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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양 왕 용-鄭芝溶 시인과 同志社(도시샤) 대학 출신 문인들
*남강문학 2호 P26 참조 (시인,부산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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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2009년 12월 1일 日本 京都에 있는 同志社大學 至誠館 3번 교실에서 충청북도 옥천군과 옥천문화원이 주최하고 정지용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한 정지용시비건립 4주년 기념 2009 국제 정지용문학 세미나에 주제발표자로 참여한 바 있다. 일본 京都大 水野直樹 교수와 인천대 吳養鎬 명예교수와 함께 주제발표를 하였는데 주제발표와 토론 과정에서 필자가 지금까지 몇 가지 사실을 잘못알고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고 국내에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점을 바탕으로 세미나 주제 발표문을 수정하여 남강문학 3호에 발표하기로 한다.
필자는 동지사대학을 방문한 적이 세 번이나 있다. 그 첫 번째는 1997년 1월 「일제강점기 재일한국인의 문학활동과 문학의식 연구」라는 당시 교육부 중점지원 연구 프로젝트의 책임자로 3명의 연구원과 함께 同志社大學과 京都大學 도서관 서가에서 정지용을 비롯한 여러 문인들의 일어체 시와 산문 자료를 찾는 작업이었다. 다음으로는 2004년 「부산대학교 교양교육과정 혁신연구」팀의 책임자로 京都大學을 방문하였다가 잠시 들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지난 2009년 12월에는 同志社大學에서 정지용 시인 관련 세미나에서 주제 발표의 기회를 가졌다. 그 가운데 세 번째 기회를 마련해준 옥천문화원 관계자와 정지용 기념사업회 오양호 회장님에게는 진심으로 감사드리지 않을 수없었다.
필자가 정지용 시를 처음 만난 것은 1959년 진주고 1학년 국어시간에 지금은 작고하신 황정규 선생님으로부터 그의 대표작 「鄕愁」를 알게 된 때부터이다. 물론 그 딩시 정지용의 이름은 밝히지 못하고 이른 작품이 있다는 정도로 말씀하셨다. 경북대 국어교육과 2학년인 1964년 현대시론 시간에 김춘수 은사님으로부터 정지용의 이름과 많은 작품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대학원을 진학한 1967년부터 대구의 고서점에서 간간이 보이는 정지용의 시집과 산문집에 관심을 가지다가 1968년도에는 『鄭芝溶詩集』 『白鹿潭』 『散文』등을 구입하였다. 이러한 정지용의 저서를 바탕으로 비록 부제에 ‘정지용의 경우’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1930년대 시연구」라는 논문을 1972년에 쓴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정지용 시인이 6.25 전쟁 때 자진 월북하였다는 오해 때문에 조심스럽게 접근하였다. 1988년 정지용 시인이 한국문단과 학계에 완전히 해금되던 2월에 「정지용시연구」로 경북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그 해 5월 15일에는 해금된 탓으로 단행본 『정지용시연구』(1988. 삼지원)를 출판하였다. 1995년 5월 12일에는 옥천군의 초청으로 제8회「지용제」에서 제1회 정지용 문학 심포지엄 주제 발표자로 참여한 바도 있다. 그리고 앞에서 잠시 언급하였지만 2009년 12월 1일에는 동지사대학에서 국제정지용문학 세미나에 참석하여 주제발표를 하였다. 최근인 2011년 6월 24일에는 서울의 예총회관에서 한국문인협회가 주최하는 제31회 문협작품토론회에서 정지용 문학을 재점검한다는 주제 아래 정지용의 작품에 대하여 살펴본 바 있다.
1997년 동지사대학을 방문하였을 때에 이미 「序詩」의 자필이 새겨져 있고 아울러 일역도 새긴 윤동주 시비는 세워져 있어서 그 앞에 기념촬영을 한 바 있으며, 그 당시 교육학과의 모 일본인 교수에게 윤동주 시인의 스승 격이자 선배 시인인 한국 현대시의 첫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정지용 시인이 이곳의 영문과 출신이요, 예과와 학부 모두를 졸업하였다고 소개한 바 있다. 물론 그 분은 영문과 교수가 아니라 자세히 알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1998년 인천대 오양호 교수가 일한교류기금의 지원으로 京都大 객원교수로 파견되어 그 해 12월 18일에 정지용기념사업회를 솔선수범하여 발족시켜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2005년 12월 18일 윤동주 시비 바로 옆에 경도가 배경인 시 「鴨川」을 새긴 정지용 시비가 세워졌다.
(2)
2009년의 세미나를 준비하면서 한글로 된 동지사대학 홈페이지와 동지사대학 한국인총학생회 홈페이지를 검색해 보고, 동지사대학의 설립 경위와 각종 유학생 현황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동지사대학의 설립은 단순히 미국 연합교회 선교사들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일본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자 크리스트교 전도사였던 新島 襄<니지마 조>(1843-1890)의 주도로 1875년 설립한 동지사영어학교에 두 명의 미국 선교사가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개교한 것을 시작으로 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1882년 동지사신학교가 개설되고, 新島 襄이 초대 학장으로 부임하였으며, 1905년 동지사전문학교 설립, 1912년 전문학교령에 의해 동지사대학 및 여학교 전문학부가 개교되었고, 1916년 정치경제학부와 영문학부의 제1회 졸업식이 있었다. 1919년에는 선교사 D․W 라네드가 동지사대학 학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920년에는 대학령에 의한 동지사대학이 개교하였다. 유학생총학생회 홈페이지에는 동지사대학 출신의 대표적인 한국문인으로 吳相淳(1894-1963), 金末鳳(1901-1961), 鄭芝溶(1902-?), 尹東柱(1917-1945)등 네 분의 사진이 소개되어 있다.
오상순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1912년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도일하여 동지사대학 종교철학과에 입학하여 1918년 졸업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귀국하여 YMCA 번역관련 업무와 교회에 전도사 일도 잠시 보았으며, 잘 알려져 있다시피 <폐허>동인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오히려 불교의 선세계에 심취하였으며, 그의 호가 공초인 것처럼 담배를 가까이 하며, 평생 독신으로 기인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 그는 전문학교령에 의한 동지사대학이 개교한 첫해인 1912년에 입학하여, 대학령에 의한 동지사대학이 개교되기 전에 졸업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종교철학과가 존재하였는지는 다소 의문이 재기되어, 이에 대한 학적부 확인 작업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귀국 후 전도사를 하였다든지, 「종교와 예술」,(1921<폐허>)을 발표하였다는 점에서 가능성도 있으나, 종교철학과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신학부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말봉, 윤동주 등은 정지용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여기에 열거된 4인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동지사대학에 재학하였을 것이며, 그들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와 연구도 필요하다.
