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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기독교정신
오 동 춘 전 연세대 사회교육원 교수
1.한국 기독교와 애국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에 감리교 아펜젤러<1858-1902>와 함께 제물로포항에 입항한 언더우드<1859-1916>선교사가 1890년경에 쓴 기도문이 있다
여기에 언더우드 선교사는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우리를
서양귀신 양귀자洋鬼子라고 손가락질 하는 조선 사람 저들도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게 하는 나라 한 백성임을 알고 기뻐할 날이 올 것이라 기도하며 학교 의원도 없고 멸시 천대만 있는 이 조선 땅이 곧 은총의 땅이 되리라
믿습니다“로 밝힌 이 기도문에 유고 봉건적 폐습과 조선사람들의 무지가 안타깝게 드러나 있다 이처럼 어리석은 조선의 무지를 깨우치기 위하여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6년도에 언더우드학당<경신중고교 전신>을 정동에 세웠다 이 교육기관에 평양에서 내려와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기독교교육을 받고 기독교 교인이 된 도산 안창호<1878-1938>는 1910년 경술국치로 일제에 빼앗긴 조선독립을 위해 60한평생 독립운동만 하다가 두 번의 옥고 후유증으로 순국했다
안창호는 20세 청년 때 평양 쾌재정에서 애국연설을 했다 이 연설을 들은 남강 이승훈<1864-1930>은 14세 위의 인생 선배이면서도 인생이 사는 길을 안창호에게 물어 기독교에 귀의하도록 전도를 받고 장로,목사,교육자,언론인,3.1운동의 열렬한 민족대표의 한 사람이 된다 1907년 안창호와 함께 만든 비밀
애국단체 신민회 회원이 되어 1911년 일제에 발각된 105인 사건 주모자로
6년형 일제 감옥살이로 호된 옥고도 치뤘다 언더우드 안창호 이승훈을 통해
초기 기독교의 애국정신을 찾아 볼 수 있다
일제는 한국 침략 전략으로 1895년 을미사변을 일으켜 민황후를 시해하고
일제는 청일전쟁<1894>,러일전쟁<1905>등의 승리로 을사늑약<1905>을 을사오적과 만든 이등박문<1841-1909>은 통감부를 설치하고 초대통감이 되어 이완용과 정미7조약을 맺어 해아밀사사건을 트집 잡아 고종을 퇴위 시키고 군대도 해산했다 1910년으로 가는 경술국치의 터를 닦은 것이다 우리의 경찰권 사법권까지 다 빼앗아 간 일본은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이등박문이 암살되자 친일파 이완용,송병준,이용구 등을 내세워 한일합병을 재촉하여
1910년 8월 22일 매국노 이완용과 일본 3대 통감 데라우찌가 굴욕의 한일병합문서에 조인함으로써 27왕 519년의 대한제국이 망해 버린 것이다 당시 조선의 의병이나 민란을 두려워하던 일제는 허수아비 순종이 매국노 이완용에게
최고훈장인 금척대훈장을 주고 대신 왕족 궁녀에게까지 훈장 잔치 베푸는 순종을 보고 그의 칙유문으로 한국의 통치권을 영구히 일본으로 넘긴다는 한일합방조약을 1910년 8월 29일 공식 발표하게 하여 우리는 분노의 경술국치를
당한 것이다
이렇게 나라가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기를 맞을 때 안창호는 비밀애국단체
신민회를 조직하여 기독교정신으로 평양대성중학을 설립운영하며 산업 경제 활동 등으로 암암리에 독립운동을 했으며 안창호와 신민회 할동에 손잡은 전덕기<1875-1914>목사는 도산 안창호의 영향으로 상동교회 안에 초등과정 공옥학교 중등과정 청년학원을 경영하며 나라의 일꾼을 길렀다 배재학당에서 아핀젤러 교장에게 세례받은 주시경이 청산학원 강사로 최현배<1894-1970> 김윤경<1894-1969> 이병기<1892-1968>등의 우리 말글얼 사랑의 제자를 길러 냈다
