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고향 인도 성지순례 글
1999년 3월 14일-30일 까지 부처님의 체취가 풍기고, 법의 향기가 그윽한
불교의 고향을 참배하기 위해 순례 길에 올랐다.
여정에 함께 한 분으로서는 녹원님과 박길상화님, 이금자, 김재호,백순심,
김복연, 김인자, 이옥수, 이광희, 김순옥, 최명자, 임선희, 김기숙, 강희남,
주영미, 유영춘, 17명의 불자가 함께 하였고, 토픽여행사 김명선 대표가 따
랐다.
3월14일 밤7시50분 김포 국제공항 2청사를 날기 시작한 아시아나 항공기는
9시간을 비행하여 15일 새벽4시 인도의 수도뉴델리 국제공항에 착륙하였다.
3월15일 <뉴델리>
2시간 동안 눈을 붙이고 순례길이 멀어 아침6시에 기상하여 예불을 올린
다음 아침 공양을 했다.
야무나의 물줄기가 굽어 도는 낮은 언덕에 인도의 수도 델리가 있다.행정
적으로 하르야나주에 편입되어 있으나 수도로서의 독립적 기능을 갖고 있
는 곳이다.
과거에는 무갈 제국의 수도였고, 근세에는 영국의 식민통치 수도로서 명실
공히 인도를 대표하는 도시이다.
델리의 지명이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13세기부터였으니 수천년의
문화를 가진 고도(古都)이다.
뉴델리의 도심에서 외곽까지는 숲이 우거져 있고 흰 고층건물과 붉은 벽
돌의 집들은 기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이국적인 정취를 물씬 풍기고 있다.
도로 가에는 일년 내내 망고나무와 파초들로 항상 싱그러움으로 가득하고,
도심을 뒤덮은 푸르른 파초잎이 붉은 건물들과 멋있게 조화를 이루면서
외교관거리 샨티 파트에서 대통령 궁에 이르는 연도는 너무나 아름
답고 주거환경이 모두 쾌적해 보인다.
그러나 변두리에는 여전히 천막을 치고 사는 난민의 움막이 많고 풍경도
황량하여 인도하면 가난 더러움 악취를 연상하게 되는데 뉴델리 도심에는
별로 눈에 뛰지 않는다.
최신형 차량들이 질주하는 도로 복판거리로 유유히 걸어 다니는 소떼들의
나들이는 기이한 풍경이었다.
관광객을 위한 좋은 차라 하는데 출고된지 오래되어 에어컨도 시원치 않는
버스를 타고 5시간 넘게 달려 뉴델리남쪽 200km에 위치한 아그라의 타지마
할에 도착 하였다.
<신비의 궁전 타지마할>
타지마할은 아그라에 있다. 아그라는 인구80만의 도시로서 16세기 중엽 회
교왕국 무갈 제국의 제3대 황제 아크발에 의해 세워졌고, 타지마할 이란
성때문에 유명한 도시로 발전한 곳이다.
인도에 무갈 왕조가 들어서면서 가장 집중적으로 개발한 곳이 아그라였기
때문에 도시의 곳곳에 이슬람의 건물이 남아 있다.
타지마할은 무갈 제국의 5대왕 샤쟈한이 그의 아내 <몸타즈> 를 위하여 만
든 무덤 궁전이다.
몸타즈는 열세명의 왕자와 공주를 두었다.
샤쟈한은 북부의 정복전쟁 때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식음도 전패
하고 상심에 빠졌다. 그리고 아내를 위하여 이 인류 역사상 다시 없을 전대
미문의 궁전을 만들기로 작정하였다.
1630년 역사가 시작되어 28년 동안 이 환상의 궁전은 완공 된다.
이 궁전은 전형적 이슬람양식을 따르면서도 그 내부의 치장과 현란한 규모가
세상의 예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방대하고 훗 날 사람들은 피라미드와 더
불어 타지마할을 인류의 불가사의라고 말하고 있다.
타지마할의 본궁은 양파처럼 둥근 지붕과 그 건물 주변으로 원통형의 탑을
세웠다. 네 모퉁이에 서 있는 미나르의 높이는 75m이며 바깥벽에는 뾰족한
아치가 정연하게 배열되어 있다.
내부는 온통 채색된 돌무늬와 갖가지 보석장식으로 뒤 덮었는데 1층에는 두
개의 관은 도굴을 막기 위한 위장이고 지하의 비밀통로에 진짜 관이 놓여
있다.
국내외 장인 5천명을 동원하여 가장 아름다?궁궐을 짓고, 다시 이 같은 걸작
품을 짓지 못하도록 그들의 손을 모두 잘랐다 하니 그 원성의 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다.
무심한 사람들은 이 환상의 궁궐 앞에서 탄성을 연발하지만 생각이 여기에 이
르면 오히려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결국 샤쟈한은 국고의 낭비로 파멸을 면치 못하여 그의 아들 아크바르에 의하
여 강제로 유배 되었고, 그때의 국력 낭비는 무갈 제국의 멸망을 초래하고 말
았다. 샤쟈한은 철저한 회교도로서 치세 때 가혹하리만치 다른 종교를 배척하
였으나 그의 아들 아크바르는 흰두교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왕국의 안정을 도모
한 왕이었다.
순례자들은 야무나의 물줄기가 도도히 흘러 내리는 강변에 우뚝 선 타지마할의
건물의 배경과 성벽에 올라 기념촬영을 하였다.
타지마할에서 버스로 2시간을 넘게 달려 아그라 기차역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부처님의 설법지 갠지스강이 있는 바라나시로 가자면 야간열차를 타
고 밤을 새워 가야 내일 아침에 바라나시에 도착하게 된다.
고객을 위한 배려가 조금도 없는 아그라역사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좌판
대가 있는 콘크리트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편안한 마음으로 2시간을 기다렸지만
약속한 시간에 열차가 오질 않았다.
인도 여행하다 보면 한두 시간 연착은 흔히 있는 일이다.
