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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가 말한 그 일은 680년 봄에 있었던 일이다. 그 때 여주汝州(하남성 여주시)의 온천에 갔던 고종 황제 일행은 북동 쪽 숭산 소요곡逍遙谷을 찾아 도교 일문一門의 종사宗師인 반사정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런 분의 말이라면, 태후 마마께서 받아들일 것 같군요. 그런데 그 분은 돌아가신 지가 벌써 몇 년 지나지 않았습니까?”
“산 사람의 말보다 죽은 사람의 말이 더 위력이 있다네.”
“도통하신 대사님이야 죽은 사람의 혼백과 대화를 하실 수 있을지 모르나, 저에게는 그런 재주가 없습니다.”
“허허허, 무슨 말씀을 그리하시나? 숭산 소요곡을 찾아가면, 반사정의 제자들이 있을 거네. 그 제자들에게 물어보시게. 반사정이 생전에 무슨 말씀을 남기셨는지.”
“그 분이 목하의 대당 형편에 대해 무슨 예언이라도 남기셨다는 말씀입니까?”
“그거야 찾아가서 물어보면 알 게 아닌가?”
설소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거기서 대충 듣고 말을 꾸며 태후마마께 허언을 진주하면, 나중 태후마마께서 사람을 보내 소요곡의 도사들을 국문하실 경우, 우리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허허허, 허언이라니 부마도위께서 무슨 말씀을 그리하시나? 우리가 지금 망령된 허언을 진주하자는 건가, 아니면 태후마마의 안위와 대당의 태평성세를 기대하자는 건가?”
“사실이야 그렇지만, 선황폐하께서 공직에 부르셔도 사양하고 원하는 게 뭐냐 물을 때도 ‘울창한 송림과 청천淸泉으로 족하다’고 하신, 반사정 어른이 도대체 지금의 현황에 대해 무슨 예언을 남기셨겠습니까?”
“그건 설공의 재조에 달렸네. 이만 가보시게.”
회의는 자신과 별무상관이라는 듯 그를 내보내려 했다.
“이 일은 대사님의 안위와도 관계가 깊은 데 어찌 남의 집 개보듯 하십니까?”
“난 설공의 지혜와 세치 혀를 믿어서 하는 말이오.”
이렇게 말하며 회의가 돌아앉았다.
산문을 나온 설소는 곤혹스런 마음으로 숭산의 소요곡을 향해 말을 몰았다. 부지런히 말을 몰아 이튿날 밤늦게 숭산 인근에 도착한 설소는 근처의 객점에서 일박하고 아침 일찍 소요곡에 오른다.
당 황실의 부마도위가 찾아왔다고 하자 소요곡의 도사들은 설소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설소가 정중하게 인사하자 환갑이 다 돼 보이는 반사정의 수제자가 함께 절했다. 그에게는 도도한 기품이 전혀 없었으며 매우 소탈하고 소박해보였다.
“그래 무슨 일로 부마도위께서 이 누추한 산골짜기를 찾아주셨습니까?”
“청량한 소나무 골짜기에서 바람과 산새와 자연과 더불어 노니시는 진인을 번거롭게 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하오나 시국이 급박한지라, 소인이 불가불 진인을 찾아뵙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빈도는 속세를 떠나 이곳에 은거하고 있는 몸이라 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전혀 모릅니다. 그리고 그리 관심도 없습니다. 하지만 시국이 급박하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선황폐하께서 붕어하시고 황태후 마마께서 보위를 찬탈하신지 어언 네 해 째입니다.”
그는 찬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었다.
“안으로는 괴이한 일들이 빈발하고 밖으로는 천재지변으로 백성의 삶이 피폐하며 천하에 원성이 물 끓듯 하고 있습니다. 진인께서도 보시다시피 금년에는 관중(장안성 일대)과 산동(낙양성 일대와 그 동쪽)에 큰 기근이 들 조짐도 보이고 있습니다.”
