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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펀이 주목한 시집|시집 리뷰
‘명랑시’의 독보적인 색깔과 오감 영성, 아모르파티의 영성
-고진하 시인의 시집 『새들의 가갸거겨를 배우다』, 신작시, 대표시를 읽고
장인수 | 시인, 사이펀 편집위원
● 시詩와 영성靈性은 어떤 관계일까?
영靈이 있을까? 인간은 몸, 영, 혼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혼(soul)은 몸속에서 일어나는 마음, 지성, 감성, 의지, 의식 등을 가리킨다. 혼은 몸과 분리할 수 없다. 반면에 영(spirit)은 신성, 불성, 아트만, 노자의 도, 성령 등을 의미한다.
그런데 영과 혼을 구분하지 않고 묶어서 보기도 한다. 구원을 의미할 때 영혼(spirit+soul)의 구원을 의미하고, 소울메이트(soulmate)는 영혼(soul)의 동료 (mate)라는 뜻으로, 서로 깊은 영적인 연결을 느끼는 관계를 의미한다. 요즘은 의미가 확대되어 가정, 회사, 동아리,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부부, 동료, 친구 사이에 소울메이트라는 용어를 쓴다.
고진하 시인은 목사이며, 시인이며, 잡초 연구가이며, 생명 철학자이며, 신학자다. 시집, 종교 서적, 야생초 산문집 등 다방면에 많은 책을 냈다. 그는 건강한 야생의 소리를 먹고 마시고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다. 자연의 음향적인 환경이 파괴되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이를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고진하 시인을 한 번도 뵌 적이 없다. 그런데 나는 그의 시집과 산문집을 읽어보았다. 그는 영성의 시인이다. 나도 영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나의 소울메이트라고 나 혼자 생각한다.
고진하 시인는 영성을 닦는 사람이다. 그의 당호가 ‘불편당’이듯 검소하게 그러나 아름답게 시작하는 시인의 이번 생은 사람의 ‘영’을 닦는 일. 너나 나나 개구리나 고라니나 봄철 불편당의 처마 아래 집을 짓는 제비들까지도 시인의 눈에는 귀한 손님이다. 진짜 손님을 대접하듯 배고픈 고라니에게 먹이를 나눠주기도 하며, 불편당을 오가는 수많은 동식물의 걸음걸이와 야생의 소리를 매일 마중하고 배웅한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시와 영성의 상관성을 깊이 생각해 보았다. ‘시마’, ‘시심’은 ‘영성’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를 종종 자문하곤 했다.
시인을 한 글자로 줄이면 신神이 된다고 어떤 시인이 말했다. 도도하고 건방진 발언 같지만 일견 많은 시인들이 수긍한다. 나도 어느 정도는 수긍한다. 시(詩)는 언어(言)로 절(寺)을 짓는 일이라고 한다. 또 시인들이 이런 말을 했다. 시인은 신과 인간 사이에 존재한다(휠덜린), 시인은 정신적이며 영적인 개벽을 꿈꾸는 자다.(단테), 시인은 무당이다. 시를 써서 살풀이를 해주는 무당이다.(신현수, 김언희, 고영서 등), 시인은 고독한 단독자다.(정현종), 시인은 눈물 흘리는 일을 대행하는 곡비(哭婢)다.(최광임), 시인은 초월적인 견자에 해당한다(랭보), 시인은 우주를 캐는 자이며, 가상 속의 매개자다.(장석주 등), 시인의 삶과 우주의 비의(秘意)를 캐는 자다.(조용미, 이종암 등), 시인은 우주적 리듬을 호흡하고 존재의 궁극에 도달하는 특별한 존재다.(고재종), 시인은 자기의 고독과 연애를 파먹고 사는 존재이자 시간을 창조적으로 변용할 줄 아는 존재다.(고재종), 시인은 “응답하는 자”, “부름을 받은 자”, “건넴을 받는 자”, 성스러움을 독촉하는 자“이다.(휠덜린) 등등. 이렇게 본다면 시와 영성은 상통하는 면이 아주 많다.
신(神)과 시인은 마이다스의 손을 지닌 창조자. 시인은 감히 신만이 알 수 있는 인생과 우주의 섭리와 비의(秘義)를 그의 시적 감수성으로 찾아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 고양된 감정과 관찰의 어떤 지점에서 인생의 비의를 체험하는 순간에 시와 영성은 필연처럼 만난다. 샤머니즘을 밑바닥 정서로 삼은 김소월, 백석, 서정주, 고정희, 김초혜, 최승자 시인이 있다. 불교적 사유가 깊게 스민 한용운, 서정주, 김달진, 조지훈, 고은, 홍신선, 오세영, 김지하, 이성선, 최동호, 황지우 시인들이 있다. 서정주는 불교와 샤머니즘을, 김달진은 불교사상과 노장사상을, 조지훈은 불교와 유교사상을, 홍신선과 오세영은 서정시와 불교의 선적 감각을 결합했다. 정지용, 윤동주, 박두진, 박목월, 김현승, 천상병, 정호승 시인은 기독교적 시편을 썼다. 구상, 김남조, 성찬경, 김종철 시인은 가톨릭 시편을 썼다. 많은 뛰어난 시인들은 결국 영성을 건드렸다. 그러면 고진하 시인은?
