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시인을 만나다|시집 속 대표시 – 이재연
기린이 잎사귀를 먹는 저녁 외 4편
기린이 잎사귀를 천천히 따먹는 저녁
수줍음이 많은 작은 꽃들과 함께 구르는 푸른 자갈들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생의 한 가운데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는 나무를 낳고 낳아
운율을 이루는 평원에 가랑비 오다 굵은 빗방울 떨어진다
땅과 잎사귀는 내리는 비를 흠뻑 받아먹었다
그림인 줄 알았던 석양은 이미 사라지고 닫힌 샘은 물먹었다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본토 갈대아 우르에서 죽어
찰나에 길이 바뀌고 후대의 이름은 끝이 없어 비 개인다
유모차 안에 탄 아이는 천천히 다가오며 불러주는
긴 들녘의 노래에 설풋 잠이 들고 시날 평지의 구음을 흩뜨리며
흰 새들이 일제히 땅에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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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나라에서
처음으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남아있는 잎들 땅에 떨어지고 눈 내린다
말간 죄처럼 눈 내린다
소리를 더 크게 지를 수도 없고
아이들을 바라보는 일을 더 오래 할 수도 없어
죄 없으면 끝없이 따라가고 싶은 흰 길을 걷는다
아무 소리 들리지 않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소리 들린다
흩날리는 눈을 온종일 받아먹고
침묵에 휩싸이는 언덕
내가 왜 나를 밖에 세워두고
눈이 오는 소리를 측량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너는 멀기만 하고 눈은 폭폭 내린다
어디에서도 우리들의 잔해가 조용히 묻히어 간다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쏜살같이 비탈길을 내려간다
텅 빈 손을 허공으로 뻗어
상처 없는 눈을 손바닥에 받아
모든 것이 사라지는 순간을 메모한다
너는 없고 나는 있다
이것을 눈의 나라에선 순수의 무게라 한다
슬픔의 하중이라 한다
걷다보니 애송이 같은
짐승의 발자국 하나
눈밭에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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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주 어린 떡갈나무였을 때
내 앞에
조금 앞서서 걷고 있는 저 사람이 사라질 때쯤
사람의 집은 어두워지고
바람은 더욱 차가워지겠다
땅에 떨어진 마른 잎들이 한없이 가볍게 바닥을 굴러간다
누가 이곳에 숲을 만들었을까
이 숲에 누가 아이를 낳아 사람의 도시를 세웠을까
오래 살던 사람들 사라지고
높은 곳에서 흘러 내려오던 언덕도 사라지고
떡갈나무만 살아있다
떡갈나무의 내력은 어디에도 없다
힘겹게 겨울비가 내린다
밤 깊어, 그처럼 차가운 정자마루에 사람이 누워있다
한 사람 곁에 한 사람이 더해져 있는 형상
검은 외투를 벗어 뒤집어쓰고 있다
온 몸을 미처 다 덮지 못한 외투 속에서 삐져나와 있는
작고 고운 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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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맨발
가로등 불빛이
비에 다 젖는다
누가 이곳에 사람을 낳아
사람의 도시가 되었을까 떡갈나무는 그 내력을 알아
추운 겨울 저녁에도 집으로 돌아갈 줄 모른다
어두워질수록 점점 밝아져 가는 나무들
누가 사람의 팔을 베고
나무의 잠을 자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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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의 기원
화사가 잘 감추어져 있는 오후에는 남쪽이 더 긴밀해지고 남쪽과는 어떤 이야기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불필요한 찔레꽃의 입장은 필요한 만큼 확장되고 때 지난 사람의 육성이 고요한 오후를 팽창 시키는 수변로를 순순히 지나가지만 누가 옆으로 지나간다는 걸 느낄 수 없는 남쪽입니다
앞서 가는 사람과 뒤에 오는 사람의 차이를 떠도는 것은 빛의 알갱이일 뿐입니다.
얇고 투명한 비닐하우스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은 훌러덩 벗어버리면 그만인 단순한 열기에 불과합니다
식물은 저항하지 않았지만 저항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지구와 같은 입장으로 성장하고 무장하고 태연하게 꽃피우고 꽃 버리고 뜨거워지는 쪽으로 산등성이를 그리지만
해가 순순히 넘어가는 산등성이는 아닙니다
늘어질 대로 늘어지는 것이 물의 입장이라고 하는 남쪽입니다 누가 말했습니다 여기 뱀이 있습니다
너무 고요해 소름이 돋습니다
입을 벌리고 있는 지구의 입장과 같습니다
찔레꽃은 향기의 주둔지이지만 무장할 필요가 없는 무논의 복판에서 바지를 둘둘 말아 올린 농부의 복장과 비슷하여 시간을 해제 시킵니다
시간이 이래도 되는 건지 묻지는 않겠습니다
잠시도 쉬고 싶지 않는 것이 찔레꽃이 거부하는 입장인 것이 분명하여 묻습니다 여기 뱀이 있습니까
묵묵부답 이것만큼 위엄이 있는 대답도 없습니다
남쪽에서는 거부되는 답변이지만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는 침묵은 위험합니다
차가운 기분이 길바닥을 쓰윽 지나갑니다
강의 꼬리를 놓치고 찾아 헤맸던 몽탄교도 순식간에 지나가버리고 태양이 흘러내리는 동안 우거진 들판, 끊임없이 새끼가 새끼를 낳는 들판 여기 뱀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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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잘 가고 나는 잘 왔습니다
겨울이 남아있기엔 바람이 부족하고
봄이 오기엔 사용해야 할 겨울이 아직 남아있다
누군가 왔다 갔던 길이 자꾸 떠올라
사라지지 않은 것도 침묵이고
다시 기억하지 않으려고 이름을
오래 안고 있었던 것도 침묵이다
여긴 너무 고요해
문을 열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바람이 강의 물살을 건드린다
흙은 스스로 부풀어 올라 입김을 토한다
왜 이리로 와야 했는지 꼭 이 길로 와야만 했는지
햇살이 아른거린다
조용한 고지대에 올라 조금 남아 있던 너를 아주 보낸다
실내등을 끄고 자꾸만 어둠을 바라보려 했던 마음도
너와 함께 보내고 난 후
겨울나무에 물색이 돌아온다
슬그머니 뒷모습을 감추었던 고양이가 골목으로 돌아온다
한 조각 햇살을 끌어당기던 오후의 벤치도 빈자리를 데우고 있다
그때 너 보내고 없는 주소지에
나보다 먼저 꽃이 돌아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