 무게를 속
이는 내용을 언급하는데, 저울의 눈금을 속인다는 것을 표현할 때 이 단어가 쓰였다
(암 8:5). 구상 명사와 추상 명사가 이렇게 균형있게 쓰인것은 다윗 시에 흔히 등장
하는 시적 기교이다. 여기서 우리는 악인들이 의인을 괴롭힐 때 우선 무고한 말이나
속이는 말로 중상 모략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윗은 사울과 시므이 등으로부터
이러한 비방과 저주를 받았던 바 있다. 우리 주님께서도 지상에 있을 때 유대인들로
부터 엄청난 비난과 저주를 받은 바 있으며, 심지어는 귀신의 힘을 빌어 능력을 행한
다는 말까지 들은적이 있다(마 9:34).
입을 열어(* , 파타흐) - 이 말은 야수(野獸)가 먹이를 잡아먹기 위해 입
을 벌리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말이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한탄하며 이렇
게 말했다 : "우리의 모든 대적이 우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렸나이다"(애 3:46).
거짓된 혀 - 혀의 위험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성경 구절 중에 야고보의 지적이
아마 가장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
라"(약 3:6). 한편 본절에서 시인은 악인들의 비방과 중상을 세 차례에 걸쳐 각기 다
른 표현으로써 강조하고 있는 바, 대적들의 독설(毒舌)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를
드러낸다(VanGemeren).
=====109:3
미워하는 말로(* , 다바르 시네아) - 앞 구절의 '거짓된 혀로'와
대구를 이룬다. 시편은 특히 대구법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므로 이러한 대구에 주의를
두고 읽을 때 한층 더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미워하다'란 뜻의
'사네'(* )에서 파생된 '시네아'는 단순히 감정상의 문제가 아니라 살인을 부
를 정도의 심각한 증오심을 가리키며 관념이나 생각으로서의 증오심을 넘어 실체적이
고 행동적인 미움을 뜻한다. 모세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스라엘의 불순종하는 모습
을 이 단어로 묘사한 바 있다(신 1:27). 그리고 민 35:20에서는 살인의 원인을 미움
으로 언급하고 있다.
나를 두르고(* , 세바부니) - 22:16에서 이 말은 개들이 먹이를 두
고 다투는 상황과 연관되어 사용되고 있다.
=====109:4
나는 사랑하나 - 이는 다윗이 핍박자에게 어떠한 해(害)도 끼치지 않았음을 분명하
게 보여준다. 그들은 정당한 이유없이 다윗의 원수로 자처하며 다윗을 공격하고 미워
하였다. 다윗은 그들의 친구로 지내왔으며 단순히 그들에게 악을 행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자비를 행하였던 것이다.
나를 대적하니 - 이 말 속에는 '나를, 도리어 나를 비방하니'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사랑을 베푼 결과, 주어진 것이 너무나도 뜻밖에 적대감이라는 데 대한 당혹감
이 곁들여져 있다 하겠다. 사랑을 사랑으로 보답하지 않고 도리어 악으로 갚은 것은
분명 사단의 장난이다. 즉, 사단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을 도리
어 미워하고 핍박하는 것이다.
나는 기도할 뿐이라 - 이에 해당하는 원문인 '와아니 테필라'는 '그러나 나로 말하
면 기도뿐이라'는 뜻이다. 영역 성경 중 KJV나 NIV는 원문상의 의미에 충실하게 번역
하고 있다(but I give myself unto prayer, KJV). 반면, 어떤 학자들은 '나는 사랑하
나'를 '나를 대적하니'란 말에 연결시켜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럴 경우 본문은 '내가
그들을 위해 기도함에도 불구하고'(even as I make prayer for them, RSV)가 된다.
다윗은 온갖 거짓과 교활한 말로 공격당할 때 악을 악으로 갚는 합당치 못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하나님께 호소함으로써 오히려 악으로부터 보호
받을 수 있었던 것같다. 우리가 때로는 이유없이 손해를 보고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에 이를 보고하려고 하기 쉬우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고 선으로써 악을 이
기는 것이 성도들의 바른 자세임을 깨닫게 해준다(롬 12:21).
