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 산행으로 행복을 캐낸 남한산성 누리길
(기행 수필)
루수/김상화
전화벨이 울린다. 화면을 보니 반가운 송우 산악회 전윤연 명예 회장이다. 얼마나 반가운지 댓 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하고 말도 하기 전에 오라버님 이번에 송년 산행 같이하실 거지요 한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반가운 마음에 네 같이
산행해야지요 하며 전화를 받았다. 훈훈한 정담이 잠시 전파를 타고 오고 간다. 이렇게 보름 전에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시간이 흘러 오늘 함께 송년
산행을 하게 되었다. 인연이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다. 일기예보엔 오늘 서울의 기온이 영하 14도까지 내려간다고 한다. 이 추위를 무릅쓰고 송우
가족은 남한산성으로 송년 산행을 하러 간다. 아침 9시에 출발한다. 너무도 추운 날씨다. 버스는 남한산성역을 지나 이름도 모르는 마을에 선다.
등산한 후 이곳에서 송년회를 하나 보다. 모두 다 내렸다. 내리자마자 추위와 친해 보려고 어깨동무하며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귀가 시려오고
볼은 추위를 이기려고 빨갛게 익어간다.
춥지만 즐거운 산행이다. 오늘 산행은 가볍게 한다고 한다. 그래서 "성남 누비길"을 걷기로
했다. 옆에는 김종배 전윤연 두 명예회장이 함께했다. 이 두 분은 송우산악회 탄생서부터 지금까지 이어 오면서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분들이다. 박치원 작가와 김성희 시인 정해봉 대장 또 주정숙 고문과 김한기 회원도 몇 개월 만에 함께 걸으니 기쁘다. 칠팔 명의
회원들과 함께 추위를 가르며 걷는다. 필자는 배낭에 사랑과 행복을 가득 담아왔다. 가다가 힘이 들면 잠시 쉬어 배낭에 담아온 사랑과 행복을
꺼내어 레이저 광선처럼 눈빛으로 나누어 준다. 눈으론 보이지 않지만 아무리 추워도 추위를 이겨내는 선물이다. 칼바람이 불어도 추운지도 모르고
걷는다. 왜 이리 즐거울까? 함께한 회원들의 입에선 잔잔한 미소가 흘러나온다.
걷다 보니 보부상(褓負商)의 옛길이란 보지도 듣지도
못한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도무지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 인터넷과 사전을 들춰 보았다. 보부상(褓負商)은 "봇짐과 등짐을 지고 이동하며
물건을 파는 장사치"라는 뜻이다. 보상은 보자기에 물건을 싸 머리에 이고 다니며 판매하는 장사치를 말하며 주로 여성이 많았다고 한다. 이에 비해
부상은 부피가 큰 옹기, 그릇, 죽제품, 소금 등을 판매하였다. 우리나라 오륙십 년대 필자가 청년 시절 이야기다. 그 당시는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고 가난에 굶주린 시절이라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었다. 또 한 푼이라도 벌어 자식들 공부 시키려는 열정으로 유행처럼 번졌던 장사 방법이었다.
보부상(褓負商)은 바로 주요 육상 간선 도로망인 삼남로, 영남로, 의주로, 봉화로(남한산성 옛길) 등을 통해 상업 유통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장사가 전국적으로 들어서게 되자 일정한 날짜에 열리는 장시를 돌며 상품판매를 하게 되고 이러한 방식은 이들에게 장시를 돌며 물건을
판매하는 장사치라는 의미로 "장돌뱅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상업이 점차 중요해지며 보부상들의 활동영역이 넓어지자 이들이 이동하는
길에는 수많은 주막이 들어서기까지 한다. 지금 보부상이라는 이름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지명들과 5일 장의 "장돌림" 문화는 여전히 새로운
이동 상인들에 의해 지속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문화이다.
조금 걷다 보니 둔전(屯田)이란 알림판이 보인다. 이것 또한 처음 보는
단어다. 내용인즉 농사도 짓고 전쟁도 수행한다는 취지로 부근의 한광지(閑曠地)를 개간하여 경작해 군량을 현지에서 조달함으로써 군량 운반의 수고를
덜고 국방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즉 "평시엔 농사짓고, 전시에는 전투 임무"라는 뜻으로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전투를 치렀던
부대의 규모는 무려 1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실제 전쟁 발생 시 남한산성에서 농사했던 인원은 기록에 따르면 임금과 관료, 군인들, 그리고 성
외부에서 성으로 들어온 주민까지 포함하면 2만 5천여 명 규모인 것을 알 수 있다. 전시에 사용되는 이 많은 물자, 그중에서도 특히 식량을
어떻게 비축했으며 또 평시에 산성에 주둔하는 상비군의 식량은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둔전(屯田)이 바로 그 해답이다. 둔전(屯田)은 군사지역이나
시설에 주둔하는 병사가 전시에는 전투 임무를 수행하지만, 평시에는 논과 밭을 일구어 직접 군량을 생산하는 제도를 의미하는 말이다. 즉,
남한산성에 주둔했던 병사들은 평소에는 직접 농사를 지었다는 말이다. 성남 산성 인근 지역의 지명을 자세히 살펴보면 둔전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아있다. 남한산성 옛길을 따라 산성의 동문으로 나가면 "오전리"라는 지명이 남아있는데 오전리의 "오"는 오동나무를 뜻하는 한자이고 "전"은
밭을 뜻하는 한자어다. 여기서 "전"이 둔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남시 작평마을, 성남시 둔전동, 광주시 오포읍 군수둔리 등도 둔전과 관련 있는
지명이다.
