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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읽는 터키사(동서양문명의 교차로,터기)-정리 및 독후감
아시아와 유럽 대륙이 만나는 곳, 비단길을 통해 동양과서양을 이어 주는 길목, 비잔티움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서 1500년 이상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곳,동서문명의 교차로인 터키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도시, 이스탄불.
고대 그리스인인 일찍이 골든혼의 끝자락에 아크로폴리스를 만들고 정착해서 도시국가 비잔티움을 세웠으나, 이후 페르시아인의 침략과 로마의 점령을 받고 파괴되기도 했다. 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노플이라 불렸다. 그 뒤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점령하면서 이스탄불로 바뀐 후 약 480년 동안 제국의 수도로 영화를 누렸다. 1923년 오스만 제국이 몰락하면서 터키 공화국이 수립된 후 수도의 지위를 앙카라에 넘겨주었지만, 여전히 이스탄불은 1000만명이 살고 있는 터키 제1의 도시다.
오늘날 터키인들 사이로 과거 로마의 영화와 오스만 제국의 흥망이 교차되는 거리, 동서양 문명의 충돌과 압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아흐메트 지구.
작은 분수 연못을 사이에 두고 성소피아 성당과 블루모스크가 마주 보고 서 있는 기이함과 감동이 함께하는 거리에 서서 주변
기독교 성지인 성당을 보면서 비잔티움 제국 시대의 웅장함과 모자이크의 화려함에 감탄하다가, 단아한 푸른색 타일로 장식된 모스크에서 주변의 소란스러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무슬림의 경건함. 예레바탄 사라이와 오벨리스크,청동기둥,뱀기둥 사이로 부유햇던 로마제국과 비잔티움 제국시대의 사람들이 오갔을 것이다.
토프카프 궁전의 화려한 장식들과 하렘의 기이한 구조를 보고 난후, 보스포루스 해협이 한눈에 바라다보이는 궁전 뒤뜰에 서서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는 이스탄불의 지정학정 위치
비단길의 종착지인 그랜드 바자르.동서양의 수많은 물건들이 넘쳐 나는 곳,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수많은 가게들이 쭉 이어져 있고, 상인들이 호객행위와 흥정소리로 시끌벅적한 삶의 생동감이 느껴지는 곳에서 터키석이나 차이 잔을 감상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터키영토는 아시아와 유럽 대륙을 폭이 좁은 곳이 1킬로미터도 채 되지 않은, 물살이 급한 보스포루스 해협이 두 대륙을 나d누고 있다. 터키는 아시아 쪽 영토를 아나톨리아(97%),유럽쪽 트라키아라 부른다. 동쪽을 제외하고는 흑해,에게해, 지중해로 둘러싸인 반도 국가이다.
다르다넬스해협에는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레안드로스와 헤롯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진다.
해협의 서쪽 갈리폴리반도는 제1차 세계대전 때 무스타파 케말이 영국군에게 크게 승리하면서 터기 영웅으로 떠올랐던 갈리폴리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맞은편 동쪽은 차나칼레로, 트로이목마로 유명한트로이 유적이 있는 곳이다.
에게해와 지중해 섬들은 대부분의 그리스것이다.터키 공화국이 수립될 때 이스탄불을 차지하는 대신섬들을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차탈회위크는 콘야 부근의 구릉 지대였다. 유적지 크기로 보아 차탈회위크에서는 약 5천~1만명 정도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기원전 9천 무렵부터 살았지만 본격적으로는 기원전 6500~5800년 무렵으로 신석기 시대에 해당한다.
기원전 3천년 무렵에는 에게해 연안의 트로이, 앙카라 동쪽 알리지 효육 등에서 청동기 문화가 발달했다.
유럽에서 청동기문명이 발달하고 있을 즈음인 기원전 2000년경부터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 부근에서는 인류 최초로 철을 만들어 사용했던 히타이트 문명이 발달했다.
기원전 1288년 무와탈리스 왕이 이끄는 히타이트 군대, 다른 쪽은 람세스 2세가 이끄는 이집트 군대가 10년 동안 이어졌다.지칠대로 지친 두 나라는 ‘두 나라는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는다’, ‘제 3자의 공격에 대해서는공동으로 대응한다’ 등의 내용을 점토판에 쐐기문자로 기록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평화조약인 카데시 조약을 맺고 친선을 도모했다.
히타이트는 기원전 1200년경 발칸반도에서 들어온 도리아인의 공격으로 갑자기 멸망해버렸다. 좁은 산골짜기에 있는 마을란 뜻을 가진 보아즈칼레가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샤였다.
멸망후 아나톨리아에는 여러 개의 작은나라들이 서로 경쟁하면 발전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청동기를 사용한 황금의 나라 프리기아는 기원전 550년경 페르시아에 멸망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만지는 물건마다 황금으로 변하게 하는 손과 당나귀같은 큰 귀를 가졌다는 프리기아의왕 미다스의 무덤이 발견했다.
그리스.로마문화
기원전 8~7세기 무렵부터 그리스 본토에 살고 있던 수많은 그리스인들이 건너와 폴리스를 건설했다.그 뒤 기원전 1세기 무렵부ㄴ터는 로마제국의 영토가 되면서 여러 도시가 발달했다. 당시 도시모습의 유적지는 에페스(에페수스)다.
에페스에서 에게해의 항구로 이어지는 큰길 양쪽에는 기둥이 줄지어 세워졌고, 상점ㅈ들이 끊임없이 이어져 있었다.당시 가로등이 켜져 있는 곳은 이 지역말고는 알렉산드리아와 로마뿐이었다. 클레오파트라 여왕와 안토니우스가 함께 거닐다가 보석을 샀다고 전해지는 상점도 잇었다.전성기 때는 무려 25만명의 귀족과 평민, 노예들이 살았다고 한다. 귀족들은 주로 남쪽 언덕에 호화로운 집을짓고 모여 살앗다. 온천을 즐겼고,지붕이 있는 소극장 오데온에서 시낭송회와 음악회를 자주 열었다. 2만 4천여명을 수용하는 야외원형극장에서 그리스희.비극이 공연되었다. 아고라와 공회당에서 열띤 토론과 논쟁이 벌어졋다.
수세식 공중화장실과 수천권의 책을 소장한 셀수스 도서관과 왕들이 신전,헤라클레스의 개선문등이 있엇다.
에게해연안에는 수많은 도시들이 세워졋다.도시들은 이후 오랜 세월에 걸쳐 발전했다.
이곳을 이오니아 지방이라 하다.본토에서와 같이 폴리스라는 공동체를 만들어 상업활동을 활발히 하여 큰 번영을 누렸다. 트로이, 비잔티움, 스미르나(이즈미르),페르가몬(베르가마), 히에라폴리스 등의 폴리스에는 그리스 아테네처럼 신전과 아고라,원형극장을 세웠다.헤로도토스, 피타고라스, 디오게네스, 히포ㅁ크라테스 등 유명한 학자들이 이곳 출신이다.
기원전 1세기무렵부터 이곳은 로마제국의 영토가 되면서 그리스의 도시들이 로마제국의 도시로 발전했다. 로마와 같이 원형경기장,극장,신전,도서관,화장실,시장등을 만들었다.
초기 기독교 교회가 자리잡다.
카파도키아 부근에서 발굴 후 깊이 85미터 지하 8층으로 이루어진 지하도시로, 한꺼번에 5000명 정도가 생활할 수 있는 큰 규모다. 지름1미터 정도의 구멍을ㅇ 수직으로 도시의 바닥까지 뚫어 지상에 잇는 공기와 물을 공급했는데, 이 때문에 깊은 우물을 데린쿠유라 불렸다.
데린쿠유는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탄압을 피해 지하로 숨어 들어가서 만든 생활공간으로, 개미집처럼 끝없는 미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각층마다 곳곳에 식당,부엌,교회,창고,우물 등이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예배를 보고 신앙을 지키면서 숨어 살았다.입구는 몸을 구부려야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좁았으며,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통로 곳곳에 돌로 회전문을 만들었다.연자방아처럼 생긴 회전문은 안에서는 쉽게 열리지만 밖에서는 잘 열리지 않았다.