=====109:5
저희는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 악인들의 배은 망덕(背恩忘德)하는 속성을 여실
히 보여주는 구절이다(35:12; 38:20; 렘 18:20; 요 10:32; 15:25). 여기서 이에 해당
하는 히브리어 '와야시무'(* )는 '야시무'(* )에 대한
'와우'(* )강조 요법으로 되어 있다. 본문에 언급되고 있는 시인의 원수들은 마
귀의 상용 수단인 선을 악으로 갚는 방법으로 시인을 저주하였다. 이런 자들에게는
기도가 오히려 저주로 여겨진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뒤바뀌어 버려 선이 악이 되
고 악이 선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7절 참조).
=====109:6
악인 - '라솨'(* )는 하나님이나 그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를 가리킨다
(145:20; 잠 24:20; 합 1:4). 이사야는 이러한 악인의 특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 "악
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사 26:10).
저를 제어하게 하시며 - 본문은 다소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이다. 게데스(Geddes)
의 경우에는 이를 '저가 악한 심판으로 고난을 당하게 하시며'로 번역하여, 법정에서
재판받는 광경을 염두에 두었다. 하반절과의 대구적 관계를 고려할 때 이러한 해석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어떤 주석가는 악한 심판관이 과연 악인들의 악행에 합당한 판결
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본절 전반절의 히브리어 일부를 수정
하려고 히도한다. 예컨대 '라솨'를 '레솨'(* )로 바꾸어 전반절을 '죄악이
그에게로 돌아가게 하시며'의 뜻으로 해석하는 것 따위이다. 그러나 게데스의 입장을
따르더라도 별 무리는 없다. 왜냐하면 본문의 강조점은, 악인들이 무고하게 의인들을
핍박한 것처럼 그들 또한 무지막지한 심판 가운데 처하게 된다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사실은 다윗의 저주를 보고 무작정 이를 모방하며
분별없이 남을 저주하거나 욕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악인으로부터 받은 고
난에 집착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망각하고 보복심에 불타올라 악인과 똑
같은 범죄를 저지르기 쉬운 것이다.
대적으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사탄'(* )인데 영역본 KJV는 이를
초자연적인 영적 존재, 마귀 곧 사단(Satan)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1)이 말이 4,
20, 29절 등에서도 동사형이나 명사형으로 나오되 신의 적대자들로 언급되고 있고,
(2) 본절에서는 시인이 자신의 대적들이 도리어 그 악한 꾀에 버금가는 곤경에 빠질
것을 바라고 있다는 사실, 또한 (3) 본절의 상.하반절이 대구를 이룬다는 점 등으로
볼 때, 이 히브리어는 시인으 대적들을 도리어 대항하는 악한 세력(an accuser, NIV)
혹은 불의한 재판관(an unfair judge, LB)을 뜻한다고 봄이 더 무난하겠다.
그 오른편에 서게 하소서 - 재판정에서 오른편에 선다는 것은 고소자의 입장에 선
다는 말과 같다(Anderson, Kidner). 한편, 스가랴는 사단이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우
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광경을 목격하였다(슥 3:1). 스가랴서에도 분명히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대적이 오른편에 서는 것은 고소하고 대적하기 위함인 것이다. 반면
에 시인은 31절에서 대적의 위치인 오른편에 대신 여호와께서 서서 심판으로부터 자신
의 생명을 구해줄 것을 간구한다.
=====109:7
저가 판단을 받을 때에 - 이에 대해서는 (1) 사후(死後)의 심판이라는 견해와, (2)
지상에서의 심판이라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현실상의 모든
법적 판결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판단과 결부되어야 한다고 믿었고(출 18:13-27; 신
1:17), 또한 실제로 하나님의 판단을 묻는 방식이 시행되기도 했다는 점에서(출
28:15), (2)의 견해를 위한다고 하더라도 궁극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심문과도 무관한
것은 결코 아니다.
죄를 지고 나오게 하시며 - 이것은 어떠한 자비도 없는 가혹한 형벌을 요구하는 기
도이다. 즉, 악인들의 죄는 너무나 분명해서 정의의 집행을 모면할 방도가 없으며 용
서를 구해도 허락하지 말아달라는 무서운 저주의 기도인 것이다. 악인은 가장 비열한
방법으로 타인들을 괴롭혔으며 무고한 자를 정죄하며 달아나지도 못하게 하였다. 이
들이 그토록 심한 죄를 범했고 또 유죄로 판정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면하게 된다
면 이것은 공의의 하나님의 통치 질서에 위배된다고 시인은 판단한 것 같다. 네로나
갈리굴라 같은 대박해자들이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용서받게 된다는 것은 정말
온당치 못한 처사일 것이다.