반사정의 제자는 아무런 말도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도 태후마마께선 요승 회의 같은 작자를 곁에 두고, 허언이나 일삼는 거짓 중들에게 미혹되어, 석교를 깊이 신봉하고 있어서 불사에 많은 돈을 탕진하고 있습니다.”
반사정의 수제자가 먼 하늘을 바라보고 가볍게 탄식했다.
“태후마마는 저의 장모이시지만, 소인은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고 진실로 만백성을 염려해, 이렇게 진인을 찾아뵌 것입니다. 소인에게 한 말씀 귀한 가르침을 내려주소서.”
도사가 여전이 묵묵한 태도를 일관하다가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빈도는 세상 물정에 어둡고 정사에 문외한이라, 무슨 말씀을 드리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다만 나를 비우고 남을 살리려는 귀공의 뜻을 가상히 여기는 바입니다.”
“차마 입에 올리기 어렵습니다만, 태후마마께선 곁에 젊은 남자들을 두고 그들을 총애하고 있는데, 그들이 대개가 동이북적들입니다.”
설소가 도사를 쳐다보며 간곡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대해 중신들도 불만이 많으나, 감히 아무도 용기있게 간언을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입을 잘못 열면 황천객이 되기 십상입니다.”
“설공께서 그 일을 감당하실 수 있겠군요.”
도인이 웃는 낯으로 온화하게 말했다.
“소인이 수차 간언을 올렸으나, 태후마마께선 누구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주변에 혹리들을 두고 입막음에 급급하며 역모를 적발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아직 정권의 기초가 단단하지 못하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오.”
“소인이 진인을 찾아뵌 것이, 바로 그 때문이옵니다. 진인께선 천리혜안을 지니고 계실 터이온데, 혹시 태무마마 곁에 있는 그 동이북적의 젊은 놈들이 황실에서 한바탕 난리라도 일으킨다면, 그들 중 다수가 병권을 잡고 있으므로 천하는 큰 소용돌이에 빠질 것입니다.”
설소의 말에는 과장이 있었다. 연헌성이나 이다조, 흑치상지 등에게는 병권이 주어진 적이 많았다 하더라도 고조영, 이해고 등에게는 아직 그런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가장 위험한 젊은 인물들이 후고구려의 태자인 볼모 고조영, 송막도독 이진충(이진영)의 수하에 있던 이해고, 그리고 말갈족의 추장 아들인 사비우 등입니다.”
그러자 도인이 빙그레 웃으며 뜻밖의 말을 했다.
“그들을 궁 밖으로 내 보내는 것이 좋겠소.”
“혹시 그들이 역모라도 꾸미고 있지 않습니까?”
“낸들 어찌 그걸 알겠소? 하지만 외국의 젊은 장수들이 세력을 잡으면 조정에서는 당연히 그들을 질시하는 자들이 많을 터이고, 또 그들은 중외인인지라 중화의 조정이 그들을 끝내 믿고 신뢰하기가 어려울 것이오. 그러니, 차라리 일찍 내보내는 게 낫지 않겠소?”
“소인의 뜻이 바로 그것이옵니다. 하지만 태후마마께선 저의 간청을 늘 외면하셨습니다.”
“빈도는 한낱 졸부이지만, 내 이름을 팔아도 괜찮소. 그것이 그 젊은이들도 살고 당 황실도 사는 길이 될 것이오.”
설소는 감격해 다시 한 번 엎드려 절하며 물었다.
“혹시 스승이진 송청진인께서 살아계셔도 진인과 같은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건 어느 누가 생각하더라도 명약관화한 게 아니오?”
“그렇군요. 별세하신 송천진인께서도 그리 말씀하셨으리라 여겨집니다.”
설소가 사의를 표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반사정의 수제자가 말했다.
“잠깐 기다리시오. 태후마마께서 오래전 이 누추한 골짜기를 찾아오신 적이 있는데, 그에 대해 저희들이 찾아뵙고 사례도 올리지 못했으니 대신 안부서신이나 하나 올려야겠소.”
이렇게 말하며 그는 즉석에서 문방사보를 꺼내 간단한 서찰 한통을 써서 설소의 손에 들려주었다.