시인 중에 무신론자가 무척 많고, 타락한 이 세상을 방치하고 있기 때문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시인들도 있다. 오히려 종교가 속세보다도 더 타락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믿음과 영성과 구원을 강조하다 보면 신앙시로 전락하고 목적성이 강한 시로 전락할 위험성이 크다고 주장하는 시인들도 많다.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영성과 시 정신은 상통하는 면이 많다고 본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진리를 탐구하고 인생의 본질을 갈구하기 때문이다. 몇 가지 공통점을 추리면
◾시와 영성은 ‘말’과 ‘말씀’을 사용하고, 부리고, 섬기고, 닦는 행위라는 것이다.
◾시와 영성은 생명의 '신비함‘과 사랑의 '절절함'을 '간절하게' 추구하는 행위라는 점이다.
◾불경이나 성경도 시적 표현이 풍부하게 들어있다는 점이다. 신의 말씀이나 인간의 말이 만나는 지점은 매우 시적 감수성으로 넘쳐흐른다는 것을 경전을 읽으면서 느끼곤 한다.
◾시와 영성에는 일상의 범위를 뛰어넘는 특수하고 놀라운 새로운 감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영성과 묵도와 참선, 동안거의 경지는 힘들고 지난한 감성의 투쟁이어야 가능한 것이고, 시의 전위적인 감성도 이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고진하 시인을 보면 청빈하다. 탐욕이 없고 가난하다. 늘 영성의 때를 닦는다. 한경직 목사, 성철 스님, 김수환 추기경을 한데 묶는 공통 단어로 ‘청빈(淸貧)’을 뽑고는 한다. 여기 고진하 시인도 그에 버금가는 분이다. 그의 시집을 읽으면 피정, 수도원, 미사, 수도사, 비나리, 성화, 제물, 신성, 도제, 은수자, 목사관, 장례목, 갈원, 세례, 순교, 성체, 정토, 피안, 억겁 등 여러 종교 용어가 서로 절묘하게 어울리고 스며서 새로운 지평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다. 풍성한 영감과 사유와 영성과 고뇌와 회심으로 가득 차 있다. 퍼도 퍼내도, 읽어도 읽어도 마르지 않는!
● 범종교적 사유와 생태영성과 오감영성의 세계
고진하 시집 『야생의 위로』를 읽고 페이스북에 단평을 올린 적이 있다. 그 내용을 옮겨본다.
야생(野生)이라! 야생이 무엇인가? ⁕우주 명랑이 펑펑 폭발하는 분꽃의 까만 씨앗을 뿌리면서 나도 사랑의 신비를 터뜨리는 푸른 혁명의 뇌관인 씨앗을 닮고 싶다고 한다. ⁕껍질 벗겨진 소나무가 자신의 둥치에 허연 송진 약을 흘리면서 제 몸을 치료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타인의 마음에 상처를 내지 말자고, 타인의 상처를 치료하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을 한다. *바퀴에 깔려 허리 꺾인 바랭이풀, 질경이들이 햇살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는 모습을 생의 닻을 올린다고 표현하면서 나도 바퀴에 깔리는 통증을 품어야만 하는 생을 견디며 사랑의 닻을 올리겠다고 한다. ⁕수십 마리 새들이 나무에 앉아 울면 나무와 새는 반조반수(半鳥半獸)의 생음악을 연주한다. 나도 온몸으로 생음악을 연주하는 소리의 집이 되고 싶다고 한다. *낡은 산악자전거를 타고 산길을 올라 운무와 구름 속을 산책하면서 산 아래 내가 자맥질해 온 지상의 고행을 내려다보며 은수자의 고해를 한다. *낡은 한옥은 틈만 나면 진흙을 개어 틈을 메워야 하지만 처마 밑 서까레 흙이 떨어진 틈으로 새 한 마리가 먹이를 물고 드나드는 것을 보고 아내와 함께 박수를 치며 삶의 틈을 응원해 주고 기뻐한다. *매일 잡(雜)이라는 말을 품은 잡초로 비빔밥을 해 먹으면서 허접한 잡(雜)과 친해지며 구두 뒤축에 짓밟힌 질경이 잡초와 진해지고, 짓밟힌 인생 잡놈들과 친해지며, 세상 잡것들이 소외되는 일이 없기를 기도한다. *땔감의 용도로 쓰기에도 너무 썩어버린 나무토막의 숱한 구멍 안에 굼벵이와 개미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서 굼벵이와 개미는 썩은 나무가 삶의 아름다운 꽃자리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세상 처처곳곳이 모두 생명체들의 꽃자리임을 발견한다. *밤새 내린 함박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휘어버린 소나무 가지를 바라보면서 구부러진다는 것은 척추가 휘는 아픔이지만 그것이 곧 사랑의 그네를 매달 수 있고, 사랑의 탄력을 휘날릴 수 있는 풍경이라고 말한다. *이 지구와 달의 여인숙에 잠시 머물며 밤의 명랑 곁에 세 들어 사는 동안 흠뻑 살다가 저 달이 지면 조용히 꺼지는 삶을 살겠노라고 말한다.
