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한인사회에서 조일환 코만 사장은 몇 가지로 알려져 있다. 첫째는 의류사업으로 성공한 사업가이고 둘째는 불교를 아주 진실하게 신행하는 신심돈실한 불교신자라는 것이다. 이외에도 조일한 사장을 개인적으로 조금만 아는 사람들은 그가 뉴욕한인봉사센터와 한국학교 그리고 뉴욕주립대 스토니부룩 캠퍼스와 코넬대학교 등에 재정지원을 많이 한 기부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많은 일을 한 조일환 사장이 작년 11월말에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에 장학금으로 50만 달러를 기증하면서 다시 한번 뉴욕 사회에 신선한 감동을 불어넣어 전미주의 불교인에게 널리 알려져 만학도 조일환 사장에 대한 관심이 일고있다.

조일환 사장은 1971년 겨울 무역회사 주재원으로 뉴욕에서 미국생활을 시작했다. 1974년 의류 수입도매업으로 사업을 시작한 코만은 청소년과 젊은 남성층을 겨냥한 캐주얼 의류업으로 미전역에 판매망과 세일즈 맨을 두고 운영하는 회사이다. 지난 2004년 창립 30주년 기념행사를 뉴져지 대원에서 갖은 코만은 뉴욕한인 의류업계의 개척자로 윤리. 도덕에 어긋나지 않은 사업운영과 사회에 기여하는 회사로써 이 업계에서 인정받고 있는 의류업체이다.
의류사업은 유행에 민감하기 때문에 잘 관리하지 않으면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 큰 규모로 의류사업을 잘 하다가 어느 날 보면 의류업계에서 떠난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코만은 34년을 한인 의류업계에 모범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한인 의류업계에서 규모가 가장 큰 Southpole의 김대원사장은 4-5년 전 언론 인텨뷰를 통해 “나의 성공은 코만 조일환 사장을 만나 그의 도움 때문이었다”라고 밝혔고 코만 창업 30주년 행사에 나와 축사를 하기도 했다. 김 사장 뿐 아니라 뉴욕에서 의류업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코만 출신이라는 것이 이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코만을 창업한 이후에 조사장은 뉴욕 원각사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당시는 숭산스님이 맨하탄 20가 4층에 있는 원각사 주지로 있었다. 이때 법안스님은 부주지로 있다가 1976년 8월 주지에 취임했다) 조 사장을 비롯한 현재 뉴욕불교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종성, 최무직, 곽종진, 이순배 거사등이 원각사의 젊은 일꾼들이었다. 이들은 부주지였던 법안스님과 일심동체가 되어 원각사 법당을 마련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조 사장은 “법안스님이 환경이 열악하고 겨울에는 추워 고생을 많이 했다. 법안스님 외에 무착스님도 함께 있었는데 나도 법회와 기도때 열심히 참석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들은 원각사 법당을 마련하기 위하여 서예로 유명한 법안스님 작품을 전시하는 서예전을 여러 번 가졌는데 조 사장을 비롯한 원각사 신도들이 작품을 사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귄하여 작품을 팔아 원각사 설립비를 마련하였다.
이런 노력으로 5만 달러 정도를 모아 퀸즈의 잭슨하이츠에 있는 건물을 17만 달러에 사서 이사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코만의 부사장으로 있던 조 사장의 부인 조 순자 보살이 코사인을 하여 은행에서 융자가 나오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조 사장 부부와 법안스님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 후 원각사는 잭슨하이츠에 4년 있다가 1982년 맨하탄 17가로 이전하였다. 필자는 1986년부터 1년 6개월을 원각사에 기거하였는데 신년에 거의 한달 가까이 새벽예불에 참석하는 조 사장 부부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조사장은“맨하탄 뿐만 아니라 뉴져지에서 잭슨하이츠의 원각사 법당에도 새벽예불에 자주 참석하였다.”고 회고하였다.