이 제자들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일제시대 함흥감옥에서 옥고를 치룬 애국자들이다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의 설교를 듣는 애국자로 안창호 김구 이승만 이승훈 양기탁 안태국 이갑 등이 있다 전덕기 목사 주변에 가까이 지낸 여섯분은이상설<1870-1917>,이동녕<1869-1940>,이회영<1869-1932>,이필주<1869-1932>,이상재<1850-1927>,주시경<1876-1914> 등이다 안창호와는 신민회 일로 가까이 지냈다 민족대표 33인중에 상동교회 목사로 최성모 이필주 오화영 신석구 네분이 있다 이승훈 목사까지 5분의 기독교 교인이 상동교회 출신으로 3.1운동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국민과 기독교 교인들을 지도했다
전덕기 목사는 이준<1859-1907>열사도 기도하여 헤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게 해 주었다 전덕기 목사는 안창호와 함께 독립운동의 전략방향으로 교육입국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신민회 총무로 일했다 신민회는 암암리에 독립운동하는 비밀 애국단체인데 황해도 안악에 사는 안중근 의사의 4촌동생 안명근이가
1910년 10월 27일 압록강 철교 낙성식에서 안명근이 데라우찌를 암살하려 했다는 안악사건을 일으켜 그를 종신징역에 처하고 그 배후가 기독교 교인이 많은 신민회 회원들이라 하여 무려 700여명을 체포했다 기독교계 인물로 이명룡,김동원,윤치호,유동열,양기탁,양전백 등과 목사 6명 장로 50명 집사 80명 포함 700여명을 잡아 간 것이다 취조 고문 후 105인을 기소하여 105인사건이라 한다 1심에서 형량을 합치면 648년이 된다 피검자도 신천,평양,정주,등 서북사람이 많았다 1심에서 주모자로 안태국,윤치호,이승훈,양기탁 등 6명은 10년,그외 18명은 7년,39명에게 6년,나머지 45명에게 5년을 선고 했다 1심에서 신효범 피고가 모진 고문으로 허위자백 때문에 범죄가 날조 되었다고 재판장에게 진술했다 기독교 탄압을 위해 사건을 허위로 조작한 것이 드러나 2심에서 일제 판사는 주모자급 양기탁,윤치호,안태국,이승훈,임치성에게 6년 옥관빈에게 5년을 언도하고 99명은 무죄 석방했다 이 105인 사건으로 항일독립정신이 더 고취되고 신민회는 해체되었으나 항일의식이 더욱 고조 발전되어 1915년 2월 풀려난 이승훈은 더욱 강한 항일의식을 가지고 3.1온동 민족대표로 앞장 서서 활발하게 활동을 했다
4.3.1운동의 원인과 일제에 당한 피해
세계 불멸의 대한민족의 3.1독립운동은 왜 일어 났을까? 국내 요인으로
초대 총독이 된 데라우찌의 경찰 헌병제도를 실시하여 무단정치로 잔인한 식민지 통치를 받은 조선민족의 항일의식이 고조 되어 있었다 초.중.선생 공무원까지 일본칼을 차고 가르치고 공무를 보도록 했다 일제 동양척식 회사의 경제 박탈과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국민의 궁핍생활 때문에 일제에 대한 적개심이 컸다 2대 총독으로 온 하세가와도 데라우찌 총독의 무단정치를 답습했다 경술국치 이후 9년의 무단정치에 조선민족의 생존권의 위협이 컸다 일제 무단정치에 항일의식이 고조 되어 있었다
1919년 1월 21일 승화한 고종의 죽음이 일제의 독살설로 퍼져 임금을 잃는
국민의 감정이 항일의식으로 가득차 있었다 3월 3일 고종의 인산날을 앞두고
경향 각지에서 많은 추모 국민이 상경하여 3.1독립만세 부르기엔 아주
좋은 기회였다