이마를 물들이는 태양, 옥구슬 굴리는 영롱한 새소리, 알 수 없는 꽃향기, 청회색 꼬리를 까딱이며 인사하는 명랑한 물까치, 흙을 먹고 분변토를 토해내며 지구를 살리는 자연의 정원사인 지렁이...... 그런 것들의 친절한 갑섭에 기꺼이 나를 던지는 삶을 살면서 미친 춤꾼처럼 멈추지 않고 계속 들판의 스텝을 밟아나가는 자연 사상가이며 은수자이며 목자이며 시인인 고진하 시인의 시집 『야생의 위로』를 읽고 또 읽는다. 낮고 낮은 곳을 바라보는 시선, 소농의 시선, 겸손함의 시선, 야생의 시선으로 닻별, 적선, 울가망, 자드락밭, 도린곁, 매듭풀, 몽리면적, 섶다리, 종자, 묵정밭 등 시골살이의 하찮은 어휘들을 영성의 언어와 만나게 하는 그의 ‘시적 표현’은 신선(新鮮)하고 신성(神聖)하다.
바다가 번쩍 들어 올린 홍련암,
바다는 왜 하필 절을 그 벼랑 위로 들어 올렸을까.
절 받으러 절을 들어 올렸을까.
넙죽넙죽 절을 하다가 파랑새를 보았다는
보살도 있다는데,
벼랑 아래 파랑 파도가 푸드득 깃을 달고 올라와
팔작지붕에 앉았던 것은 아닐까.
아무렴 어때.
아무렴 어때.
넌 절 받으면 되고, 난 절하면 되지.
「홍련암에서」 전문
낙산사 홍련암. 바닷가 암석굴 위에 자리 잡은 이 암자의 법당 마루 밑을 통하여 출렁이는 바닷물을 볼 수 있도록 지어졌다. 나는 홍련암에 갈 때마다 고개를 마루 밑으로 숙이고 천 길 아래 붉고 하얗게 부서지는 거친 포말을 바라본 적이 있다. 그럴 땐 나도 모르게 넙죽 큰절을 하게 된다. 바다에게, 포말에게 넙죽 절하게 되는 절이다.
절은 무릎을 꿇는 행위다. 겸손, 낮은 자세를 취해야 발밑의 경건함과 경이로움을 볼 수 있다. 예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에 가서 무릎 꿇고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도록 기도 하셨다.(누가복음 22장 39절) 예수는 제자들을 섬기기 위해 대야에 물을 준비하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른 후,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었다. 섬기기 위해서는 먼저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것을 실천하셨다.
고진하 시인은 무릎을 낮추어 온갖 대상에게 절을 한다. 그러면서 피창조물 속에서 창조주의 손길과 입김을 본다. 흰소, 라일락, 숯, 빙어, 목련, 딱따구리를 바라보며 그들을 하나님, 부처님이라고 부른다. 허수아비, 구름버섯, 수수, 문주란, 수탉, 직박구리, 옻나무에게서 은총을 받는다. 느티나무, 달맞이꽃, 개구리, 참새, 누렁이에게서 수도승의 모습과 수녀님의 모습을 본다. 깔끄러기, 쪼가리, 벽창호, 검댕이, 들병이, 도래솔, 붉덩물에게서 견성(見性)과 거지별을 보고 성찬을 함께 하고 성의(聖衣)를 입힌다. 쥐코밥상, 개골창, 좆대, 딱밭골, 갯강구, 고샅길에서 묵상과 묵음을 한다. 쭉정이, 귀때기, 숫눈, 송장 자세, 때깔에서 피정(避靜)을 하고, 하늘 양식을 얻는다. 떠꺼머리, 마루짱, 곰솔, 삭정이, 모탕에서 하늘 보금자리와 구름 신학을 만난다.
그의 시어는 촌구석의 질박한 언어인데 영성의 언어이기도 하다. 구름 신발, 시바, 치성인(癡聖人), 시간의 설법, 탁발승, 영혼의 식사, 욕계, 필경사, 물세례, 도반, 하늘 보험, 소청(召請), 제단, 탈수된 영혼, 성호, 하늘 도리깨, 정령, 신의 수작, 적멸의 음계, 회향의 성사, 생의 잔고, 밥상공동체, 공양, 큰 도둑, 고해소, 미사, 헛것, 낙타 무릎, 성체 조배, 접신, 영혼의 수첩, 로뎀나무, 엘리야, 보좌, 하늘빛 고요, 촛불 명상, 농부 하느님, 시모, 진흙 가면, 형상, 유다, 욥, 음성, 화인(火印), 시간의 옥(獄), 얼음수도원, 성자, 참배……
누가 이런 시어들을 하찮은 들판에서 얻을 수 있을까. 결코 쉽지않은 일이다. 빈 들, 광야의 명상과 고통스런 체험과 사유가 없다면 불가능한 언어들이다. 능수능란한 포즈와 세련된 시적 기교가 있어도 결코 범접하기 힘든 심연의 내파를 지닌 시어들이다.
웃고, 울고, 아파하며 터득한 범종교적 사유는 깊고 맑다. 낮은 듯 높다. 똥 냄새와 송장 냄새가 나는데 구수하다.
● 시집 『새들의 가갸거겨를 배우다』의 생태영성, 오감영성, 대자연의 성전
새에게서 배운다고? 새를 노래했구나. 그리면 고진하 시인의 시 중에서 새를 노래한 작품이 있을까 궁금해진다. 「새가 된 꽃, 박주가리」, 「새한테 욕먹다」, 「노래하는 가시덤불」, 「새들의 가갸거겨를 배우다」 등이 있구나. 산문집 『누가 우편함에 새를 배달했을까』라는 책도 새 얘기가 많구나. 「놀이 영토를 넓히는 새들을 보며」라는 산문을 중앙일보에 2023년 3월에 쓰셨구나. 그 내용의 일부를 인용해 보자.