로마시대 이후에도 지하도시는 이슬람세계의 침입을 피하기 위해서 계속 사용되었다.이외의 여러 개의 지하도시가 남아 있다.
바울이 터키의 아나톨리아 반도 출신의 유대인이다.바울이 선교활동을 펼치던 중에 세계 최초로 만든교회가 안티오크(안타키아)에 있었으며,이곳 안티오크의 신자들은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렀다. 에페스에는 성모마이라의 집과 성요한 교회가 있어 기독교 성지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잇다.
콘스탄티노플.기독교 세계의 중심이 되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인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발표해 기독교를 공인하기에 이르렀다.대제는 325년에 아나톨리아의 니케아(이즈니크)에서 300여 명의 성직자가 모인 가운데 종교회의를 열었다.여기서 하나님과 예수와 성령은 하나의 삼위일체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콘스탄티노플 교호lfmf 기독교의 중심으로 삼았다.로마 제국의 중심지인 이 도시는 기독교의 중심이자 유럽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 제국의 중심이 되다.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에 교회와 궁전, 원로원과 원형경기장을 만들고, 330년에 수도를 옮겼다.콘스탄틴의 도시라는 뜻의 콘스탄티노플이라 불렀다. 395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한 동로마와 로마를 수도로 한 서로마제국으로 분열되었다. 서로마는 476년 게르만족 침입을 받아 멸망했다. 동로마는 약 1000년간 더 번영을 누리며 발전했다. 동로마을 비잔티움제국이라고 한다.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전성기를 맞았다.
유스티나이누스가 비잔티움 제국을 다스리던 532년 1월 어느날 원형경기장을 빠져 나온 성난 군중들이 폭동을 일으켜 성소피아성당 등 이 도시의 주요건물이 참혹하게 불타고 파괴되었다. 황제는 527년 이 이륜전차경주를 과감히 폐지하였다. 매관매직을 없애고,무료 빵을 없앴다.여기에 익숙한 군중은 주동자 없이 폭동을 일으켰으며,황제도 선출하였다. 이때 황제는 도망치려다가 황후인 테오도라 황후가 도망가면 다시는 황제자리ㅣ에 앉을 수 없다며 반대하여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3만명으로 도시의 인구의 1/6이 죽었다.
즉위 5년만에 니카의 반란을 진압한 황제는 강력한 황제권을 바탕으로 과거 로마제국의 영 토 대부분을 다시 차지했고, 지중해를 제국의 호수로 만들었다. 도시는 100만명이 넘는 사람이 모여 사는 대도시가 되었으며,길까지 돌로 매끈하게 포장할 정도로 큰 번영을 누렸다.
넓은 영토와 여러 민족을 다스리기 위해 수백명의 학자가 옛 그리스와 로바의 법률을 수집하고 분석해서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만들었다.
황제가 죽고 난 후 권위가 약해지더니 7세기 초에는 군대가 반란을 일으키고 마음대로 황제를 세워 제국을 다스렸다.군인황제가 통치하다가 10~11세기에 황제만큼 번영을 구가하였으나 나중에 정체되었다.
10세기 무렵부터 튀르크족이 아나톨리아로 이동하기 시작햇다.11세기에는 셀주크 제국과벌인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패했고,12세기에는 룸 셀주크와 벌인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또 시 패배했다. 4차 십자군 전쟁 때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되는 등 비잔틴제국의 세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1453년 오스만제국의 마호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면서 1000년의 역사를 가진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이스탄불로 이름이 바뀌었다.터키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비잔티움 문화권에서 튀르크족의 이슬람 문화권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비잔티움 문화의 꽃, 성소피아성당
유스티아누스 때인 537년 12.17일에 5년여에 걸친 성소피아성당을 완성하였다.
수학자였던 안테미우스가 수석 건축기사를, 기하학자인 이시도루스가 조수를 맡았고, 목수 1000여명과 노동자 1만여명이 작업에 동원되었으며, 최고의 건축재료를 썼다.완성한 후 “솔로몬이여,우리는 당신을 이겼노라”고 외치다.
재료는 에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과 델피 신전의 대리석 기둥이 뽑혔고,붕괴되어 사용되엇/다
내부구조도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모일 수 있으나 앞뒤 거리가 너무 멀어서 뒷줄에 앉은 사람에게까지 예배가 잘 전달되지 않은 직사각형의 바실리카형 건물에서 모든이가 집중할 수 있도록 정사각형으로 몸체를 만들었다. 그위에 하늘을 상징하는 커다란 돔 지붕을 올렸다. 돔지붕을 24개의 엄청나게 큰 대리석 기둥을 받쳤다. 몸체의 벽과 돔이 만나는 부분에는 아치형 창문을 만들고 색유리로 장식했다.햇빛이 색유리를 통과하면서 오색찬란한 빛을 뿜어내면, 성당 안은 환상적인 모습으로 변했다. 성당 내부의 벽면은 화려한 모자이크화로 장식했다.벽이나 천장에 끈적끈적한 하얀 석고를 얇게 펴 바른 다음, 유리로 만든 금칠 조각들을 조금씩 다른 각도로 붙여서 모자이크화를 만들었다. 햇빛이 비치면 여러 갈래로 반사되어 성화가 훨씬 화려하고 성스럽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엿다.
이 황제 때 모자이크는 726년부터 시작된 성상숭배금지령에 따라 파괴되었다.성당은 이슬람의 모스크로, 지금은 아야소피아 박물관으로 변했다.
◎터키의 조상, 튀르크
터키땅에서 유스~황제가 비잔티움 제국을 다스리고 있을 때 현대 터키인의 조상인 튀르크족은 몽골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하고 있엇다.6세기에 처음 국가를 세우고 제국으로 발전햇다. 이후 몽골초원을 중심으로 한 동튀르크 제국과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서튀르크로 나뉘어 발전했다. 서튀르크는 비잔티움제국과 교역하면서 비단길을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이슬람교를 받아들였으며, 점차 서쪽으로ㅗ이동했다. 일부인 튀르크족인 셀주크 튀르크가 서쪽으로 이동하여 셀주크제국을 세웠고,영토를 넓혀 터키에 룸 셀주크를 세웠다. 뒤를 이은 오스만제국이 오늘날 터키땅을 중심으로 발달했고,직접계승한 나라가 터키이다.
터키는 1952년에 건국 1400주년 기념제를 열었다.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공화국을 건설한 1923년으로부터 30년,오스만 제국이 세워진 1299년으로부터는 650년밖에 지나지 않았으나 552년은 돌궐이 유연으로부터 독립해서 나라를 세운 해이다.
1923년 탄생한 나라의 정식이름은 터키어로 튀르기예 줌후리예티 즉 튀르키예 공화국이다. 터키는 힘센 또는 방패라는 유목민족의 힘찬 기상이 느껴지는 튀르크는 투쿠예에서 유래한 튀뤅에서 나온 말이다.
하늘에 속한 신성한 튀르크란 뜻을 가진 콱-튀르크가 중국 옛 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돌궐이다. 튀르크의 음을 따서 돌궐로 적었는데 돌突은 부딪히다.뚫다, 갑작스럽다라는 뜻이며,궐厥은 오랑캐를 뜻한다.돌궐은 중국인 날뛰는 오랑캐 족속이란 뜻으로 낮추어 부른 이름이다.삼국시대 고구려와 손잡고 중국을 견제한 돌궐이 바로 튀르크이다.
튀르크족은 몽골과 중앙아시아지역의 건조한 초원에서 서늘한 여름은 4개월간 계속되다가 8개월간은 혹독한 겨울이다.양,소,말,낙타 등의 가축을 키우며 살았다.마실 물과 먹을 풀이 항상 부족했다. 가뭄과 이른 추위는 부족 전체가 목숨을 걸고 새 곳으로 이동했다.
튀르크족은 주로 여름철과 겨울철 야영지를 따로 두고 두 곳을 옮겨 다니면서 생활했다.이동하는 길목 곳곳에서는 우물과 목초지를 만들었다.돼지,닭,오리 등은 키우지 않았다.속도가 너무 느렸기 때문이다.