그 기도가 죄로 변케하시며 - 악한 마음을 품고 악행을 저질러온 자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흉내를 내고 있다면 얼마나 가증스럽게 보이겠는가? 따라서 이들의 기도가
상달되지 말고 오히려 그의 호소가 죄를 덧붙이는 결과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는 당연
한 것이다. 그는 과부의 집을 삼키고도 오히려 기도하는 것이다.
=====109:8
그 연수를 단축케 하시며 - 세상을 괴롭히며 혼란스럽게 하는 악인보다는 미친개가
오래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의 생명이 단축되는 것은 곧 세상의 평화를 앞당
기는 지름길이다. 본문에서 '연수'(* , 야마)는 부사로 쓰이고 있지만 명
사로 해석할 수도 있다. 유대인들은 이 부분을 배반자나 사악한 자들에게 적용시키곤
하였으며 베드로는 유다의 급속한 죽음을 보고 이 말씀의 성취로 보았다. 즉, 갑작스
러운 죽음은 구약에서 현저한 죄를 범한 자에게 내려지는 형벌로 여겨졌던 것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저희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55:23; 잠
10:27; 전 7:17). 반면에 가난하고 궁핍한 자에게는 자비가 주어진다.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 - 베드로는 유다의 죽음 이후 그의 자리에 맛디아
가 임명된 사건을 두고 바로 이 말씀이 성취된 것으로 보고 이를 인용하였다(행 1:20,
26). 악한 인간은 좋은 직분조차도 나쁘게 만들기 마련이다. 이 말씀은 더욱 확장되
어 유대 민족에게 맡겨졌던 계시의 보고(寶庫)가 기독교 교회로 이전된 것으로 확대
적용되기도 하였다. 한편 '직분'에 해당하는 '페쿠다'(* )는 '직원(職員)'
(대하 23:18) 혹은 '쌓은 재물'(사 15:7) 등 두가지 뜻을 모두 지니지만, 대다수 최근
의 주석가들은 '직분'(office)으로 이해한다(Deissler, Eaton, Kraus). 왜냐하면 재
물에 관한 이야기는 11절에서 언급되기 때문이다.
=====109:9
고아가 되고...과부가 되며 - 한 남자가 죽으면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그 자녀
는 아비 없는 자식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시인은 강조적인 의미에서 이
렇게 표현하였다. 즉, 사악한 자의 최후는 자신의 죽음만으로 끝나지 않고 그의 보호
아래 호의 호식하던 처자식에게까지 심한 타격을 끼치고 말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
이다. 성경에서 과부나 고아는 특별한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회적 약자들로 거론되고
있는데, 이들에게 아무런 관심과 배려를 나타내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로서도 큰 불행
이 닥치게 될 것이다. 모든 고아와 과부에게는 동정과 연민을 베풀어야 마땅하지만
그 아비의 행위가 악독했을 때는 그들에 대한 동정의 근원이 말라버리는 것이다. 헤
롯은 베들레헴의 무죄한 아이들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그렇다면 그의 아내가 과부가
되었다한들, 그의 자녀가 고아가 되었다한들 슬퍼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이와 같은 무서운 저주의 말씀은 우리가 임의대로 해석하여 사용할 수는 없다는 점을
생각하여야 한다. 판사가 어떤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할 때 사심(私心)을 두지 않고
정의를 선언해야 하듯이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께 공의를 요청하고 있다.
=====109:10
본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도 있다. '그 자녀가 유리 구걸하며 빌어먹게 하시
고, 그들로 저희가 거하는 그 황폐한 곳에서 쫓겨나게 하소서'(Horsley). 이것은 썩
고 무너진 건물의 폐허 가운데서 한 가닥의 파난처를 이리저리 찾아다녔으나 그런 곳
에서조차도 거할 곳이 없는 가련한 상황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렘 18:21
참조).
