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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나는 소리 부자다]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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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소리 부자다]
장덕천 시집 / 문학아카데미시선 239 / 문학아카데미(2011.11.25) / 값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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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부자
장덕천
뜰이며 안방까지 채워주는 새소리
꽃과 나무들 움트고 잎 맺고 가지 벋어나는 소리
꽃과 나무들 파란 옷 노란 옷 붉은 옷 벗어던지는 소리
삶의 푸른 소리들 내 안에 가득가득 채워
소리의 눈으로 잠들고 소리의 귀로 일어나는
소리의 세월로 생이 꾸며지는
소리의 시집
언젠가 나도 바람의 소리로 남을 것이다
이 세상 부러울 거 없는 나는 소리 부자다
참 부자다.
보리菩提수련
장덕천
꽃도 깨우침이 얻는가
이 아침 보리 수련에서 보살님 얼굴을 본다
햇살로 웃으며
바람으로 내뿜는 향기
하늘은 비어 더욱 푸르다
사흘 동안에
천년 깨달음을
씨앗으로 여며 놓고
조용히 물로 사라지는
보리 수련
내 마음 속 물 속에는 아직도
꽃이 한창이다
가시 수련의 말
장덕천
진흙탕에서 피었지만
살다보면 상처 없는 삶 어디 없으랴.
고운 세상 고운 마음 열고
바람의 마음으로 살다 가라 하네
물의 마음으로 살다 가라 하네.
침묵의 소리
장덕천
꽃은 혼자 피지 않는다
산수유가 노랗게 피면
개나리도 덩달아 노랗게 피고
진달래가 붉게 피면
연산홍이 시샘하듯 붉게 핀다
들꽃들도 자기 나름의 꽃을 피워
경쟁하며
세상에 자태를 뽐내다
때가 되면 조용히 진다
꽃에도 슬픔이 있다
아침햇살에 이슬로 울은
꽃잎의 눈물자국을 보면 안다
꽃처럼 잠시 피었다 지는 우리들의 삶
들에 핀 야생화로
노을빛 물든 내 세월.
내게 남아 있는 것은
장덕천
내게 남아 있는 것은
알 수 없는 색깔이네
내 삶의 강산이 일곱 번 색깔이 변하면서
기쁨도 낙엽이고
슬픔도 낙엽이고
사랑도 바람이고
친구도 바람이고
내가 나를 소유하지도 못하네
내게 남아 있는 것은
자족하는 마음과
사람들 마음이 가지고 있는
알 수 없는 색깔이네.
하얗게 쌓인 눈을 보면
장덕천
마당에 쌓인 하얀 눈을 보면
백설기 냄새가 난다
일등병 계급장을 달로
첫 휴가를 마치고 귀대하면서
어머니가 싸준 백설기 냄새가 난다
40여 명의 내부반원 입에서 나누던
백설기 냄새가 난다
싸락눈이 내리던 저녁
“저게 쌀이라면….”
하시던 어머님의 시루 냄새가 난다
겨울철 장정 하루 품삯 쌀 석 되.
쌀이 가난했던 세월 냄새가 난다
마당에 쌓인 하얀 눈을 보면.
풀벌레에게 밤을 내주고
장덕천
대청호반에 팔월 여치로 산다
개구리며 풀벌레들 소리도 시詩로 들린다
물방울 통통 소리 날 적마다
뜬구름들이 종종거리며 호반을 들락거린다
물 속에 어려 비치는
아침이슬 같은 초록숲의 눈망울을 들여다보면
수련이 꽃대를 솟아올리고
새들도 초목의 이파리인 양 흔들거린다
빈 뜰에 도장밥을 찍듯 시를 스는 달빛
풍요로워서 쓸쓸해지는 풍경들
마음 푸르게 가꾸며 여치로 사는 세상
생각하는 만큼 세상이 보인다.