저녁 대용으로 식빵에 고추장을 발라 김에 싸서 맛있게들 먹고 있는데 역사를
서성이든 굶주린 개들이 나눠 먹자고 여기저기서 몰려와 체면도 없이 달려 들
었다. 측은한 생각이 들어서 보시를 베풀자 서로 차지하려고 생사를 걸고 역사
가 떠나가도록 싸우는 모습에 생존을 위해 허덕이는 그들의 현장이 가슴을 아
프게 하였다.
이렇게 몇 시간이 흐른 밤8시가 넘어서 침대열차에 올라 아그라의 밤을 가르며
태양이 솟아 오를 때까지 달리고 있다.
3월16일 <바라나시의 갠지스강>
동녘의 햇살을 받으며 바라나시 역앞에 내렸다. 바라나시가지는 한국의 60년대
의 모습처럼 발전이 뒤져보였다. 낡은 건물과 쓰레기가 여기저기 쌓여 있고,혼
잡한 교통체계 속에서도 길 복판으로는 편안하게 걸어 다니는 소들이 많았다.
순례 단들은 택시에 나누어 타고 갠지스 강으로 갔다. 바라나시는 세계에서 가
장오래 된 도시며, 갠지스 강물은 히말라야에서 흘러내리는 소설(消雪)이 인도
평원을 질러 뱅골 만으로 흘러 간다. 흰두의 성지, 수백 개의 사원이 늘어선 이
도시는 수천년전부터 종교의 메카였다.
인도인들은 갠지스 강물을 성수로 숭상하며 그곳에 목욕함으로써 죄를 씻을 수 있
다고 믿고, 죽어서 이곳에 뼈를 뿌리는 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부처님이 이곳을 전법의 첫 번째 장소로 택한 것도 결코 우연만은 아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이도시를 베나레스라 불렀다.
갠지스 강물은 어떠한 곳인가?
사람의 시체를 화장하는 곳을 “가트”라 하는데 바라나시에는 가트가 수십여 곳이
넘는다. 가트에 이르는 길목에는 숫자를 셀 수도 없을 만큼 담요덩어리가 뒹굴고
있다. 그 담요덩어리는 죽었 거나 죽어가는 사람들이다. 매일 새벽 순경들이 그 담
요를 들쳐보고 죽은 이는 그대로 화장터로, 숨이 붙어 있으면 그냥 방치해 둔다.
모든 인도인들은 이 갠지스에 뼈를 묻고 싶어 하기 때문에 늙은 부모를 둔 자식들의
가장 큰 효도는 어버이를 이곳에 모시는 일이다.
큰 부자인 경우는 이 강변의 가트 곁에 방을 얻어 노인들을 모시지만 대다수 사람
들은 꿈과 같은 이야기다.
심지어 바라나시로 가는 기차에 어버이를 태워 드리는 것으로 만족해야한다.
갠지스에는 인골이 흐르고 그 강물줄기를 열심히 퍼마시는 사람, 목욕으로 자기의
죄를 씻는 사람, 기도의 주문을 외우는 사람으로 아침의 갠지스는 사람들로 북적댄
다. 순례 단은 고요히 흐르는 갠지스의 유람선에 올라 물고기를 방생하고, 연꽃등
에 불을 붙여 강물 위에 띄우며 성스러운 마음으로 소원을 비는 기도를 올렸다.
<불교의 고향 사르나트. 녹야원>
사르나트(녹야원) 바라나시로부터 강을 건너 동북쪽으로 십여리를 가면 녹야가람이
있다. 입구에는 초 법륜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쇼카 대왕이 건립한 다메크 대탑이
나온다. 벽돌과 흙으로 원형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발우를 엎어 놓은 듯한 원주를
세웠다.
이 다메크 대탑을 세운연기는 아쇼카 대왕의 석주에도 상세한 설명이 있다. 뿐만
아니라 왕의 석죽에는 승단의 화합을 깨는 금계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건물은 하늘 높이 솟아있고 사방으로는 긴 복도가 이어져 있는 이곳에는1천 5백
명의 스님들이 수행하였다고 한다. 절 동남쪽에 있는 석가탑은 높이가 백여 척으
로 아쇼카 대왕이 새운 것이다.
그 아래는 높이 70여척의 석주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석존께서 초전법륜을 펴신
곳이다. 그 옆에는 미륵보살이 수기를 받은 곳이 있고, 그 건너편에 있는 탑은 옛
날 석존께서 호명보살이 되어 천지개벽 이래 인수2만 년이 되던 해에 가섭 불에게
수기하신 곳이다.
서쪽에는 석가여래께서 목욕하시던 연못. 식기를 씻으신 연못. 법의를 세탁하시던
연못이 있었다.
녹야원을 대규모로 복원한 것은, 12세기 초 베나레스는 고빈다 찬드라에 의하여
정복당한다. 그의 왕비 쿠마라데비는 독실한 불자로서 피폐해진 녹야원 일대를 굽다
시대의 모습 그대로 복원하였다.
녹야원 동편 문을 나서면 티벳 중국 사원이 있고, 서편의 평지 일대는 일본 태국 스
리랑카 등의 절들이 줄비 하게 서 있다.
그 입구에 사르나트 박물관에는 불교유물만 전시되고 있는데 눈길을 끄는 것은 아쇼
카왕의 석사자 석주이고 관음보살 입상과 미륵보살 입상이 걸작품으로 꼽힌다.
대각을 이루신 보디가야에서 이곳까지 약219km로 부처님은 이곳까지 걸으셨다. 자
신의 지고(至高)한 깨달음이 과연 무지한 중생들에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인가를 모색
하시면서 그분은 이 길을 걸으셨으리라, 불전은 이곳에 부처님이 자신과 함께 수행
을 한 적이 있는 다섯 비구에게 최초로 설법 하셨다고 기록하였다.
<부처님 설법>
“비구들이여! 삶은 고통이다. 태어나는 것, 늙는 것, 병드는 것, 죽어야하는 것은
고통 이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것, 원한 있는 자와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고동 이니라, 구하나 얻어지지 않는 것도 고통이요, 번뇌의 수풀 위에
뿌리 박은 이 몸이 존재하는 것이 고통이니라.