유리 구걸 - 조상의 죄가 자손들에게 전해짐으로써 자손이 당하는 경제적 빈곤을
가리킨다.
그 황폐한 집을 떠나(* , 다레슈 메하르보테헴) - '떠
나'에 해당하는 '다라쉬'(* )는 '밟다', '쫓아내다'는 뜻 외에도 '찾다', '구
하다', '조사하다' 등의 의미도 지닌다. 혹자는 본문에서 이 단어를 '조사하다'는 뜻
의 수동형으로 해석하고 이 어구를 '그들의 집들이 평가인에 의해 조사되게 하시며'라
고 옮겼다. 그러나 이 번역은 문맥의 흐름에 다소 어색한 감이 있다. 따라서 그보다
는 '그들의 폐허가 된 집에서 양식을 찾게 하소서'(let them seek their bread also
out of heir desolate places, KJV), 혹은 '그들의 황폐한 집에서 쫓겨나게 하소서'
(may they he driven from their ruined homes, NIV) 등으로 번역하는 것이 무난할 것
이다.
=====109:11
고리대금하는 자 - 원문인 '노쉐'(* )를 번역한 말로서 채권자를 가리킨
다. 히브리어 '나솨'(* )는 동사로 쓰이면 '빌려주다', '강요하다'는 뜻이
되고, 명사로 쓰일경우는 '채권자', '강탈자' 등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이 말을 다
소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했는데 그 이유는 빚을 미끼로 가난한 채무자의 남은 소
유마저 철저히 빼앗아 가는 사례가 빈번했기 때문이다(느 5:1-5). 어느 선지자의 생
도가 죽자 그 아내가 채주에게 두 아이를 종으로 빼앗기게 되었다고 엘리사에게 호소
한 사실도 이것을 잘 입증해 준다(왕하 4:1).
취하게 하시며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카쉬'(* )는 원래 '덫을 놓아
붙잡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고리대금업자가 온갖 수단을 다 동원
해 그의 재산을 모조리 빼앗아 가게 해달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저의 수고한 것을 - 이것은 사실상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당하게 착취하였다가 그
자녀들에게 남겨준 재산을 가리킨다.
=====109:12
은혜를 계속할 자 - '은혜'에 해당하는 '헤세드'(* )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인자(仁慈)를 가리키는 말로 자주 쓰인다(창 19:19; 출 34:6; 대하
7:3; 렘 31:3 등). 그러나 여기서는 문맥상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친족이나 이웃의 친절과 자비를 뜻한다.
연휼(憐恤)할 자 - 히브리어 '호넨'(* )은 '아랫사람에게 호의로 몸을
굽히다', '은혜를 베풀다'는 뜻의 히브리어 '하난'(* )에서 파생된 말로서 동
정심을 갖는 사람을 뜻한다. 비록 과거에 큰 해악을 끼친 원수라 할지라도 그가 오랫
동안 불행한 나날을 보내게 되면 그의 과거의 악행을 잊어버리고 불쌍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상정(常情)이다. 그러나 다윗은 원수의 악행을 결코 잊지 말기를
촉구한다. 이것이 다윗의 잔인성을 나타낸다고 오해할지 모르나 악인들의 범과가 너
무도 엄청났다는 사실과 악인들이 긍휼을 얻지 못하는것 역시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신 2:30; 수 11:20) 상기한다면 오해가 없을 것이다.
=====109:13
그 후사가 끊어지게 하시며 -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자손은 하나님의 귀한 축복
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자손이 끊긴다는 것은 엄청난 불행이요 저주로 생각될 수밖에
없었다. 또 본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후손에 대한 축복(창 12:2;
22:17)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여준다. 한편, '후사'에 해당하는 '아하리토'
(* )는 '후손'이라는 뜻 외에도 '끝' 혹은 '미래'라는 개념도 내포하는
말이다. 일례로 민 23:10에는 이것이 한 개인의 종말을 뜻하고 있다. 그리고 중세의
유대인 주석가인 나마니데스(Nahmanides)는 '아하리토'란 개념속에 '다가올 세상에서
의 삶'이란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런 견해들을 종합해 볼 때, 본문은 악인
의 영원한 파멸이라는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후대에 - '베드로 아헤르'(* )를 번역한 말로서 앞 어구의 '아하
리토'와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다. 결국 본절은 69:28의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
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란 어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M. Dahood).