나목 앞에서
장덕천
꽃의 희망은 빈 가지에서 더 빛난다
가지의 옹이마다 묻어나는 세월의 생채기에서
피어오르는 저 녹색의 눈을 보아라
한번쯤 모든 인연의 사슬에서 벗어나 보자
꽃으로 피어났다가 낙화로 사라지고
다시 바람결인 양 꽃으로 태어나는 세상
바람은 서로의 상처에 아픔을 주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으로 만나기 힘든 세상을 살면서
우리도
한번쯤 모든 인연의 사슬에서 벗어나 보자
바람 따라 바람 되어 보자
세상이 얼마나 가벼운가
빈 가지에 피어오르는 눈처럼
다음 세상에는 꽃으로 만나 보자
가을의 행간行間
장덕천
단풍이 아름다우 sRkekfr은
‘단풍잎 속에 가을의 끝이 보이기 때문이야
불타오르는 기쁨, 빛깔이 낡아가는 슬픔,
단풍잎 속에는 기쁨이 슬픔에게
슬픔이 기쁨에게 보내는 말이 있기 때문이야
삶의 속내가 잎맥을 따라 번져가면서
저리도 고운 빛깔을 만들려면
마음 가벼이, 마음 가벼이
세상을 버렸음이야
아무렴, 그리 버렸음이야
단풍이 아름다운 까닭은
단풍잎 속에 삶의 끝이 무늬지어 있기 때문이댜.
트로이메라이
장덕천
구름에 가린 별
별이 된 나를 보았네
잃어버린 빛 속에
마음을 거느리지 못하는 몸
어둠 속으로 숨어든 별을 보았네
외롭고 캄캄한 세상에서
영혼만이 홀로 눈을 뜨고
먼 먼 그리움의 나라,
시詩의 나라를 찾아 헤매었네
구름 사이 언뜻 언뜻
가느다란 빛줄기가 흘러나오는,
달빛에 씻긴 영혼
별이 된 나를 보았네.
상생
장덕천
잎들은
제 몸을 갉아 먹히는
애벌레와 탄생한다
벌레는 상처를 물고
사각사각 고통에 입 비비는 소리
잎들은
절망으로 파랗게 독이 오른다
새파랗게 허무가 날선 세상
땀과 피와 아픔이
시산의 목을 움켜잡으며
긴 싸움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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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詩人의
말
뜰이며 안방까지 채워주는 새소리
꽃과 나무들 움트고 잎 맺고 가지 벋어나는 소리
꽃과 나무들 파란 옷 노란 옷 붉은 옷 벗어던지는 소리
삶의 푸른 소리들 내 안에 가득가득 채워
소리의 눈으로 잠들고 소리의 귀로 일어나는
소리의 세월로 생이 꾸며지는
소리의 시집
언젠가 나도 바람의 소리로 남을 것이다
이 세상 부러울 거 없는 나는 소리 부자다
참 부자다.
여섯번째 시집입니다. 나이 들고 몸은 병약하지만
물감처럼 푸른 대청호 물결을 바라보다가
연꽃 사이로 돌아다니며 시를 만나다 보니,
내가 살아서 시를 쓰는 이 모두가 은총이라 생각합니다.
2011년 연꽃마을을 지키며
장덕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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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천 詩集 [ 나는 소리 부자다 ]
[ 장덕천 시인의 시세계 ] -
시심, 천심, 동심이 어루러진 멋과 맛
박 제 천
시인. 문학아카데미대표
1.
좋은 시를 읽으면 마음이 설렌다. 눈으로 읽으며 그림을 보고 입으로 나직이 따라 읊는다. 장덕천 시인의 여섯 번째 새 시집 『나는 소리 부자다』에 군말을 적기로 하고, 시를 읽다본즉 마음샘에 물이 졸졸 솟아나와 어디론가 흘러가는 그 흐름에 몸을 싣고 따라 흘러가며 시인이 보고 듣고 느끼는 자연의 진면목을 가슴에 담아두느라 정작 글쓰기는 자꾸 뒤로 미루어진다.
