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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9차 (불기 2557. 12. 08)
영주 浮石寺 및 의성 孤雲寺 순례기
1. 53선지식단의 활력소
새벽 찬 공기를 가르며 반월당 쪽으로 뚜벅뚜벅 간다.
거기에는 갈 때마다 특별한 조우가 있다.
오늘은 공주 마곡사에서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교육가신 님께서 일정을 한 나절이나 남겨 두고 홀연히 53선지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그 먼 곳에서 새벽에 날아 오셨다.
그 정성에 감사드린다.
53에 쏠리는 에너지 무엇일까 ?
53은 생활의 활력소이자 생활이다.
기획국장께서 미리 짜놓은 승차 좌석 표에 따라 오성관광 1호차,
2호차에 분승하여 태백산 부석사로 고 고 씽!
2. 차중법회 및 개인 소개
혜각 총무국장의 사회
범공 포교사의 집전으로
차중법회를 여법하게 마치다.
개인소개는 오늘의 신데렐라 오조 서 상호포교사가 진행했으며,
개개인의 덕담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보면
계사년 잘 마무리하시고
오는 갑오년에는 좋은 일 멋진 일만 가득하길 기원하는 내용.
덕분입니다.
용기 있는 자만이 사랑을 쟁취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페스트(단점, 약점 및 흑사병)를
다 가지고 있다.
알베르 카뮈(노벨 문학상 수상자이며 이방인의 작가)의
소설 La peste에서
내년에는 각자의 페스트를 잘 극복하기를 기원해 본다.
개인 소개가 끝나자 부석사 주차장에 도착하다.
3. 법회
1) 법회
11시경 태백산 부석사 설법전에서 장엄한 법회를 하다.
총무국장 혜각 장춘원 포교사의 사회
범공 임동명 포교사의 집전으로
2) 시상
- 53완주 법우
- 53(2회)완주 법우
- 개근 법우
- 정근 법우에 대한 시상이 있었다.
특히 지인으로 개근하신 분이 있어 모두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3) 108대참회 후
4) 청하 장 재영 단장님의 인사
단원에게 먼저 오체투지 삼배의 예를 올린다.
가슴 뭉클한 순간이다.
단원들이 감사의 인사를 드려도 부족할진데 단장께서 하시다니...
4년 3개월(51개월) 동안 단장을 하셨단다.
긴 시간동안 53선지식단을 위해 노심초사 하셨을 것이다.
총무국장 기획국장 재무국장 및 운영위원님께도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아울러 단장님 이하 관계자님의 보살님 거사님에게도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대과없이 무탈하게 마무리 회향법회를 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고 한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5) 차기 단장 다선 정 종국 포교사님의 일성은
한 편의 시 낭송과도 같은 인사말씀
박력있고 명쾌하고 경쾌한 인사말에 큰 힘을 얻는다.
53선지식단을 한 층 업그레이드 시켜 주시길 내심 기대해 본다.
아울러 다선 선배의 간곡한 부탁에도 다선 호에 승선할 수 없는
내가 미워진다.
미안하고 송구 할 따름이다.
그러나 어떠한 방법으로도 지원하리라 다짐한다.
4. 사찰 관람
1) 선묘낭자의 사랑이야기
"우리나라 불교 화엄종을 처음으로 도입한 신라고승 의상대사(625-702)는 신라왕족의 신분으로 경주 황복사에 출가하여 20세에 불문에 귀의하였다. 그가 원효와 함께 당나라로 구법 유학길에 나선 시기는 진덕여왕 4년(650년)의 일로써 그의 나이 26세였다. 처음 당나라로 떠난 길은 고구려 땅인 요동반도를 거쳐 들어가는 루트였으나 국경에서 고구려군의 검문을 받아 첩자혐의로 체포되어 고생하다가 귀국하였다.
이들은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지 않고 재차 시도하였는데 의상이 36세 되던 해에 원효와 함께 서해안 당항성(남양, 오늘날 경기도 화성군 해안 추정)에 다다라 당나라로 떠나는 무역선을 기다렸다. 당나라에 들어가 화엄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시기는 그의 나이 46세가 되던 해이고 처음으로 세운 사찰이 강원도 양양 낙산사와 경북 영주 부석사이다.
의상이 당나라로 떠난 시기는 신라가 삼국통일 을 완수하던 시기였고, 백제가 멸망하면서 서해 바닷길이 열렸으나 아직 고구려는 건재하였던 때였으므로 이 위험한 고구려 내륙 루트를 이용하지 않고 뱃길을 택하여 중국 산동반도 등주로 떠났다. 그 당시 산동반도를 비롯한 황해 연안은 신라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신라방(신라주민 집단 거주지)이 있었고 여기에는 신라인들이 출입하는 사찰도 있었는데 의상이 잠시 머문 곳이 적산 법화원이다.
의상대사에 관련한 중국 내 기록은 고구려 유민으로 당나라에 살면서 승려가 된 북송의 찬영이 저술한 송고승전에 전해오고 있으나 우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구체적 기록이 전해오지 않는다. 의상대사와 관련한 이야기는 부석사 창건 설화에 기록이 전하고 민간 전설에도 전해온다. 그리고 일본 경도 근처 고산사에는 10세기 작품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신라 여인상이 근세 발견되어 국보로 지정되었고, 이 여인상은 다름 아닌 의상대사와 슬픈 사연을 간직한 당나라 처녀 선묘라고 보고 있으며, 이 절에는 화엄연기라는 불교서적이 전해오는데 이 책에 의상과 선묘에 관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의상이 원효와 함께 당나라 유학을 위해 도착한 곳은 서해안 당주계(신라시대 지명에는 당성, 당항성)이며 그들은 배를 기다리다가 산중에서 노숙하면서 밤중에 비를 만났다. 어둠 속에서 민가를 찾아 헤맸으나 찾지 못하고 움집을 발견하여 그곳에서 밤을 지냈다. 의상과 원효는 밤중에 갈증을 느껴 가까이 고인 물을 달게 마셨다. 먼 여행길에 지치고 피로하여 불편을 잊고 단잠을 잔 뒤 이튿날 날이 새면서 주위를 살펴보니 자신들이 잠을 잤던 그 자리에 해골이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들이 하룻밤을 보낸 곳은 움집이 아니라 피폐해진 무덤 속이었다. 의상은 해골에 고인 물을 자신이 마셨다는 사실을 알고 구토하고 더러움을 느꼈으나 원효는 태연 작약한 자세로 오히려 환희에 젖어 있었다. 이튿날도 비가 멎지 않자 또 다시 무덤 속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는데 밤중에 귀신이 나타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원효는 이틀동안 무덤 속에서의 체험을 통해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心生卽種種法生 心滅卽種種法滅"이라고 갈파하였다. 즉 "마음이 있어야 온갖 사물과 형상을 인식하게 되고 마음이 없으면 이러한 것들도 없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원효는 "어젯밤 무덤을 무덤이라고 보지 않고 토굴이라고 생각하여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었고, 자리를 옮겨 잠을 자면서 귀신을 만났지만 마음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 누구나 생각하기에 따라서 모든 사물의 형상이 다르게 보고 느끼게 되고 또 생각을 멀리하게 되면 무덤이나 토굴의 구별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오직 내 마음 이외 무슨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깨달았으니 당나라에 가지 않고 경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의상은 더 배우기 위해서 홀로 외롭고 험한 길을 택하여 뱃길로 중국을 향했다.
