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의 기수, 교당의 얼굴
편집자 주
‘여한 없이 교화하며 살겠다.’
하여, 그의 출가 서원은 “교당 교무로 시작해 교당 교무로 끝을 맺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서원의 간절함이었을 것이다. 그는 “누군가는 교화 이론을 세우는 일에 첫발을 내디뎌야 한다”는 생각으로, 원고지에 글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교화하겠다’는 의지와 ‘잘해봐야겠다’는 마음 하나로, 간절히 매달려 왔던 40여 년의 세월이, 그렇게 온전하게 흘렀다.
몇 주 전, 김일상 원로교무를 만났다. 교화 현장에서 요청한 설법을 마치고, 두 시간여를 따로 내준 김 원로교무는 “서울은 지방교화를 이끌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한발 앞서가는 교화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당부 끝에 ‘원불교 교화는 결국 교화단 교화’임을 강조했다. “한울안신문은 교화지로서 ‘교화’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과 “교화단을 어떻게 실천적으로 끌고 갈 것인가 고민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전했다. ‘교화단을 이해해 교화를 확산시키고, 교화단을 통해 모두가 영적 성장을 이뤄내기’를 바라는 김 원로교무의 뜻을 한울안신문 기획에 담고자 한다. 김 원로교무의 저서 '교단의 기수, 교당의 얼굴'을 연재하는 취지가 잘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교화단이란
진리를 깨치신 성자들은 자신의 깨달음을 깨치지 못한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따르는 사람을 제자로 하고 그들과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는 공동체운동을 펴갑니다. 이것이 발전하여 종교가 되었고, 교화단은 공동체운동의 한 방법입니다. 그리고 단장중앙은 이의 중심에 있음을 앞에서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부처가 되고 낙원세상을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된 교화단은 무엇일까요?
교화단의 의의
교화단은 소태산 대종사님이 시방세계(十方世界) 일체생령을 교화하고 통치하기 위해 창안한 교화방법으로 조직의 명칭입니다. 정산종사님은 교화단의 ‘단(團)’을 ‘뭉쳐서 하나 된다’는 뜻으로 풀이해주시고 덧붙이는 말씀으로 “단이란 뭉쳐서 하나 된다는 말이니, 우리가 잘 뭉쳐야 이 단의 원리에 계합되어, 하늘의 기운 하나가 무위이화 자동적으로 우주 만유를 생성하듯이 우리의 정성 하나가 새로운 도덕으로 만생을 제도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대종사께서 처음 이 단을 짜시고 천지의 원리를 본받아서 시방세계의 주인이 되라 당부하셨나니, 이 원리를 체득 활용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요 영광인 바, 일국의 주인 되기도 힘들거든 시방의 주인 되기가 과연 어떠하리요. 시방의 주인은 낱으로 나누인 마음으로는 되지 못하나니, 얼굴로 주인 되는 것도 아니요 지식으로 주인 되는 것도 아니라, 낱 없는 마음, 사 없는 마음으로 주인이 되나니라.”(<정산 종사법어> 경륜편 24장)고 하셨습니다.
교화단의 역사
진리를 깨친 소태산 대종사님은 시국(時局)을 관찰하고 정신도덕의 부활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하시며 부연하시기를 “이제 나의 안 바는 곧 도덕의 정체(正體)요, 나의 목적하는 바는 곧 새 회상을 이 세상에 창건하여 창생을 낙원으로 인도하자는 것이나, 내가 몇 달 전까지도 폐인으로 평을 받았고, 일찍이 어떤 도가에 출입하여 본 바가 없었으며, 현재의 민중은 실생활의 정법은 모르고 허위와 미신에만 정신이 돌아가니, 이 일을 장차 어찌할 꼬?” (<원불교교사> 첫 제도의 방편과 구인제자)라고 하셨습니다.
소태산 대종사님이 시방세계 모든 사람을 통치 교화하기 위해 교화단을 창안하여 시행한 것은 원기2년(1917) 7월 26일(양력 9월12일)의 일입니다. 소태산 대종사님은 따르는 사람이 40여 명에 이르자, 이 가운데 특히 진실하고 신심이 굳은 여덟 사람을 선택하시고, 후일 기다리고 찾았던 송도군(宋道君송규)을 합류시켜 교화단을 완성하셨습니다. 소태산 대종사님은 교화단이 완성되자 교단사(敎團史)와 인류사에 크게 빛날 세 가지 업적을 단원들과 함께 이뤄내십니다. 이는 교화단 역사의 문을 여는 일이며 또한 교화단 활동의 정신이자 활동이기도 합니다. 그 하나는 첫 교화단이 만들어진 다음 달인 8월에 저축조합(貯蓄組合)을 창설하여 몇 달 만에 상당한 기금을 만들어 그 기금을 바탕으로 방언공사(防堰工事)를 시작하신 일입니다.
