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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유기공방 → 도기동3층석탑 → 낙원공원 → 안성구포동성당 → 안성향교 → 비봉산(비봉산성) → 안성맞춤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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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유기는 모양이 아담하고 정교하여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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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대지위에 웅장한 삼층석탑이 서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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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봉산의 지맥인 구포동 동산에 1922년에 건립되었으며, 근대 한국천주교 성당 건축양식의 특징인 한국과 서양의 절충식 성당으로, 초기 성당 건축사를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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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종27년(1532)에 세워졌으며, 큰 고을에서 볼 수 있는 풍화루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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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봉산 산정의 9부 능선에 마치 허리띠를 두르듯 총길이 1,500m, 높이 1.3m,폭 3m의 토성으로 축적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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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은 예로부터 장시가 발달했고 유기로 이름난 고장이다. |
영창대군묘 → 죽주산성 → 태평미륵 → 죽산리5층석탑 → 흔들바위 → 죽산향교 → 칠장사(당간,헤소국사비,석불입상) → 망이산성 → 기솔리석불입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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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대왕의 14명 아들 중 유일하게 정비인 인목왕후가 낳은 아들로 선조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던 영창대군의 묘이다. 묘역은 2단의 사성으로 둘러싸여 있고 묘역 앞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을 두었다. 상석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무덤을 수호하기 위해서 세우는 동자석, 문인석과 묘가 있음을 알려주는 표지인 망주석이 배치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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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산리뒤 비봉산 아래에 위치, 현재 높이 2.5m 가량의 석축이 남아 있으며, 이곳에 고려 고종 23년 죽주방호 별감이 되어 15일간 몽골의 공격을 이 산성에서 막아낸 송문주 장군의 묘비와 사당이 모셔져 있다.(죽산면 031-676-60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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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면 매산리에 위치하고 있는 미륵은5.6m에 달하는 거대한 입석불로 고려시대 몽고군을 물리친 송문주 장군과 김윤후 장군의 우국충정을 기리고 그들의 명복을 빌기위해서 건립되었다. 미륵은 미글당이라고 불리는 누각에 모셔져 있는데, 누각의 높이도 만만치 않거니와 누각을 받치고 있는 거칠고 투박한 느낌의 주초석도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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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층기단위에 오층탑신을 올린 높이 6m의 일반형석탑으로 뛰어난 건축미를 자랑하며 봉업사지에 건립되어 있다.(죽산면 031-676-600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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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성시 죽산성지(이진터성지) 뒷산인 팔봉산에 엄지 손가락으로도 흔들리는 흔들바위가 있다. 하단부 높이가 2.1m,둘레가 10.4m나 되는 거대한 흔들바위는 웅장한 생김새며 바위 위에 들어 앉은 모습이 설악산 계조암에 있는 것보다 낫다는게 주민의 자랑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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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28년(1533)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지만, 대성전은 19세기말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성전, 명륜당 등이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으며 내부의 단청과 조각은 조선말기의 솜씨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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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4년 83세로 입적한 혜소국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며, 혜소국사는 홍제관을 세우고 일곱 악인을 교화, 제도한 것에 연유하여 칠장사라 했다.(033-673-077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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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 남하한 고구려군이 대남방어용으로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죽산현의 봉수로서 영남과 중부 대륙의 봉수를 받아서 도성으로 올리는 대동맥과 같은 봉수대 유적지였다고 한다.(일죽면 031-672-50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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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눈썹, 가는 눈, 크고 짧은 코, 아래 입술이 두텁게 표현되었으며 입을 굳게 다물고 있어 인상적이다. 동쪽으로 향한 불상 중 북쪽의 큰 불상을 남미륵불, 남쪽에 위치한 불상을 여미륵불이라 부른다.(삼죽면 031-672-4002) |