실로 얼마만에 이루어지는 꿈인가, 뱃전에 갈라지는 서해의 푸른 물결 위로 수평선 너머를 그리는 의상스님은 비록 원효스님과 헤어져 홀로 상선에 의지한 몸이긴 하지만 감개가 무량하였다.
배가 닿는 곳은 등주해안, 이제 그는 그토록 그리던 당나라에 온 것이었읍니다. 하지만 아무리 급해도 그 곳은 초행길의 낯선 이국땅, 그는 몸의 피로도 풀고 좀 더 확실한 사정도 알아볼 겸 하여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한 동안 그 곳에서 머물기로 했읍니다.
의상스님은 후덕해 보이는 한 신도집을 찾았읍니다. 물론 집주인은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그럴 수 없이 친절해 그를 후원의 정결한 방으로 안내하였읍니다.
방문을 열면 비록 낙엽진 화목 사이로 차가운 이국의 해풍은 불어와도 어딘가 보이지 않는 따뜻한 정이 있어 고요히 흐르는 정원, 밤이 되자 별빛은 그 위에 은가루를 뿌렸읍니다.
길을 떠난 이래 처음으로 가져보는 포근한 잠자리, 의상스님은 집주인이 그럴 수 없이 고마워 깊은 감사를 드리며 잠을 청했읍니다. 하지만 의상스님은 이 때 자기의 모습이 이 집 딸 선묘낭자에게 남다른 인상을 주어 밤이 깊어도 잠을 못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읍니다.
항구도시인 이 곳 등주, 선묘는 이 곳에서 자라며 수 많은 남자들을 보아 왔고 또 나이를 생각해서 자기의 상대를 찾아도 보았읍니다. 그런가 하면 남 달리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를 가졌기에 그 중엔 은근히 연정을 보내오는 사람도 있었읍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진 그것도 모두 허사, 누구보다도 차분하고 이지적이며 정감어린 처녀였기에 그것은 더 어려웠나 봅니다.
그러던 것이 오늘 밤은 웬 일일까. 의상스님의 모습을 몇 번인가 훔쳐본 선묘 낭자는 영 잠을 이룰 수가 없었읍니다.
생전 처음 당해보는 가슴의 설레임, 그것은 자신이 생각해도 알 수 없는 그러나 오래 전부터 가슴 깊이 싹터 자라온 그런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선묘낭자의 남 다른 사연을 알 길 없는 의상스님은 다음 날도 조용히 자기 일에만 열중할 뿐이었읍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면서 선묘의 가슴은 애처로울만큼 바작바작 타 들어갔읍니다.
이젠 낮도 없고 밤도 없었읍니다. 때로는 언젠간 알아주겠지 하는 희망도 걸어 보았고 때로는 자기의 마음을 그다지도 몰라줌에 대해 원망도 해보았읍니다.
마주친 것도 한 두번이 아니요, 애처로운 눈빛을 보낸 것도 한 두번이 아니건만 아무리 불법에 출가한 몸이라 하지만 그도 한창 끓어오르는 젊음의 피가 있거늘 어찌 그다지도 목석과 같단 말인가, 그러기에 한편 선묘는 은연중 그 굳은 도심 앞에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부끄러워지기도 했습니다.
실로 선묘의 일과는 어느 사이 오직 의상스님에 대한 일루의 희망과 원망, 그리고 부끄러움만이 반복되는 그런 것이 되고 말았읍니다.
며칠을 울었는가 모릅니다. 그러자 선묘의 그 모든 사랑의 감정은 어느 덧 차차 그의 뜻을 따르려는 존경으로 변하고 그 존경은 다시 도심으로 변해가고 있었읍니다. 아무리 가까이하려 해도 그는 이미 출가한 몸에다가 불법을 구하려는 큰 뜻을 가지고 이 곳에 온 몸, 그녀는 결국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음을 알자 속정을 버리고 대신 그의 대도를 따르기로 마음을 가다듬어 갔던 것이었읍니다.
이제 꽃비는 내리련가, 어느 날인가 선묘낭자는 의상스님을 찾아 두무릎을 꿇고 말았읍니다.
[스님. 이제 저는 언제까지나 스님께 귀의 하렵니다. 그 동안 품었던 연정 대신 이젠 불법을 배워 품고 스님의 시주가 되어 대불사를 도우렵니다. 부디 저의 뜻을 저버리지 마시고 거두어 주십시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그리고 신앙으로 승화된 사랑이랴. 그녀의 고운 얼굴, 빛나는 눈엔 이미 세속의 그런 빛이 아닌 어떤 영겁을 뚫는 청초함이 어리는 듯 했읍니다.
얼마 안 있어 의상스님은 장안으로 향했읍니다. 그 곳 종남산의 지상사에 있는 중국 화엄종의 제일 대가 지엄삼장에게 가서 화엄학을 배우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지엄삼장은 물론 그를 보자 곧 제자로 맞이 하였읍니다. 그리곤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읍니다.
[내가 간밤에 꿈을 꾸니 해동에 큰 나무가 나서 중국을 덮고 그 위엔 봉의 집이있어 올라가 본 즉 보주가 있어 그 빛이 멀리까지 비치더군. 그래서 나는 필히 해동으로 부터 귀인이 올 줄 알고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지.]
의상스님의 큰 뜻은 이제 바야흐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었읍니다. 의상스님의 지혜는 날이 감에 따라 점점 더 깊어갔읍니다. 그리하여 얼마 안 가선 그의 모든 문하생을 뛰어넘고 나중엔 결국 지엄삼장마저도 그 아래 빛을 감추어야 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읍니다.