한 게르에 사는 가족(오구쉬)을 중심으로 몇 집이 모여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다.튀르크어에서 결혼한다는 말은 게르를 가진다와 같은 의미이다. 게르를 가진 가장은 가족을 책임지기 위해서 말타기,활쏘기, 씨름 등을 익혔다. 일부이처가 원칙이나 형제가 죽으면 형제의 아내와 결혼해서 형제가족을 책임졌다. 부모게르는 어린 막내가 물려받았다.
대가족-가문(우루그)-씨족(보드) 씨족은 베이라는 씨족장이 다스렸다.여러 씨족이 모여 부족 (보둔)을 두었는데 세력에 따라 부족장은 카간 또는 야브구로 나누어 불렀다. 카간은 부족을 다스리는 최고 지배자로, 세금을 걷고 군대를 양성하며 재판을 담당했다.
부족내부나 부족 사이의 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능력이뛰어난 지도자가 부족을 이끄는 것이 무척 중요햇다. 능력을 보고 우두머리를 삼은 뒤에는 절대복종했다.
뮬란에 등장한 부족이 흉노족이다.돌궐을 세운 튀르크 족의 조상에 해당된다.진시황제의 만리장성이나 한무제의 비단길개척은 흉노족과 관계가 깊다.로마제국을 무너뜨린 게르만족의 s이동을 불러온 이들 역시 흉노족 갈래인 훈족이다. 족장 아틸라 지도아래대제국 건설했다.
*튀르크 족, 국가를 세우다.
열 명의 아들이 가진 10개의 l성 가운데 막내아들의 성이 아쉬나였는데, 아쉬나라는 말은 튀르크어로 늑대란 뜻이다. 그가 바로 튀르크 제국의왕을 배출하는 씨족의 조상이 되었다.
우리가 삼국시대인 시절인 6세기경, 튀르크족은 우수한 철생산 기술을 가졌음에도 아직 유연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 때 튀르크족을 이끌던 사람은 부민(토문)이었다. 유연에 철공급을 끊고 유연이 약해진 틈을 이용해서 부민은 스스로 일릭-카간 즉 나라를 세운 왕의 지위에 올랐다. 중국과 손잡고 유연을 공격해서 멸망시키다.
드디어 부민은 지금부터 약 1500년 전인 522년에 튀르크인의 나라가 탄생했음을 선언했다. 터키의 건국해로 기념하고 있다.
522년 부민이 죽자 아들인 무칸은 동부지역을, 동생인 이스테미는 서부지역을 각각 다스렸다. 동튀르크제국은 강력한 왕이 되었고,서튀르크는 중앙아시아 일대를 차지하다.오르혼비석에 새겨짐
서유기의 삼장법사는 당나라의 현장스님으로 인도로 가는 도중에 서튀르크 제국의 왕에게 정중하고 극진한 대접을 받고, <대당서역기>라는 책을 통해 당시에 겪은 일을 기록했다.
튀르크족은 왕국의 상속 때문에 분열되어 힘이 약화되었고, 통일한 수와 당이 공격해와서 동튀르크는 630년 당태종에 의해서 멸망당하고,서튀르크도 651년에 망하다. 이후 튀르크은
당의 지배를 받았다.680년 경 튀르크족은 독립운동을 펼치다.동튀르크의 왕족인 쿠틀룩은 부족을 통합하였다. 682년 튀르크제국을 세우다.일테리시 카간이라 불렀다. 뒤를 이은 카파간 카간(묵철) 넓은 영토를 차지했다. 뒤를 이은 빌게 카간은 튀르크족 스스로의 역사를 기록한 오르혼 비석을세우기도 했다.
빌게 카간이 살해되면서 제국은 분열된다.이 때 당군은 고구려계 고선지장군을 원정보낸다. 도착한 곳은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타슈겐트 부근으로 이곳은 튀르크의 한 부족인 투툰이 다스리고 있엇다. 투투은 당에 충성하고 협력했지만 당은 죽이고 재산을 빼앗다.그래서 그 아들은 주변 튀르크국가들과 아바스왕조에 도움을 청하다.
탈라스강가에서 튀르크-아바스연합군과 당이 대전투가 벌어졌다. 5일간의 전투는 연합군의 승ㄹ리로 끝나다.포로가 2만명으로 그 중 종이만드는 기술자가 있어서 제지술이 이슬람세계에 전파되었다고 한다. 중앙아시아 지역은 강력한 힘을 가진 아바스가 지배하고, 이슬람교가 널리 전파되었다.
전투이후 동튀르크 여러 부족은 유목민족의 전통을 유지하면서 불교를 믿다가 뒤에 몽골(원)지배를 받았다. 중앙아시아에 있던 서튀르크 여러부족은 아바스왕조의 지배 아래 이슬람교를 믿으며 유목과 농경생활을 했다.서튀르크 일부가 서쪽으로 이동하여 터키땅에 셀주크 튀르크와 오스만제국을 세웠다.
*현대 터키에서 유목민족의 흔적을 찾다.
아나톨리아 고원은 몽골초원처럼 낙타를 타고 양을 기르며 이동생활을 하는 유목민을 만날 수 있다.
토프카프 궁전은 오스만제국의 화려한 궁전이 마치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르를 보는 듯하다.
술래이마니예 모스크나 메블라나 박물관은 우상숭배를 금하는 이슬람교를 믿는 터키인들이 성인이 묻힌 관앞에서 경건하게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예로부터 튀르크족은 사람이 죽으면 말을 타고 고인의 천막 주변을 일곱 바퀴 돈 다음에 천막 앞에 와서 슬피 울엇다. 시신을 땅에 묻고는 흙으로 높게 덮은 뒤 주위에 돌을 쌓았다. 유명한 사람이 죽으면 그의 혼령을 보호신으로 삼아 제사를 지내고 복을 빌었다. 이런 관습은 셀주크 제국이나 오스만 제국으로 이어져 와, 유명한 이슬람지도자나 술탄이 죽으면 그의 시신을 모스크 안에 관이 드러나게 묻은 후에 성인으로 받들고 기도했다.
나자르 본주는 유목민족의 전통이 물씬 풍기는 액세서리다.나자르는 악마의 눈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고, 본주는 구슬을 뜻한다.
터키인들은 주위 다른 악마들이 나자르 본주의 한가운데 갇힌 가장 힘센 악마의 눈을 보고 무서워서 도망가기 때문에 재앙와 화를 막아준다고 믿는다. 현관,집안 곳곳에 걸어둔다.목걸이 등 장신구도 행운 상징이다.
터키어는 튀르크제국이 사라지면서 문자도 사라졌지만 유럽의 알파벳을 빌려서 만든언어이다. 터키인이 전체인구 70%를 차지하는 지역만 터키공화국의 영토로 한다.(1923년 공화국수립당시)
●터키 땅에 나라를 세운 셀주크 튀르크
유목생활을 하던 튀르크족이 아나톨리아고원에 등장l한 것은 10세기무렵이다. 그 중 하나인 셀주크 투르크는 셀주크와 토그릴이란 지도자 아래 사마르칸트 부근에서 출발해 페르시아(이란),시리아,예루살렘,아나톨리아 일대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셀주크의 영토가 된 예루살렘을 찾기 위해서 유럽에서는 십자군 원정단이 조직되면서 충돌이 빚어졋다.11세 후반에 더욱 많은 튀르크인들이 터키땅으로 이동해 살았는데 셀주크가 약화되는 시기에 룸셀주크를 세우고 튀르크-이슬람 문화를 꽃피웟다.
셀주크 투르크,아나톨리아에 진출하다.
고려가 통일할 즈음 960년 무렵, 튀르크의 한 부족이 중앙앙시아 우즈베키스탄의 부하라와 사마르칸트 부근으로 이주했다. 이곳은 비단길을 통해 동서교역의 중심지엿다. 이때 부족을 이끈 사람은 셀주크 장군이었다.그의 손자인 토크릴이 즉위한 1037년에 나라를 세웠고 이후 대제국으로 발전했다.바그다드는 한때 중국을 두려움에 떨게 했으며 이슬람문하를 발전시켰던 아바스왕조의 수도였다.