아기자기하게 닦아놓은 "성남 누비길"엔 역사적인 기록까지 알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는데 필자는 큰 의의(意義)가 있다고
본다. 남한산의 주봉이 청량산이다. 이산의 높이는 해발 479.9m 이며 밤보다 낮이 긴 산이라고 한다. 산의 사방이 평지여서 밤보다 낮이
길다고 하여 일찍이 일장산(日長山) 또는 주장산(晝長山)으로 불리기도 했다. 지형은 해발 460m 정도의 산지로 둘러싸인 해발 300~350m
고도의 평탄한 분지 형태이며, 산지의 사면이 외부로부터 적의 침입을 막기에 유리한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삼국시대 이래 산성을 축성하여
군사요충지로 중요하게 인식되어 왔다.
남한산성에 대해 알아본다. 남한산성은 조선 시대에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을 지키던 남쪽의
방어기지로, 서쪽의 청량산과 북쪽의 연주봉, 동쪽의 망월봉, 벌봉 등을 연결하여 쌓은 대규모의 석축산성이다. 이성은 인조가 병자호란(1636)
시 피난하여 항전하던 곳으로 신라 문무왕(661~681, 재위)이 쌓은 주장성(일명 일장 산성)의 옛터를 활용하여 몇 차례 축조가 있었으나 조선
인조 2년(1624) 크게 고쳐 쌓은 성으로, 후금국(後金國)의 위협과 이괄(李适)의 난이 동기가 되어 총융사(摠戎使) 이서에게 명하여 2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 축성에는 각성(覺性)이 도총섭(都摠攝)이 되어 8도의 승군을 동원하였다. 이성의 둘레는 약 8km이며 넓이는
28.462㎡로서 성가퀴(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성 위에 낮게 덧쌓은 담)는 1,700첩이고 4문과 8암문 및 4장대가 있었고
성내에는 관아와 창고, 행궁이 있었다.
걷다 보니 지화문(남문)까지 왔다. 지화문(至和門)은 정조 3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지화
문이라 칭하였고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 문이며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다. 또한 현재는 성남으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성문
앞에 식재된 (350년 추정, 성남시 보호수) 느티나무와 함께 문화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시민의 역사터로 많은 사람이 이용하고 있다.
지화문(至和門)은 현재는 남문(南門)으로 불린다. 지금 현판은 지화문(至和門)으로 설치되어 있다. 남한산성에는 동, 서, 남, 북에 4개의
대문이 있다. 남문은 남한산성에 있는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 문으로 현재에도 출입이 가장 많은 곳이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동문,
남문, 수구문의 세 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 2년(1624) 수축하기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남문은 정조 3년(1779) 성곽을 보수할 때 개축하고 지화문(至和門)이라 하였다. 1976년 문루를 복원하였고 2009년 정조의 글씨를
집자하여 전면에 현판을 설치하였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올 때 바로 이 문을 통해서 들어왔다.
호국정신과
선비정신이 깃든 남문 앞 역사터 남한산성은 한성 백제 시대의 성산이요 진산의 개념으로 백제의 시조 온조대왕의 사당 숭열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호)이 있는 곳이다. 남한산성은 통일신라 시대에는 주장성(晝長城)(일장(日長) 산성)으로 불렸으며 한강 유역의 중요 산성으로 발전하였다.
고려 시대는 몽고군의 침입을 물리친 국방의 요새지이었다. 조선왕조 제16대 인조인금 원년(1623)에 성의 축성을 시작하여 1626년에
완성(본성의 둘레가 9.05km)하니 남한산성은 경도보장지(京都保障地)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남한산성은 주봉인 청량산(497.8m)을 중심으로
4대문과 18 암문을 완성하고 성내에는 행궁을 비롯하여 수어장대 등 각종 문화유적이 남아 있고, 현재는 경기도 도립공원 (국가사적 제57호)로
성남시, 하남시, 송파구, 광주시 등 4개 지방자치 단체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인조 14년에 청태종의 침공(병자호란)으로
인조임금이 이곳으로 피신하여 45일간 항전한 유서 깊은 곳이다. "남문 앞 역사터"는 성남시가 문화재청과 협의를 거쳐 2007년 5월 15일부터
약 6개월간의 공사로 2007년 11월 19일 준공하였으며, 성문 앞에 식재(植栽)된 380여 년 된 느티나무와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것으로
평가받는 남문은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역사 공간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성남시 보호수인 느티나무(4주)는 성곽방어의 특성을
고려하여 남문을 시각적으로 차폐(遮蔽)하기 위하여 식제(植栽)하였을 가능성과, 성문 주변이 평상시 왕래가 많고 지형상 경사가 심하여 우수(雨水)
시에 토양유실을 막기 위해 식재(植栽)하였을 것으로 추론되는 역사터다.
오늘 산행은 성남 누리길 제1코스인
지화문(至和門)까지였다. 잘 모르고 있던 역사를 배워가는 산행이었다. 이것으로 송년 산행을 마치고 새해는 즐겁고 행복한 산행을 하기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지는 송년회를 한다. 언제 준비하였는지 푸짐한 송년회가 시작된다. 사회는 김평재 부회장이 맡았다. 김평재 부회장은 무엇이든 솔선수범하는
송우산악회의 보배이다. 김성중회장의 인사말이다. 회원여러분 얼마 남지 않은 무술년(戊戌年) 잘 보내시고 돌아오는 기해년(己亥年)은 송우 가족의
최고의 해로 만들어봅시다 라는 힘찬 인사말을 한다. 참으로 흐뭇한 송년 산행을 맛보고 가는 행복한 하루였다.
2018년 12월 0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