한편 의상스님을 떠나보낸 선묘낭자는 여늬 때와는 달리 자신의 맹세대로 불법의 공부에 있는 힘을 다하고 있었읍니다. 그리곤 또 스님과의 재회를 기원하며 그에게 주고자 틈틈이 법복을 비롯한 여러가지 물건들을 만들기도 했읍니다.
그러던 중 봄은 오고 또 가고 어느 덧 십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읍니다.
선묘의 얼굴에는 이제 또 다른, 그러기에 함부로 접할 수 없는 어떤 신비의 아름다움이 어렸읍니다. 그런가 하면 의상스님은 그 동안 벌써 지엄삼장의 인가를 받고 그의 입적 후에도 그의 뒤를 이어 화엄학의 대가로서 그 명성을 온 천지에 떨치고 있었읍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제 신라로 돌아가고 싶어졌읍니다. 고국산천을 밟으며 화엄의 진수를 널리 펴 조국을 위해 그를 정토로 만드는데 남은 생애를 다 바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때는 당나라 고종때, 마침 그에겐 고종이 대군을 몰아 신라를 칠 것 같다는 소식이 들어 왔읍니다. 의상스님으로선 이제 더 이상 당나라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읍니다. 당에 온 목적은 다 달성해 그렇지 않아도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던 차에 침략소식까지 있으니 무엇을 더 지체하리요, 그는 곧 등주로 달렸읍니다. 처음 올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읍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어떤 깊은 감회에 잠겼읍니다. 그리하여 그는 배가 출항하기 전 잠시 틈을 내어 그 전에 머물렀던 신도집을 찾아 여러가지로 보살펴준 은의에 대해 거듭 감사의 인사를 드렸읍니다. 주인도 이미 풍문으로나마 의상스님의 소식을 듣고 있었기에 작은 정성이나마 평생의 영광이라며 그를 따뜻이 맞이해 주었읍니다.
하지만 의상스님으로선 갈 길이 바쁜 몸, 주름진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억제치 못하는 집주인과 기약없는 뜨거운 작별을 한 의상스님은 이윽고 다시 배에 몸을 싣고 귀국 길에 올랐읍니다.
한편 그 때 마침 집에 없었던 선묘낭자는 의상스님이 귀국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야 그를 선창가에서 보았다는 어느 친구의 말을 전해듣고 비로소 알게 되었읍니다. 그녀는 너무도 놀랐읍니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의상스님으로선 자기와의 일을 한낱 이국땅 어느 낯선 처녀와의 흘러간 인연쯤으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자기는 십년이라는 긴 세월을 오로지 그만을 그리며 또 기다리며 살아온 것이 아닌가, 그녀는 그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급히 집으로 뛰어가 그에게 주려고 만들어 놓은 모든 것을 챙겨 깨끗한 함에 넣어가지곤 한 걸음에 선창가로 달려갔읍니다.
그러나 이 일을 어찌하랴, 이미 스님이 탄 배는 저 멀리 떠가고 있었읍니다. 발을 구른들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소리쳐 외쳐본들 한 번 뜬 배가 다시 오랴. 선묘낭자의 마음은 마치 땅마저도 꺼져 들어가는 듯 하였읍니다.
그러나 이렇게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순 없는 것, 선묘낭자는 불현듯 스치는 어떤 생각에 마음을 가다듬고 부둣가에 선 채 이렇게 일심으로 원을 발했읍니다.
[제불보살님, 저의 참된 본 마음은 스님께 공양하는 일이옵니다. 제 원이 청정한 이 함을 부디 저 배에 가 닿게 해 주옵소서.]
그리곤 가지고 있던 함을 바다 위에 던졌읍니다. 그러자 이것은 어찌된 일인가, 돌연 어디선가 한 줄기 질풍은 그 함을 마치 새털 날리듯 가볍게 날려 스님이 탄 배에 가 닿게 하는 것이었읍니다. 눈 앞에서 벌어진 이 신비한 광경, 이를 본 선묘낭자는 순간 그 마음에 굳게 결정되어 온 바가 있었읍니다. 굽이치는 푸른 바다에 떠가는 작은 배, 그러나 신라를 화엄의 정토로 만들고자 그에 몸을 맡겨 실은 의상스님의 크나큰 원, 저 먼 바닷길을.....
그리하여 그녀는 곧 다시
[부디 제 몸이 변하여 큰 용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스님의 뱃길을 무사히 인도하여 법을 전하게 하옵소서. 이제 업보의 몸은 이것으로 끊으렵니다.]
하고 큰 원을 세운 뒤 바로 몸을 바다에 던졌읍니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 그러나 어쨌던 그녀의 몸은 곧 용으로 변해 의상스님이 탄 배 밑을 떠받들곤 뱃길을 인도하기 시작하는 것이었읍니다. 그 동안 그렇게도 열심히 불법을 익히더니 이제와선 이런 청정하고도 갸륵한 원을 세울 줄이야, 모든 불보살님들께서도 선묘낭자가 원력소생하고자 함에 다 같이 감동하시어 가피를 내리셨나 봅니다.
의상스님은 지금 과연 이런 사연을 알고 있을까. 용이 되어 뱃길을 인도하는 선묘낭자는 오로지 스스로 세운 원을 다할 뿐, 배가 신라에 닿아 의상스님이 무사히 신라 땅을 밟는 것을 보자 비록 물 속에 숨은 몸이긴 하지만 그녀의 눈에선 어느 덧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읍니다
[스님, 부디 원을 성취하시옵소서.]
그리곤 조용히 대해의 깊은 물속을 헤치며 어디론가 사라져 갔읍니다.
이젠 함부로 몸을 드러내고 살 수도 없는 선묘, 용으로 변한 그녀는 과연 어디로 간 것일까.
귀국한 후 의상스님은 당의 침략 징조를 궁에 소상히 전한 다음 화엄의 교학을 펴 신라를 정토로 만드는 근거를 삼고자 산천을 두루 돌며 가람을 세울 곳을 찾아 다녔읍니다. 대화엄의 위대한 가르침은 복되고 선한 곳이 아니면 함부로 일으키지말아야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읍니다. 그리하여 몇년 만에 찾아 낸 곳이 태백산 줄기의 어느 양지바른 산중턱, 병풍같은 울창한 수목이 저 하늘을 오르려는 듯 그 정기를 내뿜고 있는 그런 복지였읍니다. 그러나 이미 거기엔 그릇된 주장을 하는 무리들이 오백여명이나 모여 살고 있었읍니다.
모처럼 찾아낸 곳, 그냥 강행하여 가람을 지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혼자 힘으로 무조건 쫓아낼 수도 없고 의상스님은 찾아낼 때의 환희심과는 달리 참으로 곤란한 입장에 처하고 말았읍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지만 몇날 며칠을 지내도 별 묘안은 떠오르지 않았읍니다.