칼리프라 불리는 이슬람교지도자는 토그릴에게 술탄지위를 부여했다.그때까지 아랍인,이란인,이라크인이 이끌던 지도자가 이제 튀르크족에서 나왔다.
이후 용감한 사자라는 뜻을 가진 술탄 알프 아르슬란 때 서아시아 대부분을 통일하고 비잔티움제국이었던 콘야를 위협하였다.
1071년 반호수의 부근의 만지케르트에서 운명을 건 전투가 벌어졋다. 비잔티움의 20만명과 튀르크군의 5만명의 대결. 매복해서 대승을 거두고 황제까지 사라잡았다.
전투가 끝난 후 황제를 풀어주고 아나톨리아를 셀주크 제국의 영토를 삼고, 공물을 바치게 했다.여기에 그리스인들이 환영했다. 많은 튀르크인들이 아나톨리아로 이동해 와서 정착했고, 이슬람교도 점차 퍼져 나갔다.
셀주크 제국의 창시자인 셀주크도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960년경 20만호, 약 100만명의 튀르크인이 이슬람교를 믿었다. 이것이 오늘날 터키,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 등 튀르크족이 세운 많은 나라들이 이슬람 국가가 된 이유이다.
마을 중심에는 모스크를 세웠다. 모스크는 사각형 몸체 위헤 평화를 상징하는 둥근 지붕(돔)을 얹은 모양이며, 집단 예배를 보는 장소로 군사, 정치, 사회, 교육 따위의 공공행사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모스크의 귀퉁이에는 예배시간을 알릴 미라레트(첨탑)를 세웠다.
미나레트는 하늘을 향해 치솟게 만들었는데, 중간 부분에는 발코니를, 내부에는 계단을 설치했다. 하루 다섯 번 아잔(예배를 드리러 오라고 외치는 아랍어구절)을 외치는 무아진이 계단을 올라가 발코니로 나서서 마을 사람들에게 기도시간을 알렸다.매주 금요일에는 모스크에 직접 모여서 기도를 올렸다.
내부는 우상숭배의 금지로 성화를 그리지 않고, 기하학적인 아라베스크 무늬를 넣은 타일을 붙여 벽을 아름답게 장식했다. 모스크를 장식하는 타일과 바닥에 까는 카펫을 만드는 기술이 크게 발달햇다. 모스크 주변에 병원,목욕탕, 묘당, 학교 등을 세웠다.
새로 술탄이 된 사람은 금요일 기도회에서 자신의 이름을 큰소리로 말하게 햇고, 백성들에게 술탄이 누구인지를 알도록 햇다. 바그다드에 있는 칼리프로부터 예복과 터번을 선물로 받는 등 칼리프의 종교적 권위를 빌려 권력을 강화했다.
1090년 무렵이 전성기였다. 알프 뒤를 이은 말리크 샤 때에는 이집트까지 정복하여 제국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제국의 최고통치자는 술탄이었다. 실제로는 술탄의 친척이 주요 지역을 다스렸고, 그래서 술탄의 지위나 재산상속을 둘러싼 내분이 자주 일어났다. 형제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는 유목민족의 전통때문이었다 샤도 상속을 둘러싼 내분 때문에 암살당했다.
내분이 겨우수습된 1097년 시리아의 안티오크라는 도시에 낯선 군대인 십자군이 나타났다.
클레르몽페랑에서 교황의 호소에 응한 사람들은 신앙심,금은보화를 탐하는 기사들,7년 동안 흉년으로 굶주린 농민들, 영토를 넓히려는 영주들 각자 다른 목적으로 십자가를 달고 약 200년간 여덟 차례에 걸친 십자군 전쟁이(1096~1270)이 일어났다.
제1차 십자군전쟁은(1096년)에 각각 프,이탈,서부독일에서 출정하였다.안티오크는 1년동안 싸웠지만 함락되었다.매수당한 군사가 밤몰래 성문을 열어주었다. 이후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보니 튀르크 군사는 1000여명으로 불과했다. 함락당하다.이후 십자군은 약탈은 말할 것 없고 남녀노소할것 없이 살육으로 예루살렘이 피바다를 이루었다.
얼마지나지 않아서 셀주크 제국 이집트왕조의 왕인 살라딘이 십자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다시 빼앗다. 되찾은 뒤 살육과 파괴를 철처히 금했다. 약 2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과정에서 아나톨리아 지역은 십자군의 이동통로가 되었고, 튀르크인의 주요 도시드은 여러 차례 십자군에게 약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룸 셀주크, 아나톨리아에 세워진 첫 번째 튀르크 국가
셀주크제국이 한창 발전하고 있을 무렵인 1077년, 한 분파가 오늘날 터키에 룸 셀주크를 세웠다.옛 로마 지역에 세워진 튀르크 국가라 해서 룸(로마,로마사람)라 불린 것이다. 수도를 니케아(이즈니크)에서 콘야로 옮기고,1147년 제2차 십자군전쟁을 물리치면서 아나톨리아 주인이 되었다.이즈음 아나톨리아는 튀르크족의 땅의 뜻에서 투르키아로 불리기 시작했다.바다를 통해 지중해나 흑해로 나갈 수 있는 통로도 마련했다.
셀주크와 룸~시대에는 아나톨리아는 기독교와 이슬람세계가 만나는 곳이었다.이 세계와 동양과서양을 연결하는 무역을 중계함녀서 큰 이익을 얻었다. 동서양의 대상(카라반)들이 이 제국의 보호하는 무역로를 따라 서로 교류했다.또한 두 제국은 대상들이 안심하고 무역을 할 수 있도록 많은 편의(숙소3일무상,보험제도)를 제공해주었다. 오늘날 질좋은 모직물을 가리키는 앙고라는 당시 룸~의 앙카라지방에서 수출된 염소 털에서 유래한 말이다.카페의생산과 수출이 본격화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여러 지역에 동업조합을 만들었고, 인구 10만이 넘는 대도시가 여러 개 있었다.
룸 셀주크시대에 콘야에서는 메블라나가 만든 세마 춤이 유행했다.13세기 당시에는 대부분이 아랍어로 쓰인 쿠란을 읽을 수가 없었다. 이슬람교를 전파하기 만든 춤이다.
신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네이(터키 피리)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세마춤을 추는 사람인 세마젠들이 등장하면 웅성거리던 모스크 안은 조용하고 경건한 분위기로 변했다. 세마젠은 세이히(지도자)의 손에 키스를 한 뒤에 신을 향한 여러 동작을 하면서 엄청난 속도로 30여분 돈다.
룸~의 전성기는 1230년 무렵이었다.칭기즈칸이 세운 몽골제국이 아나톨리아까지 와서 초토화시켰다. 그동안 튀르크족은 전통적인 척후-유인-매복-기습전략을 이용해와서 승리를 하였는데 이 때에는 어찌된 일인지 이 전략을 버리고 쾨세다그 평원에서 몽골군과 대결했고, 그결과 룸~은 참패했다. 몽골에 복속되었다.룸 왕조는 1308년까지 이어졌으나 술탄권위는 떨어져 각 지역의 투르크족은 곳곳에 작은 나라를 세웠다. 이 중 하나가 오스만이 세운 오스만 공국이엇다.
양의 가슴이란 뜻을 가진 콘야는 고원 중앙에 있으며, 터키 10대 도시 가운데 하나다.광활한 평야에서 생산된 밀은 터키 전체국민 1년 양식이 되고 남을 만큼 풍부하고,자두와 살구 등이 풍부하다.콘야의 옛이름은 이고니온이다.
룸~의 수도로 현재 콘야의유적지 대부분이 이 때 세워진 것이다.또한 메블라나 교단의 발상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12월이면 메블리나 축제가 열린다.