“청둥오리나 백로 같은 새들이 얼음 풀린 작은 웅덩이에서 놀고 있었다. 사람들 같으면 놀이터가 좁다고 투덜거리겠지만, 새들은 빨간 맨발로 물속에 뛰어들어 먹이를 잡고 그러다 물 밖으로 나와 푸르르 푸르르 젖은 날개를 털곤 했다.
어떤 녀석들은 그 좁은 웅덩이에서도 서로 등짝을 타고 올라 짝짓기를 하기도 했다. 멀찍이 서서 새들의 유희를 관찰하다 보면, 그렇게 물속에서 놀며 잔물결을 일으켜 차츰 얼음을 녹여 자기들의 놀이 영토를 넓히는 모습이 매우 성스러워 보였다. 물론 새들의 그런 움직임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겠지만, 지구 생명들이 살아갈 건강한 터전이 점점 줄어드는 현실에서 생존과 놀이가 동반된 그들의 활기찬 모습은 내 가슴에도 성스러운 파장으로 와 닿았다. (중략)
나는 꽃씨를 다 심고 들어와 호미를 농기구 창고에 걸어둔 뒷마당에 서서 붉은 황혼이 물들기 시작하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때 제 보금자리를 찾아가는 한 무리 새들이 보였다. 나는 새들을 바라보다가 그냥 혼자 중얼거렸다. 행복이 뭐 별거야? 찧고 까불며 신나게 놀다가 돌아갈 보금자리가 있는 것!” -중앙일보(2023. 03. 28.)-
새들의 놀이가 거룩하고 신성하다는 것! 새들의 놀이가 놀이 영토를 넓히는 일이라는 것! 새들의 놀이에서 영성을 발견한 것이다. 이 산문을 읽은 후에 다시 「새들의 가갸거겨를 배우다」를 읽는다.
입춘 무렵, 보이지 않는 검은 손이
대문을 흔들며 문 열라고 소리치더니
며칠 전부터는
방 문고리를 잡고 흔드는 것 같았어
이젠 소멸의 가갸거겨를
배워야 할 시간이 당도하고 있는 것일까
얼어붙었던 개구리 입이 떨어진다는
경칩, 용솟음치는 봄의 기운이
죽음을 비웃듯
쳐진 내 어깨를 툭 치며
동장군 뚫고 연두 머리 쑥 내미는
구억배추 새싹을 보여주었어
청명 지나자
꾸찌뽕나무 잔가지에도
물오른 잎눈들이 부활을 토했어
고미다락에 올라 깜박 졸다가 나와
꽃샘바람에 번쩍 정신이 들어
집 안팎을 휘둘러보았는데
대문과 문고리를 잡고 흔들던
검은 손의 환영은 보이지 않았어
잠시
끌탕하던 마음 추스르고
돌담을 넘나들며
봄을 파종하고 있는
새들의 가갸거겨를 배우고 있네
-「새들의 가갸거겨를 배우다」 전문
이 시는 친구 스님을 떠나보내고 죽음의 환영에 사로잡혀서 쓴 시다. 친구 스님을 떠나보낸 며칠은 너무 기가 막혀 종일 집 안팎을 흙강아지처럼 서성이곤 했단다. 그런 일이 있고 며칠 뒤부터 꽃샘바람이 불며 대문에 빗장을 걸어두었는데도 덜컹거릴 때마다 보이지 않는 검은 손이 어서 문 열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삭풍이 불어와 대문 빗장을 마구 흔들고 있었던 것. 또 어느 날은 방문의 쇠문고리를 잡고 흔드는 것 같기도 했고. 그래서 혹시나 누가 왔나 하고 문을 열어보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이런 환영에 시달리던 마음을 겨우 추스른 어느 날, 문득 성큼성큼 다가오는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소멸의 가갸거겨를 배울 시간이 당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 생명을 파종하는 새들의 노래. 그 전에 삭풍이라는 검은 손이 불어와 대문을 흔들고 문고리를 흔드는 소멸의 가갸거겨. 그것은 죽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긍정의 지혜를 배우겠다는 것. 가깝게 지내던 친구와 후배들을 딴 세상으로 먼저 떠나보내고 꽤 여러 날 우울하던 내 마음에 어느덧 연둣빛 명랑이 감돌기 시작했단다. 소멸의 가갸거겨를 들은 후에 봄을 맞아 참새와 딱새 같은 작은 새들이 재잘거리며 봄을 파종하는 소리를 들으니 더욱 건강하고 명랑한 생명의 소리로 들리더라는 것, 그리하여 ‘저 새들의 가가거겨를 배울 거야. 자연의 유치원생이 되어!’라고 외칠 수 있는 것이다.