저들도 이 나라의 백성이 아닌가, 그들을 향한 자비심에 의상스님은 더욱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것은 무슨 꿈같은 변고인가, 별안간 천지를 뒤흔드는 큰 진동과 함께 어디선가 홀연히 집채 만큼 큰 바위 하나가 나타나 허공을 가르는 무서운 바람소리를 내며 그들의 집 지붕위를 막 떨어질 듯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것이었읍니다. 의상스님은 몰랐었는지 몰라도 그것은 바로 용으로까지 변한 선묘낭자가 몰래 의상스님을 따라 다니며 그 신변을 지켜오던 중 그 뜻을 알곤 그것을 이루게 하고자 큰 신통변화를 일으킨 것이었읍니다.
너무도 창졸간에 일어난 상상도 못할 이변, 오백명이나 되는 무리들은 일이 이쯤되자 혼비백산, 그만 산산이 흩어져 버리고 말았읍니다. 이제는 다시 조용해진 산골, 공중을 나르던 거암도 산 언덕 다른 바위 위에 잠자 듯 조용히 누웠읍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그 곳엔 화엄의 대찰을 짓는 목공 석공들의, 나무를 다듬고 돌을 다듬는 우렁찬 소리가 대신 들려 오기 시작했읍니다.
이를 지켜보는 선묘낭자의 가슴은 어떠했을까, 선묘는 절이 완성되자 용이 된 그 몸을 다시 찾아 무량수전 밑으로 들어갔읍니다. 아마도 그 절을 지키는 영원의 수호신이 되고자 함이었을 것입니다. 부석사, 푸른 솔바람에 옷깃을 날리며 저 먼 곳 어디엔가 시선을 보내고 있는 의상스님의 마음속에 등주의 그 날들이 아련한 추억으로 떠오르고 있었읍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곳에 석룡이 있다고 입에서 입으로 전했읍니다.
비록 몸은 돌이 되어 굳었지만 그 숨결만은 지금도 들려오고 있는 듯 목탁소리 울릴땐 산도 소리내어 답을 해 옵니다.
언젠가 객은 백설이 뒤덮힌 부석사를 찾아 떠오르는 감회를 적다가 그냥 한동안 멍하니 서있던 적이 있었읍니다. 너무나 벅차 그대로 그음속에 남겨둘 수 밖에 없었읍니다. 하지만 지금 객은 이 이야기를 그대에게 적어 보냅니다. 웬지는 객도 모르겠읍니다. 사랑이란 미명아래 오가는 빈번한 저울추를 보기에 너무나도 이런 이야기가 간직하고팠기 때문이라고나 할까요.
지금도 부석사를 찾아가 보면 선묘낭자의 화신으로 공중에 떠 위엄을 나타냈던 부석은 무량수전 뒷편 바위 위에 가볍게 내려 앉아 있는데, 택리지에는 <노끈을 건너게 하면 거침없이 드나들어 비로소 그것이 뜬 돌인 줄 알았다.>고 부석을 말하고 있고 무량수전 밑에는 비늘까지 달려있는 자연 석룡이 그 꼬리를 석등 아래에 두고 묻혀 있다는 것이 발견되어 선묘낭자가 용이 되었다는 것을 더욱 실감있게 해주고 있읍니다.
지금도 선묘낭자의 넋은 의상스님의 손길이 깃든 부석사를 지키며 화엄의 도량이 유지되고 이 땅이 정토되길 영원히 기원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너무도 아름답고 너무도 깨끗했기에 이루어진 영원한 사랑의 이야기, 그리고 님의 품에 포근히 젖어 들려오는 듯한 그 해맑은 속삭임, 그대는 그것을 알리라, 객은 저 먼 찬란한 별빛을 더듬으면서 그 속에서 선묘낭자의 모습을 찾아보았읍니다. 그리고 오늘을 사는 많은 소녀들에게서도 그 모습을 찾아보았읍니다. 어디엔간 그런 아름다운 소녀가 또 있을 것이기에......
석룡이야 보이지 않더라도 부석은 오늘도 영겁을 뚫는 그 숨결을 그 객에게 보내는 듯 하였답니다.
2) 조사당의 선비화
신라시대에 의상조사가 창건한 사찰이라고 알려져 있는
부석사의 조사당(국보 제 19호) 추녀 밑에
일명 선비화라고 불리는 콩과 낙엽관목인 골담초 1그루가 있다.
“택리지”에는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한 후 도를 깨치고
서역 천축국(인도)으로 떠날 때 지팡이를 꽂으면서
‘지팡이에 뿌리가 내리고 잎이 날 터이니 이 나무가 죽지 않으면
나도 죽지 않은 것으로 알라.’고 했다는 내용이 나오는 데
그 나무가 바로 선비화라 한다.
조선 광해군 때에 경상감사가 된 ‘정조’라는 이가 부석사에 와
선비화를 보고 선인의 ‘지팡이였던 나무로 지팡이를 만들겠다’라며 나무를 잘라 갔으나
다시 줄기가 뻗어 나오 전과 같이 잘 자랐고,
후에 정조는 역적으로 몰려 죽였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퇴계 이황은 이 나무를 보고 ‘부석사비선화’라고 하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아기를 못 낳는 부인이 선비화의 잎을 삶아 그 물을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내려와
나뭇잎을 마구 따 가는 바람에 나무가 많이 훼손되었다 한다.
높이는 170㎝, 뿌리부분 굵기 5㎝정도 밖에 안 되지만 수령이 최소 500년에 이른다고 알려진 부석사의 선비화는 현재 철책으로 둘러싸여 보호되고 있다.
5. 점심공양
집행부가 미리 준비해 둔 부석식당에서
산채 비빔밥으로 점심공양을 하다.
공양 후 포근한 날씨 덕분에 도반들과 삼삼오오 짝을 이뤄
가볍게 산책을 할 수 있는 여유로움도 만끽하다.
기분이 베리 나이스(트레 비엥, 짱)였다.
6. 孤雲寺로 이동
부석에서 고운으로 한 시간 여 만에 당도하다.
등운산 고운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이다.
사찰 관람 시간 한 시간 여였다.
특이한 점은
조계문
고궁전 등이 있었다.
7. 귀향
- 차중 회향법회
- 행운권 추첨
- ‘홧바’(대웅 전 단장 보시)로 저녁 공양 대체하고
평소와 다르게 1호차에 여흥으로 노래를 할 수 있었다.
1호차는 노래를 할 수 없는 성역 같은 곳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드디어 열렸다.