=====109:14
그 열조의 죄악을 - 여기 '열조'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아보타'(* )는
복수로서 원수의 지위가 상당하였음을 암시한다. 즉,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의 부친
을 가리킬 때는 이와 같은 장엄 복수를 사용하는 것이 관례였다(8절 참조). 장엄 복
수에 대해서는 사 14:21에서도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 "너희는 그들의 열조의 죄악을
인하여 그 자손 도륙하기를 예비하여...."
기억하시며 - 히브리어 '자카르'(* )는 원래 '표시하다', '(대출 장부에)
기록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본 문구에는 죄악을 행한바 언젠가는 그 대가
를 치르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 어미의 죄를 - '어미'는 히브리어로 '임모'(* )인데 단수로 기록되었
다. 따라서 복수로 표현된 앞 어구의 '아보타이우'도 그 의미상 단수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도말하지 마시고 - 하나님은 언약에 근거해서 천 대까지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반면 악인에게는 삼사대까지 저주하신다고 말씀하셨다(출 34:7). 따라서 시인의 저주
는 가혹한 것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상벌 원리에 일치하고 있다. 물론 이것
은 부모의 죄가 그 자손에게 직접적으로 전가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죄악된 길로
행하는 자는 그 후손에겐도 심각한 죄의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며, 특히 언약 공동체라
할 수 있는 이스라엘에서 부모의 패역한 행위의 악영향은 그 후손은 물론 공동체 전체
에 심각한 환난을 초래케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왕하 24:3; 렘 15:4). 그렇지만 "범
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
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겔 18:20)라는 말씀처럼 궁극적으로 죄의 형벌이란 본
인에게 달린 것이다.
=====109:15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 양피지나 토판(土版) 등에 기록하여 항상
기억되도록 해달라는 뜻이다. 이와 유사한 구절인 90:8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하나님앞에 숨길 수 있는 죄악이란 하나도 없고 또 지은죄로 말미암은
심각한 악영향이 후대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고 자신을
채찍질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109:16
긍휼히 여길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 6:8)이라는 말씀속에 요약되어 있는 바, 이는 언약
백성의 기본적인 삶의 원리를 철저히 무시했다는 뜻이다(Anderson). 무죄하고 가련한
사람이 고통당하고 있는 것을 볼 때면 정상적인 사람이면 이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것이다. 또한 시기와 질투는 대부분 어느 정도 동등한 위치에 있을 경우에 발생
한다. 그러나 본문의 악인은 전혀 대항할 수 없는 비참한 자를 핍박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도리어 멸시하였다.
=====109:17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 본절에서 18절까지 동사 앞에 접속사 '와우'(* )가
다섯개나 쓰이고 있다. 이를 단순히 순접 관계의 접속사로 보면 이 두 절은 시인의
현재적 바램을 나열한 것이 된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이 동사들이 19절의
'...하소서'(* , 테히)에 연결된다고 보는 데서 찾아진다(Dahood). 반면에
다섯 개의 '와우'(* )중 일부를 결과를 나타내는 용법으로 보면 개역 성경의 번역
처럼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시므이는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달아날 때 다윗을 저
주한 바 있다(삼하 16:5-13).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 욥 22:21의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는 어구와 표
현 형태가 유사하다. 시므이는 돌을 던지며 다윗을 저주했으나 솔로몬 왕 때 왕명을
어기고 참수형을 받고 죽은 바 있다(왕상 2:36-46).
=====109:18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 값진 옷 입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저주하기를 즐겨했
음을 뜻한다. 또한 이것은 저주가 고질적인 질병처럼 몸에 배여 저주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은 형국임을 의미할 수도 있다. 에스겔은 심판날에 이스라엘이 당할 두려
움을 이렇게 표현한다. '왕은 애통하고 방백은 놀람을 옷 입듯하며...'(겔 7:27).