국외 3.1운동이 일어난 원인은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나고 1918년 말에 열린 파리 강화회의에서 윌슨 대통령은 “모든 민족은 스스로 결정한 권리가 있다는 것과 약소민족에게 자유가 주어져야 하고 강대국들이 약소국을 지배하는 일은 종식 되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에 3.1독립만세운동이 한국교회 중심으로 목사 장로의 기독교 지도자들에 의해 조직적인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해외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이 1910년 새문안교회 장로인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보냈다 우리의 독립소원을 호소하기 위해 김규식 장로를 대표로 보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일본의 조선지배 부당성을 지적하며 일본과 혈전도 불사한다는 신한청년당 주요인물은 여운형<33> 김규식<38> 여운홍 이광수<27> 조동호<27> 장덕수,24> 김철<32> 조용은<조소앙> 김순애<30 김규식 부인> 등이다
상해 임시정부요인 조소앙,<1887-1958> 독립운동가가 기초해
쓴 육필 대한독립선언서가 그의 유족에 의해 지난 2019년 1월 31일 언론에
공개 되었다 이 대한독립선언서는 미국,만주,러시아 연해주 등지에서 독립운동하는 39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서명한 것이다 미국에서는 안창호,이승만,박용만 등이 서명한 독립운동 투사들이다 이 대한독립선언서는 중국 길림성에서 발표했다 적의 수도 일본 도쿄에서 백관수 송계백 이광수 김도연 등이 도쿄기독청년회관에서 바른 조선독립을 위해서는 혈전도 불사하겠다는 2.8독립선언서는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이 사실이다 1919년 1월 신한청년당의 결연한 기백의 독립선언문,2.1 조소앙의 대한독립선언서.도쿄의 2.8독립선언서 등이 3.1운동의 주된 원인이 되고 대외적으로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세계
평화와 인류평화를 부르짖은 우리 민족의 고귀한 문화적 가치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가 살아 있음을 잘 보여준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은 우리 민족의 단결된 모습을 세계에 보여 주며 우리 민족혼과 민족정기가
새파랗게 살아 있음을 온 세계에 높이 보여준 횃불이 아닐 수 없다
400여명의 청중 앞에서 2.8독립선언의 나라사랑 횃불을 국내 불멸의 애국함성 3.1운동에 점화시킨 대표적인 동경 유학생 이름을 살펴 보기로 한다
게이오대김도연<출생지경기 양천 1894-1967>,메이지대 백관수<전북 고창 1889-1961>,와세다대 이광수<평북 정주 1892-1950>, 도쿄영어학교 최승만<경기 안산 1897-1984>,와세다대 최팔용<함남 용원 1891-1922>,현상윤<평북 정주 1893-?> 도쿄고등사범학교서춘<평북 정주 1894-1944>,천도교 지도자 손병희<충북 청원 1861-1922>,와세다대 송계백<평남 평원1896-1920>,중앙학교 교장 송진우<전남 담양 1887-1945> 등이 자랑스런 애국학도였다
67세로 승하한 고종의 인산날을 앞두고 기독교계 이승훈 이필주 최성모 박희도 등과 천도교계 손병희 최린 등과 협의하여 3.1일 오후 2시 독립만세 부를
날로 정해 놓고 민족대표가 될 만한 인사를 찾아 보자 했다 손병희 보성학교
최린교장,이승훈 등이 친일파 이완용 윤치호 박영호 등에게도 민족대표가 되는
길을 열어 주었으나 이들은 다 권면에 거절을 보였다 최종 본인의 승낙 받은
민족대표 33인은 다음과 같다
손병희 길선주 이필주 백용성 김완규 김병조 김창준 권동진,권병덕,나용환,
나인협,양전백,양한묵,유여대,이갑성,이명룡,이승훈,이종훈,이종일,임예환
박준승 박희도,박동완,신흥식,신석구,오세창,오화영,정춘수,최성모, 최린,한용운
홍병기,홍기조<33명>
위 33명 가운데 기독교 대표 16명 천도교 대표 15명 불교 대표 2명으로
기독교계가 많다 23명의 3.1운동 지도자 가운데 목사가 9명 장로가 3명
전도사가 4명이다 기독교 출신이 압도적이다 민족대표 이름 순서는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를 맨 앞에 두고 그 다음에 장로교 대표 길선주