장덕천 시인은 그동안 다섯 권의 시집을 펴내었지만 아마도 본격적인 시작활동에 접어들기는 1998년에 발간한 세 번째 시집 『수통골 돌밭』이 아닐까 싶다. 저간의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시가 좋아 시를 읽다가 시를 쓰고, 시를 쓰다본즉 시집을 두 권이나 펴내게 되고서야 늦으나마 1997년에 문예지 추천의 길을 밟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장 문학아카데미 방산사숙(芳山私塾)에 들어와 1년여 워크샵 과정을 거치며 간행한 시집이 『수통골 돌밭』이다. 이때 나는 시집의 표4에 “장덕천 시인의 시는 투명하리만큼 정결하다. 오랜 지병 속에서 터득한 삶의 달관이 밝고 건강하다. 평화의 아름다움, 침묵의 치열성이 가득 배어 있는 시의 행간을 더듬노라면 삶과 시가 일치된 문인화의 품격이 드높고, 삶을 바탕으로 뿜어내는 난의 향기가 깊이 서려 있다.”고 쓴 적이 있다.
이로부터 오로지 시를 생활하며 시에 명운을 건 정진을 거듭해 2002년에는 네 번째 시집 『어둠은 아름답다』, 2007년에는 다섯 번째 시집 『풀벌레에게 밤을 내어주고』를 잇달아 펴내면서 시단의 상찬을 받아왔고, 이번에 새로이 여섯 번째 시집을 상재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유수화 시인은 「느림의 미학, 삶의 여유와 향기(부분 발췌)」라는 글에서 장덕천 시인의 시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한다.
한스 마이어 호프는 예술이 인간성을 반영한다고 하는데, 장덕천 시인의 마음으로 들어간 세상의 ‘바람’은 바로 장덕천 시인의 ‘바람’이 되어 나오는 걸 보면, 필자가 시인에게 느끼는 ‘여유’와 ‘따뜻함’이 오해는 아닌 듯 싶다. 이런 시인의 ‘마음 밭’에 사는 언어들도 서로의 충돌이 없다. 사소한 다툼도 없다. 언어와 언어들이 어울렁더울렁 만나 리듬을 만들고 있다. 요란하고 가파른 굴곡의 리듬이 아닌 자글자글한 웃음소리를 내고 있다. 어릴 적 해거름의 동네 어귀에서 부르는 어머니의 손짓같은, 진달래꽃을 따 먹고 남은 꽃가지를 흔들며 뛰어가는 발걸음같은, 언어의 리듬들이다.
유수화 시인이 표현하듯 장덕천 시인에 대한 세간의 평설은 하나같이 무욕, 천진, 여유로 일치된다. 헌즉 그의 시에 대해 필자가 붙이는 군말은 사실 무사를 덧입히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시집 『어둠은 아름답다』의 표4에 되풀이 요약하듯 “장덕천 시인의 시는 투명하다. 투명하면서도 그 안에 스스로 빛을 발하는 발광체가 들어 있다. 마치 반디불이처럼 그 빛은 따스하고, 부드럽다. 장덕천 시인의 시는 직절하다. 직절하면서도 그 안에 나무와 같은 것들이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고, 잎들이 무성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의 정진은 강물과 같아 언제나 그 자리, 그 흐름, 그 빛깔로 여겨지지만 유속은 물론 그 넓이와 깊이도 하루가 다르기 마련이다. 그러니 『수통골 돌밭』에서부터 여섯번째 시집 『나는 소리 부자다』에 이르기까지 13년이 흐르면서 “투명하고, 정갈하고, 평화롭고, 직절하고, 여유롭고 따듯하다”는 시인의 특성이 더욱 깊어지고 더욱 넓어지되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다지고 다듬어낸 완미한 시의 외길을 되짚어가며 되풀이 익히는 즐거움 또한 시신의 은총일진저, 흠뻑 그 멋과 맛을 즐겨보기로 하자.