무엇이 이 고통의 근본이랴? 성내고, 탐내고, 어리석은 것, 이 세 가지가 모든 고통
을 유발하는 원인이니라. 그러므로 열반이 으뜸이니 여덟 가지 바른 수행(八正道)과
고집멸도(苦集滅道) 네 가지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여기가 바로 최초로 가르침을 펴신 곳이고, 불교가 발생한 고향이 바로 이곳 녹야원
이다. 순례 단은 녹야원 불탑 앞에 백팔 배를 올리고, 청법 가를 부르면서 그 옛날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든 모습을 회상하며 “사성제와 팔정도“를 내용으로 법회를 봉
행 하였다.
사르나트의 참배를 마치면서 불교 발생지의 거룩한 뜻을 담아오기 위하여 녹야원 유적
석 하나를 간직하고, 5백리가 넘는 길을 버스를 타고 붇다가야 부근에 있는 수자타
호텔에 이르니 밤이 된다.
3월 17일 <붇다가야>
이른 아침에 기상하여 수자타 호텔에 마련된 불단에 예불을 올리고 버스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부처님의 성도지 마하보디사원으로 갔다.
싯다르타 태자가 부처님으로 새롭게 태어난(成道하신) 붇다가야는 가야라는 도시에
서 10km쯤 남쪽에 있다. 붇다가야 는 기원 후 10세기까지 모든 순례자들의 메카였다.
지금도 스리랑카 스님들이 보리수나무를 중심으로 대각사를 건립하여 성지를 지키고
있고,1960년 이후 미얀마 중국 태국 일본 티베트 등의 사원들도 들어서 있다.
부처님께서 도를 이루신 보리수나무의 둘레는 벽돌로 쌓아서 보좌를 만들어 놓았다.
흥륜사 순례단은 부처님 깨달음의 의미를 기리고 인연공덕을 짓기 위해 보리수나무
아래서 잠시 입정을 가진 다음 법당에 모셔져진 부처님께 감격어린 신심으로 석가모
니불 정근을 염송하면서 예불기도를 올렸다.
보리수는 피발라 나무인데 부처님께서 이 나무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다하여 보리수라
고 부르게 된 것이다.
마하보디사원의 정문은 동쪽으로 나있고, 니련선하 강을 향하고 있다. 남문은 큰
연못으로 이어져 있으며, 서쪽은 험준한 언덕으로 막혀있다.
북문은 대가람으로 통해 있는데 그 안에는 절과 불탑들이 많다. 이 모두는 부처님을
따르는 왕과, 대신, 부호 장자들이 조성한 것들로서 각기 이름을 남기고 있었다.
6년간 고행을 하신 싯다르타는 먼저 니련선하 강에서 몸을 씻으신 다음 그곳에서 수
쟈타라는 양치는 여인이 올린 우유고양을 받으신 후 보리수나무 밑에서 정려에 들어
갔다.
7일째 되던 날 새벽 먼동이 틀 무렵 드디어 확연한 깨달음이 싯다르타에게 다가왔다.
“무엇이 이 생존을 윤회 속에서 허덕이게 하는가, 어떻게 하면 그 괴로움에서 벗어
날 수 있을까, 무엇이 내재되어 있는 업의 덩어리인가, 과연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
인가, 그 모든 문제들을 한결같이 하나의 확신을 가진 채 대답해 주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그 깨달음의 현장이다.
순례 단은 부처님 깨달음의 상징인 해탈보리수 잎 하나씩과, 마 하보디 사원의 스님
이 선물하는 가사 한 벌을 기증받은 뒤 붇다가야 도량을 뒤로하고 나왔다.
<6년 고행설산과 니련선하 강>
니련선하 강은 보드가야에서 2백m쯤 떨어진 위치에 있다
이 곳은 싯다르타 태자가 수쟈타로부터 우유공양을 받고 목욕을 하셨다는 성스러운
강이다. 푸르고 시원스런 강물이 흐르고 있을 줄로만 알았는데 아쉽게도 순례 단이
갔을 때가 건기 철이어서 넓은 강은 바닥을 들어내고 몇 그루의 보리수나무만이 순
례자들을 반기며 흐르는 땀을 식혀 주었다.
<법화경의 설법지 영축산>
영축산(靈鷲山)은 독수리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인도 남부지방에는 산이 별로 없지만 이곳만은 물과 숲이 있었다.
큰 나무들은 별로 없고 키가 작은 잡목들 사이로 거북이나 새처럼 생긴 검은 바위들
이 많이 있는 산이었다.
날씨가 무더워 걸어서 오르기에는 힘들 듯하여 케이블카로 산상에 오른 뒤 붉은 황
토 흙과 돌로 된 계단을 밟고 내려가 보니 넓은 평원이 시원히 내려다보이는 산중턱
의 바위위에 옛날 법화경을 설하셨다는 자리가 있었다.
흥륜사 순례자들은 이 곳에서 백팔배를 올리고 법회를 열면서 그 옛날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시던 영산회상을 떠올리며 법화경“회삼귀일과(會三歸一)과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에 대한 법회를 열기도 하였다.
그곳에서 정상으로 조금 더 올라가면 동굴 두 개가 있다.
첫 번째 동굴은 사리불이 공부하던 곳이고, 다음 동굴이 아난존자가 수행하던 곳
이다.
<죽림정사竹林精舍>
영축산 북쪽에 죽림정사의 옛 터가 있다. 이 사찰은 부처님당시 “칼란다”라는 장
자가 대나무 숲이 우거진 정원에 절을 지어 부처님께 시주한 유명한 정사(精舍)로
써 교단이 생긴 이래 기원정사 다음으로 두 번째 절이 되는 셈이다.
죽림정사 터 동쪽으로는 불탑이 하나있는데 이곳은 “아쟈타사 투루“ 대왕이 세운
부처님 진신사리를 안치한 탑이다.
