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방 6 / 수필 / 전옥선
참 외
따스한 봄날 시장에 나갔다. 멀리서도 참외의 달콤한 향이 너울너울 날아와서 코를 유혹했다. 참외가 한창인 철이다. 유독 참외를 좋아하는 딸이 생각나 두 소쿠리 샀다.
아삭아삭 하고 달다며 딸은 참외를 좋아한다. 작고 동글동글 한 것이 귀엽다고 한다. 사과, 수박은 큰 것이 맛있지만 참외는 작은 것이 낫다. 딸이 맛있게 먹고 있는 것을 보면서 기억은 묵언으로 다가와 잊었던 생채기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의 딸보다 훨씬 어렸을 무렵, 참외를 사러갔다. 그날은 왠지 엄마가 참외가 먹고 싶다고 하였다. 우리 동네에서 오리정도 가면 참외 단지가 있다. 그때에 내 마음은 참외를 먹을 수 있다는 즐거운 마음 같은 것은 없었다. 뭐가 먹고 싶다고 사오라는 말을 한 적이 없는 엄마였다. 장에 가서 먹을 것을 사와도 우리 사 남매 먹으라고만 하지 같이 잘 먹지는 않았다. 그렇던 엄마가 참외가 먹고 싶다고 한다.
먹장구름 같이 무거운 마음으로 돈을 주고 참외를 받았다. 돈보다 낫게 넣었다고 말하는 아줌마 손을 덥석 잡았다.
“아지매, 참외는 더 안줘도 되니 이거 먹고 우리 엄마가 낫게만 해주세요. 예? 이 참외 먹으면 우리 엄마 병이 싹 낫겠지요?”
똬리를 틀고 있는 울먹거림을 피하려고 바위를 들어 올리는 힘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텅 빈 하늘이다.
나는 맏이다. 아직 어린 남동생들이 셋이다. 속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동생들을 봐서라도 흔들려서는 안 된다. 바위를 닮아야 한다고 내 자신을 새로 나는 길처럼 다지고 또 다졌다.
참외를 씻어서 쟁반에 담아 엄마 앞에서 깎았다. 엄마는 내가 깎아서 사등분한 조각에서도 몇 번을 더 내어서 하나를 입에 넣었다. 처음에는 아프기 전의 생각으로 사오라고 했지만 막상 먹어보자 맛이 없는 듯 했다. 잘게 쪼갠 조각도 몇 개먹지 못하고 쟁반을 내게로 밀었다.
엄마의 얼굴은 참외 빛이다. 원래 하얗던 눈자위까지 참외 빛깔이 되었다. 참외를 먹으면 엄마가 샛노란 용변을 누어서 건강하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의 눈과 얼굴은 참외 빛이면서 변은 꼭지 같이 새카맣고 얼굴에 번져있는 기미 색이었다.
딱 한번 엄마의 엉덩이를 본 적이 있다. 다른 때는 병중이라도 혼자 해결을 했지만, 병이 깊어질수록 변이 딱딱해져 잘 나오지 않았다. 학교 갔다가 돌아와 방에 들어간 나를 엄마가 불렀다. 옆으로 돌아누운 엄마 옷을 내렸다. 밤알 만 한 참외꼭지 색이 잘 나오지 않고 붙어있었다. 평소에 비위가 약하지만 그때는 조금도 메스껍지가 않았다.
구전민요 ‘타박 네’야 에도 엄마 무덤가에 개똥참외 맛이 어릴 적 먹던 젖 맛이라는 가사가 있다.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의 마음에는 참외 같은 노랑 멍이 드는가보다.
시간은 구름에 달 가듯이 지난 멍울을 묻게 한다. 세상의 반이 아픔이라면 나머지 반을 차지하는 것은 기쁨이다. 굴러다니는 먼지도 보이게 하는 치자 빛 햇빛이 있어 희망에 차게 한다. 햇살이 엄마의 마음을 전하러 온 텔레파시 광선 같다.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인 것 같다. 계절의 시작이면서도 실의를 안겨주었던 노란 참외색은 시간이 흐른 지금은 봄을 부르는 화사한 개나리 색으로 맑게 다가온다. 세월은 유수같다지만 그것이 또 우리의 고난에 찬 생을 지탱하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과거를 망각할 수 있어 현재를 살아간다. 그동안 겪었던 우여곡절만큼이나 세월은 발효되어 어둠을 삼킨 이글거리는 붉은 해가 내 앞에 열려있다.
삶은 살아가는 사람의 것이다. 희로애락으로 세금을 내고 있으니 당당하게 살아나가겠다. 소시민의 인생이지만 내게는 온 우주이다. 엄마를 생각해서라도 어디든 뿌리내리며 축을 만들어 타오르는 담쟁이를 닮아 가고 싶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엄마와 딸들도 모두 크고 작은 아릿한 추억이 한두 가지씩은 있을 것이다. 해마다 봄이면 어김없이 참외가 세상을 노랗게 물들이듯이 엄마와 딸들의 추억도 저마다의 가슴에 생겨나리라.
두 개를 깎아줬는데 다 먹은 딸이 참외 두엇을 또 가져 와서 내민다. 그래 맛있냐는 말에 ‘응’ 하면서 웃는다. 제가 깎는 것 보다 엄마가 깎아야 맛있다고 한다. 딸을 앞에 두고 앉아보니 그때 바람이 휘몰아쳤을 엄마의 마음을 알겠다. 못다 한 명을 꺾고 세상을 닫아야 할 때 인간으로서 살고 싶은 욕구와 참외에 알알이 박힌 씨처럼 어린 자식들의 앞날에 대한 근심이 어떠했을지 절실히 와 닿는다.
딸은 이다음에 참외를 보면 달콤하고 아삭아삭한 참외 맛을 가장 먼저 떠올렸으면 좋겠다. 엄마가 참외를 깎아주어서 더 맛있었지 하는 좋은 기억만 남아있었으면 한다. 딸에게는 참외가 새로운 봄날처럼 행운의 상징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