정지용과 휘문고보 동기로 <搖籃>동인이었던 朴濟煥(1905-1995)의 경우 동지사대학 경제학부를 진학하여, 정지용과 함께 하숙을 하였으며, 졸업 후에는 행정관리로, 해방 후에는 2대와 5대 국회의원으로 제2공화국 시절에는 張勉 내각의 농림부장관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는 1992년 자신의 호를 딴 회고록 「지봉한담」을 출간하였다. 아마 그의 회고록을 읽어보면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더욱 자세한 정지용의 경도에서의 모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지용보다 7세나 적은 金煥泰(1909-1944)의 경우 동지사대학 예과 3년(1928-1931)을 다닌 후, 九州帝國大學 영문과 (1931-1934)로 옮겨 졸업하였다. 귀국 후에는 문학평론가로 활동하였으며, 「정지용론」(삼천리문학 2집, 1938.4.1)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김환태 역시 정지용과 관련지어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김말봉은 정지용보다 한 살 위이다. 그는 1901년 4월 3일 부산 영주동에서 아버지 김윤중과 어머니 배복수 사이의 3자매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그는 어려운 가세에도 불구하고 미국선교사가 경영하는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미션 스쿨인 부산의 일신여학교(현재의 동래여중․고교 전신)에 1914년 입학하였다. 입학 동기로는 여성 야당정치인으로 유명한 박순천(1898-1983) 전 국회의원이 있다. 1917년 일신여학교 3학년을 수료하고 상경해 서울의 정신여학교에 편입하여 이듬해에 졸업을 한다. 그리고 1919년에는 황해도 재령의 명신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이듬해인 1920년 도일하여 동경의 頌榮(쇼에이) 고등학교에 편입한다. 1921년 송영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高根(다카네)女熟에 입학하여 1923년 졸업한 후 그 해 동지사대학 영문과에 입학한다. 1927년 영문과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29년에는 중외일보 기자로 활약한다. 1932년 김보옥이라는 필명으로 중앙일보(중외일보 개칭) 신춘문예에 단편 「망명녀」로 입선하여 소설가로 데뷔한다. 1933년 첫 남편 전상범과 결혼하게 되며, 부산의 동구 좌천동 794번지에 거주한다. 그의 첫 결혼은 그 당시로 보아서는 파격적이었다. 우선 그녀의 나이가 33세로 만혼이었다. 다음으로는 그는 초혼이었지만 남편은 재혼이었다. 첫 남편에게는 전처 사이에 출생한 딸 전혜금이 있었다. 이 딸이 뒷날 금수현과 결혼하게 되는데 이러한 인연으로 뒷날 금수현 작곡의 유명한 가곡 「그네」가 김말봉 작사로 탄생하게 된다. 말하자면 금수현의 처 전혜금의 의붓어머니가 김말봉이며 그러한 사위와 장모가 콤비가 되어 작사 작곡한 가곡이 <그네>인 것이다. 그리고 금수현과 전혜금 사이에 탄생한 아들이 오케스트라 지휘자 금난새이다. 따라서 김말봉은 금난새의 의붓 외할머니가 되는 셈이다.
김말봉은 1935년부터 장편소설 「밀림」을 동아일보(1935.9.26 - 1938.2.7)에 연재하게 되어 대중 소설가로 이름을 떨친다. 그의 대표적 장편소설로는 「찔레꽃」(조선일보 1937.3.31 - 10.31) 「화려한 지옥」(1945) 「별들의 고향」(1950) 「태양의 권속」(1952) 「푸른 날개」(조선일보 1954.3.26 - 9.13)등이 있다.
그는 첫 남편과 1936년 사별하고 1937년 두 번째 남편 이종화와 재혼한다. 해방 이후에는 이종화 역시 사별하여 혼자서 신문의 연재소설의 원고료로 가계도 꾸리고 두 남편의 자녀 교육도 시켰다. 그는 대중 소설가였지만, 한국기독교장로교회에서 1957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장로로 피택되었으며, 그 해에는 여성 최초의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기도 하였다. 1961년 폐암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부산과 서울에서 주로 거주하였으며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부산에 거주하면서 동아, 조선일보의 신문연재소설을 집필할 정도로 지역성과 여성성의 한계를 뛰어넘은 소설가였다. 그 외에도 많은 일화와 그에 대한 평가가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정지용과의 관련성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하겠다.
그는 1923년 일본에서의 頌榮高等學校와 高根女熟 학력을 인정받아 예과를 거치지 않고 바로 동지사대학 영문과에 입학한다. 이 해에 정지용은 동지사대학 예과에 입학하여 김말봉의 후배가 된다. 비록 나이는 한 살이 많아 정지용은 김말봉을 누님으로 인정하였으나, 두 사람의 인연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 정지용의 산문과 김팔봉, 유치환 등의 회고기에서 나타나고 있다.
정지용의 산문 「鴨川上流(上)(下)」는 1948년에 발행한 『芝溶文學讀本』(서울 박문출판사)에 수록되어 있는데, 일종의 경도 유학시절에 대한 회상기이다. 정지용의 散文에 대해서는 시에 비교하여 많이 연구되지 않아 이것이 처음에 어디에 발표되었는지 확인할 수가 없다. 이 글에서 지용은 比叡山(히에이산) 케이블카 공사장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어려운 살림살이에 대하여 담담한 어조로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비 오는 날이면 우산 하나로 여학생과 둘이서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압천 상류를 거닐었다. 그러다가 조선인 노동자들로부터 모욕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조선 유학생들임이 밝혀진 뒤에는 노동자의 아낙네들로부터 둘은 마치 볼모 잡힌 신랑신부처럼 고향, 나이, 심지어 어떤 사이냐고 추궁 당하여 사촌간이라고 하면서 난감함을 모면하여 친절한 대접을 받기도 하였다.