그가 이렇게 절과 신행에 열중하게 된 것은 “미국에 한국을 심는 일을 하자”라는 나름대로의 원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일의 의미에 대해 “ 한국 사람이 뉴욕에 성당을 바티칸 교황청보다 더 크게 짓더라도 큰 의미는 없다. 그러나 해인사, 송광사 같은 대찰을 뉴욕에 건립하면 그것은 한국을 미국에 심는 것으로 의미가 있다. 나는 이런 의미 때문에 원각사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기도를 많이 했다.” 고 말했다.
원각사가 잭슨하이츠에서 몇 년 있다가 뉴욕 17가로 옮긴 후 법안스님과 여러 신도들이 함께 식사하면서 조사장은“스님 우리의 꿈은 해인사 같은 절을 뉴욕 인근에 짓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을 법안스님은 조 사장의 손을 꼭 잡고 감격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일요일 법회 마치고 공지사항 시간에 법안스님은 조 사장을 <원각사 불사추진위원장>으로 발표하였다.
갑자기 이 말을 들을 조 사장은 엉거주춤 나가서 “추진위원장 말 한 것도 없는데 무슨 추진위원장입니까? 미국에 큰 절을 건립하는 것은 나의 꿈이 아니고 우리 모두의 꿈입니다.”하고 말하자 모든 신도들이 박수치고 기뻐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고 난 직후부터 법안스님은 시간 나는 대로 뉴욕과 뉴져지 일대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큰 절터를 보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법안스님이 1988년 중풍으로 쓰러지자 법안스님의 은사 관응스님의 권유로 원각사 이사장직을 수 년간 맡았다.
이렇게 법안스님과 특별한 인연을 맺은 조 사장을 포함한 원각사 초기 신도 여러 사람들이 법안스님의 발병이후 관계가 갈등관계로 된 것에 대해 조사장은 안타깝게 생각한다.
한미불교진흥재단을 통한 불교포교와 후원활동
1995년 4월에 미국에서는 L.A에 이어 뉴욕에서도 불교방송이 시작되었다. 당시 1480 라디오 방송을 일주일에 한 시간 대여하여 방송을 시작한 것이다. 김자원 보살이 시작한 이 방송은 조 사장이 결성한 한미불교진흥재단(Korean American Buddhist Foundation)이 조직적으로 재정 후원을 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사찰을 중심으로 한 조 사장의 불교활동은 불교방송 운영, 격월간지 ‘구름걷힌 햇살’ 운영, FIT 등 뉴욕지역 불교대학생회 결성지원, 인터넷 불교동아리 ‘보리’지원 등으로 영역을 넓혔다. 한국의 IMF 여파로 김자원씨와 함께 하던 불교방송이 1999년 5월 말 문을 닫자 2달 후인 8월에는 조 사장이 모든 비용을 부담하면서 다시 불교방송을 재개시켰다. 이 방송은 2003년 5월까지 약 4년간 지속되었다.
1999년 8월 이후에는 방송대여비, 진행자 임금, 사무실과 직원 임금, 잡지 운영비 등으로 매달 5천달러를 지출하였다. 그러나 들어가는 비용에 비해 조 사장 부부가 관심이 많은 젊은층에 대한 포교 효과가 적다고 판단이 되었다. 방송포교를 중단하고 대신 젊은 층을 위한 포교사업으로 방향을 돌렸다. 예일대학교, 코넬대학교, 뉴욕주립대 스토니부룩 캠퍼스를 비롯한 많은 대학교에 번역된 한글대장경 전질을 기증하고 도서구입비와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그리고 미주현대불교에도 2003년 3천달러를 시작으로 2004년 부터는 매달 5백달러씩 후원하고 또 연꽃축제를 비롯한 본지의 행사에 별도의 재정후원을 하고 있다. 이외에도 코만의 조사장 부부는 뉴욕의 크고 작은 불교행사에 후원을 하며 또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도움을 요청을 하는 사람들을 돕기도 한다. 미주한국불교 40여년 역사에 불교포교에 이 처럼 다방면에 걸쳐 재정후원을 한 사람은 없다.