감리교 대표 이필주 불교대표 백용성을 차례로 세웠다 나머지는 가나다순으로
나열했다
보성사 사장 이종일은 최남선이 쓴 기미독립선언서를 3만 5천장을 찍었다
민족대표들은 명월관지점인 태화관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했다
학생들은 탑골공원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 하기로 했다 학생대표는
연희전문학교 김원벽<1894-1928>으로 황해도 은율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3.1운동 학생대표로 활동하다가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뤘다
보성전문학교 대표 강기덕<1886-1950납북됨>은 함남 원산 출신으로
3.1운동을 학생대표로 이끌다가 옥고를 치루고 1927년 함남 기자대회를
이끌다가 금고형 처벌을 받았다 신간회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여
건국대 전신 조선정치학관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1950년 6.25때 납북됐다
김마리아<1882-1944>는 황해도 장연 출생으로 광주 수피아여고,서울정신여고
교편을 잡다가 일본에 유학하고 돌아와 3.1운동에 참여 시위여학생 배후인물로 지목 받아 5개월 옥고를 치루고 1919년 9월 애국분인회를 조직 독립운동 하다가 다시 옦도를 치뤘다 미국 다녀와 근화회를 만들어 활동하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광복 1년 앞두고 사망했다
1919년 기미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 29명이 약속대로 태화관에 모였다
길선주 유여대 정춘수 세 사람은 지방행사로 참석못했다 상해로 간 김병조 대신 2선에서 독립운동 하기로 한 함태영<전 부통령>이 참석했다 한용운은 자신이 쓴 공약 3장이 들어 있는 최남선이 쓴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에 기미년 3월 1일 조선독립행사를 주도한 민족대표를 알리고 자진해 경찰에 연행되어 간 것이다 비폭력 무저항 행동이었다 합동으로 독립만세
행사를 하기로 약속한 민족대표들이 탑골공원에 오지 않게 되자 김원벽 강기덕 두 연전 보전 학생대표가 태화관에 찾아가 항의하고 돌아 와 경신학교 졸업생 정재용이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게 하고 곧 경성<서울>거리로 나와
대한독립만세,조선독립만세,한국독립만세 등의 구호를 외치며 대한의 자랑스런 학도들답게 3월 1일 3.1운동 시위를 힘차게 벌였다 투철한 민족주의자요 독립운동가로 순국한 전덕기 목사가 시무한 남대문 상동교회에는 상동파 애국지사들이 많다 상해 임시정부의 산파역 도산 안창호를 비롯하여 백범 김구,우남 이승만 단재 신채호 우당 이회영 남강 이승훈 월남 이상재,최남선 양기탁 주시경
이동녕 등이 있다 상동교회 목사를 지낸 이필주 최성모는 일제 재판장 앞에서
일제의 무단정치가 조선민족의 인권을 짓밟고 식민지 국민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을 안겨 주기에 민족대표 33인의 하나로 참여했다고 당당히 진술했다
청년 안창호의 쾌재정 애국연설로 후배 도산을 인생 스승삼고 함께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남강 이승훈 목사를 한국신학대학 출신 김경 목사는 그의 제10시집에서 한굴명사 50인 시선에서 첫째로 남강 이승훈을 <3.1운동 선봉장 이승훈>으로 읊어 그의 높은 기독교정신과 애국정신을 찬양했다 단재 신채호<1880-1936>는 독립운동가 언론인으로서 1919년 김원봉 등이 조직한 의열단의 요청으로 1923년 의열단 이름으로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에서 그 첫머리에