여기서 지용과 동행한 여학생이 김말봉이라는 추론이 가능한 회고기가 바로 김팔봉의 「白潮同人과 종군작가단」(현대문학1963 9월호)이다. 그는 1926년 여름 조선지광사에 들렸을 때 정지용이 김말봉과 동행하여 찾아온 것을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정지용은 학생복을 입고 있었고 시작품을 투고하기 위하여 찾아왔던 것이라 보고 있다. 지용은 1927년 조선지광 2월호에 「바다」「湖面」등 7편, 3월호에 「鄕愁」「바다」「석류」등을 발표하는데 이 때의 방문으로 이루어진 성과라고 볼 수 있겠다. 다음으로 유치환 역시 「叡智를 잃은 슬픔」(현대문학 1963.9)이라는 정지용에 대한 회고기에서 김말봉이 정지용의 옥천 생가를 방문하였을 때 지용이 12세 때 결혼한 부인 송재숙의 감정표현과 청마가 부산에서 올라가 서울의 지용을 만났을 때, 김말봉의 안부를 자주 묻는 것 등을 회고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회고기로 볼 때, 지용과 말봉은 방학 때 집에까지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친한 이성친구였다. 결혼한 아내가 있는 고향집에까지 갔다는 것은 단순한 연인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사이라고 보아진다. 특히 김말봉은 정지용보다 3년이나 먼저 일본 유학을 왔기 때문에 일본 유학생활에 대하여 훨씬 많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同志社大學이 개신교 계통의 미션 스쿨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개신교에 입문한 김말봉으로서는 지용의 유학생활과 개신교 대학에서의 신앙에 대하여 지도 조언하는 일종의 멘토 역할도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관계가 성립된 것은 물론 활달한 김말봉의 성격 탓이라고 볼 수도 있다. 지용의 일본어로 발표한 산문. 「봄, 삼월의 작문」(1927.4 <近代風景>)에 보면 이러한 면모는 훨씬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누님은 내 신앙이 깊지 않다고 비난한다. 공작새가 날개를 펴는 듯한 내 詩情을, impolite한 행동을 비난한다. -중략- 누님, 나는 철학이나 종교나 품행 이전 - 적어도 야만한 상태, 보라색 시대에 있는 것입니다. -중략- 까딱하면 탈선해서 연설이 되어버릴 때마다 누님은 기도를 강요한다. 그 이마의 대리석 빛 긴장과 신기하게 성스럽고 낭랑한 기도의 목소리가 더욱 더 나를 작은 악마로 만들어간다.
하느님, 누님 나는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늦 三月의 作文」 마지막 부분 眞田博 子 사나다 히르코『최초의 모더니스트 정지용』서울,역락 .P169에 번역 되어 있음)
여기서 누님은 바로 김말봉이다. 앞의 번역가는 김말봉이 천주교 신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 누님은 다른 사람이라 생각된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기도하는 자세나 방법으로 볼 때 여기서의 신앙은 천주교 신앙이 아니라 개신교 신앙이다.
1927년 4월 이전에 창작된 글이라고 보면 이 때의 정지용의 신앙은 1927년 4월 직전의 신앙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때의 정지용의 신앙은 同志社大學의 채플 시간에 고백하는 개신교 신앙이라고 보아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앞에서 번역한 眞田博子가 찾아낸 정지용의 京都 가와라마치 교회에서의 천주교 세례 증명서에 세례일이 1928년 7월 22일로 되어있다. 따라서 정지용은 유학초기에 同志社大學의 방침에 따라 개신교 신앙을 가졌다가 1928년에 개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지용 자신이 <가톨릭 靑年>지를 함께 편집한 오기선 신부에게 이러한 취지를 고백하였다고 한다.
개종의 문제를 처음 제기한 사람은 『鄭芝溶 詩集』 (1935. 시문학사) 발문을 쓴 박용철이다. 정지용은 1923년부터 이 글을 쓴 1927년까지는 개신교 신앙을 소극적으로 수용하다가 개종하여 1928년 7월 천주교 영세를 받으면서 적극적인 천주교인이 된 것이다. 이상과 같은 김말봉과 정지용의 관계는 김말봉이 정지용보다 2년 이른 1927년 졸업하여 귀국하면서 일단은 멀어진다. 김말봉은 귀국 후 1929년에는 중외일보 기자로 활약하면서 소설가가 되지만, 1933년 첫 남편 전상범과 결혼하게 되면서 더욱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정지용에게는 12세인 1913년에 결혼한 송재숙 여사가 고향에 부모님을 모시고 있었고 1928년에는 장남 구관이 출생하게 된다.
(3)
정지용의 동지사대학 시절은 김윤식 교수가 1980년에 이미 조사한 대로 1923년 5월 3일 예과에 입학하여, 1929년 6월 30일 영문과 졸업으로 분명히 파악되어 있다. 최근에는 그의 영문 졸업논문 「The imagination in the poetry of William Blake」전문이 소개되고 번역되기도 하였다. (『정지용사전』.2003,최동호 편저 pp.524-565 번역 -김구슬)
그의 생애와 시에 대한 연구는 1988년 정식으로 해금된 후부터 다양한 형태로 많이 되고 있다. 지용회에서 시작된 지용제가 옥천군과 옥천문화원의 주도로 매년 5월 15일을 전후하여 성황리에 열리고 있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그 동안의 많은 연구 성과로 인하여 현대시사에서의 정지용의 위상은 선구자로서 자리 매김 되어 있으며 지용제와 김희갑이 작곡하고 가수 이동원과 박인수 서울대 명에교수가 뚜엣으로 부른 가요<향수>로 인하여 대중들에게도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러한 부분은 생략하고, 동지사대학 재학 시절의 정지용의 활약상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이 부분 역시 많은 이들이 연구하였다. 특히 2001년에는 인천의 인하대학교에서 일본인 眞田博子(사나다 히로코)가「모더니스트鄭芝溶硏究-日本近代文學과의 비교 고찰을 중심으로」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이듬해인 鄭芝溶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最初의 모더니스트 鄭芝溶』(2002 역락)을 출판하였다.
鄭芝溶은 휘문고보 시절(1918 -1923)부터<搖籃>동인을 결성하여 등사판 동인지 <搖籃>을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습작기라 볼 수 있고, 동지사대학 재학시절이 본격적인 문학수업기요 데뷔한 시기이다. 정지용은 휘문고보의 교비를 지원받아 졸업 후 휘문고보에 재직하는 것을 조건으로 동지사대학에 유학하였다. 그의 대표작 「鄕愁」는 1923년 3월에 쓰여져 동지사대학 재학 시절인 1927년 3월 서울에서 발간된 <朝鮮之光>에 발표되었다. 이 작품의 창작 시기는 휘문고보 5년제를 졸업한 1923년 3월이었고 동지사대학을 입학한 5월의 2개월 전이다. 유감스럽게도 창작한 곳은 기록하지 않고 있으나 유학하기 직전 서울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조국을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는 적국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야 하는 착잡한 심정이 형상화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그의 후배 평론가 김환태(1909-1944)의 수필 「京都의 三年」<朝光>2권 8호 1936.8.1)에 의하면 1928년 4월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생 환영회 석상에서 지용은 동요 「띄」와 「홍시」를 읊었고, 그 후 어떤 칠흑과 같이 깜깜한 그믐밤 김환태를 相國寺 뒷길 묘지로 데리고 가 「鄕愁」를 읊어주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해 초여름 석양에는 함께 鴨川(가모가와)를 거닐면서 「鴨川」를 읊었다고 한다. 이렇게 그는 同志社大學 재학 시절 시작과 시낭송에 빠져 있었다.