저축조합의 창설 목적은 새 회상 창립을 위한 사람들의 공부 비용과 사업 자금을 마련하고자 한 것으로 단원들이 소태산 대종사님의 지도를 따라 술담배를 끊어 저축하고, 재래의 명절과 휴일을 줄여 특별 노동 수입을 저축하고, 여인들은 끼니마다 시미(匙米)를 모아 저축하고, 천제를 지내는 것도 폐지하고 저축하는 조합이었습니다.
소태산 대종사님이 시방세계 모든 사람을 통치 교화하기 위해 교화단을
창안하여 시행한 것은 원기2년(1917) 7월 26일(양력 9월12일)의 일입니다.
소태산 대종사님은 교화단이 완성되자 교단사와 인류사에 크게 빛날
세 가지 업적을 단원들과 함께 이뤄내십니다.
이는 교화단 역사의 문을 여는 일이며 또한 교화단 활동의
정신이자 활동이기도 합니다.
방언공사는 길룡리 앞 바닷물이 내왕하는 간석지를 막는 일이었습니다. 원기3년(1918) 3월에 시작하여 이듬해 3월에 마무리되었던 만큼 만 1년의 세월이 소요되었습니다. 그 결과 갯벌 2만 6천 평(85,800㎡)에서 곡물을 수확할 수 있게 하여 기근에 허덕이던 민중들의 민생고를 해결하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교단 경제자립의 기초를 다졌으며(<원불교교사> 정관평 방언공사), 방언공사를 통해 만들어진 농토는 정관평(貞觀坪)이라 명명하였습니다. 또 하나는 혈인기도(血印祈禱)를 시행한 일이었습니다. 혈인기도는 새 회상이 법계(法界)로부터 인증받는 결과를 이룬 것으로 새 회상 건설의 일대 정신작업을 공고히 하는 것이었으며, 소태산 대종사님이 단원들을 철저히 훈련시킨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그 실증적인 것이 바로 소태산 대종사님이 친히 개발하여 시행한 <성계명시독誠誡明示讀>입니다. <성계명시독>은 단원들의 10일 동안 지낸바 마음을 청(靑)홍(紅)흑(黑)점(點)으로 조사하여, 신성의 진퇴와 실행 여부를 조사하게 한 책입니다. 이는 후일 <상시일기常時日記>로 변화하여 지금까지 원불교 교도를 부처되도록 훈련 시키는 핵심적인 것으로 이어져 왔고, 교화단 관리의 핵심 내용이라 할 것입니다.
앞서 설명한 저축조합, 방언공사, 혈인기도, <성계명시독> 등은 소태산 대종사님이 중생제도를 위해 경제기초를 확립하고 정신기반의 확립을 위해 설계하셨을 것입니다. 아울러 영육쌍전(靈肉雙全)하고 이사병행(理事竝行)하는 종교로 나아가 인류의 정신생활과 육신생활을 원만히 이끌어 인간의 행복을 실제화 해주기 위한 소태산 대종사님의 경륜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소태산 대종사님이 목적한 낙원세계 건설을 위한 방법이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소태산 대종사님은 교화단을 중심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셨습니다. 이에 차츰 믿고 따르는 사람의 수가 늘고 그 활동 영역이 넓어지자 원기6년(1921) 6월에 새롭게 교화단 교화를 시험하기 위해 영광지방에 남자 1단을 조직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늘어나고 교도가 이동함에 따라 8월에 다시 영광김제전주 등지를 합하여 남자 1단과 여자 1단을 조직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직은 교도의 수가 적어 광범위한 교화단이었던 관계로 현실에 맞게 교화단을 조직하여 운영했지만, 소속감을 갖게 하고 실질적 지도가 이뤄지기에는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되며, 교화단 교화의 정신을 살려 이어가려는 의지가 담긴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계속)
교단의 기수, 교당의 얼굴
김일상 원로교무
2월 28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