“강도 일본이 우리의 국호를 없이 하며 우리의 정권을 빼앗으며 우리의 생존의 필요조건을 다 박탈하였다”로 결단 있는 말로 일본을 우리 한국을 강탈한 강도로 규정했다 강도 일본의 무단정치에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3.1운동 시위에 나선 3.1독립만세 시위군중에게 처음부터 일제 헌병 경찰은 총을 쏜 것이다 3월 1일 만세운동은 서울 중심으로 의주 선천 평양 진남포 안주 원산 함흥 등지에서도 한꺼번에 대한독립만세소리가 우레같이 크게 외쳐진 것이다 서울에서만 50만 군중이 참여한 3.1운동은 전국적으로 1년간 시위 군중은 천만이 넘는다는 증언도 있다 3.1운동으로 우리 피해 사항은 일제측 통계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3.1운동 총 참가자:2.023.098명 218개군 가운데 211개군에서 3.1운동 시위에참여함 집회수:1.542회,사망자:7.509명,부상자:1.5931명,<이만열교수 4.5562명 주장함>감옥수감자:4.6848명 예배당 47개소,<이만열 교수 59개>학교 2개소,민가 715채<이만열교수 724채>소실 등으로 피해사항이 드러나 있다 일본측 기록만 보아도 3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8개월 동안에 재판 받은 피고가 17.990명에 이르고 그중에 징역형 유죄언도가 5.156먕이었다 잔악한 일제 고문은 치를 떨만큼 잔인하기 그지 없었다 서대문형무소나 천안독립기념관에 가면 악마같은 일제 고등계 형사들의 고문 장면이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다
기미독립선언서에 공약3장을 쓴 불교대표 한용운은 검사의 참회서 또는 굴복서 요구에 <조선 독립의 서>를 써서 조선독립의 정당성을 밝게 주장하였다
3.1운동 피검자 중에 3065명이 피검된 기독교 교인으로 51%가 되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16명이 기독교 교인이요 길선주 이필주 이승훈 목사 등이 전국의 2897개의 교회 조직망을 통하여 조선독립만세운동을 선두에서 하나님뜻에 따라 지도 하였으므로 3.1운동의 중추적 역할은 기독교에서 횃불이 된 것이다
2.8독립선언도 일본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선포된 것이 아닌가
오늘날 3.1운동하면 국민의 82%가 유관순을 떠 올릴만큼 믿음 독실했던 유관순의 순교 순국정신이나 화성 제암리교회에서 불에 탄 순교자들의 넋이 모두
애국애족의 3.1독립정신을 낳은 것이다 교회도 59개나 불타지 않았는가
1919년 3월 12일 서울 안동교회 김백원 목사와 그 교회와 이웃해 있는 승동교회 차상진 목사 등 12명의 기독교인들은 하세가와 요시미치 2대 조선 총독에게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보낸 주동자 김백원 차상진 두 목사는 즉시 구속 되었다가 풀려 났다 신사참배 일본 천황 숭배는
지극히 미신임을 우리 한국 기독교 교인들은 선교사들로부터 철저히 우상배격의 신앙교육을 잘 배웠다 십계명 제1계명에 철저히 배치되는 일본의 우상에
어찌 우리 한국 기독교 신자들이 동조 할 수 있겠는가 사탄 마귀국가 일본에
대한 우리 한국기독교 신자들은 철저히 일제에 대한 적개심과 회개없는
일제 만행에 당연히 항일의식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서
전 세계적인 대한독립만세를 불러 대한의 민족혼과 민족정기를 살렸는데도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조선장로교총회에서 총대 193명
고등계 일제 형사 100명이 참가한 가운데 꾸준히 일제의 신사참배 우상 사탄을 거부해 오던 장로교 총회도 더 버티지 못하고 신사참배가 국민의레의 하나라는 일제의 속임수에 넘어가 신사참배하기로 홍택기<1893-?> 총회장이 일방적으로 통과시킨 것은 두고두고 회개해야 할 한국교회의 비극이다 3.1운동 100년 한국교회 기념대회 준비위원장 윤보환 목사 말씀같이 1938년 교회의 신사참배는 영적 국치일로 반드시 한국교회가 깊이 회개해야 할 일이다