저주가 물 같이 그 내부에 들어가며 - 이는 민수기에 언급된 '증거의 쓴 물'을 연
상시킨다(Anderson). 민 5:16-31에 보면 부정한 여인을 판단하기 위해 쓴 물을 마시
게 하는 기록이 있다. 깨끗한 여인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해(害)가 되지 않으나 부정
한 여인에게는 독이 되어 넓적다리가 떨어져 나가게끔 작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본문
은 저주로 말미암아 오히려 원수 자신이 그 저주에 버금가는 큰 해를 당했음을 시사한
=====109:19
저주가...띠와 같게 하소서 - 본절은 18절 상반절의 단순한 동의어 반복적 표현이
아니라 악인에게 임할 저주의 계속성과 영속성을 한층 강화한 표현이다. 특히 '항상'
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타미드'(* )가 '계속적인', '영존하는'등의 뜻을 지
닌 말임을 고려하면 이 점이 더욱 분명해진다(Alexander). 한편, 본문의 명사 '띠'
(* , 메자흐)와 동사인 '띠는'(* , 하가르)은 히브리어 원어상 그 어
근이 서로 다른 말이다.
=====109:20
악담하는 자가 여호와께 받는 보응 - 다윗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즉각적인 보응
을 지적함으로써 어떠한 고난이 온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하였다. 극심한 고통 중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보응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잃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사야는 예루살렘과 유다에 대해 심판을
경고하면서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화가 있을 것은 그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사 3:11)고 하였다.
=====109:21
여기서부터는 저주를 그치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시작된다.
주의 이름을 인하여 - 하나님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인격이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있
으며(출 3:7-15 강해, '하나님의 이름' 참조),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이름이란 곧 하
나님 자신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VanGemeren). 본 문맥에서 하나님의 이름에 호소한
다는 것은 특히 조상들과 맺었던 언약에 근거하여 간구드린다는 뜻이다.
주의 인자하심이 - 시편에 자주 등장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구약의 사상을 잘
나타내주는 단어 중의 하나이다. 이 말의 원어는 '헤세드'(* )인데 자비나
사랑, 인애, 인자하심 등으로 번역된다. 하나님은 영원 불변하신 까닭에 하나님의 사
랑에도 변함이 없다. 비록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채찍을 맞는
다 하여도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그들과 함께계신다. 이것이 바로 '헤세드'의 개념인
것이다(44:23-26 강해, '하나님의 인자하심' 참조). 시인은 여기서 하나님의 헤세드
에 호소하고 있다.
=====109:22
중심이 상함이니이다 - 외적인 환난과 핍박을 받을 때 신실한 성도는 더욱 겸손해
지기 바련이다. 그러나 이런 환난을 받고도 겸손해지지 않는다면 그는 환난에서 아무
런 대가도 얻지 못한다. 한편 '상함이니이다'의 히브리어 '할랄'(* )은 16절
의 '상한'에 해당하는 '나케'(* )보다 훨씬 강한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관
통당한' 혹은 '찔려 죽은'등의 뜻을 내포하는 말이다(Alexander). 시인은 원수의 참
혹한 적대 행위로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지만 하나님을 향해서는 더욱더 겸손해졌음
을 고백한다. 하나님 앞에 이러한 자세로 자신의 겸손하고 가난한 상태를 고백하는
자의 기도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인 것이다.
=====109:23
나의 가는 것은 석양 그림자 같고...불려 가오며 - 시인은 자신의 처지를 석양 그
림자에 비유하고 있다. 어스름 황혼의 희미한 그림자는 일몰과 동시에 갑자기 사라지
고 만다. 이는 바로 앞일도 예측할 수 없는 시인의 불안한 심정이 잘 드러난 비유이
다. 또한 본문은 사람의 생명이 극히 짧으며 풀과 같이 쇠잔한다는 표현과 일맥 상통
한다(102:11). 그리고 시인은 자신을 메뚜기로 비유한다. 메뚜기가 거센 바람을 만
나 휩쓸려 가버리듯이(출 10:19; 나 3:17) 시인도 끊임없는 핍박으로 도망다녀야 했으
며 평안히 쉬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109:24
금식함을 인하여 내 무릎은 약하고 - 혹자는 다윗이 극도의 상심과 혼란스러움으로
인해 식욕을 잃고 만 것이라고 본다(Barnes). 그러나 그보다는 오히려 환난에 직면하
여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를 간구하며 또 위대한 신앙적 결단을 내리기 위해 자발적
으로 음식을 멀리한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69:10).