죽림정사 서남쪽으로 2km 지점에는 동굴이 하나 있는데 여기가 바로 부처님경전을
최초로 결집한 유명한 칠 엽굴 (七葉窟)이다.
경내에는 다발을 이룬 대나무들이 여기저기 무성히 자라고 있어서 죽림정사임을 말
해 주고 있었다.
<나란다대학>
불교학의 요람 나란다 대학 비하르주의 수도 파트나에서 103km, 위치한 옛 불교학
의 요람이었던 나란다 대학을 찾아갔다.
찬란했던 옛 나란다대학은 영광과 위용을 잃은 체 황토색 대지위에 말없이 길게 드
러누워 있어
안타까운 심정과 아픈 마음으로 저려왔다.
한때는 5만 명이 넘는 스님들이 불철주야 부처님의 진리를 탐구하던 곳이 이제는
무심한 풀 더미에 뒤덮여 세월을 견뎌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현장법사가 이 대학에 와서 수학하던 7세기 중반까지도 1만 명이 넘는 스님들이 이
곳에서 대승과 소승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있던 곳 이었는데 어찌 이를 수가 있다는
말인가?
1199년 나란다대학은 무슬림들의 침공에 의한 방화와 살육으로 거대한 켐퍼스는 잿
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세월의 수레바퀴는 끊임없이 굴러서 이제 불태운 자도, 불에 태워 진자도 남지 않은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깨어진 주추돌은 지금도 옛 영화를 잊지는 않고 언젠가
는 잡초더미를 딛고 일어나 부처님 진리의 메아리를 울려주길 간절히 빌면서 나란다
대학을 나왔다.
18일 <바이샬리>
바이샬리는 미하르주의 수도파트나에서 약50km서북쪽에 있다.
바샬리는 부처님 당시에 가장윤택한 도시었고, 부처님께서 45년간 교화를 위하여
남북을 오가시면서 자주 들리신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유마거사의 고향이자, 부처님을 길러주신 마하파사파티 이모님이 출가하여
교단에 최초의 여승이 탄생한 비구니의 고향이기도하다.
특히 부처님은 바샬리에서 자귀의(自歸依) 법귀의(法歸依)자등명(自燈明) 법등명
(法燈明)이란 유명한 유교를 남기시고 “3개월 후 나는 열반에 들것이다.“라고
예언을 남기시고 입멸 처인 쿠시나가르로 떠나신 곳이 바로 바샬리이다.
유적지는 황토색 평지위에 붉은 벽돌로 쌓은 커다란 절터와 석주들이 여기저기 서
있고, 곁에는 큰 호수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옛날 승원의 규모를 짐작케 하였다.
끝없이 펼쳐진 평원에는 사탕수수밭과 야자수 그리고 망고의 숲들은 이국적 정취가
풍겼다. 몇 년 전에 파트나에서 이곳까지 갠지스강을 가로 지르는 10.5km 세계에서
제일 긴 다리를 놓아서 또 다른 구경거리였다.
이곳 갠지스 물줄기는 야무나 카시아등 모든 지류가 합해지기 때문에 마치 대해를
연상시킨다. 도도한 흙탕물을 보면서 왜 갠지스강이 이토록 인도인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열대지방에서 물이란 실리성이 절대적이었을 것이다.
부처님의 설법 가운데서 나무그늘과 갠지스강에 대한 비유가 많은 것을 인도에 와
서야 실감한다.
<열반지 쿠쉬나가라>
부처님의 열반지 <쿠시나가라>를 지금은 “카시아”라고 부른다.
델리. 바라나시, 봄베이, 캘커터 등에서 갈려면 “고락푸르”를 택하는 것이 가장
좋다. 코락푸르에서 이곳 “카시아“까지는 54.7km 자동차로 1시간 걸린다.
쿠시나가라 열반지는 오랫동안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이곳이 알려지게 된 것은 영국의 고고학자 <알렉산더 컨닝햄>이 1861년과 1862년
두 차례에 걸쳐 답사 발굴한 후“이곳이 불멸지 (佛滅地) 이다” 라고 확인한데서
시작 되었다.
불멸 약 2백년 후 이곳은 마가다의 영토로 편입된다. 곧이어 마우리야 왕조 시대로
접어든다. 찬드라굽타 대왕은 거대한 통일제국을 마련하였다. 그의 손자 아쇼카 대
왕은 인도의 남부 일대를 제외한 대 통일국가를 일으켰다. 그 때 이곳은 마우리야
영토로 귀속된다.
아쇼카 대왕은 이곳에 참배를 하면서 대탑과 석주를 세웠다.
그 후 한동안 관심에서 제외되었던 이곳은 (399-414)15년 동안 인도의 불적지를
순례하였던 중국의 구법승 법현에 의하여 주목받게 된다.
법현은 그때 쿠시나가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몇개의 석탑과 사원이 있었으나 황폐 되었고, 마을의 몇몇 가족만이 불교를 신봉
하고 있다“ 이때가 기원후 5세기 초 굽다왕조 시대에 해당한다.
곧이어 쿠마라 굽타 (9413-155재위) 대왕이 등극하였고, 그때 독실한 불자였던
“히리발라” 가 아쇼카대왕 때의 유적을 복원하고 부처님열반하신 장소에는 큰
법당을 짓고, 열반상을 조성하여 모신 것이 지금까지 법당에 모셔져 있다.
<부처님의 열반 설법>
부처님의 열반에 관해서 불전은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북쪽을 향해서 가시던 부처님은 파바라는 마을에서 대장간을 하는 춘다의 공양을
받으신 후 카쿠쯔타 강에서 목욕을 하신 다음 쿠시나가라로 오셔서 사십여년을
곁에서 모시던 아난다에게 “사라수나무 밑에 평상을 준비하라”이르신 후 마치
사자처럼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누우셨다.