8. 아름다운 송년 및 청하 단장님의 마무리 법회를 마치고
계사년 남은 시간들을 마무리를 잘하시고
갑오년 새해 법우님들이 뜻하신 것 몽땅 이루시고
건강하시고 이울러 늘 행복하시길 기원하면서
이만 총 총...
※ 부석사의 국보 및 보물
1. 석등 (국보 제17호)
부석사 석등은 無量壽殿 중심 앞 中庭 중앙에 세워져 있다. 따라서 무량수전을 진입하기 위해 安養樓 계단을 오르면 제일 먼저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 있다. 또한 석등 앞에는 석등의 부속물인 방형의 拜禮石이 현존한다. 이들 석등은 배례석이 있는 부석사는 義湘(625~702)이 文武王의 뜻을 받들어창건한 이래, 그 제자들에 의해 法燈이 계속되었다. 특히 신라 하대에는 神琳 이후 번성하여 건물의 중창은 물론 많은 인재가 배출되므로써 華嚴宗을 크게 일으키면서 석등과 같은 조형물이 조성된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곧 이 무렵은 신라 景文王代(861~874)로서, 부석사가 위치한 太白山은 新羅五岳 중 北岳으로 숭앙되며 비중있는 화엄종 본찰의 중심무대가 됨에 따라, 사찰 내에는 석등 이외에 大石檀, 石龍, 長臺石, 石搭 등이 이 무렵이 9세기에 조성되었던 것이다. 한편 무량수전 앞 석등 외에 또 다른 석등 郡材 2기가 더 있는데 하나는 무량수전 동쪽 언덕의 삼층석탑 앞에 위치한 석등이고, 다른 하나는 醉玄屢 앞의 옥개석과 간주석 파편 일부를 통해 알수 있다.
▷ 조사내용
석등의 각 부재는 상륜부만이 일부 파손되었을 뿐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으며, 지표면에 하단부가 묻혀 대석의 하단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지대석은 3매의 판석이 조립된 방형의 지대석으로 상면에는 하대하석을 받치기 위해 弧形의 받침대가 2단 각출되었고, 네 귀는 들림현상이 거의 없이 평이하다. 하대석은 방형의 하대하석 위에 하대상석인 팔각 원구형의 연화대석이 얹혀진 구조로 이들은 각각의 別石이다.하대하석 상면에는 角形과 弧形의 2단 받침대가 마련되고 側斜面의 상하에는角帶가 돌출되었다. 각대 내부에는 음각면의 안상이 2조씩 모두 8개가 새겨져 있다.
연화대석은 팔각 중심에 복엽 연판문이 모아지고, 그 끝 꼭지에는 귀꽃을 돌려 장식하였다. 이들 팔엽의 연화판 사이의간엽은 상하가 겹친 重辦이다. 연화대석 상,하면에는 받침대가 있는데, 하면은 1단의 높이 30mm의 각형받침이, 상면에는 4단의 높이 65mm의 받침이 角形과 弧形으로 있다. 내부에는 간주공이 뚫렸다.팔각형의 간주석은 한 변이 145mm로 상하의 두께 차이가 거의 없으며 안허리곡도 없는 편이고, 상하끝은 상,하대석에 꽂을 수 있는 촉이 마련된 구조이다. 상대석 역시 팔각꼭지에 팔엽 단판 연화문 중심이 모아지게 구성되었고 화판 내부는 보상화문이 들어 있다.
하면은 3단의 받침대가 마련된 후 外緣의 연화문과 연결되고 상면은 2단의 받침대가 마련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각형받침이다. 上臺帶는 50mm로 굵기가 두꺼워 화사석과 상대석의 경계가 뚜렷하며 그 상면은 중앙으로 갈수록 귀솟음이 되어있다. 팔면체의 화문석은 내부가 비어있고 사면에 장방형의 창이 뚫렸으며, 나머지 사면 외부에는 보살입상이 浮彫되었다.
火窓높이 410mm, 너비 170mm로 외곽에는 1단의 윤곽대가 마련되고 윤곽대 내부에는 鐵釘孔이 12개씩 돌려있고 이 구멍은 한쪽에만 14개가 있으며 그 배열도 특이해 개폐시설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바닥에는 가로 180mm, 세로 150mm의 등화시설로 보이는 방형의 段이 한 단 파여 있다.
화사벽에 장식된 보살들은 모두 원형의 두 광이 있고 삼면관을 머리에 쓰고 연화대에 서 있는데 목에는 三道가 분명하며 수인은 양 손을 모으거나, 늘어뜨린 천의를 잡기도 하고 연꽃과 보주를 어깨와 가슴에 들고 서 있는데, 자세들이 모두 자연스러우며 신체가 날씬하다. 이 보살들은 상의는 입지 않고 천의만 양 어깨에 늘어뜨린 상태고 하의는 군의를 입고 있다. 옥개석을 삿갓형태를 하고 팔각 옥개면은 仰曲과 안허리가 분명하며 처마선도 경쾌한 곡면을 나타내고 있다. 옥개 상면은 팔엽복 판연화문의 蓮華冠이 덮혀 있고, 그 위로 호형과 각형의 층급 받침대가 2단 마련되었다. 상단 상륜받침대 동서측 중앙에는 엄지손가락 만한 홈이 파여 있기도 하다.
처마 안쪽에는 깊이 28mm, 너비 20mm 切水溝가 돌려지고 중앙에는 옥개받침대가 2단 각출되어 있다. 내부 상면은 상륜부를 낄수 있는 竿孔이 지름 220mm로 뚫려있고 구멍은 처마쪽으로 갈수록 점차 옥개면의 형태로 넓게 벌어져 있다. 상륜부는 원래 보주형의 연봉이 있었는데 현재는 보륜의 중간부까지만 남아 있다. 상륜은 하단부에 촉이 있어 옥개석에 끼워지게 되고 외부에는 호형과 각형의 3단 받침이 있고 보륜 중앙허리에는 4엽의 만개한 연화문이 띠와 함께 돌려져있다. 이외에 석등과 동일한 시기와 양식으로 조성된 배례석이 석등 앞에 자리하고 있다. 석등과의 거리는 800mm이고 안양루와의 거리는 2,250mm 떨어진 상태로, 그 형태는 장방형이며 1,420mm x 850mm x 300mm 크기이다. 배례석 상면 중앙은 子房이 큰 팔엽단판에 간엽이 있는 연화문이 양각으로 시원스레 장식되어 있다.
