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群山)과 옥구(沃溝)의 재고찰
1.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은 조선 성종(成宗,1457-1495)때의 지리서로, 성종(成宗)때 명(明)의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1462년)가 수입되자 왕이 노사신·양성지·강희맹 등에 그것을 참고하여 세종 때의 《신찬팔도지리지》를 대본으로 지리서를 만들도록 하였다고 한다. 성종 12년(1481년)에 50권을 완성하였고 다시 성종 17년(1486년)에 수정하여 35권을 완성해 재간행하였으며, 이후 중종(中宗) 25년(1530년)에 이행(李荇) 등의 증보판이 나오게 되었고 이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하지만 우리는 대륙조선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대명(大明)과 유명(有明)의 뜻이 명(明)나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조선을 지칭함에 있어, 찬란한 이라는 형용사였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음에 때라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는 찬란한 조선의 지리를 하나로 모아 체계화한 책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임경업(林慶業,1594~1646)장군의 부인이 심양(瀋陽)의 옥중에서 자결하기 전 “나의 남편은 대명의 충신” 이라 했던 말의 대명(大明)이 바로 조선이었음은 너무나도 상식적인 사실임을 우리는 정확히 이해해야 할 일이다.
간교한 일제의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는 조선의 오천년 역사를 교열(校閱) 왜곡(歪曲)하면서 대명조선(大明朝鮮)의 형용사 대명(大明)을 명(明)나라로 만든 후 조선의 후예들에 끊임없는 세뇌를 통해 대명조선, 또는 유명조선의 의미를 명나라에 종속된 비굴한 조선으로 만들어 버렸고, 지금도 이러한 잘못된 역사인식은 친일식민강단사학에 의해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대륙조선의 반도이주 후 반도조선을 역사화하기 위해 조선사편수회에 의해 철저하게 교열되어 현 반도에 맞게 새롭게 쓰여진 책이다. 따라서 이 책의 가치는 각 지명에 대한 연혁(沿革)을 참고할 수 있을뿐 지리적 해설은 일고(一考)의 가치가 없음을 우리는 정확히 판단해 내야 한다.
오늘 우리가 고찰하려는 군산(群山)과 옥구(沃溝)라는 지명과 관련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모두 반도에 맞추어 철저히 왜곡된 역사의 산물로 조선사오천년(朝鮮史五千年)의 호남(湖南)지역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지명이동된 초라한 지역일 뿐이다.
2.
역사통설에서 말하는 현 반도의 군산(群山)에 대한 설명은 원래 옥구군(沃溝郡)과 임피군(臨陂郡)으로 나눠져 있었으며, 임피군은 백제의 시산군(屎山郡), 옥구는 백제 마서량현(馬西良縣)이었다고 한다.
대한제국 때 옥구군(沃溝郡)이 개항장(1899)이 되면서 옥구부로 승격되었다가,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와 함께 군산부로 개칭되었다고 하며, 1914년 군산부의 개항장 지역만을 군산부로 남기고 잔여지역을 옥구군으로 분리하고 임피군을 옥구군에 병합한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허나 1910년 이후의 기록이라는 것들은 모두 반도이주 후 가필된 기록임을 간파해낼 수 있는데, 이는 아래에서 살펴보게될 호남지방의 군산과 옥구를 지도를 통해 찾아냄으로써 그 가증스런 교활함을 밝혀낼 수 있다.
조선역사의 전주(全州)는 여러 기록을 통해 현 대륙 호남성(湖南省)의 계림(桂林)임을 살펴보았다. 당-송-명-청으로 이어지는 나라들에 속했던 계림의 원래지명은 현 베트남 하노이의 북쪽에 위치해 있어야 타당함 또한 살펴보았다. 또한 장가계(张家界)는 조선 충청도의 서천(舒川)지방이며, 이 지역에서 남남서쪽으로 뻗은 600여km의 산이 바로 차현(車峴) 즉 차령산임을 또한 고찰해 보았다.