“아난다여! 쿠시나가라의 말라스 사람들에게 전하라. 오늘 밤 자정 여래가 열반에
들리라고. 낡은 수레가 움직일 수없음과 같이 나는 이제 여정을 멈추고 싶구나.“
이 슬픈 소식을 듣고 사라수나무 곁에 운집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펴셨다.
“여래의 육신을 포함해서 이 세상 모든 현상이 무상하다.
불법은 깨달음의 진리이기 때문에 현상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의 법에 의지라. 의문이 있거든 물으라.“ 고 세 번
을 거듭 말씀하셨다.
그러나 아난을 비롯한 군중들은 터지는 오열을 참지 모하여 이상 여쭙지 못했다.
“모든 것은 덧없다. 쉼 없이 정진하라.” 이 말씀을 남기시며 부처님은 열반에 드
신다. 이때가 인도력( 印度歷) 으로 사월 보름날이었다.
흥륜사 순례 단은 법당에 예불을 올리고 열반상을 돌면서 석가모니불 정근으로 부
처님의 무량하신 자비와 한량없는 공덕을 기렸다.
열반당 뒤편에는 원형으로 된 아주 큰 대탑이 서 있다.
이곳이 바로 부처님 다비 장소이다. 그 내부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진신사라가 모셔
져 있는데 부처님 열반의뜻을 기리기 위해 탑신의 벽돌하나를 가사 폭에 싸서 모시고
열반지를 물러 나왔다.
3월 19일 <불교의 최초사찰 기원정사>
공양을 새벽같이 하고 아침5시 숙소를 출발하여 기원정사로 향했다. 열반성지 쿠시
나가라에서 이곳까지는 172km 위치에 있다.
비포장도로에 황토먼지를 일으키며 덜컥대는 버스를 타고 7시간이 넘어서야 기원정사
에 도착하였다.
경전의 첫머리에“ 부처님이 어느 때 사위국기수급고독원에서 천이백 오십 인의 비
구와 함께 계셨다.“ 는 구절은 바로 이 기원정사“ 를 두고 하는 말이다.
불교 교단형성에 주추 돌이었던 기원정사(祇園精舍)는 부처님께서 가장 오래 머무셨
던 성지이고, 금강경을 설하신 곳이기도 하다.
그 옛날 이곳은 <슈라바아스티>라 불렀으나 오늘날은 <바람뿌르>라 한다. 부처님당
시 슈라바아스티는 이교도인 <프라세나짓트>왕이 다스리고 있었으나 부처님이 행하
시는 이적(異蹟)을 친견하면서 불교를 자신의 반려로 삼았다.
그때 <수닷타>라는 장자가 이곳에 절을 지어 부처님께 올렸는데 이것이 불교역사상
최초의 사찰인 것이다. 이 수닷타의 원력으로 이룩된 기원정사는 북인도 불교세력의
중심지가 되었다.
기원정사 경내에는 부처님의 십대제자 가운데<아난><마하가섭><사리불><목건련>
과 원력제자<수닷타> 장자 등의 사리와 유골을 안치한 부도 탑이 있는 곳이다.
<슈라바아스티>라는 말을 중국말로 번역하면 실라별(室羅伐)로 표기되는데 우리말
로는 서라벌이 된다. 이렇게 볼 때 <서라벌> 이란 말은 물론 우리의 국호였던
<신라>와 현재의 수도인 <서울>이란 지명도 켤코 이 <슈라바아스티>라는 지명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수천 년의 세월이 무상하게 지난 후 순례 단이 이곳에 갔을 때는 넓은 정사
터 위에는 붉은 벽돌만 남아 있고, 우거진 숲과 수백 년생 보리수나무만이 기원정사
를 지키고 있었다.
흥륜사 순례 단은 부처님의 체취가 깊이 스며있는 성지를 가꾸고 지키지 못한 송구
한 마음으로 참회의 예불을 올리고, 그 옛날 차란 했던 기원정사의 영광을 이 땅에
다시 구현해 낼 것을 서원하면서 석가모니불을 크게 소리 내어 불렀다.
<앙굴리 마라를 교화하신 곳>
슈라바아스티 기원정사부근에 많은 사람을 살해한<앙굴리마라> 가 살고 있었다.
그는 사람을 죽이고 손가락을 잘라서 목걸이를 만든 희대의 악인이자 살인마였다.
그는 백 사람의 손가락을 잘라 목에 걸고자 이미 99명을 죽였고, 나머지 한명을 구
하지 못하자 어머니마저 죽이려하던 그때 이 악한을 교화하신 일화가 <앙굴리마라
경>이다.
기원정사 뒷산에는 부처님께서 흉악한 살인범 앙굴리마라를 제도 하시어 대아라한
(大阿羅漢)을 만든 교화의 현장이 있다.
순례 단들은 부처님의 자비가 넘치고 교화의 손길을 펴셨던 그 현장과, 앙굴리마라
가 살고 수행하던 동굴을 돌아보는 것을 끝으로 인도의 순례를 마치고 국경을 넘어
룸비니가 있는 네팔로 향했다.
인도에서 네팔로 넘어올 때에는 관리사무소에 여권을 접수하고 30분가량이 지나자
복잡한 절차없이 확인 스탬프를 눌러주면서 "국경을 넘어도 좋다"하여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인도 기원정사를 출발한 흥륜사 순례 단은 굽고 좁은 도로를 7시간 넘게 달
려 인도와 국경이 접한 네팔 땅 룸비니부근의 니르바나호텔에 밤 8시가 넘어서 도착
하였다.
3월 20일 <네팔 룸비니>
부처님 당시의 룸비니는 인도 영토였으나 지금은 네팔국토에 속한다. 대부분 여행자
들은 인도에서 이곳을 거쳐서 네팔 카트만두로 가게 되는데 우리도 이 길을 택했다.
네팔은 관광수입을 주요 원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별도의 수속없이 쉽게 비자를 받
을 수 있다.
룸비니가 위치하고 있는 지명을 <피프라바>라고 하는데 <카필라바스투>와 룸비니의
중간 지점에 삼각형 모양으로 굽이쳐 흐르는 시냇물이 있다.