뉴욕한인봉사센터 등 사회복지단체에
후원자로 나선 조일환 사장 부부

사업에 열중하면서 가정과 직장 그리고 불교신앙에 몰두하던 조일환 사장에게 사회로 방향을 돌리게 한 사람은 뉴욕한인봉사센터(The Korean Community Services of metropolitan New York,Inc-이하 KCS로 약칭) 사무총장으로 오랜 동안 일했던 최우길씨였다. KCS는 뉴욕 한인사회에 한인들에 의해 설립된 한인들을 위한 첫 번째 봉사단체다. 뉴욕한인교회 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되고 운영되었던 이 단체가 1980년 초에 재정난으로 큰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이때 뉴욕한국일보에 근무하면서 이 단체를 잘 아는 윤영재씨가 코만에 들려 KCS와 최우길 사무총장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조일환 사장에게 들려주었다. 윤씨의 소개로 최우길씨를 만난 조사장은 최씨의 삶에 큰 감명을 받고 동시에 쇼셜워커에 대한 연민의 정을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 최씨를 만난 후 조 사장은 “인생을 저렇게 사는 사람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가정만 생각하면서 살아온 삶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나는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종종하게 되었다. 이후 조 사장은 사회단체, 교육단체, 봉사단체, 학교 등 여러 분야를 후원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최우길씨의 영향 때문이었다.
조 사장은 1981년부터 이제 후원이 필요 없다고 할 때까지 만 6년 동안 KCS에 매달 $1,000씩 기부하는 후원자가 되었다. 조 사장의 이런 후원과 뉴욕한국일보의 후원으로 KCS는 폐쇄직전에서 회생하게 되었다. 올해로 창립 35주년이 되는 KCS는 뉴욕한인사회에서 가장 큰 봉사단체로 매일 약 1,000명 넘는 사람들에게 서비스를 하고 있으며 일년 예산이 400만 달러에 이르고 있다. 코만은 KCS에 매달 정기적으로 후원하지는 않지만 그 후로도 매년 일만 달러 이상을 후원하고 있다. 현재 KCS는 한인사회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는데 “KCS가 잘 운영되고 있어 한없이 기쁘다”고 조 사장은 자기 일처럼 기뻐하였다. KCS Award라는 상은 사회를 위해 공로가 많은 단체나 사람에게 KCS가 해마다 선정하여 시상하는 것인데 조 사장은 2004년에 이 상을 받았다.
코만 조 사장과 그의 부인 조순자 보살이 지원하는 복지단체는 뉴욕지역 뿐만 아니다. L.A, 시카고 그리고 한국에도 있다. 시카고에 있는 ‘The House of Player' 단체는 목사가 운영하는 단체에서는 미국의 최극빈자들로 알콜 중독자, 마약중독자인 사람들을 모아서 재생의 길을 가게 돕는다. 조사장 부부는 이 단체에 10년전 부터 잠바, 겨울 옷, 스리핑 백 등을 많이 후원하고 있다.
LA에 있는 'My friends Place'는 나이가 18세 이하로 집을 나와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위한 곳이다. 이 단체에서는 이곳에 도착하는 청소년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샤워를 시키고, 옷과 음식을 주며 직업교육을 시킨다. 방황하는 청소년들이 이 단체에 와서 샤워하고 새 옷을 입고 난 후 새롭게 변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학교나 집으로 돌아가 재생의 길로 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코만은 이 단체에 5년전부터 봄. 가을에 걸쳐 재정지원도 하고 코만 신품 옷과 스링핑 백을 몇 트럭씩 보내고 있다. 이런 단체들을 도우면서 조 사장 부부는 의류사업을 하는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미국 뿐만 아니라 한국의 거제도의 애관원이라는 지체부자유 고아원에도 고정 후원자로 오래 전부터 후원자로 있다.