신사참배 가결 아닌 가결이 되던 날 김길창 부총회장을 비롯해 23명 총대가 평양신사에 참배한 비신앙적 행위는 기독신앙인의 큰 회개 제목이다 1938년 12월 감리교 양주삼 목사 성결교 이명직 목사가 일본까지 건너가 야수쿠니 신사에 참배하고 귀국한 죄과도 우리 기독교의 영적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어떤 변명도 필요 없다 오직 참으로 회개하고 십계명 1.2 계명을 끝까지 잘 지키는 한국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5.천안 아우내 장터 유관순의 독립투쟁
박두진<1916-1998>시인은 순국소녀 유관순<1902-1920>을 그의 시 <3월 1일의 하늘>에서 프랑스의 순국소녀 쟌다크에 비유했다 이화고녀 1학년에
재학 중이던 유관순은 1919년 3월 1일 김복순,국현숙,서명학,김희자,등과 결사대를 조직하고 탑골공원에 가서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3월 5일에도 유관순이
이끄는 결사대는 남대문역 앞의 수 많은 학생 시위에 참여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경무총감부로 잡혀 갔으나 외국인 선교사의 노력으로 곧 풀려나 집에 왔다 이화학교는 임시 휴교령이 내려 3월 13일 고향 천안 병천으로 내려 왔다 3월 16일 주일예배를 마치고 아버지 유중권<1863-1919> 어머니 이소제<1863-1919>,숙부 유중무,동네 어른 조인원<조병옥 부친> 등과 협의하고 아우내 장날에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기로 했다 유관순은 각 부락을 다니며 아우내 장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도록 권면했다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침 9시경 3천명 정도 장꾼이 모여들었다 1950년대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 박사 아버지 조인원 어른이 대나무 막대기 끝에 태극기를 매달고 장터
중앙에 세웠다 그리고 유관순이 서울에서 가져온 대한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많은 군중들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병천 군중들도 천지가 떠나 갈 듯
우렁차게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조중권,김근헌,김교선,조동호 뒤를 따라
시위행진을 했다 유관순도 태극기를 장대에 매달고 앞장서서 각 부락에서 모여온 군중들에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했다
이 대한독립만세 소리에 놀란 천안헌병대병천파견소장 고야마<小山正平>가 헌병 하나오까를 데리고 시위현장에 나타났다 뒤이어 일본 경찰들이 몰려 왔다
일본 헌병이 유관순 깃대를 분질러 버리고 유관순 옆구리를 칼로 찔렀다 항의하는 유중권,이소제 유관순 부모는 일본 헌병 칼에 찔려 유관순 딸이 보는 앞에서 순국했다 앞장 서서 대들던 김상헌 김구응도 칼에 찔려 순국했다 시위 현장에서 19명이 죽고 30여명이 부상당했다 유관순 오빠 유우석도 공주 영명학교 교사와 감리교 목사와 함께 대한독립만세운동을 학생들에게 지도하다가
일본 경찰의 칼에 부상을 입었다 재판에서 유우석도 6개월 형을 받고 집행유예로 풀려 났다 유관순은 공주법원에서 병천 3.1운동 주모자로 7년형을 받고 그해 6월 2심 재판에서 3년으로 형이 확정되어 상고 포기하고 1919년 7월 4일부터 서대문형무소 죄수로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다 감옥 안에서도 힘찬 독립투쟁을 했다 심한 일제의 고문 후유증으로 1920년 10월 1일 오후 2시에 순국했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어 연고자가 없는 관계로 시체가 여러날 방치 될 때