특히 넓은 자방 외곽에는 원형의 線帶가 돌려 있다. 四面에는 상, 하에 걸쳐 角帶가 한 단씩 각출되어 있고 사이에 안상이 낮으막하게 파여 있는데 앞뒤에는 4개의 안상이, 좌우 측면에는 2개의 안상이 각각 장식되어 있다. 이들 안상 아랫면은 하단부에 마련딘 받침대와 바로 연결되는데 받침대는 3단이 넓게 마련되어 안정감 있다. 이 석등의 가장 큰 특징은 기단부가 방형의 지대석과 하대하석위에 팔각의 복엽 복련대석이 놓여 이루어진 점과 연화대 첨단부에 귀꽃이 장식되어 있는 점, 그리고 화사석 사면에 보살이 장식된 것을 들 수 있다. 즉 종래이 방형의 기단형태에서 팔각형태로 바뀌어 가는 변화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또한 기단부 하대석의 연화대 받침대가 원형에서 팔각으로, 그 상면은 간주받침대가 굽형으로 각출된 점 등 양식의 세부 변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특히 간주석을 받치게 되는 연화대석 상면의 角形과 弧形의 4단의 받침은 형태가 장식적인 층단이 마련되므로, 연화대석 의 높이는 그 폭에 비해 매우 낮게 조성되었다.
상대 앙련이 연판 내에는 花紋이 있고 상대석의 두께도 하대석의 연화대석처럼 얇은 편이며, 이들 상, 하대석의 間葉은 2단의 重瓣 구조를 하고 있다. 화사석의 4개의 화창이 개설된 벽면 四壁에 사천왕상 대신 보살입상이 장식된 것은 매우 특징적이며, 옥개석은 옥개마루 쪽이 갑자기 들려 안허리곡이 심해 날카로운 감도 없지 않다. 이와 같이 연화문의 간엽이 중판인 점, 기단부에 귀꽃과 간주석 받침대의 발생, 그리고 상대 연화문 내의 보상화문이 화사석의 보살상의 장식 등과 같은 세부양식으로 보아 9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2. 무량수전 (국보 제18호)
부석사의 주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로도 불리는데 '무량수'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건물 가운데 하나이다.
역사적으로 인정되기로는 안동 봉정사 극락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알려져 있지만 건물 규모나 구조 방식, 법식의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무량수전에 비하여 다소 떨어진다.그러므로 무량수전은 고대 불전 형식과 구조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기준이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원융국사비문]에 의하면 고려 현종 7년(1016) 원융국사가 무량수전을 중창하였다고 한다. 1916년 실시된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서북쪽 귀공포의 묵서에는 공민왕 7년(1358) 왜구에 의하여 건물이 불타서 우왕 2년 (1376)에 원융 국사가 중수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건축 양식이 고려 후기 건물과 많은 차이를 보이므로 원래 건물은 이보다 약 100년 정도 앞선 13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광해군 3년(1611)에 서까래를 깔고 단청을 하였고 1969년에는 번와 보수하였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인데 평면의 경우 건물 내부의 고주 사이에 형성된 내진 사방에 한 칸의 외진을 두른 형식을 취했다. 기둥 사이의 주칸 거리가 크고 기둥 높이도 높아 건물이 당당하고 안정감 있게 지어졌다. 지붕은 팔작 형식인데 지붕의 물매는 후대 건물에 비하여 완만하다. 예로부터 건물의 구조는 단면에 위치한 도리의 수를 셈하여 말하는데 이 집은 소위 9량집으로 외목을 제외한 도리가 9개나 되는 큰 건물이다.
면석과 갑석을 짜맞추어 만든 가구식 기단과 사갑석을 받치는 지대석이 돌출된 계단, 원형 주좌와 고막이를 가진 초석의 법식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기법을 계승한 것이다. 계단 동측면에 선각된 '충원적화면(忠原赤花面) 석수김애선'이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무량수전은 고려시대의 법식을 거의 완벽하게 보여 주지만 그 가운데 가장 유의하여 볼 부분은 평면의 안허리곡(曲), 기둥의 안쏠림과 귀솟음, 배흘림, 항아리형 보 등의 의장 수법이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착시에 의한 왜곡 현상을 막는 동시에 가장 효율적인 구조를 만들기 위하여 고안되 고도의 기법들이다.
안허리곡은 보통 건물 중앙보다 귀부분의 처마 끝이 더 튀어나오도록 처리한 것을 말하는데 기둥의 안쏠림과 관계가 있다. 안쏠림은 기둥 위쪽을 내부로 경사지게 세운 것이다. 무량수전에서는 안허리곡과 안쏠림이 공포와 벽면에까지 적용되어 마치 평면이 오목거울처럼 휘어 있다. 귀솟음은 건물 귀부분의 기둥 높이를 중앙보다 높게 처리하는 것인데 수평 부재의 끝부분이 아래로 처져 보이는 착시를 막아준다. 기둥의 배흘림 역시 기둥 머리가 넓어 보이는 착시 현상을 막기 위한 것인데 무량수전의 기둥은 강릉 객사문 다음으로 배흘림이 심하다.
무량수전의 공포 형식은 기둥 위에만 배치된 소위 주심포계인데 매우 건실하게 짜여졌다. 주두 위에서 공포의 짜임이 시작되고 벽면 방향의 첨차와 튀어나온 제공의 길이가 똑같은 전형적인 벽면 방향의 첨차와 튀어나온 제공의 길이가 똑같은 전형적인 북방계통의 수법이다. 주두와 소로는 내반된 곡선의 굽을 가지고 있다. 또한 공포 사이 포벽에 뜬 소로를 가지고 있는 점은 이 집만의 특징이다. 무량수전 정면 중앙칸에 걸린 편액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이다.
내부 서쪽에는 불단과 화려한 닫집을 만들어 고려시대에 조성한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국보 제45호)를 모셨다. 협시보살 없이 독존으로만 동향하도록 모신 점이 특이한데 교리를 철저히 따른 관념적인 구상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불상을 동향으로 배치하고 내부의 열주를 통하여 이를 바라보도록 함으로써 일반적인 불전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장엄하고 깊이감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일반적으로 진입하는 정면쪽으로 불상을 모시는 우리나라 전통 건축에서는 드문 해결 방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집을 만든 대목(大木)의 뛰어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대들보 위쪽으로는 후대 건물과는 달리 천장을 막지 않아 지붕 가구가 잘 보인다. 굵고 가늘고 길고 잛은 각각의 부재들이 서로 조화 있게 짜맞춰진 모습은 오랫동안 바라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이와 같은 무량수전의 천장 가구에서 고저장단의 운율을 느낄 수 있다고도 하였다.