=====109:25
저희의 훼방거리라 - 대적들은 다윗의 곤고한 처지를 보고서 쾌재를 부르며 비웃었
다. 아울러 본문은 대적들이 하나님 앞에서 취한 다윗의 겸손한 태도마저 위선으로
단정하고 조롱하였음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Alexander). 한편 22:6, 7에서 다
윗은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멸시받고 있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나는 벌
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
웃으며."
나를 본즉 머리를 흔드나이다 - 사람들이 시인을 보고 조소하는 광경을 표현한 말
이다(22:7; 44:14).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다가
그들로부터 조롱거리가 되었다고 하나님께 호소한 바 있다(렘 20:7).
=====109:26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시며 - 사람들로부터 비록 비방을 받고 있으나
(22-25절) 하나님은 당신을 의뢰하는 자를 기필코 구원하시며 또 선한 길로 인도하시
기 때문에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 따라서 시인은 21절에 이어 다시 하
나님을 찾으며 구원을 호소한다.
주의 인자하심을 좇아 나를 구원하소서 - '구원하다'의 히브리어 '야솨'
(* )의 본래 의미는 '열려 있다', '넓다' 혹은 '의롭다'로서 그 명사형인 '예
솨'(* )와 마찬가지로 택한 백성을 위경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묘사하는 문맥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이다(삼하 22:3; 사 17:10; 슥 9:9 등).
=====109:27
이것이 주의 손인 줄을 저희로 알게 하소서 - 원수의 핍박에서 구원받는 것이 하나
님의 능력에 의한 것임을 그들에게 밝히 보여주시라는 뜻이다. 이를 좀더 확대해서
이해하면 시인을 핍박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행 9:4).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구원받기를 소망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영광이 만천하에 드러나기를 또한 바라야 함을 배워야 할 것이다.
=====109:28
본절에는 대적들의 어떠한 비방이나 핍박에도 좌절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
고자 하는 시인의 담대한 믿음이 연속되는 두개의 대조 구문을 통해 뚜럿이 부각되어
있다.
저희는 저주하여도 주는 내게 복을 주소서 - 이 말씀은 원수들의 저주를 극복하겠
다는 시인의 신앙적 투지를 표현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보다는 원수의
비난과 핍박을 이제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시인의 담대한 믿음을 표현한 것으
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주의 종은 즐거워하리라 - '복을 주소서'란 앞의 어구가 단순한 간구가 아니라 선
취적 신앙에 근거한 일종의 찬양이란 사실이 여기서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주시는 한 원수의 공격이 아무리 잔인하고 집요하다 할지라도 구원의 소망
을 굳게 붙들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109:29
욕을 옷 입듯하게 하시며 - 18, 19절과 유사한 직유 형태이며 본문에서 '욕'은 히
브리어 '켈림마'(* )를 번역한 것인데, 이사야 선지자는 우상을 만드는 자
들이 당하게 될 수치와 부끄러움을 이 말로 지적하였다(사 45:16). 그리고 잠언 기자
는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잠 18:13)고 말한다.
여기서 시인은 원수의 박해가 참으로 어리석어서 자승자박(自繩自縛) 꼴이 되고 만다
는 사실을 다시 한번 지적하고 있다.
=====109:30
입으로 여호와께 크게 감사하며 - 입으로 감사한다는 말은 자신의 믿음을 공개적으
로 선포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다윗은 저주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난 다음 거
기서 그치지 않고 이제는 그 어떠한 고난이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09:31
저가 궁핍한 자의 우편에 서사 - 히브리어 본문에는 앞 구절의 원인을 설명하는 접
속사 '키'(* )가 문두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궁핍한 자'의 히브리어는 '에
비욘'(* )이란 형용사인데 영어에서와 같이 히브리어에서도 형용사가 명
사로 흔히 쓰인다. 이말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를 주로 가리킨다(출 23:6; 신
15:4). 그리고 '우편'의 원어는 '야민'(* )으로서 원래적 의미는 (좀더 강
하거나 재주있는 것으로서의) '오른손'(혹은 '오른편')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그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이스라엘을 붙드시사 그를 도울 것이라고 하였다(사 41:10). 또
에스겔은 그룹들이 성전 우편에 선 것을 보았다(겔 10:3). 이 경우에 있어 '우편'은
보호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6절 주석과 비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