이화학당 월터 학당장 서리가 제자의 시체를 찾아와 학생 대표들과 함께
유관순이 출석하던 정동교회 김정우 목사 집례로 장례식을 마쳤다 유관순 유해를 월터 이화학당장과 학생대표 김활란<전 이대총장>이 이태원공동묘지에 묻었다 그 후 이곳이 군사기지가 되어 파헤쳐져 유관순의 시신은 사라지고 없다 유관순은 아버지 유중권이 홍호학교도 세운 교육자로 일찍 기독교에 귀의안 애국자였기에 어려서부터 애국사상과 기독교 사상을 잘 배우고 익혔다 욥이 어떤 시련도 이겼듯이 유관순도 악질적인 일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성도의 신앙을 지키고 순국한 유관순의 거룩한 삶을 우리는 본받아야 할 것이다 천안 병천에는 지금 유관순기념관,유관순 사당,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유관순 공원도 있다 유관이 어려서 다니던 매봉교회와 생가도 기념관 근처에 보존되어 있다
충남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아우내 장터가 내려다 보이는 구미산 기슭에 세워진 기미독립만세기념비에 이렇게 시작된 글이 있다
“ 이 비문은 국학자 정인보 선생이 짓고 서예가 김충현 선생이 썼다 ”아내“는
아우내의 옛말이다 두 개의 내<개천>를 아우른다는 뜻이고 이곳의 지명인
병천並川을 우리말로 풀어 쓴 것이기도 하다 경상도와 한양 땅을 이어 주는
길목이어서 조선시대 전국 곳곳의 상인들이 모여 들어 큰 장이 서기도 했던 곳이다
유관순의 모교 이화여고에 유관순 기념관이 서 있다 각종 행사가 열린다
장충단 공원 위 타우워호텔 앞 큰길 가운데 유관순 동상이 서 있다 천안 유관순 기념관에 위당 정인보 선생이 쓴 유관순기념비가 서 있다 담원 정인보전집 2에 병천기의비문並川紀義碑文에 유관순 중심의 병천 3.1운동 활동과 희생기록이 담겨 있다 정인보는 3.1절 노래도 지은 독립운동가요 애국지사이다
박두진 시인이 쓴<3월 1일의 하늘>은 7.80년대 고1국어 실린 작품으로
첫연이 /유관순 누나라로 하여/처음 나는 3월 하늘에 뜨거운/피무늬가 어려 있음을 알았다/로 읊어 유관순 순국소녀를 프랑스 쟌크로 비유해 읊었다
김경 목사 시인은 그의 제10시집에서 쓴 <순국처녀 유관순>시에서 /쟌다크 유관순/그대는 알리라/로 읊어 유관순을 쟌다크로 노래했다 3.1운동의 대표적 나라사랑 인물로 부각 되는 유관순의 여론조사에서 3.1절하면 제일 먼저 떠 오르는 인물이 유관순으로 82.2%로 가장 높게 나왔다 김구가 5.4% 안중근 4.9% 손병희 2.8% 한용운 2.5% 윤봉길 2.2%로 나와 있다 대표적 3.1운동 민족 대표인 손병희나 한용운보다 3.1절 중심인물로 국민생각에 뜨는 인물은 유관순이 82.2%로 단연 압도적인 관심도를 보여 준다 3.1운동 만세 시위로 집안이 다 피해를 입는 그런 예는 유관순이 으뜸이 되리라 믿는다 유관순은 대한민국 조국에서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을 받았다 올해부터 미국 뉴욕주에서는 3월 1일을 유관순 기념일로 유관순을 추모하기로 했다
6.화성 제암리교회에 저지른 일제 만행
1919년 4월 5일 옆 마을인 발안 장날에 제암리교회 청년들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경찰과 헌병들이 무력 진압했으나 제암리교회 청년들은 총칼에 굽힘없이 뒷산에 올라 봉화불을 보고 온 군중들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제암리 청년들의 만세 시위가 계속되자 일본 경찰과 헌병들은
제암리교회 청년들을 학살할 계획을 세웠다 1919년 4월 15일 일본헌병 78연대 소속 아리타 도시오 중위가 1개 소대 병력 30명을 인솔하고 지난 4월 5일 발안 장터에서 심하게 시위 청년들을 진압했던 그일을 사과하고자 하니 15세