이곳이 경전에 사문유관 四門遊觀으로 묘사되는 태자 때의 싯다르타가 궁성 밖으로
나갔다가 “늙은이, 병든 이, 죽은 이, 출가사문 등 네 모습을 차례로 대하고 드디어
출가 出家를 결심하게 되었다는 일화의 고장이 그곳이다.
불전에 따르면 룸비니는 사알라 나무의 숲에 싸인 아늑한 꽃동산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흥륜사 순례 단이 이곳에 갔을 때는 옛 영화는 여기저기 자치만 남아있고 근
대에 세워진 여러 불교 국가들의 사찰들과 순례를 온 각국의 스님들이 많이 보였다.
유적이 발굴된 넓은 성지위에는 우탄트 전 유엔 사무총장을 중심으로 un산하 15개국
이 참여하여 유적지의 복원을 서두르고 있다고 쓰여 있었다.
18세기 말까지만해도 룸비니는 기록상에만 전해오는 성지였으나 1896년 독일의 고고
학자 <휘러>에 의해 비문판독을 함에 따라 이곳이 <성인의 탄생지 룸비니>라고 확인
되었다.
인도구법의印度求法의 시효라 불리는 불국기佛國記의 저자 법현法顯은 “이 부근 어
디가 룸비니인데 길이 험하고 숲이 무성해서 찾을 수가 없다.“ 라고 술회하고 있다.
아쇼카 대왕의 석주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즉위한지 20년 만에 뭇 대신들과 왕 중의 왕인 아쇼카는 이곳을 참배하노라. 이곳
은 인천人天의 공양을 받으신 석가족의 성자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곳이다. 나는 그분
의 태어나신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돌로써 표적을 삼는다.
위대하신 부처님이 태어나신 곳이기에 이곳의 대지에는 토지세를 土地稅를 면하도
록 명하노라.“ 이와 같이 쓰인 아쇼카대왕의 석주와 명문의 발견으로 룸비니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늘과 인간에 거룩한 성자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든 날 동서남북으로 일곱 발짝
씩을 걸으시고 난후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 天下唯我獨尊) 이라고 말씀하셨다.
“유아독존”의 뜻은 자기만이 아니라 인간의 고귀함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좀더
구체적으 로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신 것이고, 평등성의 강조라는 상징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순례 단은 발굴된 마야부인상 법당에 백팔 배를 올리고, 밖으로 나와 부처님 탄
생을 기리는 석가모니불을 부르면서 보리수나무를 여러 바퀴 돌고 난 다음 룸비니
성지순례를 마쳤다.
룸비니를 끝으로 부처님 땅 인도성지순례를 모두마치고 버스에 올라 네팔의 수도 가
트만두로 향했다.
룸비니에서 카트만두는 정말로 먼 길이었다.포장은 되어있지만 곳곳이 파여서 비포장
이나 다름 없었고, 버스가 덜컥대며 뛰는 통에 어지러울 정도로 도로가 좋지 않았다.
굽이지고 협소한 수천m의 고원 길을 올라갈 때에는 관세음보살이 절로 나올 정도로
천길 낭떠러지 좁은 고갯길을 외줄을 타듯 가고 있었다.
이렇게 10시간을 넘게 버스를 타고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 있는 해발 1천5백m의 에
베레스트호텔에 도착하니 몸은 차를 타고 가는 듯하고. 정신이 멍하였다.
3월 21일 <네팔 카트만두>
네팔의 면적은 14만718km이고 인구는2370만 명이다. 히말라야 산맥 남사면에 위치
하여 동북쪽으로 중국서장자치구 (티배트)와 접하고, 동남서쪽은 인도에 둘러 싸여
있다.
네팔의 국토는 대체로 대 히말라야산맥 소 히말라야산맥 사왈 리크산맥 및 타라이
라고 불리는 산록평지의 4개 지역으로 나눈다.
대 히말라야산맥 지역은 티베트와 경계를 이루는 지역으로 에 베레스트 산을 비롯
한 카첸중가, 마나슬루, 안나푸르나, 다울라 기리, 등 8000m급의 고봉이 줄을 이어
네팔에서 가장 해발고도가 높은 지역이다.
순례 단은 오늘 낮 카트만두 여행을 마치고 태국으로 돌아가는 일정이다. 그런데
아침시간 김명선 사장이“네팔 항공사의 파업으로 비행기 운항이 전부 스톱 되었
습니다.
오늘 태국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스케줄이 어긋나 방콕호텔이나 한국으로 가는 비행
기까지 문제가 발생하여 큰일 났다“고 안절부절하였다.
생각할수록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 김사장과 인도가이드에게 “방법을 강구하라"고
항공사로 보내고, 순례단을 인솔하여 네팔 인들의 정신적 귀의처인 스와 암부나트
사원을 방문하였다.
네팔은 인도와 중국 사이에 위치한 지리적 탓인지 아리안족 힌두 문화와 티베트
불교문화를 혼합한 성격을 띠고 있다.
네팔의 특징은 힌두교와 불교의 종교적조화로서 불교사원내에 흰두사원이, 흰두
사원내에 불상이 안치되어 있어 종교의식에 힌두인 불교인이 함께하고 있어 놀랍고
이색적인 느낌을 받았다.
큰 사원 곳곳을 알뜰히 돌아보며 참배를 올리는데 항공사 일이 너무 신경이 쓰였다.
호텔로 돌아와 항공사 사정을 들어보니 “언제 운항할지 막막하고, 비행기를 타지
못해 며칠씩 묶고 있는 사람들이 사무실로 몰려와 아우성이라고 하였다.
호텔로비에 앉아 걱정을 하고 있다보니 태국으로 가야할 시간도 지나고 카트만두
에는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3월 22일 <카트만두 시내구경>
일정대로라면 이시간은 태국방콕에서 사원을 참배하고 있을 시간이지만 항공기
사정으로 호텔에 묶여 천금같이 소중한 시간을 그냥 보내고 있다.