설소는 기쁜 마음에 거듭 사의를 표하며 홀가분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낙양성을 향해 달렸다. 황궁에 들어선 설소가 무 태후를 곧바로 찾아간 것은, 당연지사다.
이튿날 무태후가 번番을 보러 들어간 조영에게 말했다.
“지금 북방이 좀 시끄럽고 좋지 않네.”
운을 뗀 무 태후가 약간의 정황을 설명했다.
“돌궐이 북방 변경을 노략질한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야. 요즘은 특별히 더 심하다는 보고일세.”
무태후가 조영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곧 흑치상지와 이다조 등 명장들을 파견할 작정이네. 고 장군도 그들을 따라 출정하는 게 어떤가?”
조영이 두말 않고 머리를 조아렸다.
“소신이 삼가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조영의 흔쾌한 답변에 만족한 미소를 머금던 무 태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닐세. 아니야. 그들 두 사람의 명장만 있으면 돌궐의 무리는 충분히 격퇴할 수 있을 걸세. 고 장군은 좀 다른 임무를 맡아주는 게 좋을 것 같아.”
“무엇이든 하명하시면 소임을 충실히 감당하겠사옵니다.”
“고 장군을 내 곁에서 한 시라도 떠나보내기 싫지만, 북방이 어지러운지라 나도 안타까운 마음으로 보내네. 그럼 이렇게 하게.”
조영이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자 그녀가 차근차근 말했다.
“내가 고 장군을 하북도순무대사河北道巡撫大使로 파견하고자 하네. 하북과 유주 영주의 고려인, 말갈인, 거란인 등이 동요하지 않도록 잘 다독여주고 안무해 주게나.”
“폐하, 소신이 삼가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무 태후가 그윽한 눈길로 고조영을 내려다보다가 환관을 불러 명했다.
“지금 즉시 동관시랑冬官侍郎 적인걸狄仁傑과, 짐의 시위장수 이해고, 우림군의 사비우를 불러오게.”
잠시 후 나이 예순이 거의 다 되어 보이는, 인물이 중후하게 생긴 한 관리와 더불어 이해고, 사비우등이 속속 도착했다.
적인걸이 무 태후 앞에 엎드려 절하자 무 태후가 말했다.
“어서 일어나시오.”
무 태후는 적인걸을 바라보며 부탁했다.
“경 밖에 믿을 만한 사람이 별로 없어 내 경을 불렀소. 시국이 어수선하니 경이 일 년 기한으로 하남河南(황하이남)과 장강 이남을 두루 돌아다니며 혹시 역모의 기운이 없는지, 탐관오리가 없는지, 민심이 어떤지 살펴보고 보고해 주시오.”
“삼가, 폐하의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이어서 무 태후는 고조영과 이해고, 사비우에게 향해 말했다.
“고 장군은 하북도순무대사를 맡고, 이해고, 사비우 장군은 순무부사副使의 직위를 감당해 줄 수 있겠소?”
“폐하,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그들이 공손히 말했다.
무 태후가 얼굴이 미소를 머금고 적인걸과 고조영을 향해 말했다.
“그밖에 필요한 인원은 직접 선발해 데리고 가시오. 기한은 일 년이고 특이한 정황 등을 기록에 남기시오. 준비를 잘 갖춰 며칠 후에는 출발하도록 하되, 일 년 후에 복명하고, 그 동안에는 역참을 통해 보름마다 한 번씩 보고하며, 중대한 일이 발견될 경우에는 즉각 상주하시오.”
무 태후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명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임무는 이것이오.”
무 태후는 잠깐 뜸을 들이며 고조영의 얼굴을 응시했다. 이윽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북 각지에 흩어져 있는 고려인들의 현황을 조사하되, 유사시 모병募兵에 응할 수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시오.”
고조영 일행은, 하남도순무대사의 직책을 부여받은 적인걸과 함께 즉시 자신전을 물러났다.