2.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가 있어설까. 필자가 보기에 우리나라 시에는 저마다 자연과 계절에 대한 섬세한 감각과 매혹적인 상상력의 잔치가 만발한다. 사람들의 오욕칠정이 스스럼없이 신새벽이나 노을 지고 달 밝은 밤과 같은 자연과 한데 어우러진다. 꽃이며 이슬, 초록그늘과 같은 자연의 입성에 힘입어 한껏 맵시를 내기도 하고, 산과 강, 낭떠러지와 폭포, 해와 달과 별과 같은 천지자연을 빌어 제 마음의 한 경계를 보여준다.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 모두에 깃들인 자연의 품성이 시인들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라 생각된다. 죽어 하늘에 묻히고 싶다는 신라의 선덕여왕 무덤 아래 사천왕사를 지어 여왕을 한 등급 위의 하늘인 도리천에 자리잡아주는 신라인들의 여유로운 융통성, 밝은 달빛을 묘사하되 “가지가 째질 듯이 나무에 실린 달”이라 하여, 달빛과 달의 양감을 동시에 표현해 미당 서정주를 감탄하게 하던 이름 없는 시골 노인네들의 꾸밈없는 진솔 마음자리가 그대로 시인들의 손에 전해져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리라.
장덕천 시인 역시 불교의 진여나 노자의 자연과 같이 있는 그대로의 자연법에 터를 두고 있다. 먹이사슬에 얽힌 서양의 자연이 아니라 호랑이며 사슴이며 새와 같은 것들이 한식구로 해와 달과 별을 따라다니며 사는 동양의 자연이다. 따라서 시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시인이 살고 있는 대청호반 샘골의 자연과 사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대전이라지만 샘골이라는 이름처럼 대전에서 찾아들어가자면 굽이굽이 산을 감도는 골짜기 아래 대청호의 물살이 발을 적실 둣 호반에 지은 시인의 집은 시인의 시력과 비례해 변신을 거듭했다. 시인이 모아들인 시집은 사람들을 불러들여 <글사랑 놋다리집>이라 문패를 갖추었고, 시인이 하나 둘 모아들여 마음 붙이며 키워나가던 연꽃들은 어느덧 마을 전체로 벋어나가 <연꽃 마을>을 이룸으로써 대청호의 명소로 거듭났다.
눈이 내리는 날에는 대청호반으로 오세요
파란 호수에는 눈꽃과 물너울의 사랑이 있어요
눈이 내리는 날에는 대청호 올레 길을 걸어보세요
솟대처럼 서 있는 연꽃대를 보면서
눈을 하얗게 덮어쓴 목판의 시를 읽으면서
삶이 아름다운 참소나무와 바위의 고요를 만나고
가지마다 널려 있는 산새소리를 들어보세요
눈이 내리는 날에는 대청호반으로 오세요
눈송이의 웃음을 머리에 이고
바람과 춤을 추는 솔숲,
딴 세상 맛보는 하얀 올레 길을 걸으세요
눈이 내리는 날에는 시가 있는 숲길을 걸으며
상처받지 않는 사랑,
세상 모든 것이 사랑인
푸른 물의 나라, 대청호반으로 오세요.
― 장덕천, 「대청호 올레길」 전문
연꽃마을은 또한 길을 만들어냈다. 휠체어나 간병인의 등에 업혀 대청호의 바람과 물을 벗 삼던 시인도 이제는 스쿠터를 타고 돌아다니게 되고, 혹은 연꽃을 보러, 혹은 <글사랑 놋다리집>의 정원 여기저기 나무며 돌에 씌어져 자연을 노래하는 시를 보러 찾아드는 손들도 올레길의 정취를 덤으로 갖게 되었다.