*이슬람교를 믿는 무함마드 케말의 하루
하루 다섯 번 기도를 드리고, 일주일에 한 번 금요일에는 직접 모스크를 찾는다. 라마단 기간은 해가 뜨기 전에 아침을 간단히 먹고 나면 해가 지고서야 저녁을 먹을 수 있다. 해가 있는 동안 금식은 창시자 무함하드의 고행을 생각하며 참는다.
터키공화국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여 종교허용했다.
터키인들은 매일 기도를 빠뜨리지 않고, 메카순례를 염원한다. 모스크(자미)는 터키에 6만
7000여 개가 있고, 이스탄불만 3000여 개가 있다.셰케르 바이람(추석과 같은명절-라마단 후 3일 동안 영양보충하기 위해 친척들과 우정)과쿠르반 바이람(이슬람력으로 12.10부터 4일간희생제-가난한 사람들에게 고기나누주기도 한다.)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쿠란과 하디스에 근거한 생활을 하고 있다.
터키인들은 평생동안 신ㅇ앙고백,기도,단식,희사,메카순례라는 5가지 의ㅣ무를 실천해야 한다. 무슬림은 아침에 해뜨기 전 잠자리에서 일어난 후, 정오를 넘긴 낮,오후,해가 질 무렵, 잠자리에 들ㄹ기 전, 이렇게 다섯 번 기도를 한다.금요일에는 모스크에 모여 예배를 보는데, 입구의 우즈야(우물)에서 손,입안,콧속,얼굴,팔,머리,발을 닦는 우두라는 의식을 행한다.
안으로 들어가 메카 방향(키블라)을 가리키는 홈 미흐라브를 향해 기도를 한다.똑바로 선채로 두 팔을 배꼽위해 포개고 쿠란의 기도문을 외운다음, 바닥에 엎드려 이마와 코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며 기도한다.
메카의 카바신전을 일곱 번 돌고,카바 동쪽에 있는마르와 동산과 사파동산을 일곱 번 왕복함으로써 영혼을 깨끗이 한다. 메카순례를 마친 사라a을ㄹ 하지라고 하며 존경한다.
◆비잔티움 제국을 무너뜨린 오스만 제국
몽골침략으로 룸셀주크의 세력이 약화된 사이,룸 셀주크와 비잔 티움제국 사이에 있던 작은 부족이 부족장 오스만을 중심으로 1299년 오스만 공국을 건국했다. 이후 오스만의 뒤를 이은 술탄들이 끊임없이 비 잔티움 제국을 침략하고 동서로 영토를 넓히면서 제국으로 발전했다.7대 술탄 메흐메트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비잔티움제국을 무너뜨렸다.1000여년의 역사를 가진 기독교세계의 정신적 지주였던 비잔티움 제국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이슬람교를 믿는 오스만 제국의 시대다 열렸다.
아들인 오르한에 이은 무라드 1세는 동서로 정복전쟁을 벌였다. 1세는 졍예부대인 예니체리를 만들었다.수도를 유럽지역인 아드리아노플(에디르네)로 옮긴 후 유럽정복에 나섰다.발칸반도를 빼앗겨서 유럽으로부터 고립된 비잔티움은 도움을 받지 못했다. 당시 유럽은 왕권 강화되고 도시와 상업발달하기 시작하였으나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통일된 국가가 출현되지 못하였다. 흑사병과 영.프전쟁으로 혼란스웠다.
발칸반도를 차지한 1세는 반란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 아시아인은 유럽으로 유럽인은아시아로 강제이주시켜서 다양한언어와 종교를 가진민족이 뒤섞여 살기 시작했다.
1세 이후 바예지드1세는 이을드름(번개)처럼 동서로 번쩍이면서 영토를 확장하다가 몽골계 티무르에의해 아들과 함께 포로된다.패배한 후 전모습을 회복한데는 50년세월이 걸렸다.
마호메트 2세는 배72척을 갈라타 탑 동편의 톱하네에서 끌어올려 언덕을 넘어 골든혼 쪼기 카슴파샤바다에 내려놓는 데 성공했다.그러나 콘스탄노플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개기월식이 나타나 불길한 징후라 사기저하되었다. 이 틈을 이용해 오스만군은 서쪽의 육지와 동의 바다에서 협공하고 우르반의대포가 성벽을 부쉈고, 예니체리가 단숨에 성벽을 안쪽을 뚫고 들어가 비잔티움과 맞붙었다.콘스탄티누스11세가 전사하면서 항복하다.
서로마제국이 무너진 지 1000년 만에 비잔티움제국(동로마)도 멸망하였다.유럽동쪽을 지키면서 이슬람세력의 공격을 막아 주던 방파제가 무너져 버린 것이다. 그후로 200여 년 동유럽의 여러 나라는 오스만의 침략을 받아야 했다.비잔티움이 멸망하면서 많은 학자들이 그리스로마시대의 책과 문화유산을 가지고 유럽으로 이동해 와 르네상스가 발달하는데 영향을 주기도 했다.
메흐메트2세는 파티히(정복자)란 이름에 걸맞게 정복전쟁을 18년간 벌인결과 흑해를 오스만의 호수로 만들었고, 지중해를 차지하면서 동방무역을 당담하다.서유럽은 인도와 중ㄱ국으로 가는 다른 길을 찾을 수 밖에 없었는데 이 때 에스와 포루투칼이 신항로 개척의 길로 나서게 되었다.
콘스탄노플을 이스탄불로 바꾸다.
1453.5.29일 마호메트 2세는 콘스탄노플로 들어갔다.성소피아성당 안은 메카방향을 나타내는 미흐라브가 만들어졌고, 민바르라는 설교단도 세워졌다.우상숭배금지에 따라 석회를 발라 모자이크를 덮었다.
오스만의 전통대로 병사들에게 3일간 약탈을허용했는데 2세가 보기에 콘스탄노플이 파괴하기에는 너무 아깝고 소중한, 역사의 도시이자 동서교역중심지였기에 약탈을 중지시켰다.
수도도 아드리아노플을 아예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꾸고 옮기다.
성당 옆에 토프카프궁전을 짓고 예니체리부대에 궁전방어를 맡겼으며,디반을 두어 대신들이 국가의 중요한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술탄은 알현실에서 디반회의의 결과를 듣고 외국사신들을 맞았다.
메호메트 모스크를새로 지었다.옆에는8개의 메드레세(이슬람교신학교),순례자 숙박소,공동취사장,병원,대상숙소,자신이 묻힐 묘당을 함께 지었다.모스크와시장,공공교육기관과 자선기관을 함께짓는 대규모 공공 복합단지인 퀼리예를 만들어 이슬람교에서 꿈꾸는 이상적인 도시모습을 꿈꾸다. 이스탄불에는 큰 규모의 퀼리예를 중심으로 여러 개의 마을이 모여사는 지구(나히예)가 13개나 만들어졌다.
술탄은 그랜드 바자르(카팔르차르시)란 큰 시장을 만들었다.이 곳 상점에는 제국전체에서 모여드는 대상들이 가져온 물건들로 넘쳐났다.수공업자들은 동업조합인 길드을 조직했다.이스탄불은 이후 500년 가까이 제국수도로 번영을 누렸다.
토프는 대포, 카프는 궁전이란 의미인데,보스포루스 해협을 향해 대포를 놓았기에 이렇게 불렀다.궁전에는 황제의문(밥 이 후마윤),평안의 문(밥 웃 셀람),지복의 문(밥 웃 사세트)등 3개의 문이 있다.
황제의 문을 통과하면 군주와 궁전을 수비하는 예니체리라는 근위대가 있어 예니체리 마당이 나온다. 평안문를 들어서면 향나무들이 있는 디반회의가 열린 곳이다. 디반의 방 앞마당에는 출정식,외국사신 접대 등 각종 행사가 열렸다. 지복의 문은 술탄과 술탄의 측근만이 통과할 수 있는 문으로,마당에서는 술탄즉위식이 열렸다. 알현실 건물 앞에는 공식행사때 술탄의 왕좌가 놓였으며, 알현실에서는 술탄이 사람을 만났다. 술탄의 여인과 가족들이 생활하는 하렘은 이 세 번째 문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다.