그 날 밤 조영은 무태후의 갑작스런 지시를 곰곰이 헤아려보았으나, 그녀의 의도를 알기 어려웠다. 적인걸은 그렇다 치더라도 연치어린 자신들을 보내는 것이 못내 이상했다.
퇴근 후 이루하의 집을 곧장 찾아갔다. 상의할 사람은 여미아 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조영이 소임 받은 사실을 설명하며 덧붙였다.
“태후마마께서 연소한 우리에게 그런 중임을 맡기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여미아가 골똘히 숙고하다가 대답했다.
“이 일엔 필시 다른 이들의 입김이 작용했을 겁니다. 하지만 태후마마로서도 대신들의 불만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중화인이 아닌 젊은 남자들을 가까이 두고 있는 것은, 누구의 시각에도 아름답고 안전해 보이지 않을 겁니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일 년 동안 나가 있을 때 목숨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것도 우려이지만, 태후마마께서도 그 점을 능히 예견하실 터인데, 어찌해서 그냥 내보내려 하실까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다른 어떤 뜻이 있겠지요.”
조영은 마치 잊고 있었다는 듯, 집에서 나올 때 챙겨온 비녀를 품에서 내놓았다.
“진즉 전해 드렸어야 하는데, 이제야 가져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이건 제가 받을 수 없는 물건입니다.”
이루하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우선 제가 간직해 두겠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되돌려 드릴 겁니다.”
조영이 미안한 마음에 불쑥 말했다.
“이번 저의 순무 여정에 동행하시지 않으렵니까?”
“우리는 여기에 남아있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공자님을 따라가고 싶지만, 보는 눈길들이 많아서요.”
그녀는 속으로 특히 무 태후와 미시아를 의식하고 있었다. 여인들의 질투심은 낮과 밤, 나이의 많고 적음, 물과 불, 생과 사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이루하의 상념이었다.
“하지만 아가씨를 홀로 두고 가는 것이 불안합니다.”
“진심이에요? 여미아의 말로는, 오히려 공자님의 목숨이 위태롭다고 하는데, 저희가 동행하는 것은 여기 있는 것만 못할 거예요.”
조영이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난 죽어도 아가씨는 살고 싶으신가 보군요.”
이루하가 얼굴에 붉은 빛을 띠며 입을 다물었다.
동관시랑 적인걸과 무 태후의 시위장수 고조영이 하남과 하북 순무대사로 나가기로 결정된 후 설소는 다시 회의대사의 사문을 두드린다.
“기한이 일 년이니 이번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을 겁니다.”
회의는 말이 없었다.
설소는 별다른 얘기 없이 물러나왔으나 그 나름대로는 다른 복안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날로 그가 찾아간 것이 바로 박주자사 낭야왕 이충이었다. 낭야왕 이충은, 고종의 이복형인 월왕越王 이정李貞(627 - 688)의 아들이다.
“태후 마마께서 감싸고돌던 그 세 젊은이 고조영과 이해고, 사비우가 외유길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설소가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이번 기회에 그들을 제거할 수 있다면, 태후에 대한 후고구려와 거란, 말갈인들의 원망이 걷잡을 수 없도록 깊어질 것입니다.”
“그들을 제거한 후 그게 태후의 짓이라고 소문을 낸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고중상의 후고구려와 거란, 말갈인들이 무 태후에게 이를 갈 것입니다. 게다가 고조영을 남몰래 사모하고 있는 임장청의 외손녀 미시아, 이진충의 딸 이루하와 귀성주자사 손만영 등에게 역모죄를 씌운다면, 무 태후에 대한 동이북적들의 증오심은 불길 같이 타오를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네만, 아무런 증거도 없이 그녀들을 어떻게 모반죄로 잡는단 말인가?”
“미시아는 후고구려의 개국공신이라는 임장청의 외손녀인데, 그녀는 고조영의 심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조영이나 미시아 등이 속으로 바라고 있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고려 고토의 회복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임장청과 고승의 무리가 영주에 모여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태후마마께서 영주에 가셨다가 미시아를 데려왔으나 어쩌면 미시아는, 임장청이 파견한 후고구려의 첩자인지도 모릅니다.”