눈이 내리는 날의 대청호 올레길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뛴다. 푸른 물에 점점이 흰 동그라미를 그리며 눈꽃을 피워내는 눈은 화가의 마음일 터이고, 둥치만 남아 하얗게 눈을 뒤집어 쓴 설목들 사이 서로의 눈길이 마주치는 나무 아래 글자들이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시의 목판은 자연이 낭랑하게 읽어주는 눈나라의 동화와 같을 것이다. 거기 꽃송이들이 사라진 연꽃줄기들이 비죽비죽 열을 지어 서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시인의 한마음을 꼿꼿하게 보여주는 솟대일 터이다.
굳이 작품의 뜻을 풀어 새길 사이도 없이 시인은 “눈이 내리는 날에는 대청호반으로” 오시라고 초대를 한다. 대청호엔 “눈꽃과 물너울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대청호 올레길을 걸”으면서 “솟대처럼 서 있는 연꽃대를 보면서/ 눈을 하얗게 덮어쓴 목판의 시를 읽으면서 // 삶이 아름다운 참소나무와 바위의 고요를 만나고/ 가지마다 널려 있는 산새소리를 들어보”라고 권한다. 참소나무와 바위와 산새소리가 자아내는 경관은 찾아온 손들을 시의 무아경으로 이끌어간다. “눈송이의 웃음을 머리에 이고/ 바람과 춤을 추는 솔숲”이야말로 ‘딴 세상’일 수밖에 없다. ‘무릉도원’이나 ‘막고야산’ ‘무하유지향’ ‘호중지천’ ‘서방정토’처럼 사람이 살아서는 찾아갈 수 없는 곳이 아니라 대전에서 한 30분 차를 타면 닿을 수 있는 샘골, <시가 있는 숲길>을 걷다보면 “상처받지 않는 사랑,/ 세상 모든 것이 사랑인/ 푸른 물의 나라” 대청호반으로 오라는 시인의 초대장이 곧바로 시인의 작품이다.
샘골 봄밤은 법당이다
천정에 초롱초롱 등을 켜는 별들
먼 산길 바랑으로 넘어오는 달빛
게송偈頌을 노래하는 밤새들
시방공十方空에 잠들기 전
반야심경을 읽어대는 무논 개구리들
사바세계에서 내 마음 출가시킨다
샘골의 봄밤은 법당이다.
― 장덕천, 「대적광전大寂光殿」 전문
시인에게 있어 샘골은 그 자체가 대자연의 법당이다. 밤새들은 시나브로 게송을 노래하고, 개구리들은 하염없이 반야심경을 읽는다. 하늘의 별들은 등불이 되고 달빛은 바랑에 산길을 담아와 환하게 비추어 준다. 눈을 번쩍 뜨면 딴 세계가 펼쳐질 터이니 시인은 여기와 저기의 경계를 지우고, 동서남북 상하좌우가 없고 가이 없는 우주의 실체, 시방공을 샘골 봄밤의 법당으로 받아들이고 마는, 영락없는 비구의 삶이다. 이 작품의 제목인 대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곳이니, 이와 지, 중생과 부처, 어리석음과 깨달음이 서로 다르지 않는 하나임을 알려주는 비로자나 부처님이 계시는 연화장 세계는 진리의 빛이 가득한 대적정의 세계라 하여 대광명전, 대광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화엄경을 중심으로 하는 사찰에서는 대적광전을 본전으로 삼고, 그렇지 않은 사찰에서는 비로전 등으로 부른다. 이 때문에 시인은 봄밤의 자연이 곧 대적광전이고, 천지자연이 비로자나불의 현신에 다름아님을 깨우치는 것이다. 진정, 자연의 오묘함이 아닐 수 없다.
3.
앞에서 말하듯, 장덕천 시인은 자연의 시인이라 할 만큼 작품의 대부분을 자연에서 거두고 있다. 이번 시집에도 역시 자연의 시를 한상 가득 차려놓았다. 자연에 사는 사람이래야 즐길 수 있는 온갖 꽃과 풀, 자연의 풍광이 보는 이의 눈을 황홀하게 만든다. 그 중에서도 연꽃이 이번 시집의 주역을 맡았다. 지난 시집에도 연이 등장했지만 이번에는 보리 수련, 버지라스 수련, 빅토리아 수련, 알비타 수련, 가시 수련 등이 대거 등장한다. 연꽃마을 연꽃가족들이 그만큼 늘어난 때문이리라.