이렇게 천장을 노출시키려면 각각의 부재가 아름답게 디자인되어야 하고 또한 정확하게 짜맞추어야 하므로 품이 훨씬 더 들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목수들은 이러한 건물을 많이 지었다. 특히 고려시대 주심포 집들에는 천장을 가설하지 않은 것이 많다.
원래 내부 바닥에는 푸른 유약을 바른 녹유전을 깔아서 매우 화려하였다. 아미타경을 보면 극락 세계의 바닥은 유리로 되었다고 하는데 녹유전은 이러한 이상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장엄 도구의 하나였던 것이다.
3. 조사당 (국보 제19호)
조사당은 무량수전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산 중턱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작은 전각으로 측면 쪽으로 약간 비스듬히 진입하여 소박하고 간결한 느낌을 준다. 지붕은 맞배 형식으로 간단해 보이지만 넉넉하게 뻗어 나와 결코 작은 건물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1916년의 해체 공사 때 발견된 장여 위의 묵서에 의하면 조사당은 고려 우왕 3년(1377)에 원응 국사가 재건한 것이다. 조선 성종 21년(1490)에 중수하고 성종 24년(1493)에 단청하였으며 선조 6년(1573)에는 서까래를 수리하였다.
4. 소조아미타여래좌상 (국보 제45호)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 대사가 창건한 우리나라의 대표적 화엄종 수사찰인 부석사에는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물들이 전하고 있어 부석사의 유구한 역사를 증명해 준다.
현존하는 유물을 시대별로 살펴보면 신라시대의 것으로는 절 입구에 세워진 당간지주, 무량수전 동쪽의 석탑을 비롯한 3층석탑 3기, 석등 2기, 그리고 자인당에 봉안된 3구의 석불좌상이 있으며 고려시대의 유물로는 무량수전의 주존으로 봉안된 소조아미타여래좌상, 조사당에 그렸던 벽화 6점, 원융국사비, 그리고 화엄경 목판 등을 들수 있다. 조선시대의 유물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현재 괘불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승당지로 추정되는 곳으로 큰 석조와 맷돌이 남아있어 부석사의 사격(寺格)을 전하고 있다. 또한 경내에는 괘불대, 석등의 화사석, 불상광배편, 배례석, 장대석 등 석물의 부재들이 산재해 있다.
원래는 이보다 훨씬 많은 수의 우수한 미술품들이 있었겠지만 경내에 현존하는 유물들은 화엄종의 수사찰인 부석사의 지위와 유구한 역사에 비해 그다지 많은 수는 아니다. 더구나 이들 가운데 석불상들과 3층석탑 등은 부석사의 유물이 아니고 다른 절터에서 옮겨온 것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주심포계 건물로 손꼽히는 무량수전과 여기에 봉안된 소조 불좌상, 현존 최고의 사찰 벽화인 조사당 벽화, 당간지주와 석등, 고려각판 등의 유물들은 모두 당대를 대표할 만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 1916년 무량수전의 해체 수리 때 대들보에서 금동 약사불입상을 비롯한 20여 구의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들 가운데 13구의 불상들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5. 조사당 벽화 (국보 제46호)
부석사에 전하는 벽화 6점은 원래 조사당 벽면에 그려졌던 것이다. 일제 시대에 벽체에서 분리하여 무량수전에 보관하다가 현재는 보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이들은 현재 남아있는 우리나라의 사원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 된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범천과 제석천 그리고 사천왕상을 그린 것인데 이 절의 창사주인 의상대사를 기린 조사당에 그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를 외호하려는 의도로 제작한 듯하다.
크기 : 205.0 X 75.0 센티미터
▶ 범 천
범천은 오른쪽(향좌)을 향한 측면관으로 서있는 자세이다.
머리에는 화관을 쓰고, 얼굴 뒤로 원형의 두광이 희미하게 보이며 앞으로 약간 내민 배 위에 두 손을 맞잡고 있다. 넓적한 얼굴에 긴 눈과 작은 입에서 위엄이 느껴지며 굵은 목, 넓고 듬직한 어깨 등이 전체적으로 풍부한 양감과 함께 건장한 인상을 풍긴다.
가슴께에 요대를 한 곤룡포 모양의 옷을 입고 있으며 소매 속으로 맞잡은 듯한 양팔 위로 드리운 천의가 발끝까지 늘어져 있다. 허리 아래는 박락이 심하고 후대에 색을 다시 입혀 정확한 묘선과 채색을 살필 수 없지만 풍만한 얼굴에 작은 이목구비, 옷단의 화려한 장식 문양 등 귀족적인 모습으로 고려시대에 제작된 존상으로 여겨진다.
▶ 제 석 천
범천과 마주보이는 측면관을 취한 제석천은 화려한 보관을 쓰고 합장한 보살형이다. 아름답고 단아한 얼굴, 좁은 어깨와 날씬한 체구 등 여성스럽고 우아한 자태이며 정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구슬과 꽃으로 장식된 보관을 머리에 썻으며 보발이 어깨 위로 길게 내려와 있다. 합장한 양팔 위로 웃옷의 끝단이 좌우로 날카롭게 뻗쳐 있는데 양팔에 걸쳐진 천의는 아래로 흘러내려 유연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이들 범천과 제석천은 모두 암녹색 바탕에 먹선으로 윤곽을 그린 후 진홍, 살색, 녹색, 등의 채색을 가했는데 얼굴이나 의복 등에 보이는 묘선은 매우 부드럽고 유연하게 흐른다.
▶ 사 천 왕
귀부인 같은 느낌을 주는 범천과 제석천과는 달리 수호의 임무를 맡은 사천왕상은 그들의 성격처럼 굴곡이 심한 활달한 곡선을 구사하여 매우 생동감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동방의 수호신인 지국천왕(持國天王)은 새털로 장식된 투구를 쓰고 왼손에 칼을 든 채 악귀를 밟고 서 있다. 둥그렇게 부릅뜬 눈, 곱슬곱슬한 눈썹과
수염 그리고 울퉁불퉁한 코는 올빼미 같은 투구 장식과 함께 무섭다기보다는 희화적(戱畵的)인 느낌을 자아낸다. 건장한 신체를 감싼 천의와 갑옷 역시 굴곡이 심한 묘선의 강조로 약동하는 천왕의 모습을 구체화시키려 하였다. 양다리 사이로 내려온 옷자락은 두 가닥으로 나뉘어지고 그 사이에 악귀가 그려져 있는데 단단히 눌려 옆으로 일그러진 입은 단순하지만 인상적이다.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은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어깨를 들어올리고 몸은 오른쪽으로 틀고 있어 활달하고 율동적인 모습이다. 오른손은 배 위에 얹었고 왼손으로 화살을 잡고 있다. 가슴 쪽의 천을 묶은 매듭을 갑옷 아랫단과 경갑 위에도 그려 넣어 치밀하고 장식적인 느낌을 준다.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사천왕 가운데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외호신다운 위엄이 잘 나타난 작품으로 두 발로 악귀를 단단히 누르고 서서 칼을 잡고 있다. 갑옷에는 발밑의 악귀처럼 생긴 그러테스크한 귀면이 그려져 있다. 이들과 함께 여러 가닥의 천의가 몸 주변으로 복잡하게 흐르는데 약간 형식적인 형태이다.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은 오른손을 허리에 대고 있으며, 다른 상과는 달리 한 발을 들어올려 악귀를 밟고 있는 당당한 모습
이다. 눈썹과 수염이 곧고 코와 입은 인간적인 모습이다. 광목천왕처럼 귀면 장식이 여러 개 붙은 갑옷을 입고 있으며 왼손에 긴 창을 쥐고 있다.