마호메트2세는 이스탄불에 다양한 민족의 이주결과 대립과 갈등이 생기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밀레트제도를 도입햇다. 터키어로 종교공동체,또는 민족을 뜻하는 말로 종교별로 구성된 일종의 종교 자치제이다.
오스만제국은 각각의 밀레트를 존중하기 위해 제국안에서 세 번의 주일을 운영한 것이다. 결혼이나자녀교육 등 일상 생활과 법률, 재판 등도 밀레트 스스로 운영하도록 했다.
자율권을 얻은 대신 술탄 정부에 세금납부하고, 군대에 가는 의무를 졋다.술탄은 무슬림과 관련된 재판이 밀레트 사이의 분쟁이 있을때만 관여했다.
이슬람교를 강요하지 않고 그들의 종교와 관습과 문화를 인정했다. 대신 특별인두세를 더 내면 되었다.이슬람교로 개종도 허용하였다.
조세제도를 정비해 상인과 장인의 이익을 보장했다. 외국인들도 2퍼센트 세금만 부담하면 이스탄불에서 자유롭게 상업활동을 하게하엿다. 이스탄불의 갈라타 지구곳곳에는 상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만들어졌다.
새로운 병사, 신식군대란 예니체리 부대는 오스만이 건국한 지100여년 만에 대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하였다. 3대 술탄인무라드 1세에 만들어진 이 부대는 튀르크인으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나 발칸반도 기독교인들이 더 많은 수를 차지하기도했다. 강제징집된 뒤에은 이슬람교로 개종시켜 엄격하게 신체훈련과각종 무기를 다루는 d기술을 익히게 했다.
사령관인 아가의 권한은 막강햇다. 절정에 달한 16세기에는 숫자가 m1만 5000명에 이를 정도였다. 유럽 기독교 국가들의 두려움의대상이었다.
영향력이 커지면서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무력을 이용해서 재산을 쌓고 이익을 얻는 일에 끼어들었으며 17세기부터는 술탄을 죽이거나폐위시키기도 했다.
여러 번 시도 끝에 마흐무트 2세때인 1826년에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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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니체리의 군악대 70여명의 메흐테르
수 많은 영화속에 등장한 드라큘라는 실제 인물로 본명은 블라드 체페슈이다. 루마니아 옛 왕국 중 하나인 왈라키아 공국의 왕위 계승자였다.드라쿨은 용 또는 악마란 ?뜻의 루마니아인데 그의 아버지가 용문장을 달고 다니던 기사단의 한 사람으로 활약해서 붙 여진이름이다. 그는 용의 아들이라는 뜻의 드라큘라라고 불렸다.용의깃발을 들고 메흐메트2세에 맞서 루마니아를 구한 영웅이었다. 침략을막는데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십자가를 두려워 한 이유는 군주가 된 후에 그에 반대하는 귀족은물론 포로 등을 꼬챙이로 찔러 죽이곤 하였?다. 피를 흘리며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식사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지켜보았다. 꼬챙이가 루마니어로체퍼슈인데 여기서 그의 이름이 유래했다.
실크로드의종착지, 그랜드 바자르에는 없는 물건이 없다.
시장을 바자르라고 하는데 이는 고대 페르시아어로 식량을 의미하는 아바와 장소를 뜻하는 자르가 합쳐진 말이다.
이스탄불에는 2개의 유명한 바자르가 잇다. 하나는 이집트 시장인 므스르 차르시인데 카이로에서 수입한 허브같은 향신료가 거래되었다. 그랜드 바자르(카팔르 차르시)는 마호메트 때부터 있었다.길양쪽으로 3300여개의 가게가 들어서 있다 출입구가 20개가 넘어 한번 들어서면 길을 잃어버리기 쉽다. 중심지에는 보석이나 귀금속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베데스텐
이라는 울타리가 있었다. 귀금속,카페가 유명하다.유목민족으로 초원에 이동식 천막을 치고 카펫을 바닥에 깔거나 벽에 걸고 살았다.이슬람교를 믿으면서 모스크에 들어갈 때 신발을벗고 무릎을 꿇은 채 이마를 바닥에 대고 절을 했기 때문에 바닥에 카펫을깔아놓았다. 질좋은카펫을 칼리라고부른다.도자기가 유명하다.
■유럽을 떨게 한 오스만제국
오스만 제국은 16세기에도 영토를 계속 확장해 슐레이만 1세때는 아시아,아프리카,유럽 세 대륙에걸친 대제국을 발전했다.동지중해는 오스만의 호수가 되었다.슐레이만은 법을 만들고 통치제도를 정비해 카누니(입법자)로 불렀으며,영토를 넓히고 법률,문학.건축 등의 분야에서 큰 업적을 이룩해 제국의전성기를 이루었다. 술래이마니예 모스크와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블루모스크)등 제국을 대표하는 건축물들도 이때 세워졌다. 술래이만이 세상을 떠난 후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지배층이 대립함ㄴ서 어려움을 겪게 된 오스만은제2차 빈 포위공격에 실패하면서 정체되기 시작했다.
1520년,술레이만 1세는 지혜의 왕 솔로몬의 튀르크식 발음으로 즉위 당시 25세이다.그의 아버지인 셀림1세는 오스만이 술탄을 칼리프를 겸하게l 하였다.46년을 통치한 술래이만은 13차례나 원정을 떠났다.술레이만 통치하는 동안 서유럽은 에스와포루이 신항로를 개척하였고,알프스이북지역에서는 르네상스가 꽃피웠으며,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등 근대의식이 싹트면서 절대주의 사회로 성장하고있었다. 하지만 서유럽은 오스만은 여전히 부서운 존재였고, 제국팽창 앞에서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1529년 9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첫 번째 패배를 맛보았다.
술래이만은 약 2000만명이 넘는 제국의백성을 다스렷는데 수 많은 민족이 포함되어 있었다.복잡한 제국을 다스리기위해서 제국의 모든 백성에게 똑같이 적용될 술레이만법전을 만들도록 명령했다.
소집이란 뜻을 가진 데브시르메는 다른 민족이나 종교인 가운데우수한 인재를 뽑는 제도로,1380년 무라드 1세가 처음 실시했다.이를 통해 발칸이나 아나톨리아의 기독교마을에서 소집한 소년들을 예니체리 부대원으로 양성했다.이들중 아주 우수한 대원들은 궁전학교에 보내어 14년 동안 훈련받고 술탄의 비서나제국의 행정관리가 되었다.
술탄은 누군가를 관직에 임명할 때 출신이나 계급따위에 신경을 쓰지않았다.능력이 뛰어나나거나 전쟁에 나가 큰 공을 세우면 얼마든지 높은관직에 오르고 부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오스만의 각 길드도 구성원들의 생계를 보호하고 친목을 도모했으며,품질과 가격을 통제하는 등 생산활동을 규제했다. 공동으로 기금을모아 병든 길드 조합원을 지원하고, 장례비용을 대거나 고인의 아내와아이들을 도와주기도 했다.무라드4세 때인 17세기에는 무려 57개 부분에서서 1000개가 넘는 길드가 조직되었다.상업의 발달함에 따라 국제무역도 발달했다.
술래이만의 아내인 록셀란왕비를 잃었고, 술탄의 두 아들은 왕위를 노린단 이유로 죽이고, 유일한 아들셀림 2세는 무능력에 술꾼이었다.
술래이만의 총애를 업은 록셀란은 하렘을 토프카프 궁전으로 옮긴 후 정치에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다른 여자가 낳은 아들에게 반란죄를 뒤집어씌어 암살하고 자신의 아들 셀림을 술탄으로 만들었다. 자신의 무능력한 아들을 술탄으로 만든 후 갖은 음모와술수 를 꾀했다.
본래 하 렘은 아랍어 하람에서 생겨난 단어로 종교적으로 금지된, 신성한 장소 등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일반인의 출입이 금지.통제된 곳으로,이슬람 사회에서는 가까운 친척 외에 일반남자들은 출입할 수 없는 장소엿다. 궁전 후궁의 처소뿐만 아니라 무슬림 여성들의 생활하는 공간을 모두 하렘이라 하다. 하렘은 전통적으로 술탄의어머니가 관리했다.