깊은 헛간 구석으로 들어가
죽은 고양이 새끼를 킁킁 후각으로 겨우 찾아
뒤란 앵두나무 아래 묻어주었는데
바람이 불어
버슨분홍 앵두꽃 후두두둑 떨어져
슬퍼할 새도 없이
금세 꽃무덤을 지었네
저 불룩한 꽃무덤에서
돌담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꽃잎 밟고 다니던
음유시인 하나 태어난다면
천연덕스레
종말을 노래하는 시절
지구별 조율사처럼
꽃무덤에서 고양이든 사람이든
음유시인 하나 태어난다면
-「꽃무덤」 전문
신작시 「꽃무덤」 에도 소멸의 긍정성이 여실히 드러난다. 소멸은 슬픈 것이 아니다. 소멸은 탄생을 예비한다. 자연은 끊임없이 순환한다. 죽음이 생명을 잉태한다. 죽음이 삶의 긍정적 에너지가 된다. 죽음이 삶을 살린다. 고양이는 죽었지만 버슨분홍 앵두꽃이 후두둑 떨어져 꽃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그곳에서 음유시인이 태어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양이는 음유시인이 될 것이다. 시를 읊으며 집 주변, 헛간, 사람 주변을 떠도는 동물 시인으로 살다가 영성을 지닌 진짜 음유시인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고진하 시인의 시집 『새들의 가갸거겨를 배우다』는 새와 꽃과 노래와 신의 숨결로 붐비는 시집이다. 촉각의 시, 진흙의 시, 영성의 시, 유치원의 시다.
목숨붙이로 산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하고 무섭고 슬픈 일인가?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얼마나 더욱 더 아프고 슬픈 일인가? 생명으로 사는 모든 피조물에게 사랑과 관심과 연민을 건넬 수는 없을까? 그게 가능한 사람이 있을까? 대한민국 6천만 명 국민 중에 있을까? 대한민국 수행자 십만 명 중에 있을까? 새에게 욕을 얻어먹는, 새들이 욕하는 소리를 듣는 시인이 있을까? 묵직한 해바라기 꽃송이를 보고 묵직한, 무거운 웃음 세 송이라고 웃는 꽃, 꽃의 웃는 표정을 발견하는 목사님이 있을까? 수확하기 십여 일 전부터 자빠지는 양파를 보고 죽음을 미리 알리며 겸허해지는 양파를 현자(賢者)라고 불러주는 목사님이 이 나라에 있을까? 방죽길의 개똥에 많은 나비들이 날아와 개똥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의 성찬(盛饌)도 저와 같을 것이라고 말하는 목사님이 이 나라의 사제 중에 있을까? 나이 삼십 대이건 오십 대이건 팔십 대이건 모두 마음에 팔팔한 하느님을 섬기면 모두 팔팔한 청춘이라고 얘기하는 시인이 있을까? 그는 진흙 시인이다. 인간은 진흙 덩어리에 불과하지만 신의 찬연한 빛을 품고 있기에 ‘진흙 등불’이라고 말하는 진흙 시인이다. 박주가리가 껍을 벌리면 꼭 날아가는 새의 형상을 한다. 새가 된 박주가리! 식물이 조류가 되어 날아가는 모습을 발견하고 환희에 젖는 목사님! 그는 나이를 먹어도 영원히 자연의 유치원생이다. 새와 봄나물과 가갸거겨 노래를 배우는 유치원생이다. 유치원생은 온몸이 촉각이다. 만진다. 느낀다. 고진하 시인은 촉각의 시인이다. 인간과 자연과 생명을 영성과 마음의 눈으로 살피는 견성의 시인이었다. 이제 거기에 촉각을 더 첨가했다. 감각의 영성화! 그는 풀떼기의 친구이며, 가난한 성자이며, 새의 시인이다. 풀빛 빈자, 새의 빈자여서 무궁무진하게 우주를 낭비하는 부자다.
새벽 미명마다 걸으면서 기도하네
어느 날은
막 동이 터오는데
둑방 옆 나뭇가지에 붙어
생명의 경계를
미소(微小)한 자로 허물듯
오체투지하듯
꿈틀꿈틀 움직이는
자벌레들을 보았네
지구
평화를
기리는
느림의 신도들―
-「새벽 성전」 전문
이글이글 불타는 태양의 수레가
뭉게구름 속을 들락날락하는 오후
마을 어귀 넓은 양파밭
푸른 양파 잎들이 일제히 옆으로 자빠져 있었다
어, 이거 무슨 일?
볕이 너무 뜨겁고 가물어서 그런가
마침 밭 주인이 밭가에서 풀을 베고 있기에
가까이 다가가서 물었다
왜 저렇게
푸른 양파 잎들이 일제히 드러누웠죠
저걸 도복(倒伏)이라 그러는데유
양파는 저렇게 옆으로 쓰러지면서
열흘 안에 수확해야 될 때가 되었다
는 걸 알려주는 거예유
저 죽을 때를 모르는 사람보다 낫지유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그래서 양파는 벗기고 벗겨도 또 벗길
깊은 속을 지니게 된 거라고
그래서 저를 까는 사람 눈물 쏙 빼놓을 만큼
매운맛을 지니게 된 거라고
-「현자 양파」 전문
「새벽 성전」 과 「현자 양파」 두 작품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자벌레를 느림의 철학을 추구하는 신도라고 표현하고 있고, 스스로 엎어지고 드러누우며 낮은 곳으로 임하는 양파를 현자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벌레에게도 종교적인 영성이 있고, 양파에게도 종교적인 영성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우선시하는 인본주의는 찾아볼 수 없다. 인간의 삶을 중심에 놓는 인본주의(人本主義)적 인문학이 결코 아니다. 만물의 생명을 평등하고 소중하게 바라보는 새로운 생명주의다. 고진하 시인은 성전은 동물과 식물과 벌레의 세계에 있고, 그들 중에 신도가 있고 사제가 있고 현자가 있을 수 있다는 발상을 누구보다도 앞서서 하고 있다.