3ㆍ1운동기념관 → 청원사 → 덕봉서원 → 오정방고택 → 운수암(무한성터) → 안성맞춤가족공원 → 양성향교 → 미리내성지 → 고삼호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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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주민 이천여명이 전국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개했던 원곡, 양성의 만세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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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사는 정확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고 1973년 개금불사 중 고려 국왕 발원 은자대장이 발견되었다. 산골짜기 언덕안으로 늘 푸른 안개가 낀다고 해서 청원사라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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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 때의 문신인 충정공 오두인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1695(숙종21)년 창건된 서원, 바리봉을 뒤에 두고 외삼문, 정의당, 내심문, 사우가 일직선상에 놓여 있으며 숙종이 하사한 현편이 남아있다.(양성면 031-672-20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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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5년(1510)에 처음 세운 이후 정무공 오정방(1588~1634) 천파고오상에서 충정공 오두인(1624~1689)에 이르기까지 해주 오씨 명인들을 배출한 유서깊은 곳으로 전해 내려온다.(양성면 031-672-20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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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0년 창건되었고, 대원군이 중건하여 친필 현판을 하사했다. 장씨부인이 부처님을 모시고 살아갈 생각으로 터를 닦았는데, 밤에 신령이 나타나 무한성 안에 절을 세우도록 계시를 내려 절을 지었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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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주택단지 조성을 목적으로 전망 좋은 33만평의 구릉지대에 쾌적하게 즐길 수 있는 여러가지 문화시설을 완비하였다. 중앙공원에는 분수대와 어린이 놀이터, 농구장, 배구장,족구장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어 가족단위휴양지로 적합하며, 또한 중앙의 송림속에 죽마루와 아로정의 정자가 있고, 맑고 푸른 하천을 끼고 보트장이 있으며, 그 옆으로 정구장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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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중종 28년(1533)에 세워진 것으로, 대성전은 정면 3간, 측면 2간, 목부에는 단청이 칠해져 있고 맞배지붕이다.(양성면 031-672-20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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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박해 때 신자들이 숨어 살던 곳으로 1895년 천주교회당을, 1896년 현재의 돌성당을 건축하였다. 이후 1976년부터 수도원, 수녀원, 피정의 집, 예수수난 14처상, 겟세마니 동산이 건립되었다. 맞은편 계곡에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안치된 묘역이 있으며, 연중 순례객이 찾아와 마음의 평화와 영혼의 위안을 받고 돌아간다.(031-674-125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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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물매운탕과 토종닭이 유명하고, 김기덕 감독의 영화'섬'의 촬영장소로 이용됐던 이곳은 고삼면 월향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근에 특색있는 레스토랑과 숙박시설이 많이 있고, 특히 양어장 낚시터가 많아 초보자들에게 적격이다.(031-672-7002) |
이덕남장군묘 → 바우덕이묘(남사당꼭두쇠) → 청룡호수 → 청룡사 → 석남사 → 금광호수 → 안성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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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시 홍계남장군과 함께 의병 3천명을 거느리고 서운산성에 성루를 구축하여 싸우다가 전사한 이덕남 장군의 묘, 후에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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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역사속에서 민중들이 스스로 형성, 발전시킨 유량예인집단. 조선조 말기의 김암덕(바우덕이)으로부터 시작, 대원군의 옥관자를 하사받기도 했다. 이후, 1982년 안성남사당 풍물놀이 보존회과 세워져 1989년 전국민속예술 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바 있다.(서운면 031-673-90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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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방향의 드라이브 코스로 제격이며 인근에 청룡사와 서운산 등산로와 연결되어 있어 여름철 피서지로 유명하다.(서운면 031-673-90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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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사는 고려 원종 6년에 명본국사가 지어 대장암이라고 했다. 사찰 안에는 대웅전, 관음전, 봉향각, 명부전 등이 있고 대웅전 앞에는 5톤 무게의 구리로 된 종이 있다. 2.2미터 높이의 아담한 3층 석탑은 대웅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게 보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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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수도승들이 유난히 많았던 석남사인지라 스님들의 손길이 곱게 묻어나는것만 같다. 고려 광종이 아들 혜거국사가 크게 중건하는 등 이름 높은 스님들이 석남사를 거쳐갔다. 석남사는 당시 수백인의 참선승이 머물렀던 수행도량으로 이름이 높았던 곳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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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광호수는 물낚시와 얼음낚시가 잘 돼 낚시꾼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도로에 인접해 교통이 편리하고 좌대, 연안 낚시 모두 좋다. 호수 주변에는 소문난 맛집들이 즐비하며 호수를 끼고 산림이 우거진 도로변을 따라 진천방향으로 향하는 드라이브 코스도 이품이다. 고급 숙박시설과 북카페와 같은 이색적인 요소가 갖추어진 곳이기도 하다. (금광면 031-672-30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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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사신이 내왕할 때 묵던 숙소로 중앙에 정청 좌,우 익사를 두었고 1653년 중수 되었음이 밝혀 졌으며 축조연대는 14세기로 추정된다.(보개면 031-672-669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