이러한 사정을 한국에 알리고 말라가는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서 인도 성지순례에서
먹다가 남은 쌀로 전기밥통에 공양을 지어 호텔방에 둘러앉아 김치 한가지로 점심
을 먹으면서도 여전히 웃음 꽃을 피운다.
속담에 엎어진 김에 시어간다는 말이 있듯이 “히말라야설산 밑에까지 와서 올라
가보지는 못하더라도 카트만두 풍경이라도 구경은 하자“면서 시내를 관광하며
유익한 하루를 만들었다.
호텔로 돌아오자 일행 중에 연세가 가장 많은 유영춘보살님이 마침 칠순 날이라고
순례 단 모두에게 공양을 낸다고 하였다.
답례의 뜻으로 케이크에 불을 붙여 축가를 부르며 선물을 증정하고 심경을 외면서
축복을 비는 만찬을 즐겼다.
그러나 이틀이 지나도 항공기 문제는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아 밤이 늦도록 관세음
보살만 찾았다.
3월 23일<카트만두에서 -태국으로>
오늘로서 카트만두에 머무는지가 3일째 되는 날이다.
방글라데시로 돌아서 갈까? 뉴델리로 다시 가서 귀국을 해야 하나? 이도저도 어렵
다는 말에 답답한 마음이 가슴을 억누른다.
생각다 못해 김명선 사장에게 힌트를 주면서 ”네팔항공이 안되면 태국항공이라도
해결해 오라“고 보냈다.
4시간을 조마 조마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을 때 불보살의 가피였는지 태국항공
표를 끊어온 것이었다.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하면서 오후3시 태국항공을 타고 네팔을 탈출하다 시피
공항에 도착하여 방콕시내로 들어오니 해가지고 밤이 어두워 졌다.
일정대로라면 오늘 모두 귀국하는 날이지만 항공표가 취소 되어서 한국으로 돌아가
는 비행기표는 2매밖에 구하지를 못했다.
하는 수없이 사정이 급한 백순심 이광희 두 분만을 먼저 보내고 나머지 순례단은
항공 표를 구할 때까지 태국여행을 하기로 방콕에서 밤을 보낸다.
3월 24일 <방콕 사찰순례>
태국은 중국의 남쪽 말레이반도 상부에 위치하고 있는 불교국가이다. 면적은51만
평방km로 태국의 수도는 방콕이며 수도에는 900만의 인구가 살고 있다.
방콕은 사이암만으로 흘러드는 <차오프라야 강>하구에서부터 상류 30km위쪽에 있
으며 강의 오른쪽 연안인 톤부리시를 편입하여 수도권을 형성하고 있다.
방콕의 평균기온은 27~·28도로 1년 내내 고온을 유지하는 전형적인 열대 기후에
속한다. 방콕은 제국주의 열강들이 서로를 견제하던 말레이반도 중앙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식민지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라이다.
아침공양 후 순례 단은 유람선을 타고 방콕시민의 젓줄로 불리는 차오프라야 강을
따라 돌며 시민들이 살아가는 생활문화의 현장을 돌아보는 관광을 가졌다.
육안으로 봐서 맑지 않는 황토색 강물이었지만 세수와, 목욕과, 빨래도 하고, 그
강물위에 원두막처럼 집을 짓고 채소도 씻고 밥도 해먹으면서 살아가고 있었다.
운하를 따라 뱃길이 닫는 곳마다에는 꽃과, 기념품, 과일 등을 쪽배에 실고 다니면
서 장사를 하며 살아가는 수상 인들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아! 이래서 차오프라야
강이 방콕 시민의 젓줄" 이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방콕의 명소 왓아룬>
물길 따라 돌다보니 어느 듯 배가 새벽사원 앞에 닿았다.
이절의 이름을 태국말로 왓아룬 이라한다. 그러나 새벽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아름다움보다, 저녁 역광에 챠오프라야강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대탑의 아름다운
모습은 말할 수도 없고, 밤에는 74m높이 대프랑 탑이 전등 빛을 밝힐 때가 장관
을 연출 한다.
왓아룬은 톤부리 왕조의 왕실전용 사원으로 1809년 탁신 왕에 의해 짓기 시작하여
1910년 라마3세 때에 완성된 절이다.
대탑에는 계단이 있어서 탑신 중간 부까지 올라가면 강 반대편의 왕궁 및 에메랄드
사원과 방콕시내 스카이라인을 볼 수 있다.
<아시아의 관광명소 에메랄드 사원>
에메랄드 사원은 왕궁내의 왕실 전용사원으로 태국 인들의 정신적인 심장부로서
태국사원 중 최고로 꼽힌다. 높이 치솟은 전과 누각 사원 모두는 금박과 자기 유
리로 찬란하게 장식되어 눈이 부시는 이곳은 그 이름처럼 환상적이고 이국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원에서 처음만나는 것은 다양한 양식의 세계의 탑들이다.
이 탑들은 스리랑카양식, 태국양식, 크메르양식으로 각각의 자태를 뽐내며 뭇사람
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탑을 지나 법당으로 들어서면 태국국보 1호인 순고한 에메랄드 불상을 만날 수 있
다. 불상의 화려한 황금 옷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국왕이 직접 갈아입히는 법회를
봉행하고 있다.
사원내의 모든 벽에는 불교의 온갖 설화와 수호신장상들이 그려져 있다.
방콕의 이두사원은 여러 차례 친견하고 참배를 하였지만 언제나 새롭고 환희심이
절로 우러나오는 도량이다,
순례 단이 방문한 시간에 큰 법회가 열리고 있어 스님들과 함께 예불을 올리게 되
어 뜻 깊은 행사에 동참할 수 있었다.
방콕에서 점심공양을 들고 남부에 위치한 해변의 도시 파타야로 이동하니 시원한
바다와 아름다운 꽃들이 그동안 성지순례로 지친 순례단을 고향처럼 편하게 맞아
주었다.
3월 25일 <파타야 민속촌>
오늘은 산호섬을 가보기로 예정한 날인데 출발하려고 밖으로 나오니 궂은비가 가로
막았다.
