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사 택한 104세 호주 과학자, 베토벤 교향곡 들으며 잠들다
입 력 2018.05.10 12:04
불치병에 걸리지 않았지만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를 원하는 104세 데이비드 구달 박사(왼쪽)가
호주 퍼스 공항에서 스위스로 떠나기 전 손자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다. [EPA=연합뉴스]
“베토벤 교향곡 9번의 마지막 부분이 좋을 것 같다.”
올해 104세인 호주 최고령 과학자 데이비드 구달이 불치병에 걸리지 않았지만 능력이 급격히 쇠퇴하고 있다며 스위스 바젤을 찾아 10일(현지시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9일 기자회견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에 듣고 싶은 음악을 꼽은 뒤 직접 노래를 흥얼거렸다. 구달은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 합창곡인 '환희의 송가'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고 그를 지원해온 단체 관계자가 밝혔다.
영국에서 태어난 구달 박사는 대학에서 강의하는 자리가 나자 호주로 이주해 102세 때까지 연구를 해왔다. 저명한 식물학자인 그는 초고령의 나이에도 컴퓨터를 직접 다루고, 4년 전까지 논문을 발표할 정도로 집념을 보였다. 하지만 그는 최근 수년 동안 건강이 악화해 혼자 힘으로 생활하기가 어렵다고 느껴왔다.
스위스 바젤에서 회견하고 있는 구달 박사 [AP=연합뉴스]
구달 박사는 최근 ABC방송 인터뷰에서 “질병은 없지만 건강이 나빠지면 지금보다 더 불행해질 것 같다"며 “104세라는 나이에 이르게 된 것을 매우 후회하고 있다"고 말했다. 안락사 지지단체에서 활동해온 구달은 넘어져 병원에 입원했던 2개월 전쯤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구달 박사는 호주에서 스스로 삶의 마지막을 결정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호주는 안락사를 금지하고 있다. 빅토리아주만 지난해 안락사를 합법화했는데, 불치병에 걸려 6개월 미만의 시한부 선거가 내려진 이들만 대상이다.
그래서 구달 박사는 스위스 행을 택했다. 스위스에선 불치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상당 기간 조력 자살을 원한다는 의향을 밝히면 안락사를 요구할 수 있다.
104세 구달 박사가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옹호하는 단체 소속 자원봉사 간호사와 함께 앉아 있다.
[AP=연합뉴스]
호주 퍼스에서 출발해 프랑스 보르도 지역을 거쳐 바젤에 도착한 구달 박사는 회견에서 “더는 삶을 지속하고 싶지 않다. 생을 마칠 기회를 얻게 돼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는 “호주에서 삶을 마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질 않았고, 호주가 스위스보다 한참 뒤떨어져 있다는 것이 유감스럽다"고 했다. 이어 “노인이 삶을 지속해야 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도구로 내가 기억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구달 박사는 바젤에 있는 ‘이터널 스피릿'이라는 기관에서 스스로 삶을 마쳤다. 매년 80여 명이 이곳을 찾는데 대부분 아프거나 고령으로 심각한 고통을 겪는 이들이다. 비용이 비싸 구달 박사도 모금을 통해 2만 달러 이상의 비용을 충당할 수 있었다.
구달 박사. [AP=연합뉴스]
스위스의 안락사는 의사가 처방한 치사 약을 환자가 직접 복용하도록 하고 있다. 이터널 스피릿측은 정맥 주사를 썼는데, 구달 박사가 직접 주사기에 연결된 밸브를 열었다고 해당 기관은 밝혔다. 이터널 스피릿의 뤼디 하베거는 AFP통신 인터뷰에서 “불치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노인이 스위스까지 먼 길을 와야 했다"며 “그가 집에서, 자신의 침대에 누워 생을 마칠 수 있도록 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구달의 스위스 행이 알려지면서 초고령화 사회에서 품위 있게 죽을 권리를 부여해야 하느냐가 다시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구달은 “죽는 것보다 죽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게 진짜 슬픈 일"이라며 노인의 조력 자살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호주 의료협회 등은 여전히 조력자살을 비윤리적인 의료행위로 본다. 불치병에 걸리지 않은 이들의 안락사를 법적으로 허용하면 생명 경시 풍조가 확산할 것이란 반론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