반도의 군산(群山)은 전주에서 약 40km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금강(錦江)의 하구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군산이라는 이름처럼 한 곳에 많은 산이 모여있지는 않고 있다.
영화 아바타(2009)의 모티브는 장가계와 계림등에서 얻었다고 회자되는데, 이 지역들의 공통점은 작은 산들이 군집을 이루어 장관을 연출한다는 점이다. 장가계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충청도 서천지역으로 비정됨에 따라 현재 우리가 고찰하려는 군산이라는 지명고증과는 멀리 떨어져 있음으로 바로 계림지역이 조선의 군산(群山)이라는 지명을 찾을 수 있는 지역이 된다.
이 계림지역에는 남북을 관통하는 계강(桂江)이 있는데 이 강은 계림북쪽 산악에서 발원하여 현 광동성(廣東省) 바닷가로 흘러나가고 있는데, 계림시에서 남쪽 90km지점에 작은 산들이 군집을 이루면서 동서로 약 20km에 걸쳐 형성되어 있는 모습을 찾아낼 수 있다. 바로 지명의 이름과 일치하는 지형이 형성된 곳, 조선사(朝鮮史)의 군산(群山)이다.
옥구(沃溝)는 현 장사(長沙)지역으로, 조선 호남의 풍부한 물산이 현재 상강(湘江)으로 지명이동된 강을 따라 조선의 남해인 동정호(洞庭湖)로 들어간 후 한수(漢水)를 타고 한양으로 올라가는 중요 길목을 말하며, 일제는 거대한 대륙조선을 반도에 억지로 구겨넣어 지명이동을 시키면서, 군산(群山)과 옥구(沃溝)를 한데 얽어 현 반도 금강(錦江)하구에 배치함으로써 대륙조선 전주의 절경인 군산(群山)을 후손들이 영원히 찾아내지 못하도록 간교한 짓거리를 해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했던 조선의 후예들은 현 반도 금강하구에 왜 군산(群山)이란 지명이 위치하는지에 대한 어떠한 의문도 품지못한 채 친일식민사학의 교활한 역사조작에 속아 넘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고려왕조시절 안남대도호부(安南大都護府)가 위치했던 호남의 중심 전주(全州)를 현 계림(桂林)에서 찾아내고 이를 중심으로 다시 군산(群山)을 비정해 냄으로써 익산(益山)과 논산(論山)의 위치도 찾아낼 수 있게 되었다
조선의 군산(群山)은 현 대륙 광서성(廣西省) 계림시(桂林市) 평락현(平樂縣)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옥구(沃溝)라는 지명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던 곳이었다.
3.
2024.04.09.松溪
첫댓글 고맙습니다
거듭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씀 올립니다~!
박은식의 지혈사 내용에 따르면 군산은 충청도에 있고 옥구는 전라도에 있다는 내용이 있는데, 그건 참고할 만한 자료가 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조선총독부가 그것까지 조작했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만..ㅜㅜ)
무안 옆에 목포, 목포 옆에 군산,
옥구 옆에 남원, 남원 옆에 광주..
이렇게 인접해 있는게 맞다면 좀 더 확실한 단서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봅니다. 목포가 충청도에 있고 거제도가 전라도에 있다는 기록을 보고 완전히 넋이 나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가 볼수 있는 우리 선조들의 모든 책들은 거의 다 교열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그래서 지명고증이 어렵고 또 어떤책에는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지명고증을 포기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찬찬히 하나씩 씨줄과 날줄을 엮다 보면 희미하지만 조금씩 지명을 찾아나갈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저하지 마시고 많은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1898년경 전라좌우도가 전라남북도로 변경되었다는 기록의 의미를 면밀히 살펴야 하고, 또 목포의 경우는 동정호의 변경 가장자리에 있어야 타당하니 이 또한 주의깊게 살펴야 하겠지요.,
임경업 부인이 “나의 남편은 대명의 충신”라고 한 것은 임경업이 명나라로 망명해 명 장수로서 금과 싸웠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으로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