뉴욕주립대와 코넬대학교 그리고
뉴욕브롱스 한국학교 지원
슬하에 3남매가 있는 조일환 사장은 2세들의 한글을 비롯한 한국문화 교육에 특별히 관심이 컸다. 아이들 한글교육 문제로 브롱스 한국학교 허병렬 교장 선생님을 만나보고 훌륭한 교육자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리고 1978년부터 15년간 3남매를 매주 토요일 한국학교에 같이 다녔다. 학생들의 숫자는 많지만 공간이 좁은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던 조 사장 부부는 결혼 10주년이 되던 1979년 브롱스 한국학교 건립기금으로 5천 달러를 허 교장과 이사들에게 내놓고 “이 돈을 시작으로 돈을 모아서 건물사서 우리 2세들을 가르치자”라고 제안하였다. 지금도 이 학교의 고문으로 있는 조 사장은 1980년부터 1986년까지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건축기금으로 30만 달러를 모금하였다. 그러나 한때 300명에 달하던 학생들도 뉴욕지역에 한인들이 증가하면서 교회를 비롯한 많은 종교단체에서 한글학교를 운영하기 때문에 학생 수가 많이 감소하여 건물은 사지 못하였다.
이런 활동을 했던 것은 평소 조 사장이 교육에 관심이 컸기 때문이다. 조 사장은 지금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국의 시골에 있는 중고등학교의 선생님으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희망을 주는 강연회를 하고 싶은 소망이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자라는 2세들에게는 코리언 아메리칸으로서의 정체성 정립이 중요하다고 조 사장은 강조한다. “훌륭한 한국인이 되어야 훌륭한 코리언 아메리칸인 될 수 있다. 또 훌륭한 시민, 훌륭한 세계인이 되기 위해서는 훌륭한 한국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한국학교가 꼭 필요하다”는 것이 조 사장의 소신이다.

조 사장의 이러한 생각은 뉴욕주립대 스토니부룩 캠퍼스와 코넬대학교 등의 한국학 진흥운동에 후원자도 나서게 한다. 스토니부룩대학교에는 박성배교수와 코넬대학교에는 한국학 담당 교수가 친구 아들이라는 친분이 작용한 것도 있지만 그 밑바탕에는 조 사장의 이런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본다.
“코넬대학교에서 한국학과가 생긴다는 말을 들으면서 코넬대학교에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고등학교 학생 때부터 조사장 집으로 자주 놀러오던 친구 아들이 이 대학의 교수가 되는 것을 보고 아주 기뻤다. 이런 운동은 ‘미국에 한국을 심는 작업’과 같은 연장선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조사장은 말했다. 그래서 이 대학의 한국학진흥을 위해 후원을 했다. 또 그의 기부금으로 만든 동아시아학과의 도서관 안에 있는 세미나 룸에는 'Mr. Mrs IL HWAN CHO &SOON JA CHO ROOM FOR Semina East Asian Studies'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코만은 지금도 이 대학교에 후원을 계속하고 있다.