그의 작품 가운데 처음 발표지면에 同志社大學 시절 京都에서 쓰여졌다고 표기된 작품이 여럿 있다. 「鴨川」의 경우 <學潮>2호(1927.6.15)에‘1923.7 京都 鴨川에서’ 라 기록되어 있다. 이 작품이 일본에서 쓰여진 첫 작품이다
창작 순서대로 표기된 나머지 작품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紅春」(1924.4 鴨川上流에서),「따알리아」(1924.11 京都 植物園에서), 「샛빩안 機關車」 (1925.1 京都),「幌馬車」 (1925.11 京都),「이른 봄 아침」(1926.2 京都) ,「바다」(1926.6 京都) ,<湖面>(1926.10 京都),「벗나무 열매」(1927.3 京都) ,「엽서에 쓴 글」(1927.3 京都) ,「五月消息」(1927.5 京都) 등 11편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연도별 국내 작품발표 빈도를 조사해 보아도 1927년의 경우가 28편으로 그의 전 시작시기 (1926-1950) 가운데 압도적으로 많이 발표하였다는 사실이다. 더욱 두 번째가 1926년으로 14편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한글로 된 정지용의 시는 2002년에 최동호 교수가 발굴한 2편과 2004년 박태일 교수가 발굴한 3편 이순욱 박사가 2005년에 <韓國文學論叢> 41집에 발굴하여 연구논문으로 소개한 국민보도연맹시기(1949-1950)의 시 3편 등을 포함하여 총 134편이다. 그 가운데 1926년과 1927년 42편이 발표되고 1928년 2편까지를 포함한 44편이 동지사대학 유학생시절의 작품이다. 따라서 이 시기를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으며, 이 시기에 그는 신인으로 등장하여 당당한 기성시인으로 주목을 받았다고 보아진다. 그리고 한국시문학사에서 신체시 근대시에 이어 현대시의 출발을 대체로 동인지 <詩文學>이 창간된 1930년 3월로 잡는데 사실 정지용이 <詩文學」지 창간호에 발표한 시 4편은 이미 다른 문예지에 발표한 <따알리아」(1926.11 <新民>) ,「이른봄아침」(1927.2<신민>), 「鴨川」 (1927.6 <學潮> 2호), 「船醉」(1927.6 <學潮> 2호) 등이다. 따라서 현대시의 기점을 1926년으로 올려야 한다는 주장이 정한모(1923-1991) 교수에 의하여 1984년 <現代詩>1집에 「韓國現代詩 硏究의 反省」이라는 논문에서 이미 제기되었다
다음으로 일본에서 처음으로 창작된 작품이자, 시비에 새겨진 「鴨川」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鴨川 十里ㅅ벌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목이 자졌다 여울 물소리…
찬 모래알 쥐여 짜는 찬 사람의 마음
쥐여 짜라. 바시여라. 시언치도 않어라.
역구풀 욱어진 보금자리
뜸북이 홀어멈 울음 울고,
제비 한쌍 떠ㅅ다.
비마지 춤을 추어
수박 냄새 품어오는 저녁 물바람.
오량쥬 껍질 씹는 젊은 나그네의 시름.
鴨川 十里ㅅ벌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鴨川」전문 (「鄭芝溶詩集」1935)
앞에서 언급한 수필 「鴨川上流」(상)(하)>에 자세히 나와 있지만 정지용은 중압천변에서 하숙을 하였다. 따라서, 이 작품의 배경은 경도 시가지를 가로 지르는 ‘下鴨’이 아니라, 比叡山이 마주 서있는 상류 즉 高野川이 배경이다. 여름철이 되어야만 역구풀이 붉게 우거지고, 밤에는 뜸부기가 울었다고 한다. 지용은 이 냇가를 거닐면서 부질없이 돌팔매질을 하고 달도 보고 생각도 하고 학기말 시험 때에는 노우트를 들고 나와 누어 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 시는 이러한 때의 심정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경도 유학 첫 해 여름인 1923년 7월, 그것도 고국을 떠난 지 3개월에 접어들 무렵의 오랜지 껍질을 씹는 젊은 나그네의 시름 즉, 고향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이국 생활의 설레임과 고독 사이의 갈등 등을 노래한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다. 여울 물소리를 님 보내면서 잠긴 목 소리로 인식한 것이나, 찬 모래알에서 사람의 마음을 발견한 것이나 .뜸북이 홀어멈 울음 같이 자연을 서러움의 정서로 인식하고 있는데서 그의 유학 초기의 심리 상태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러한 첫 작품에 이어 10편의 작품에서는 이미지스트로서의 그의 본성이 다소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카페 - 프란스」(1926.6 <學潮> 창간호 발표)에서는 식민지 청년의 우수와 고뇌도 형상화 되어 있다.
다음으로 그의 일어체 시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그는 이 시기에 고국의 시단에서 신인이면서 파격적인 대우로 기성문단에 편입하였지만, 일본시단에도 일어체 시 창작과 투고로 실력 있는 신인으로 인정을 받았다. 동지사대학의 교내 동인지 <街>와 영문과 학우회지 <同志社文學>뿐만 아니라 당시의 일본의 대표적 시인이자 단가 작가인 北原白秋(기타하리 하쿠수)(1885-1942)가 주재한 문예지 <近代風景>제2호(1926.12)에 신인으로 투고하여 北原白秋의 눈에 들어 뽑히었던 것이다. 첫 발표작은 이미 한국어로 발표된 「카페 프란스」를 일어로 번역하여 투고한 것이다. <近代風景>은 1926년 11월에 창간되었으니, 그 다음호에 바로 신인으로 정지용이 뽑힌 것이다. 이 작품 이래로 1928년 11월까지 모두 23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정지용의 일어체 시는 이 작품들 말고는 <同志社文學>3호 (1928.10)에 발표한 「馬」(1)(2) 등 4 편이다.
일어체 시에 대한 연구는 부산외국어대 박경수 교수가 「정지용의 일어시연구」(비교문화연구,2000.)에 그 동안의 연구성과를 잘 정리하여 발표한 바 있다. 앞에서 언급한 眞田博子 여사 역시 자세하게 연구하였다. 박 교수는 22편이라고 하였으나 眞田博子 여사가 산문시 「고아의 꿈」(1928년 2월)등 몇 편을 추가하여 27편이나 되었다. 특히 眞田博子 여사의 경우 <近代風景>이 1926년 11월부터 1928년 8월까지 24집을 내고 종간하였다는 사실과 北原白秋의 일본문학사적 위치와 정지용과의 영향관계 등에 대하여 자세히 살피고 있다.