“오호, 그래서?”
“고조영과 이해고, 사비우가 순무사로 궐 밖에 나온 기회를 빌어 그들을 제거하고, 역모의 혐의로 이루하와 그녀의 비자 여미아, 미시아 등을 가두어버리면 됩니다. 역모 죄는 우리가 꾸미기 나름입니다. 심증이 있으니 물증은 만들기만 하면 되죠.”
“우리가 그들을 죽이고 무 태후의 짓이라고 소문을 낸다 하더라도, 만에 하나 그들을 죽인 장본인이 누구인가가 탄로 날 경우 우리는 거사하기도 전에 발목이 잡히는 게 아닌가?”
“아닙니다. 이런 일은 군사들을 시켜서 될 일이 아니고, 강호의 호걸들에게 위탁해야 합니다.”
“그 젊은 동이북적의 남녀들은 대부분 볼모로 들어와 황궁에서 숙위宿衛하는 자들인데, 우리가 무 태후의 이름으로 그들을 죄다 제거할 경우, 우리가 거사하기도 전에 혹시 후고구려와 거란, 말갈이 분란을 일으키지 않겠는가?”
“우리가 노리는 게 바로 그겁니다. 우리가 거사하기 전에 그들이 먼저 들고 일어나야 합니다.”
낭야왕 이충이 묵묵히 듣고 있었다.
“격분한 송막도독 이진충과 후고려왕 고중상에게 밀사를 보내, 군사를 일으켜 변경을 침략하게 하면, 무 태후의 대군이 대거 동북으로 올라가 서경과 동도의 군사력이 약화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군사를 이끌고 곧장 동도로 진격하면 됩니다.”
끝말은 설소가 이충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그 동이북적의 젊은 남녀들을 무 태후가 죽였다 하면 후고려나 거란이 믿어주겠는가?”
“물론입니다. 무 태후의 광기가 극에 달해, 그들에게 죄다 역모 죄를 씌워 죽였다고 하면 됩니다. 오늘날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살아난 자가 누구 있습니까?”
“그건 그렇소. 무태후의 광란을 거란이나 후고려가 모를 리 없을 테지.”
그러나 설소가 고조영 등을 죽이려는데 그토록 집착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자신의 처인 태평공주가 고조영을 죽자 살자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의처증이 심한 설소는, 자신의 처가 고조영은 물론, 이해고와 순진한 사비우까지 꾀어 통정하지 않았나 의심하고 있었다.
“고조영, 사비우, 이해고를 해치우는 일은 강호의 호걸들에게 맡기십시오. 전하께서 평소 강호의 호걸들을 휘하에 많이 두시고 그들을 친절히 대접해 오신 게 바로 이런 날을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낭야왕 이충이 설소의 말에 어느 정도 구미가 당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회의대사가 태후의 총애를 잃을까 염려해 조영을 속히 극락에 보내고 싶어하고, 내준신 등이 조영에게 이를 갈고 있다면, 그들에게 부탁하거나 그들과 협력해 제거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바로 그겁니다. 협력자가 생긴 것을 안다면 회의와 내준신은 뛸 듯이 기뻐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뒤로 빠지시고 단지 경신술과 암기술暗器術에 능한 강호의 호걸들 세 명 정도 제게 소개해주시면 됩니다. 제가 아는 인물들은 죄다 무공이 변변치 못하고 믿음직스럽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쓸 만한 인물로 유명한 곤륜검객이 있었는데, 그만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낭야왕 이충이 깊은 고려에 잠기다가 마침내 머리를 끄덕였다.
“세 사람 쯤은 문제없이 구할 수 있을 거네. 그런데 손만영, 이루하, 미시아 등에게 역모 죄를 씌우는 일은 누가 맡아야 하나?”
“그건 제게 맡기십시오.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낭야왕 이충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할 만한 답을 얻어 동도 낙양성으로 돌아온 설소는 내준신과 회의를 차례로 만난다.
(다음 장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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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5. 3. 21.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