애니메이션을 보면 동물, 식물과 인간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사건을 전개 시킨다. SF 영화 아바타를 본 적이 있는가? 판도라성에 있는 나비족은 생명의 나무와 교감신경을 서로 연결하여 교감을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나무, 새, 물고기, 인간 등 모든 생명체는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발상에서 인류 미래의 운명적 사건이 전개되고 있다. 동물과 식물, 더 나아가 강물과 바위 같은 사물이 모두 살아 있으며 인간과 영적으로 교류한다는 애니미즘이 영화 아바타의 바탕을 이루고 있으며, 미래 인류와 생명체를 구원해 줄 철학으로 작용하고 있다. 애니미즘(animism)은 ‘생명·숨·영혼’을 뜻하는 라틴어 아니마(anima)를 뿌리로 한 말이다. 애니미즘이라는 말은 19세기 중반 영국 인류학자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1832~1917)가 처음 쓴 말이다. 동물과 식물과 사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을 ‘애니미즘’이라고 불렀다. 요즘 다시 애니미즘이야말로 반생태적 근대 문명의 대안을 찾는 상상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이 늘고 있다.
그런데 모든 생명체는 먹이사슬로 연결되어 있다. 먹고 먹히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인간이 살아가려면 다른 동식물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육식을 그만두고 채식만 한다고 해도 사정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뭇 존재를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것과 그 뭇 존재를 먹어야 하는 것 사이에는 모순이 있다. 이런 모순을 고진하 시인은 ‘허락’, ‘거둠’, ‘선물’, ‘주고받음’, ‘증여’의 개념으로 바라보고 있다. 서로에게 선물을 주는 것이다. 신은 우리에게 무한한 식량을 주셨다. 무한한 사랑을 주셨다. 무한한 선물을 주셨다. 증여해 주셨다. 우리는 신의 무한한 선물을 소비하고 낭비해도 된다. ‘선물’을 받으면 답례를 해야 한다. 답례는 상호 관계 맺기이며, 더 큰 세계와 관계 맺기로 확대된다. 인간과 비인간 사이 우호적 상호작용에서 벗어난 존재는 사람답지 않은 존재다. 비인간 존재의 생명성을 포착하고 그 생명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수성을 키우는 것이 생태적 상상력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영성의 세계에서는 ‘영성은 모든 자연을 사로잡고, 그 안에 편만해 있으며, 꽉 차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고진하 시인이 나에게 보내온 대표시 5편. 「대문」은 백 년이 훨씬 넘은 고택의 솟을대문을 보고 쓴 시다. 폐가에 가깝지만 솟을대문은 젊디젊단다. 문을 열 때마다 삐그덕 큰소리를 낸단다. 큰소리를 우주 명창이라고 말한다. 대문(大門)은 대문(大紋)이다. 큰 무늬다. 온갖 자연과 삶의 무늬를 몸에 새기고 있다. ‘삐그덕’, ‘이리 오너라’ 아직도 큰소리를 치면서 온갖 무늬를 새기고 있다. 솟을대문의 큰소리에서 영성을 느낀다. 「향기 수업」은 봄꽃을 보고 쓴 시다. 봄은 꽃의 문을 연다. 향기 수업을 한다. 나비, 벌 등 곤충이 향기 수업을 받는다. 만발한 꽃의 향기에서 영성 수업을 받는다.
「얼음수도원 3」은 남극 빙설을 얼음수도원이라고 명명한다. 혹한의 추위 속에서 백야, 남극 빙설이 만든 대자연의 신비한 눈 조각을 상상하면서 쓴 시다. 대자연은 묵상을 하고, 눈 조각을 만들며 즐거움을 누린단다. 혹한의 겨울은 묵상하기 좋은 계절이다. 동안거에 들어서 묵상을 하고, 대자연의 빙설을 보고 붓다와 예수를 생각하며 시간의 영원성을 생각하고, 미소와 고뇌의 속성을 묵상한다. 눈 폭풍이 휘몰아치면 모든 형상을 순식간에 바꿔놓는다. 눈 조각의 미소도 고뇌도 사라지고, 형상을 알 수 없는 형상만 남는다. ‘유현(幽玄)한 형상’이 된다. ‘유현’은 이치나 아취(雅趣)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깊고 오묘함을 말한다. ‘극(極)의 시간’을 헤아리는 일은 유현한 일이 된다. 「어머니의 성소」라는 시에서 장독대가 어머니의 기도처이며 성소가 된다. 평생 항아리를 닦고 닦는다. 그것은 마음을 닦는 일, 영을 닦는 일이다.