정지용은 <近代風景> 1927년 3월호의 「편지 하나라도」 라는 편집자에게 보내는 산문에서
北原白秋에 대한 존경심과 그에게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멀리서 동경하면서 사사하겠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그리고 <近代風景>에 시의 시평 같은 것을 써보라는 권유를 겸손하게 거절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계속 시를 발표한다. 정지용의 <近代風景>에 발표된 일어체 시는 일어체 시와 국어시가 중복되는 작품 11편, 일어체 단독으로 발표된 것이 12편이다.
정지용의 <近代風景>의 일어체 시는 1928년 2월1일 이후로는 보이지 않는다.<近代風景> 역시 1928년 8월에 종간되지만 아마 정지용 시인은 대학 졸업반으로 졸업 논문 쓰기와 유학생활 마무리에 분주하여 시간을 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정지용은 1929년 6월 30일 同志社大學을 졸업하고 귀국하면서 일본문단과 절연하게 된다. 그 뒤 北原白秋 는 한국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정지용 시인의 안부를 물었으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따라서 정지용의 일어체 시 창작은 본격적인 일본시단의 진출을 위한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그러나 정지용 시연구의 부족한 영역이 바로 이 부분이다. 앞의 두 사람이 계속 연구하고 있으나 일어체로만 창작된 전 작품의 목록도 확정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미발굴 자료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확정된 작품의 전반적인 번역 작업도 되지 않았다. 따라서 한국학자와 일본 학자의 공동연구가 절실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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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정지용 시인과 윤동주 시인과의 관계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윤동주는 정지용과 동시대에 동지사대학에 재학한 것은 아니다. 그가 立敎大學(1942.4~9)을 거쳐 동지사대학에 편입한 시기는 1943년 10월 1일이다. 따라서, 그는 정지용이 <文章>지 추천위원(1939.2-1941.4)을 지낸 후 명실상부한 한국 시단의 제1인자가 되었을 때, 동지사대학에 적을 둔다. 윤동주에 대한 연구와 전집 발간 등은 거의 완벽하게 되어 있다. 필자도 「일제강점기 크리스천 시인의 시와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연구 프로젝트에서 윤동주 시인의 경우를 심도 있게 다루어 본 적이 있다. 여기서는 그의 전반적인 시의 특성이나 세계관보다 정지용 시인과 관련된 것과 동지사대학 재학시절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살펴보겠다.
윤동주 시인이 정지용 시인의 시에 대해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일은 그의 유품인 『鄭芝溶詩集』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속표지에 1936년 3월 19일 구입한 것으로 되어 있다. 『鄭芝溶詩集』은 1935년 10월 27일 서울 시문학사에서 출간되었는데, 윤동주가 이것을 구입한 시기는 그 이듬해 3월 19일이다. 그런데 이 시절 그는 용정이 아니라 평양에 있었다. 1935년 윤동주는 용정 은진중학교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을 간다. 은진중학교는 4년제였기 때문에 5년제 중학교인 숭실중학교로 전학을 간 것이다. 3학년을 수료하고 친구인 송몽규는 중국으로, 또 다른 친구 문익환은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떠났으나 그는 4학년에 진급한 후 남아 있다가 4학년 2학기가 시작되는 9월에 전학하게 된다. 그러나 이 전학 과정에 윤동주는 생애 최초의 큰 좌절을 겪게 된다. 편입시험에 실패한 것이다. 편입을 허락받지 않은 것이 아니라 4년이 아닌 3학년으로 편입하라는 시험 결과 때문에 한 학년 아래로 낙제한 것과 같은 결과가 된 것이다. 그의 좌절이 더욱 큰 것은 그와 동급생이던 친구 문익환은 한 학기 전 4학년으로 바로 편입했는데, 그는 그러지 못한 것 때문이었다. 그는 여동생 혜원 앞으로 ‘그들이 나를 제학년에 넣어주지 않는다’는 서글픈 표현으로 이 일을 가족들에게 알렸다. 그 소식에 집안 어른들은 그의 실패를 나무라고 꾸짖는 편지를 동주에게 보냈다. 윤동주는 그 편지를 읽고 몹시 괴로워했지만, 숭실 생활에 잘 적응해 갔다.
그는 그 해 숭실중학교의 학생회 간행 학우회지인 <崇實活泉>에 그 생애 최초로 활자화된 시「空想」을 발표하며 은진 중학교에서 전학온 친지가 문예 부장이라 윤동주의 능력을 알고 있어 학교 문예지 편집을 맡게 된다. 이 시기에 쓰여진 그의 시는 「거리에서」(1935.1.18) 「남쪽하늘」 동시 「조개껍질」 「고향집」「병아리」 「오줌싸개 지도」(1937.1 <카톨릭 소년>) 「기왓장 내외」시「비둘기」등이 있다.
그는 좌절을 극복하고 시를 쓰면서 평양의 서점에서 『鄭芝溶詩集』을 보자 구입하게 된다. 그의 장서 『鄭芝溶詩集』에 보면 정독한 후 소감까지 적은 것이 있다. 그러나 숭실중학 시절은 일제의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개신교 탄압 때문에 견디지 못하고 1936년 3월 윤동주와 문익환은 용정으로 돌아오면서 끝난다. 윤동주 시인은 문익환과 함께 친일계 학교로 변신한 용정의 광명중학교 4학년과 5학년에 편입한다. 말하자면 윤동주의 평양에서의 7개월은 『鄭芝溶詩集』을 구입하여 붉은 줄도 긋고 걸작이라는 소감을 쓰면서 탐독하고 정지용의 영향을 받아 동시를 집중적으로 창작한 시기인 것이다. 이러한 과정과 정지용의 영향관계에 대하여는 『윤동주 평전』을 세 번이나 개정보완 (초판 1988 열음사, 개정판 1998 세계사, 재개정판 2004 푸른역사)한 송우혜에 의하여 자세히 밝혀져 있다.
다음으로 정지용과 윤동주의 인연은 윤동주가 연희전문에 재학한 1938년 - 1941년 사이의 일들이다. 앞에서 언급한 송우혜는 앞의 책에서 이 시절을 「젊음의 정거장, 서울 연희전문학교」라는 제목으로 길게 언급하고 있다. 그는 윤동주의 만 27년 2개월 생애 가운데 연희전문 문과 시절의 4년간은 그의 삶에서 가장 풍요로웠던 시기, 가장 자유로웠던 시기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시절 일본은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8월부터 서울에도 등화관제가 실시되었으며, 1938년에는 3월에 한인들을 대상으로 ‘조선육군지원법령’을 공표하고 5월에는 일본국가총동원법을 조선에도 적용해 전시체제로 몰아넣었다.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된 안창호가 병보석 중이던 경성제대 대학병원에서 사망한 것은 이해 3월이었다. 4월 9일 윤동주는 고종사촌 송몽규(1917-1945)와 함께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시작한다.