하는 수 없이 호텔방으로 되돌아와 모두가 둘러앉아 행선지를 민속촌으로 변경하
였다. 일정은 바뀌었지만 민속촌으로 가보니 파타야를 찾는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가봐야 할 만큼 수천종류의 아름다운 꽃들과 잘 만들어진 넓은 정원이 인상깊이
남았다.
극장에서는 민속 문화공연들을 관람할 수 있었고, 코끼리를 비롯한 동물들이 펼치는
다양한 재롱에 칭찬의 박수가 절로 나왔다.
3월 26일 <파타야 산호섬>
오늘은 날씨가 좋아 표정들이 밝고 신나 보인다. 그래서 어제 가려고 했던 산호섬을
구경하기 위해 쾌속정 보트에 올랐다.
에메랄드 빛깔처럼 맑고 푸른 바다 물을 가르며 속력을 내서 달리는 뱃머리에 올라
앉은 일행들 중에는 즐거운지 환호를 질러대며 마냥 좋아했다.
산호섬 해변의 모래는 마치 황색의 설탕을 뿌려놓은 것만 같고, 바닷물은 푸른 비취
빛처럼 거울같이 맑았다.
귀국 일정이 훨씬 지나 마음에 부담이 있을 법도한데 모든 상념들을 털고 동심이 되
어 마냥 즐거워들 하는 모습이 그렇게 평화로워 보일 수가 없었다.
일행중에 어떤 분은 바나나 물놀이 기구를 타고 즐기다가 전복되는 바람에 구명복
을 입고서도 허우적대며 당황하던 모습을 화재로 꽃을 피우면서 아름다운 산호섬을
떠나 호텔로 돌아 왔다.
3월 27일 <파타야-방콕>
파타야 여행을 마치고 11시가 지나서 호텔을 출발하여 방콕에 도착하니 오후가 되었
다. 가족들과 귀국을 약속한 일정이 여러날 지나서 모두가 빨리 돌아가야 하지만 네
팔에서 한번 꼬인 스케줄이 신혼여행 철이라 항공 표를 구하기가 쉽질 않다.
오늘 귀국하는 일행들과 작별이 아쉬워서 푸른 바다와 좋은 경관을 가진 메남호텔
야외 푸드에서 특별공양의 자리를 갖고 인도성지 순례에 대한 회향 식을 가졌다.
음식과, 기온, 고된 순례, 게다가 제날짜에 귀국마저 못하는 마음고생 속에서도 끝
까지 유쾌하고 안전하게 긴 여정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협조해준 분들
이 너무나 고마웠다.
공양을 마치고 공항에 도착하니 밤9시가 되었다. 함께 갈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
도 아홉 분 만을 귀국시키고, 길상화보살님과 녹원님 왕사성 김순옥 김명선 이영대
등 7명만이 남아서 숙소가 있는 방콕시내로 되돌아오니 새벽2시가 넘었다.
3월 28일 <아유타야 성지참배>
오전10시 2대의 택시에 7명이 나누어 타고 태국의 고도<아유타야>로 향했다.
아유타야는 방콕북부 70km지점에 있는 태국의 옛 수도이다 .
웅장한 사원과 궁전 터이며 허물어진 성벽들이 아유타야의 옛 영화를 잘 나타내고
있었다.
목이 없는 불상과 기울어진 탑등은 말쑥하고 번쩍거리는 그랜드 필리스보다 오히려
더 따뜻하고 감동적이었다. 이 모두는 그 옛날 아유타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얼마
나 번성했었던가를 열심히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다.
아유타야의 유적지의 하나인 역사공원은 1991년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되었다고 한다.
태국에 처음 불교가 들어오게 된 것은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 동남아시아에 전파
된 불교를 남방불교라고 한다. 이곳으로 불교를 전파하는 기지가 된 곳은 스리랑카
이며 B C 3세기 중엽 아소카왕이 아들 <마힌다>스님을 파견하여 상좌부 불교를 전한
것이 시효가 되었다.
흥륜사 순례단이 이곳에 갔을 때가 초봄이었는데도 한국의 여름날씨보다 더 강열하
고 따가운 빛이었지만 그것은 부처님 자비의 열광이었다.
그동안 태국을 몇 번이나 다녀갔으면서도 이처럼 웅장하고 거룩한 유적지를 그냥
지나쳤는데 아유타야를 참배 하고 느끼는 감동과 환희는 분명 모두가 부처님의 뜻임
을 알았다.
며칠을 돌아도 끝없이 많은 아유타야 불교유적지, 결코 인도에 모자람이 없는 부처
님의 성지였다. 지금도 생생하게 남는 기억은, 그 무더운 날씨에도 산 사람처럼 법
당에 앉아계신 등신불 큰스님의 잔잔한 미소가 두고두고 아유타야를 떠올리게 한다.
3월 29일 <귀국>
더디어 오늘이 귀국하는 날이다. 이제 더 이상 가볼 곳도 별로 없고, 차이나타운과
방콕 서민들이 살아가는 시장골목을 오르 내리며 생활 모습들을 눈여겨 살펴보니
그곳이나 이곳이나 사람이 사는 형태는 같았다.
특별한 목적이나 할일 없이 종일을 보낸다는 것은 일중에 힘든 일이고, 하루해가
너무나 긴 것만 같이 느껴졌다. 주머니 사정이 썩 좋은 편은 아니어서 간단하게
저녁끼니를 때우고 밤9시 방콕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그것은 행여나 항공사와 약속한 비행기티켓이 잘못 되지나 않을까하는 염려 때문
이었다. 다행이도 염려 했던 거와는 달리 밤11시50분 항공기에 몸을 실고 어둠은
밤을 헤치며 30일 아침7시 김포공항에 도착하므로서 인도성지 순례의 대장정은
막을 내렸다.
불기2544 (1999) 3. 14. - 3. 30 (16박 17일)
인도성지 순례 기행 글 흥륜사 주지 정 법 륜 스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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