약화된 셀림2세,무라드3세 때에는 명재상 파샤가 보좌한 덕에 영토가 계속 확장되기는했지만,더 이상 술탄이 직접전쟁터에 나가지않았다.행정관료와 군인을 중심으로 한 재상(베지르)와 장군(파샤)가문의 세력이 강해졌다.
술탄의 약화된데는 왕위계승제도에 문제가 있었다.누구든 능력이뛰어난 사람이 술탄이 되었다.유목민족의 전통이다.술탄이 되기 전 왕자들은각 지방에서 지방관으로 경험을 쌓았다.왕위다툼에서 경험많고t 능력있는왕자가 술탄이 되기는 햇지마,이런 적자생존과 형제살해는 많은 문제점을 낳았다. 술탄이 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했고,하렘의 정치개입도 치열했다.
술탄형제들을 죽이는대신 금빛감옥이란 카페스에 가두었다.(마호메트3세 사후 14세 마호메트1세와 동생 무스타파밖에 남지 않았다.)
아흐메트1세는 성소피아성당보다 더 멋진 모스크를 짓고 싶었서 만들어진 것이 블루모스크이다. 1609~1616년에 세워진 모스크로 푸른빛의 화려한 이즈니크산 도자기타일로 장식되어 있어 있다.
이모스크에는 미나레트는 6개가 있는데 터키어 6은 알트,황금은 알툰인데 비슷한 발음 때문에 오해가 생겨서 나 왔다는 것인데 이는 건축가가 제국의 어려운 재정상황을 고려했다는 것이다. 이슬람성지인메카의 모스크만 6개의 미나레트를 가지고 있기에 그렇다는 견해도 있다.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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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탄 아흐메트1세가 죽은 후 32년 동안 그의 아들 세 명이 차례로 술탄이 되었다. 14세에 술p탄이 된 오스만 2세는 능력이 뛰어나 제의 파티히로 촉망받았지만,예리체리 부대를 견제하려다가 반격을 당해 4년만에 처형되고 말았다. 그후 동생 무라드4세,이브라함이 술탄이 이후에는 연장자에게로 계승되었다.이때부터 술탄은 군림하되 통치하지는 않았다.대신에 강려간 힘을 가진 귀족가문ㄴ이 나라를 운영했다.
그러면서 오스만은 세력이ㅜ점차 쇠퇴해 갔다.권력이 중앙으로 집중되지 않고 지방으로 분산되었으며, 각 지역에서 지방세력의 힘이 커졌다. 정체하는 사이 서유럽은 절대주의 국가로 발전하다.
*동서양의 대립,이슬람 세밀화와 베네치아 화풍
◆개혁의 기로에선 오스만제국
제2차 빈포위공격이 실패하면서부터 오스만은 정체되기 시작했다.시민과산업혁명을 쟁취한 서유럽을 따라잡지 못하고,술탄권력은 약화되었으며 영토는 줄어들었다.러시아를 비롯한 유럽여러나라와 전쟁에서 계속 패배했고,19세기에는 발칸반도와이집트,아랍지역의 영토를 잃어버렸다. 제국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술탄이 중심이 된 탄지마트(개혁)를 추진했지만,근본적이 제도개혁이 따르지 않아 큰 성과를 거두지못했다. 청년 오스만인들이 주도한 제1차 입헌혁명이 성공하면서 이슬람권에서는 최초로 헌법을 만들고 의회를 여는 등 근대화를 추진했지만,곧바로 술탄의 반동정치로 혁명을좌절되었다.
술래이만1세 황금시대 이후재상과 장군가문이 정치를 이끌었으며,술탄권력과중앙통제력은 약화되었다.예니체리부대는 규모가 커졌지만 무능.부패했으며,왕위쟁탈전에끼어들기도 했다. 곡물가격이 오르는 등 물가상승으로 민중들의생활은 어려워졌다.여러종교를 믿는 다양한 민족간의 충돌도 점차 늘어났다.
여기에 비해 서유럽은 절대주의국가로 발전하고있었다.
무역의 중심이 지중해서 대서양으로옮기자 오스만은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었다.1683년 14만명을 이끌고 간 재상 무스타파는 빈을 함락하지 못하다.이후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공격으로 1699년 굴욕적인 카를로비츠 조약을 맺고 영토의일부를 이들 나라에 넘겨 주었다
1703년 술탄이된 아흐메트3세는 서유럽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사절단을 보내다.유럽처럼 여러 기술이나 복장 등을 도입하고 베르사유궁전처럼 튤립을 심었다.서구화상징으로 튜립을 심었기에 이 시대(1718~1730)를 랄레 데브리(튤립시대)라부른다.
다행히 평화는유지되었으나 술탄과귀족들의 사치와 향락 때문에 나라살림은 적자가났고,물가가올라 백성의생활은 더 어려워졌다.
이 시대의 개혁은 주로 군사훈련이나 무기개선 등 군대개혁에만 치우쳐 근본적인 제도개혁으로까지 이어지는 못했고, 유럽식 생활양식 또한 상류층에서 유행하는ㄷ 그쳤다
군대개혁은 예니체리 부대가 강력하게 저항했다.
반면 일반사람들은 그림자 인형극 카라괴즈(검은 눈)를 보며 온갖 시름을 잊었다. 무식하고 욕을 잘하며 직설적인 카라괴즈와 거만하고 잘난 척하며 얌체같은 하쉬바트가 걸쭉하게주고받는 풍자와 해학 넘치는 대사가 일품이다.
카웨에 모여 커피를즐기기 시작했다.15세기 중엽에 오스만에전래되었다. a커피는 본래 포도주나 술을 의미하는 카와라는 아랍어에서 유래한 말이다.메블라나의 수피즘을 믿는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고 춤을 추면서 몰아 상태에 빠지자 애호가들은 신에 가까이 가는 매개체라고 하고,반대론자들은 이성을 마비시키는 사탄음료라 하면서 논쟁이 일었다.
카웨에서 유래한 것이 카페이다. 비엔나 커피는 오스만 군인들이 빈(비엔나)에서 급하게 후퇴하면서 버리고 간 자루에 담긴 커피가 서구인들에게 전해지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한다.
유럽의여러나라가 시민과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근대국가로 발전하고 있었던 데 비해 오스만은 정체와후퇴를거듭하고 있어서 유럽의 병자라 놀림을 당하다.
2차 빈 포위공격이실패한 후 18~19세기 동안 오스만은 유럽 여러 나라의 침략에 의해 많은영ㄷ토를 잃었다.전성기에 비해 영토의 40%,인구의 20%가 축소되는 등 위기를 맞았다.
오스만 제국은 19세후반 내재 러시아침략을 받았다.1853년에는 남하정책을 추진하던 러시아가 흑해연안의 크림반도까지 침략해 와 크림전쟁이 일어났다.
마흐무트2세와 서구식 교육을 받은 관료들은 군사제도나 교육제도의 개혁 등 위로부터 개혁을 추진했다.예니체리의 반란을 진압하고 해체하고(1826년) 무함마드의 승리한 용사라는 신식군대를 만들었다.의복개혁도 추진하였다.원래 모로코등에서 남자들이 쓰던 모자인 페즈를 착용하도록 하다.복장으로 사람의 직업이나 지위,종교를 구분해서 차별하는 일은 없어졌다.p
압둘 마지드1세와 압둘 아지즈 때 탄지마트가 추진되었다.술탄의 귈하네 칙령에 따라 서구화가 추진되었다.
1.제국주민은 누구나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으며, 대신에 군대에 가고 세금을 낸다.
2.경찰서와소방서,우체국이 만들어졌다.이 통신망은 터키공화국을 수립하는ㄷ 큰 영향을 주엇다.
3.법률제도도 바뀌었다.세속법정에 다룬다.
4,교육제도도 개혁되었다.