연꽃을 보며 시를 썼다
연꽃 시를 쓰면서
연과 정이 들고 가까워졌다
언제부턴가 내 마음에 정화된
연 물이 들고
연 싹이 자라고
하얗고 노랗고 붉은 꽃이 피어났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사람들이 나를 좋아 찾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연을 보러 온다는 것을.
― 장덕천, 「연꽃마을 연꽃 시」 전문
이 작품은 시인과 연꽃의 관계를 한눈에 보여준다. 연꽃을 보며 시를 쓰던 시인이 연꽃과 정이 들자, 마음속에서도 연꽃이 피어난다는 자연과의 교감이다. 짧은 작품이면서도 기승전결을 다 갖추었고, 이미지 역시 또렷하다. “연 물이 들고/ 연 싹이 자라고/ 하얗고 노랗고 붉은 꽃이 피어나”는 과정을 마치 슬로비디오처럼 한눈에 다 보여준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담백하지만 시인의 마음이 연꽃으로 바뀌듯 읽는 이의 마음에도 연 물이 들고 연 싹이 자라고 꽃이 피어나게 만드는 직절함이 묘미라 할 수 있다. 흔히들 『시경(詩經)』에서 ‘사무사(思無邪)’의 경지를 말하지만, 시경이 강조하는 대목은 ‘시즉절(詩卽切)’, 풀어 말해 시인의 절실한 마음이다. 이 작품에는 생각됨의 삿됨도 없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인이 곧 연꽃이고자 하는 절실함이 더 큰 울림을 준다.
시인은 사실 근육병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기에 요양 차 이곳에 터를 잡았고, 무료함과 적막함, 고독감과 같은 병자의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연꽃 키우기에 마음을 의지했던 것이다. 그 연꽃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사람들이 연꽃을 찾아오지만 시인은 여전히 홀로일 수밖에 없다. 삶의 경계 밖에서 시인을 돌아보자면 더 큰 절망감에 휩싸일 수도 있는 처지이지만 시인은 의연하게도 그 버려지고 잊혀짐을 연꽃으로 되살려내는 삶의 여유, 시의 미학으로 형상화한다. 필자가 시인의 이 작품을 시즉절에 빗대어 말하는 까닭이다. 이쯤에서 시인의 ‘오랜 지병’에 대해 알아보자.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어둠은 아름답다』에 쓴 이흥우 시인의 발문에서 추려낸 내용이다.
1998년 7월, 강원도 춘천의 위도, 『문학과 창작』·문학아카데미가 주최한 숲속의 시인학교에서 장덕천 시인을 처음 만났다. 대충 공식행사가 끝나고 밤이 깊어가며, 몇몇 나이든 시인을 위해 마음을 써준 방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잡담들을 했다. 성찬경, 김광림 시인들이 자리를 같이 했다. 그때 문이 열리며 행사를 주관하는 젊은 시인들이 장덕천 씨를 인도해왔다. 정확하게는, 운신이 자유롭지 않은 장덕천 씨와, 또 한 사람, 자동차 운전을 비롯해 몸이 불편한 장 시인을 손과 발처럼 돕는 신태수 씨(申泰秀, 독실한 불교인이며 수필가)였다. 두어 병의 색다른 술과 안주를 들고 왔었다. 장 시인의 농토에서 거둔 오미자를 소주에 담가 묵힌 오미자술이었다. 밤이 늦도록까지 우리는 그 두 병의 술을 다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연스럽게 시에 대한 말들도 오고갔다. 장덕천 씨는 불편한 몸을 가누고 한쪽에 앉아서 우리가 나누는 잡담이기도 하고 담론이기도 한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는 담론이고 잡담이고, 우리들의 말 사이에 전혀 끼어들려 하지 않으며 그저 듣기만 했다. 그의 듣는 태도가 퍽 진지하구나 하는 것을 나는 담론 사이에서 간혹 느꼈다. 남의(선배라면 선배인 다른 시인들) 말을 듣는 그의 표정이 마치 어떤 수업시간의 정직한 중학생의 표정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때 그는 이미 60세였다. 