이러한 전시상황에도 불구하고 연희전문은 기독교계 학교이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로운 학풍과 분위기 속에서 윤동주는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는 「새로운 길」이라는 시를 5월 10일 창작하였고 조선일보 학생란에 시와 산문을 부지런히 투고하여 발표하기도 한다.
그는 당대 최고의 시인인 정지용을 존경하였고 정지용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의 고향 친구이자 서울 감리교 신학생이었던 라사행 목사의 회고에 의하면 윤동주가 2학년 시절인 1939년 기숙사를 잠시 나와 북아현동에 살 때 같은 북아현동에 살고 있던 정지용 시인을 그와 함께 방문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정지용 시인의 장남 정구관(1928-2004)의 기억에 의하면 1939년에 정지용 시인은 북아현동 1의 64호에 거주하였고, 그가 열 살 무렵인 그 당시 그의 집에는 아버지 친구들, 학생들, 문학 지망생들의 출입이 끊일새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포함되어 윤동주는 정지용 시인을 직접 만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지용 시인에게는 윤동주는 한 사람의 평범한 문학 지망생이었기 때문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다음으로 윤동주는 전시체재로 3개월 단축되어 졸업하는 1941년 12월을 앞두고 졸업기념으로 19편(「序詩」와 나머지 18편 )의 시를『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 (77부 한정판)으로 출판하고자 했으나 그 당시 연희전문 은사이던 이양하 교수(1904-1963)가 「십자가」「슬픈 족속」「또 다른 고향」과 같은 작품이 일본 관헌의 검열을 통과할 수 없을뿐더러 윤동주 신변에 위험이 따를 것이니 보류하라 하여 서울에서의 출판은 단념합니다.
가족들의 회고에 의하면 용정에서의 출판은 경제적 사정이 어려워 단념하였다고 하지만, 이 시집을 내기 위하여 원고지에 필사한 3부 가운데 하나가 해방 후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나중에는 국문과 고전시가 전공 교수가 되는 후배 정병욱(1922-1982)에 전해지고, 그것을 기본으로 해방 직후인 1948년 1월 30일 정음사에서 유고시집 초판을 같은 제목으로 내게 된다.
초판의 서문을 정지용 시인이 쓴다. 여기서 그는 윤동주를 만난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해방직후 경향신문 주간으로 있으면서 일본 입교대학 시절의 시 「쉽게 씌어진 詩」가 발표될 때 그 소개문을 쓰기도 한다. 이 시가 경향신문에 발표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윤동주의 연희전문 기숙사 룸 메이트인 정병욱 못지않게 절친한 친구인 강처중은 해방 전 일본에서 보내온 윤동주의 편지 속에 동봉한 시 5편을 간직하고 있다가 해방 직후 경향신문 기자가 되었다. 그러자 주간이던 정지용 시인에게 시들의 발표를 부탁하였다. 1947년 2월13일 4면에 정지용이 윤동주의 생애를 간략히 소개하면서 발표하게 된 것이다. 1947년 3월 13일 역시 신문 4면에 「또 다른 고향」이 1947년 7월 27일에는 「少年」이 2면에 소개 된다.
무엇보다 정지용 시인과 윤동주 시인의 깊은 관련성은 윤동주 시인이 정지용 시인의 동지사대학 영문과 후배였다는 것이다. 윤동주가 동지사대학 영문과에 적을 두게 되는 과정은 약간 우여곡절이 있다. 원래 윤동주 시인은 송몽규와 함께 1942년 경도제국대학에 시험을 쳤다. 그러나 아쉽게도 윤동주는 실패하고 송몽규만 경도제국대학 사학과 서양사전공에 1942년 4월 1일 입학하게 된다. 윤동주로서는 숭실중학 편입 실패에 이은 두 번째 좌절이었다. 그러나 그는 동경의 立敎大學에에 가서 입학시험을 쳐 문학부 영문과에 1942년 4월 2일 입학한다. 입교대학은 성공회가 경영하는 미션계 사립대학이었다.
입교대학 윤동주 학적부에는 그가 1942년 1학기에 수강하였던 두 과목의 성적이 나와 있다. 영문학연습 85점 동양철학사 80점이 그것이다. 그는 1942년 4월부터 7월 중순 여름방학 전까지 입교대학을 다니면서 입교대학 원고지로 시를 쓴다. 「흰 그림자」(4.14)「흐르는 거리」(5.2)「사랑스런 추억」(5.13)「쉽게 씌여진 詩」(6.3)「봄」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쓰여진 시가 전해지게 된 것 역시 기적에 가깝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서울에 있는 친구 강처중에게 편지에 시를 적어 보낸다. 그것을 그가 해방되기까지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봄」은 안전을 위해서 편지를 폐기하고 시만 남기다가 끝부분과 함께 창작한 날짜까지 날아갔다고 한다. 다른 친구들에게도 시를 적어 보내곤 하였다고 하나 강처중만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처중은 이 작품뿐만 아니라 서울에 있던 윤동주의 장서, 졸업앨범 기타 유품들을 보관하였다가 해방 직후 간도에서 서울로 월남한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에게 넘긴다.
입교대학 유학시절에 찍은 사진 두 장이 유품으로 남아 있다. 1942년 8월 4일 여름방학 때 귀향한 윤동주는 송몽규 윤여선 김추형 윤길현 등과 같이 용정에서 찍은 사진이 있다. 그리고 그의 외사촌 김정우와 같은 날 찍은 사진도 남아있다. 그런데 대학생인 다른 이들은 모두 머리를 기르고 있는데 윤동주만 빡빡 깎고 있다.