이상의 벽화들은 현재 박락(물건이 오래되어 긁히고 깍이어 나감)과 개채(색을 다시 입힘)가 심하여 정확한 양식을 살피기 어렵다. 이 벽화들의 제작 연대는 지금까지 조사당 장여 묵서명의 기록대로 1377년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도리 하단에 1201년에 개채한 것을 다시 1493년에 개채하였다고 한 묵서명의 기록으로 보아 1377년 제작설은 제고해 보아야 한다. 또한 사천왕상의 표현 기법은 [인종일채]의 선각 천부상과 같은 12세기 작품과 비교되며, 14세기 불화의 양식보다는 유연하고 세련되었기 때문에 이들 벽화의 제작 시기는 14세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6. 자인당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 2구 (보물 제220호)
이 2구의 불상은 처음부터 부석사에 있던 것이 아니라 부석사 동쪽의 폐사지에서 옮겨 온 것이다. 양손이 깨어졌고 얼굴과 대좌 일부가 파손되었으나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자인당의 두 비로자나불 좌상들은 세부 조각만 약간 다를 뿐 형태와 조각 양식이 거의 동일하여 같은 조각가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양감이 없는 경직된 신체와 형식화한 옷주름을 지닌 불상이나 다양한 무늬로 화려하게 장식된 광배와 대좌는 모두 9세기 후기 불상의 전형적인 특징들이다.
7. 3층석탑 (보물 제249호)
무량수전의 동쪽 약간 높은 지대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3층 석탑이다. 이 탑은 자인당의 석불들과 함께 이웃 절터에서 옮겨진 것이다.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은 전형적인 신라시대 석탑이다. 지대석과 하층 기단의 중석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는데 모두 8매석으로 짜였고중석 각 면에는 2개씩의 우주와 탱주가 새겨져 있다. 상층 기단의 중석은 각 면이 1매의 판석으로 짜였고 각 면에는 위에는 2단의 탑신 받침이 있다. 그 위로 탑신부가 올려져 있고 옥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1매석으로 구성되었다. 각층의 탑신에는 각기 우주만 있을 뿐 조각을 새기지 않았다. 옥개석의 받침은 각층 5단이고 낙수면의 네 모서리는 약간 반전되었다. 3층 옥개석의 일부가 파손되었고 그 위의 상륜부엔 현재 노반과 넓적한 복발만이 남아 있다.
8. 당간지주 (보물 제255호)
이 당간지주는 부석사 창건 당시 세워진 신라시대의 석조 유물이다. 1300여년전의 이 당간지주에는 화엄종찰을 알리는 깃대와 깃발이 꽂혀 있었겠지만 지금은 한쌍의 돌기둥만이 남아 있다.당간지주는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에 다다르기 전 왼편 중턱에 우뚝서 있으며, 그 키가 4.8m 이다.
9. 고려 각판 (보물 제735호)
이 각판은 부석사에 소장된 정원본(貞元本), 진본(晋本), 주본(周本)의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을 새긴 목판으로 13~14세기에 제작되었다.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은 크고 방정하고 넓은 뜻을 가진 부처님의 설법을 화려한 꽃으로 장식한 것 같은 경전이다. 부석사 화엄경판은 우리나라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화엄사상을 발전시켜 나간 부석사에 소장되어 그 가치가 더욱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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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시 도반 금륜법우님 후기글 감동을 줍니다 늘 곁에 있어서 행복하고 감사드림니다.
항상 열심이신 모습 감동 입니다.ㅋㅋ
남한땅의 5대 명찰(名刹) 가운데 으뜸인 "영주 부석사" !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집 가운데 한곳이다.부석사의 자랑거리인 "무량수전"을 뒤로하고 해동제일 지장동량인 "고운사" 순례에 이어 대구로 향하는 버스는 2014년 정종국호의 순항을 기원하며 마무리 회향을 하였다. 그 동안 집행부를 이끌어오신 회장단 선배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53선지식 순례단은 영원할 것입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선묘낭자의 넋이 깃든 부석사의 아름다운 전설~~~
부지런한 님들이 계시기에 53선지식의 배는 쉽없이 달려가겠죠~~
후기글 감사합니다 ^*^
후기글 잘 읽었습니다. 후기글이 없으면 뭔가 허전하죠. 늘 수고 합니다.
금륜 후기 글 올려 주시어 감사 드립니다. 그 옛 날 남여상열지사에 지고지순 애틋한 사연과 사찰에 얽힌 감동적인 글을 읽고 다시 한번 더 상기하면서 늘 좋은 일 많이 있으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금륜님 후기글 덕분에 선묘낭자의 사랑이야기~ 아름답네요.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졸필 순례기를
읽어 주신 분!
댓글까지 달아 주신 분들!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순례기를 다섯번씩이나 게재할 수 있었던 것은 동문 여러분께서 보내 주신 애정어린 관심이라 생각됩니다.
당분간 53을 참석할 수가 없어서 본 댓글에 첨언하여 인사드립니다.
또한 순례기는 다른 동문님이 더 멋진 글로 게재해 주리라 믿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계사년을 잘 마무리 하시고
오는 갑오년에는 건강하시고
뜻하신 것 몽땅 이루시길 기원드립니다.
황금수레바퀴 올림
동문들의 순례행사인 53선지식 행사 후기믄을 잘 올려주신 정성 감사합니다. 이는 역사가 됩니다.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네년에는 바쁘신가 보죠? 당분간의 어떤일 잘 마무리하시고 가까운 시일내에 53선지식 행사에서 같이 만나기를 기대합니다. 합장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