이상 남자 신자들은 제암리교회로 다 모여 주길 바란다고 전해 왔다 대수롭지 않게 제암리교회 교인들이 예배당에 모이자 일제 경찰 헌병 병력 30명이 교회를 포위하고 교회 문을 걸어 잠그고 총을 난사했다 창밖으로 나오려는 어린아이까지 총을 쏴 죽였다 잔악한 일제 경찰 헌병 병력은 교회를 불질러 모두 불타 죽었다 남자 21명 여자 2명이 죽었다 에배당과 33호 가옥이 불탔다 일제의
제암리 기독교 교인 학살의 만행으로 갑자기 부모 잃은 자식들,남편 잃은 부인들이 큰 비극을 당했던 것이다 이런 일제 만행은 정주,맹산,강서,천안,의주,강계,곽산,유원,창성 등지에서 자행 되었다
7.3.1운동의 영향과 그 의의
한국인의 단결된 힘과 독립정신을 온 세게에 보여 주고 일제에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3.1운동의 영향은 국내외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3.1운동이 기독교적으로 남긴 역사적 의의는 크다
먼저 3.1운동의 영향을 보자
첫째 일제는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정치 변화를 보여 주었다
둘째 1919년 4월 11일 상해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셋째 1920년 6월 7일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본오동 전투에서
일본군 소좌가 지휘하는 19사단을 대파했다
넷째 1920년 10월 21일부터 6일간 김좌진 장군이 지휘한 대한독립군이 일본 군 1.200명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다섯째 중국의 5.4운동,인도의 독립운동,필립핀 독립운동,이집트의 독립운동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3.1운동의 의의와 기독교정신을 살펴보자
첫째 3.1운동은 민족운동의 분수령으로 민족사의 주체성 확립에 큰 공헌이 되 었다
둘째 기독교 천도교 불교가 힘을 합쳐 3.1운동을 혁명운동으로 2백 2만명이
독립만세를 외친 불멸의 민족역사의 가치가 크게 확립되었다
셋째 3.1독립운동이 기독교 천도교 불교 세 종교가 합류하여 3.1운동을
전개했으나 그 선봉에는 민족 대표 16인의 기도와 믿음이 컸다
넷째 신앙과 불굴의 의지로 한국의 쟌다크가 되어 주님의 희생정신
나라사랑의 순국정신을 보여준 유관순 열사의 기독정신을 잘 본받아야 하 겠다
다섯째 도산 안창호와 신민회 활동했던 신민회 사건과 3.1운동 민족대표로 옥 고를 치룬 이승훈 목사의 하나님 사랑 나라사랑도 잘 본받자
여섯째 자주 민주 정의 진리 평화 자유의 3.1정신으로 우리는 기도와 믿음의
교회 일치를 보이며 분단 조국의 복음통일에 힘을 쏟으며 기도해야 하겠다
일곱째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우리 한국교회는 주기철목사 유관순열사의
순교정신을 본받으며 신사참배 했던 잘못을 깊이 회개하자
여덢째 날뛰는 이단 마귀를 다 물리치고 교단 분열을 막으며 3.1운동 100주 년을 맞으며 목사 장로 권사 집사 직분자들이 3.1정신의 기독교 정신을 깨 닫고 오직 믿음 오직 은헤 오직 성경으로 한국교회 하나되는 새 역사를 이 룩하자
아홉째 우리 나라가 자주독립국가요 민주 자주민임을 선언한 3.1운동의 3.1정 신은 상해 임시정부 수립의 기초정신이요 대한민국 임시헌장 1조에 대한미국은 민주공화제로함을 내세운 국가정체가 되었다 3.1정신이 우리 헌법 전문의 등불이 되게 우리는 꾸준히 기도하자
열 번째 일본은 독도 여유권을 주장하며 역사교과서를 왜곡하며 이미 한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있다 3.1정신으로 일본을 철저히 경계하며 1월 28일 93세로
별세한 종군 위안부 김복동 할머니 한도 기도하며 풀어 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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