송우혜의 재개정판 『윤동주 평전』(2004. 푸른역사)에 의하면 이 빡빡 깎은 모습에 대한 의문이 발단이 되어 일본인 여성이자 입교대학 졸업생 楊原泰子(1946년생)가 일본어로 번역된 『윤동주 평전』을 읽고 송우혜의 '학교 규칙이 그러했던가、라고 의문을 제기한 부분 때문에 1942년 당시의 입교대학 사정을 조사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1942년 4월 10일자 <입교대학신문>에 「학부 단발령 4월 중순 실시」라는 기사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기독교 대학임에도 불구하고 자유롭지 못한 그런 규칙이 발효된 것은 1941년 가을에 배속된 군사교련을 담당했던 동부군 사령부 소속 현역 육군대좌 飯島信之라는 철두철미한 군국주의자가 주도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나는 예수가 정말 싫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 유학생들에게 가혹하게 굴었다. 그는 입교대학 독단적인 단발령을 감행하게 만들었으며 10월에는 대학 안의 예배당도 폐쇄되어 무기고가 되었다고 한댜. 楊原泰子의 조사에 의하면 윤동주의 입교대학 동급생 I씨를 찾아 취재한 결과 윤동주가 그로부터 서양인 교수 폴 럇수와 高松孝治라는 문학부 종교학과 교수를 소개받기도 하였다고 한다. 高松孝治는 입교대학과 성공회 신학원에서 공부하였고 미국에 유학하여 캠브리지 신학원과 하버드대학 신학부에서 공부한 사람으로 조선 유학생들에게도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윤동주는 高松 교수를 여러번 찾아갔다고 한다. 高松 교수는 전쟁 말기까지 군부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가 대학에서 쫓겨났다.
윤동주 시인이 교련을 거부하였다는 증언도 I씨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윤동주 시인이 高松 교수에게 교련거부에 대하여 상의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입교대학에서의 윤동주 시인의 행동은 결국 윤동주 시인을 입교대학에서 떠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이러한 결심을 하고 윤동주는 1942년 7월 간도로 귀향한 것이다. 그의 친척들의 증언에 의하면 귀향한지 보름 만에 병환 중이던 어머니 가까이 앉아 위로해드리다가 동북제국대학 재학 중이던 친구가 그 대학에 편입할 시험을 치르러 오라는 연락을 받고 떠났다고 한다. 그는 '앞으로 우리말 인쇄물들이 사라질지 모르니 악보라도 모아두라'고 동생들에게 당부하고 막상 떠날 때에는 놀이 간 남동생들을 만나지 못하고 여동생만 만나고 황급히 떠났다고 한다. 바로 이 짧은 귀향이 살아생전 그의 마지막 귀향이 되고 만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자세한 경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는 동북제대로 편입하지 못하고 1942년 가을 학기부터 동지사대학 영문과로 편입한다.
그가 존경한 연희전문 스승 이양하 교수가 6년 동안 보낸 경도, 그가 숭실중학 시절부터 즐겨 읽던 『鄭芝溶 詩集』의 주인공인 정지용 시인이 졸업한 동지사대학 영문과로 옮긴 것 자체가 바로 이 두 사람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편입학 시험을 치르고 1942년 10월 1일 자로 영문과에 입학한다. 동지사대학은 같은 미션 스쿨이지만 성공회 계통인 입교대학과는 판이하게 달랐고, 그가 간도에서 다닌 개신교 장로교 계통의 대학이었기 때문에 편안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1941년 4월 1일부터 경도제대에 다닌 고종사촌 송몽규(1917-1945) 가 있는 곳이 바로 경도였던 것이다.
윤동주 시인은 1942년 10월부터 1943년 7월까지 두 학기 동안 동지사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그의 학적부에 의하면 그 동안의 수강 과목은 모두 5과목이었다. 이 시기의 윤동주 시인에 대한 연구는 일본인 伊炊鄕 (이부키 고우)에 의하여 자세하게 밝혀지고 있다. 그는 윤동주 시인의 경도 주소 左京區 田中高原町 27 武田(다께다) 아파트를 찾아 그곳이 1945년 화재가 나 불타고 지금은 교토 예술단기대학이 들어서 있다는 것도 밝혔다. 그리고 송몽규의 하숙집 左京區 北白川 東平井町 60 淸水榮一 방까지 밝혀 두 집 사이가 불과 도보로 5분 거리였다는 사실도 확인한다
윤동주 시인은 10월 1일부터 동지사대학을 다니기 시작하여 석 달 후의 겨울방학 때 북간도의 집에 가지 않고 그대로 경도에 머문다. 그의 생일이 12월 30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귀향을 하지 않았다. 왜 귀향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은 여러 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대학을 옮긴지 얼마 되지 않아 적응하기 위함과. 동북제대로 편입하기 위해 급히 떠난 지난 여름방학 때의 귀향임에도 불구하고 동지사대학으로 옮긴 것에 대한 가족들, 특히 아버지의 역정에 대한 불안감과 그리고 지난 여름방학 때 꺼내놓은 결혼 이야기의 좌절 등 복합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렇게 1942년 겨울을 경도에서 보내고 그는 1943년 봄 새 학기를 시작한다. 비록 추운 겨울방학 동안이지만 자유로이 보낸 윤동주 시인의 모습을 증언으로 남긴 분이 있다. 가수 윤형주의 아버지이자 당숙 어른인 尹永春(1912-1978) 그는 윤동주 시인이 경도 下鴨경찰서에 체포되어 있을 때 윤동주의 외사촌 김정우와 함께 윤동주 시인을 면회하기도 했고 나중에 윤동주 시인의 사망소식을 듣고 시체를 인수하려 가는 윤동주 시인의 아버지 윤영석과 福岡형무소로 동행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윤동주가 겨울 동안 독서와 시창작으로 보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로 인하여 윤동주의 동지사대학 시절의 모습이 전해지는 것은 정말 다행이다. 1942년 7월 여름방학 때 지난 겨울방학과는 달리 귀향하기 위해 고향에 귀향여비를 부쳐달라는 요청과 돈이 도착되는 대로 곧 출발하겠다는 전보를 친 후 여비를 기다리다가 1943년 7월 14일 경도 특고(사상탄압을 하는 전문 경찰 조직) 형사에게 체포되어 하압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된다. 송몽규는 그보다 4일 앞선 7월 10일 먼저 체포되었다.
체포되어 재판 받는 과정도 송우혜의 평전에 자세히 밝혀져 있다. 특히 윤동주 송몽규와 함께 끝까지 갇혀 있다가 기소유예가 된 그 당시 제 3고 재학생 고희욱을 추적하여 살아 있는 그를 인터뷰하는 부분은 정말 눈물겨울 정도로 감동적이다.