이런 개혁은 실패햇다.필요한 전문인력과 자본이 부족했기 때문이다.보수주의자들은 이슬라교 정신과 기본질서를 파괴한다며 강력하게 저항했다.개혁과정에서 빌린 외채 때문에 경 제적위기를 맞았다.결정적인 것은 의회나 입헌군주제와 같은 근본적인 제도 개혁없이,술탄이전제군주제는 그대로 둔 채서구식 기술이나 제도만을 도입하려 했던 데 있다.때마침 1876년 일어난 오스만-러시아 전쟁에서 오스만이 패할 가능성이 커지면서유럽열강의 간섭도 심해지자 탄지마트도 위기를맞았다.근대식 군대가 효과적 d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압둘 마지드1세는 서구화를 지향하고 국력을 새롭게 갖출 목적으로 보스포루스 해안에 정원으로 가득 찬 곳이란 뜻의 돌마바흐체 궁전을 지었다.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해 지은 것으로 1차 입헌 혁명 때인 1877년 오스만 사상 처음으로 의회가 열렸으며,1938년에는 터키공화국의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이 사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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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오스만 운동은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구성해야 하고, 참정권도 주어야 한다고 하였다t. 입헌군주제를 주장했다.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던 해 1876년 쿠데타를 일으키다. 의회와 헌법제정을 조건으로 하미드 2세를 술탄으로 하다.오스만 최초의 성문헌법인 미드하트 헌법을 공포하다. 1차 입헌혁명이 성공하다.프랑스 혁명에서 실현하려던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담았다.3권이 분립,모든 국민에게 종교자유,표현의자유, 법앞에서 평등을 보장했다.
공포되 헌법에 따라 1877년 3.19일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최초의의회가 열렸다.이슬람권에서는 최초의 의회와 헌법을 가진 입험군주국이 되었다.술탄이 1878년 의해를 해산하여 혁명은 실패하였다.권력이축소되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술탄의 반동정치와제국주의 열강들의 끊임없는 침략이 맞물렸기 때문에.
술탄은 탄지마트식 개혁d을 계속 추진했다. 도로와 철도가 건설되었다. 범이슬람주의 운동을 펼쳐 서구식 입헌공화국을주장하는 개혁파를 견제하고,밖으로느 발칸반도에서 전개되는 범슬라브주의 운동을 억압하면서 아프리카에서 반유럽투쟁을 이끌었다.이런 정책은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1908년까지영토를 더 이상 잃지 않았다. 이기간동안 정치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아래 신문이나 잡지가 많이 발행되었으며, 이는 이후 입헌정치가 부활하고 민주주의가 확대되는 기반이 되었다.
★오스만제국에서 터키 공화국으로
제1차 입헌 혁명이 좌절된 후 청년 오스만인들은d 연합진보위원회를 조직하고 제2차 입헌 혁명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그러 나 오스만은 1차대전 때 삼국동맹에 가담했다가 패전국이 되면서 연합국에 의해 분할 점령될 위기를 맞았다.무스타파 케말이 권리보호연합회를 조지가고 터키의 독립운동을 이끌면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케말은 그리스와 연합국을 몰아내고 아나톨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터키 공화국을 수립한 후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아프리카에서는 영의 종단정책과 프의횡단정책의 대립이,동유럽에서는 독의 범게르만주의와러의 범슬라주의가 부딪혔으며,서아시아에서는 독의 3B와 영의 3C정책이 대립햇다 유럽에서는 독일,오스-헝가리.이탈의 삼.국동맹과 영,프,러의 삼국협상이 대립했다.이후 1차대전으로 발전했다.
술탄반대운동이 유럽이나 근대식 학교에서 서구식교육을 받은 엘리트 청년장교단이 주축이 이루었으므로청년 튀르크라 하다. 이후 연합진보위원회로 바뀌다.
오스만주의실패이후 범이슬람주의가 제안되었지만 현실성이 없었다. 이미 와하브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오스만은 두 차례의 발칸전쟁으로 유럽쪽 83%,인구의 69%를 잃었다.영토는 줄어들었지만 이슬람교,튀르키ㅇ인이라는동질성이 높아지면서 튀르퀴인에 의해 국가가 건설된 가능성이 높아지다.
아르메니아인이 러시아와 협력해서 터키를 공격하려 했고, 동부에서 반란을 일어날 가능성이있어서 추방하였는데 이이동과정에서 대학살 ,영양실조,탈진,질병 등으로 50만명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1차대전이 끝나갈 무렵 메흐메트 6세는 연합국분할 점령을 막고 제국을 지키는데 적극적이지 않았다.이에 비해 터키아버지(아타튀르크)불리는 무스타파 케말은 남아있는 오스만의 군대와 민족주의 단체를 해산하라는 술탄의 명령을 받고 흑해 삼순에 상륙했다. 술탄의 뜻을 거역하고 연합국이 점령당한 국토를 해방시키기위해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오늘날 이날(5.19)을 청년과 스포츠의 날이라고 해서 국가 기념일로 하고 있다.
로잔조약을 체결하면서 이스탄불을 차지하는 대신에 에게해의 여러 섬을 그리스에게 양보하였다.
터키수도 앙카라는 정했을 당시(1923.10.13)인구 3만정도의 조그만한 촌락이었다. 공화국이 독립할 당시 이스탄불은 술탄과 서구열강의 지배아래 있었고, 군사적 방어를 하는 데도 적합하지 않았다. 국민의회 소집 등 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저항운동이 주로 앙카라를 중심으로 한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전개되었다.
▲현대터키
터키공화국은 세속주의를 중심으로 근대화를 추진했다. 터키문자를 만들고 페즈를 쓰지 않게 했으며,모든 국민이 성을 갖도록 했다.평화적 정권교체도있었지만, 정치적혼란은 군부 쿠테타를 가져오기도 했다.현재는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의 대립,경제위기,유럽연합 가입등의 과제를 안고 있다.
터키는 세속주의,공화주의,국민주의,개혁주의,민족주의,국가주의 터키발전을 이끌어 갈 6가지 기본원칙을 발표했다.
페즈를 금지하고 유럽식 모자인 샤프카를 쓰게하다. 여성들이 공공장소에서 히잡을 쓰는 것이 금지되었다.
라틴문자를 기초로 터키어 발음에 맞게 만든 터키 문자를 발표했다.터키어로 된 쿠란을 읽엇다 언어와 문자가 하나가 되었다. 터키민족주의가 실현된 것이다. 그래서 문맹률이 거의없어졋다. 반면에 아랍문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어, 오스만의 유산을 계승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본래 대부분의 터키인들은 거의 성을 쓰지 않았다.주로 부의 이름을 쓰거나 자신의 이름에 출생지나 신체적 특징을 나타내는 말을 덧붙여서 불렀다.이름이 같은 사람이 여러 명이 있을 수 밖에 없엇다.이를 해결하기 위해 1934년에 모든 국민들은 의무적으로 성을 가질 것을 법으로 정했다.
키프로스 섬은 그리스계와 터키계 7:3비유로 정부를 구성하기로 합의한 후 1960년 키프로스 공화국으로 독립햇다. 이후 그리스계가 그리스로 통합을 주장하며 내전을 일으키자 터키의 지원을 받은 터키게정부를 따로 수립했다.
아나톨리동부에 쿠르드족이 분리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3천만명이 터키,이라크,이란,시리아,아르메니아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
차이는 터키 국민들이 사랑하는 음료이다.
터키요리는 중국과 프랑스요리와 더불어 세계 3대 요리이다. 쉬쉬케밥,되네르 케밥,요구르트가 유명하다. 라크는 포도로만든 무색 투명한 증류수로 물과 섞으면 뿌옇게 탁해지므로 아슬란 스투(사자의 젖)이라 한다.터키인들은 축구광이라 약200여개의 프로축구팀이 있다.밸리댄스가 있다.
2012.12.30 20:20 두암동 미라보아파트에서
1시간 전에 정리를 끝냈으나 컴퓨터 잘못인지 내 실수인지 일부가 날라가 버려서 무진장 속에 상한 상태에서 어렵사리 정리를 끝내다.자세히 정리한 이유는 보름간 터키 유적답사를 가기 때문이다.얼마 전에 봤던 <터키,1만년의 시간 여행1,2>를 어느 선까지 정리할 지 고민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