어제 말갛게 닦아놓은 항아리들을
어머니는 오늘도
닦고 또 닦으신다
지상의 어느 성소(聖所)인들
저보다 깨끗할까
맑은 물이 뚝뚝 흐르는 행주를 쥔
주름투성이 손을
항아리에 얹고
세례를 베풀듯, 어머니는
어머니의 성소를 닦고 또 닦으신다
-「어머니의 성소」 부분
나는 2년 전부터 장독대를 들락거린다. 고추장을 손수 담갔다. 작년에는 처음으로 간장을 담갔다. 간장을 담그니 된장도 담게 된다. 이십여 개의 장독을 다 열어보았다. 수십 년 된 새까만 씨간장 항아리가 두 개 있었다. 매실청, 동치미 항아리도 있었고, 빈 항아리가 십여 개 있었다. 이십여 개 항아리는 깔깔 웃는 동자승처럼 보이기도 했고, 배부른 임산부들처럼 보이기도 했고, 덕이 높은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넣고 쌓은 둥근 돌탑인 부도탑처럼 보이기도 했다. 가족들의 일용할 양식과 양념이 보관되어 있는 장독대는 어머니의 성소임이 분명했다.
「표절 충동」이라는 시에서는 여러 시인들의 좋은 시구절과 가인들의 노래 구절이 너무 좋아서 베끼고 싶었던 때도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저 그랬다는 것이다. 진짜 베끼고 싶은 구절은 꽃, 꿀, 나비, 꿀벌 등 생물들의 꽃자리가 되어주는 대지의 사랑을 베끼고 싶다고 노래한다.
고진하 시인은 유일신을 믿으면서도 창조주인 유일신은 어디에서 존재하며, 유일신은 그가 창조한 수많은 피조물들이 영혼과 영성을 지녔다고 보는 것 같다.
●‘명랑시’의 독보적인 색깔과 아모르파티의 영성
북카페 빌려 어울리는 경전 읽기 모임
새로 나온 벗에게
나이가 몇이냐고 물었다
“서른 두 살이에요.”
“팔팔한 청춘이군.”
달포쯤 먼저 나온 벗에게
나이가 몇이냐고 물었다
“마흔아홉이에요.”
“팔팔한 청춘이군.”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항변했다
“이네 곧 쉰내가 날 텐데요.
어떻게 서른둘하고 마흔아홉이 똑같이
팔팔한 청춘일 수가 있죠?”
잠시 껄껄껄 웃다가 대답했다
“그대들 안에 계신
하느님은
언제나 팔팔한 청춘이시거든!”
-「팔팔한 청춘」 전문
이 시를 읽고 나는 키득키득 웃었다. 왜냐하면 내 별명이 ‘영원한 청춘’이기 때문이다. 28살 때 나는 ‘패랭이 청년’, ‘영원한 청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고등학교 2학년 제자들이 지어준 별명이다. 나는 늙어서도 결코 늙지 않는 청년이고 싶었다. 고진하 시인은 하느님을 영원히 팔팔한 청춘이라고 얘기한다. 외람되게도 내 별명과 닮은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은 늘 ‘하느님을 닮으며 살자.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자.’는 설교를 하신다. 닮아가는 삶! 하느님이 팔팔한 청춘이라면 나도 아무리 나이를 먹더라도 팔팔한 청춘으로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고진하 시인은 명랑한 시인이다. 명랑 에너지가 넘치는 시인이다.
저물녘 산길을 내려오다보니
이미 오래전 입적해버린 새의 주검 위로
나뭇가지에 열린 새들 뱃종뱃종 명랑의 둘레가 되고
-「명랑의 둘레」 부분
이 시는 「명랑의 둘레」라는 시의 마지막 연이다. 산길에서 새의 주검을 발견했다. 이미 부패했다. 그런데 나뭇가지에는 새로운 새가 뱃종뱃종 지저귀고 있다. 명랑하게 지저귀고 있다. 죽음 위에 명랑의 둘레를 치고 있다. 죽음과 소멸의 자리에 건강한 명랑의 소리를 퍼붓고 있는 모습은 「새들의 가갸거겨를 배우다」라는 시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래서 고진하 시인은 명랑의 시인이며, ‘명랑시’를 창조하는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의 신작시 「날마다 시흥(詩興)이 솟으니」를 보자. ‘명랑시’의 색깔이 돋보인다.
느시렁느시렁 걷는 돌방죽 옆
마른 억새 덤불에 핀 흰 서리꽃
정지된 식물의 시간을
햇살이 튕겨대는 눈부신 상고대가 장관이네
엊그제 내린 폭설이 녹아 물이 불어난
개여울은 다급한 음색으로 흐르며
내 느낌의 모천을 소환하듯이
색동의 봄을 부르는 것 같았어
아직도 내게 설렘이 남아 있었던가
벌써 몇 주째 단주의 날들이지만
날마다 시흥이 솟으니
이 과잉의 시정(詩情)이
지혜의 궁전 문을 활짝 열어주려나
산책로 끝에 얼음 풀린 연못
백로들 날아들며 빙글빙글 돌길래
새의 천성*을 가진 나도
그 무리에 쓱 끼어들어 보았는데
괜히 겨드랑이가 가려워 춤꾼처럼
까치발 들고 스텝 밟다 돌아왔네
춤이라고 해봐야 막춤이지만
어쩌다 쾌연한 성격으로 변한 난
번우(煩憂)로 복대기는 일 있어도
천변만화하는 구름의 소요거니 퉁치고
얼레 달 뜬 밤이면
저 빛의 실 다 풀리기를 기다려
자족의 그믐 속으로 잠긴다네
늦가을 날 뿌리 캐어
얼어 죽지 않도록 묻어 둔 다알리아가
생각나는 야심한 밤
동면에 들어간 다알리아 뿌리는
선정(禪定)은커녕
여직 속정(俗情)에 끄달리는 나를 비웃지 않을까
내일 다시 영하로 내려간다기에
아궁이에 장작개비 몇 개 더 밀어넣고 불멍(!)을 하다
사랑에 들어 늦은 잠 청하는데
길냥이들 부뚜막 긁는 소리, 에고 숙면에 들긴 틀렸구나
눈부신 상고대부터
다알리아 뿌리까지 긁고 또 긁어대는…
* 프리드리히 니체시
-「날마다 시흥(詩興)이 솟으니」 전문
앞서 나는 고진하 시에서 ‘새’의 상징성이 유독 돋보인다고 썼다. 이 시도 마찬가지다. 봄의 노래다. 온갖 생명체가 소생하고, 명랑함으로 충만한다. 고진하 시인은 ‘신은 죽었다’고 외친 니체에게서 ‘충만한 영성’을 발견한 것 같다. 니체는 ‘아모르파티’를 외친 아모르파티의 철학자다. ‘아모르파티’ 트롯 가수 김연자가 부른 경쾌한 노래인 ‘아모르 티’는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 용어다. 철학자 니체는 긍정의 철학자였다.