뿐만 아니라 윤동주의 재판 기록 가운데 남아있는 기록인 <특고월보> (1943.12)가 윤동주 시인의 후배이자 일본 국회도서관 사서인 宇治鄕毅에 의하여 발견되었고 그것을 윤동주 시인의 동생 윤일주가 번역하여 1979년 12월호 < 문학사상>에 소개하였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또 한 사람의 윤동주 연구가인 伊吹鄕의 노력으로 <사상월보>109호(사법성 형사국 발행 1944년4.5.6월치)가 발굴되어 이것 역시 윤일주가 <문학사상> 1982년 10월호에 소개하였다. 윤동주 시인의 죄목도 송몽규와 같이 '독립운동'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이나 <문학사상>을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재판결과 윤동주는 미결일수 120일 삽입 징역 2년 형(구형 3년)이고 송몽규는 미결일수가 전혀 삽입되지 않은 2년(구형 3년)으로 확정 되었다. 윤동주는 1944년 4월 1일 송몽규는 1944년 4월 17일 형이 확정되어 윤동주 시인은 1945년 11월 30일까지, 송몽규는 1946년 4월 12일까지 징역을 살아야 했다. 모두 다 잘 알 듯이 이들 둘은 福岡형무소로 이송되어 윤동주 시인은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그가 태어난 1917년 12월 30일로부터 만 27년 2개월 . 송몽규는 그로부터 7일 뒤에 절명한다.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윤영춘의 회고에 의하면 하압경찰서로 면회갔을 때 윤동주 시인은 동지사대학 2학기 동안 쓴 많은 시와 일기 등을 압수당해 경찰서 유치장에서 주로 그것을 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알려진 일본에서 쓴 시는 동경 입교대학 시절의 5편밖에 없다. 막상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정지용 시인의 시비보다 10년 전에 동지사대학 교정에 세워졌지만 그의 경도 시절 그것도 동지사대학 시절의 많은 시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앞에서 언급한 伊吹鄕에 의하면 이러한 자료들은 재판 과정의 증거자료들로 사용되었을 것이며 보관하고 있다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전하자 재판에 관여하였던 사람들을 전후의 전범 재판에서 보호하기 위하여 소각된 것이 확실하다고 단언하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에게 남겨진 윤동주의 작품 가운데 동지사대학이나 경도에서 쓰여 진 것은 한 편도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처음 읽었을 때 필자는 절망하였다.
정말 사라졌을까? 혹시 어느 곳에 남아 있지는 않을까? 이러한 진실을 정확히 밝히기 위해서는 더욱 더 많은 연구가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 특히 일본 사람들의 윤동주에 대한 깊은 연구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윤동주는 결코 대한민국의 독립을 외면하지 않았고 그 당시 동지사대학 영문과 교수와는 우리나라의 독립에 대하여 의견이 대립되어 토론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최근에 밝혀진 입교대학 시절의 윤동주 모습을 통해서 더욱 확신이 간다. 그렇다면 동지사대학 시절의 시는 어떠했을까? 결코 나약하지 않고 「쉽게 씌어진 詩」의 연장선상에 이육사에 못지 않은 문학적으로 형상화된 저항시를 남겼을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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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시인의 작품 속에 나타난 경도 체험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구체적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막상 동지사대학 시절의 작품은 하나도 남겨놓지 않고 사라져버린 윤동주 시인보다 일본에서의 평가나 알려진 바는 적다. 한국현대시사에서 정지용 시인과 윤동주 시인과의 영향 관계로 보아도 정지용 시인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윤동주 시인의 연구와 생애 추적의 과정은 정지용 시인의 연구방향과 정지용기념사업회의 나아갈 길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우선 정지용 시인의 생애를 완벽하게 재구해 볼 필요가 있다. 김학동 교수가 1987년 『정지용 연구』로 시작된 이래 그의 작품에 대한 연구 특히 시에 대한 연구는 대단히 많이 진척되었다. 그러나 그의 산문에 대한 연구는 부진하다. 특히, 경향신문 사설이나 논설에서의 익명의 산문들까지 포함한 산문 전반에 관한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그의 생애 역시 김학동 교수의 『정지용 연구』부터 이석우 시인의『현대시의 아버지 정지용 평전』(2006. 푸른사상)까지 꽤 연구되었다. 그러나 『윤동주 평전』처럼 충실한 연구를 하기는 어쩌면 이미 100세를 훨씬 넘긴 정지용 시인으로서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나타난 것에도 부분적인 오류들이 많다. 작품 해석에도 사소한 오류들이 많다. 생애뿐만 아니라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동안의 연구를 지속적으로 전개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보다 심도 있게 연구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자면 재정적 지원 없이 불가능하다. 옥천군은 필자가 알고 있기로는 지역 대표축제를 지역 출신 문인의 이름을 걸고 한 최초의 기초단체이다. 특히 정지용 생가의 복원이나 지용시비 세우기, 지역 예술행사 등은 이미 상당한 실적과 성과를 올렸다고 볼 수 있다. 이제는 앞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보다 정확한 평전이나 오류 없는 작품 해석을 위하여 지자체나 옥천군 출신 유력 인사들이나 옥천군 내 각종 단체들이 함께 뜻을 모아야 할 것이다.
사실 필자는 한국시학회가 결성되기 전 서울의 유수한 대학의 교수들에께 지용시학회를 결성해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한 적이 있다. 지용회와 같은 성격의 단체도 필요하지만 지용학술재단 같은 것을 만들어 더욱 정지용을 국내외에 알릴 필요가 있다.
윤동주의 경우 일본 학자들이 그 동안의 연구에 기여한 바가 매우 크다. 특히 윤동주의 고향이 멀리 간도이기에 한국과 중국 사이에 국교가 수립되기 전부터 일본 학자들이 멀리 그 곳을 방문하여 연구하였고 일본자료에 대한 접근의 용이성 때문에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정지용 연구에도 일본 학자들을 지금보다 많이 참여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남북한 사이의 정지용의 납북과 자진월북이라는 대립된 견해와 죽음에 대한 이질적인 생각도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다시 한 번 지용회 ,옥천군,,옥천문화원 ,옥천예총, 옥천문협 등이 협력하고 단결하여 정지용의 시사적 위상에 걸맞은 연구논저와 논문들이 쏟아져 나올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동지사대학을 비롯한 일제강점기 문인들이나 유학생들이 다녀간 일본의 각 대학 역시 정보를 개방하여야 할 것이며 그곳에 한국어문학과가 있다면 그들과 한국학자들이 연계하여 정지용을 비롯한 다른 문인들에 대하여 연구할 자리도 정기적으로 마련해야 될 것이다.
*약력 : 남강문학 2호 P4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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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풍부한 자료와 해박한 식견의 논문 잘 읽었습니다. 특히 정지용과 김말봉의 관계는 처음 알았습니다. 1960년대 명동을 주름잡던 4대 奇行詩人(김관식 백시걸 박봉우 이현우) 중의 한 사람이었던 이현우가 재혼한 김말봉 이종환 사이에 난 장남이었고 그의 결혼식이 토성동 부산대 병원앞 모예식장에서 있었는데 강파월 박영진 배정웅 시인들과 어울려 하객으로 갔다가 얼떨결에 즉흥축시를 지어 낭독했던 기억이 아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