의류사업 뒤로하고 65살에 만학도 전형으로 2005년에
동국대 경주캠퍼스에 입학과 장학금으로 50만달러 기증
의류사업으로 성공한 조 사장은 뉴욕한인사회에서 불교인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아쉽게도 조 사장은 개인적으로 불교에 대한 교리공부를 심도있게 할 기회가 없었다. 이런 그에게 가끔은 현지인을 포함한 주위 사람들이 불교의 ‘사성제’ 혹은 ‘오온’에 대해 질문하면 당황하였다 한다. 그래서 항상 불교공부를 하려는 생각으로 집에서 불교 책을 보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체계적으로 불교공부를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오랜 전부터 교육과 학교에 관심이 많은 그는 결단을 내려 불교대학교에 가서 공부하기로 하고 조사를 하였다. 처음에는 동국대학교 분교인 LA 동국로얄한의과대학교도 알아보았지만 원하는 학교가 아니었다. 그러나 고향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경주캠퍼스를 보고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 학교에 만학도 전형으로 입학하였다. 조 사장을 아는 많은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들고 매우 놀랐다. 성공적으로 운영하는 큰 사업체를 뒤로하고 65세에 한국으로 대학교 신입생으로 입학한다는 것은 분명 보통 사람들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조 사장은 일반 학생들과 똑같이 공부하고 방학 때는 다시 뉴욕와서 사업하면서 이제는 졸업반인 4학년이 되었다. 조 사장은 1학년때는 올 A 플러스를 받았고 3학년이 끝난 현재 1학년부터 3학년까지 계속해서 성적이 우수하여 주는 장학금을 받았다. 조 사장은 받은 장학금을 매칭펀드로 다시 학교에 장학금으로 3년간 총 700만원 그리고 불교문화연구비 일천만원 총 1천 7백만원을 학교에 기부하였다.
만학도 이지만 공부하는데 어려움은 전혀 없었고 다만 가족하고 떨어져 생활하는 것이 불편하였다고 전하였다. 70살인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학교 간 것은 잘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석사까지 할 예정이다.”라고 몇 년 공부를 더 할 계획을 말했다. 그는 이어 “이제는 오온이나 사성제에 대해 설명 할 수 있다. 앞으로 장학사업으로 인재양성하면서 영어로 불교강의를 하고 싶다”고 야심찬 포부를 밝혔다. 조 사장은 올해 본지에서 주최하는 중고등학생들을 위한 명상캠프에 강사로 초빙되어 학생들에게 특강을 할 예정이다.
조 사장은 미국에서 사업할때는 ‘해인사 같은 큰 절을 뉴욕에 세워 한국을 미국에 심자’는 생각을 일찍부터 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 사장은 동국대 경주캠퍼스에 재학하면서 불교공부도 체계적으로 하면서 이런 가치관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인재양성에 큰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는 “불교발전이 안되는 것은 절이 없어서가 아니라 인재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은여생을 인재양성에 쏟고 싶다”고 앞으로의 활동방향을 밝혔다.
불교의 앞날을 걱정하는 조사장은 인재양성과 더불어 불교인들의 의식구조가 타종교인들에 비해 더 앞서야 하고 선진화된 사고를 가져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해외와 접촉을 많이 해야 한다. 해외여행을 많이 하게 되면 지식을 더 많이 갖게 된다. 그러므로 세계 공영어가 되어가는 영어를 더 잘해야 한다”는 것이 조 사장의 지론이다. 이런 일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재정이 필요하므로 경주캠퍼스 불교대학 학생 중에서 선발하여 100% 경비를 지급하여 해외영어연수를 시키는 기금으로 50만 달러를 지난 해 11월 말에 기부하였다. 2010년부터 시행 될 이 프로그램은 동국대 신입생 선발 프로그램에도 이미 홍보되기 시작했다. 조 사장은 이 장학금이 “불교계가 선진화된 사고를 가지는 해외교육에 대한 기폭제가 되었으면 좋겠고 이 프로그램이 잘되면 장학금을 더 출연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세계적 갑부인 빌 게이츠 마이크로 소프트 회장이 지난 1월 25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기업들이 각국 정부 및 비영리단체들과 함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창조적 자본주의를 해야 한다”고 주창했다고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빌 게이츠가 주창한 ‘창조적 자본주의’란 코만의 조 사장 부부가 펼치고 있는 여러 사업과 같은 선상이라고 생각한다. 코만 사업이 번창하여 지금까지 하는 여러 방면의 후원 사업이 지속되기를 바란다. 또한 조일환 사장이 석사과정까지 무사히 마치고 다시 미국에 돌아와 2세들에게 한국인의 정체성을 심어주고 불교를 강의하는 그 날을 상상해본다.
첫댓글 대단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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