“나는 웃음을 신성하다고 말하노라. 보다 높은 인간들이여, 내게 배울지어다. 웃음을!”(니체, 『짜라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장석주 책 198쪽)
니체 철학을 극도로 요약한 말이 곧 ‘네 운명을 사랑하라’(아모르파티)이다. “매사에서, 큰일에서나, 작은 일에서나, 언젠가 때가 되면 나는 단지 긍정하고자 하는 자가 되고자 한다”고 짜라스투라의 입을 빌려 외쳤다. 한 번의 긍정으로 부족하면 "한 번 더 긍정하라" 고 외칠 만큼 그는 세상의 모든 것들에 긍정의 축복을 보낸다.
"너, 티 없이 맑은 자여! 빛나는 자여! 너 빛의 심연이여! 네가 내 가까이에 있는 한 나는 축복하는 자요, 긍정하는 자다."
"춤 한번 추지 않은 날은 아예 잃어버린 날로 치자! 그리고 큰 웃음 하나 동반하지 않는 진리는 모두 거짓으로 간주하자! 하루에 열 번 주위 사람들에게 냉담한 말을 퍼부었다면 오늘부터는 하루에 열 번 주위 사람들에게 기쁨을 안겨주는 말을 건네 보라. 그러면 자신의 영혼이 치유될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의 마음도 상황도 한결 나아질 것이다."
웃음이 넘치는 사람에게 세상은 신나는 축제의 장이다. 세상은 웃는 자가 이끌어가는 거대한 놀이터다. 니체는 “어린아이처럼 웃는 사람만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슬픔 속에서도 기쁨을, 고통 속에서도 즐거움을 찾아낼 수 있다. 내가 웃으면 세상도 따라 웃는다.”라고 말한다.
영원 회귀의 철학을 위해 ‘신은 죽었다’고 니체가 외쳤지만, 신의 자리에 인간의 초인간적인 의지와 운명에의 긍정을 올려놓았지만, 신을 믿는 나로서는 신의 말씀을 전하는 성경에서 삶의 긍정성에 대한 구절을 찾는다. 그것은 니체의 긍정성과 묘하게 맞닿아 있다.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로 말미암아 즐거울 것이니라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잠언 23장 24절, 25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또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서 4장 4절~7절)
기독교인이 갖추어야 할 3대 덕(德)이 있다고 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3대 덕이다. 항상 기뻐하라, 다른 사람에게 관용하라, 그리고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 감사함으로 아뢰라. 성경에는 기뻐하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온다. 기뻐하라. 다시 기뻐하라. 사도 바울은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하 감옥에 갇혀서 모함과 고통을 받고있는 처절한 상황이었다. 기뻐할 수 없는 그런 나쁜 상황에서도 기뻐하라고 말했다.
삶은 슬픔의 총량과 기쁨의 총량으로 이루어져 있다. 긍정의 총량과 부정의 총량으로 이루어져 있다. 선함의 총량과 악함의 총량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쁨의 총량보다 슬픔의 총량이 더 많은 삶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하며, 웃으면서, 긍정하며, 명랑하게 살아갸는 것! 그것이 창조주에게 감사하며 사는 일과 맞닿아 있다.
고진하 시인의 「날마다 시흥(詩興)이 솟으니」는 이런 명랑성과 기쁨의 총량이 잘 표현되어 있다. 상고대에서, 졸졸 녹아 흐르는 개여울 물소리에서, 백로의 춤에서, 까치의 통통 튀는 까치발에서, 다알리아 뿌리에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서, 부엌에 들어온 길냥이에서 명랑성을 발견한다. 오감이 영성으로 이어져 있으니 아모르파티의 영성을 느끼는 것이다.
영성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나 인간 중심의 인본주의에 경도된 사람들은 고진하 시인의 시편에 공감을 표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그의 명랑과 아모로파티의 영성에는 시흥(詩興)에 흠뻑 젖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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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수
2003년 《시인세계》 등단. ‘사이펀’ 편집위원. 시집 『유리창』, 『온순한 뿔』, 『천방지축 똥꼬발랄』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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