장덕천 시인은 충남대학 경영학과와 경영대학원 출신으로, 일찍이 이름 있는 기업체의 경영자였다. 그런데 40대 때에 어느 날 교통사고(상대방의 실수였으나, 그 책임을 적극적으로 추궁하지도 않았다 한다)로 몹시 다쳐 2급장애인이 되었다. 상태는 점점 더 악화해서 의사의 사형선고를 받은 지가 몇 해가 지났으나 ‘이상하게도 오래 견디는’ 중이라고 했다. 아마도 그렇게 ‘견디는’ 동안에 그는 시를 쓰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보다는 그의 속에 일찍부터 있었던 시의 마음(詩心)이 육체적인 수난과 고통을 견디면서 차차 다시 깨어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람, 누구에게나 본래부터 시심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더욱 그렇다. 한 사람의 가혹한 육체적 고난과 고통은 그런 시의 마음, 시의 정신, 시에의 추구를 더욱 끈질기게 집중시켜 줄 수도 있다.
― 이흥우, 「산으로의 길, 시의 길」 부분
조금 긴 것 같지만, 이흥우 시인의 글을 통해 장덕천 시인의 신변사를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니 장덕천 시인을 만나고서 꽤 많은 시간이 흘러온 셈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1997년에 시인을 처음 만났다. 1988년에 개설한 문학아카데미 방산사숙은 2000년까지 서울 대학로 이화동 133번지의 한 건물 2층에 편집실을 두고, 3층을 강의실로 사용했다. (방산사숙은 2001년 동숭동 2-19 낙산빌라 101호, 현재의 사옥으로 이전했다.) 그 시절, 간병인의 등에 업혀 3층의 강의실에 들어서는 시인을 볼 때마다 안쓰러운 마음이 일었지만 나는 차마 그리 몸을 다친 경위를 물을 수가 없었다. 시가 뭐기에 그 불편한 몸으로 대전에서 서울까지 차를 타고와, 다시 등에 업혀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나. 그런 내 마음과 달리 시인은 너무나 꿋꿋했다. 이흥우 시인의 글처럼 자세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경청을 하며 수첩에 깨알같이 기록을 했다. 시가 있어서 행복하고, 시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말을 수없이 했다. 아마도 그건 시인 자신에게 스스로 다짐하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13년, 칠순이 넘은 시인은 아직도 같은 말을 이메일마다 꼬박 적어 보내고, 어쩌다 전화 통화를 할 때에도 빠트리지 않는다.
시인과 맺은 인연으로 필자는 자주 대청호반 시인의 집을 찾는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아내와 처음 방문할 때만 해도 추사의「세한도」를 떠올릴 만큼 물가에 소슬하게 서 있는 시인의 집은 적료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회를 거듭할수록 연꽃이 늘어나고, 정원 여기저기에 나무들이 들어서고, 가지마다 둥치마다 시를 아로새긴 목판들이 내걸렸다. 시인은 그때마다 새 식구를 맞아들이듯 그가 좋아하는 시인들과 지인들을 모셨다. 필자의 시 「입춘부」가 걸리던 날도 아내랑 함께 찾아가 병약해 보이는 겉보기와 달리 시인의 가슴속에 마그마처럼 들끓는 시의 열정을 이야기하던 추억이 오롯이 남아 있다.
시인의 연꽃과 시에 대한 애정은 차츰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 불씨가 시인의 오랜 도반인 수필가 신태수 씨에게 옮겨지면서 본격적인 연꽃마을로 발전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연꽃마을이 많지만 장덕천 시인이 기거하는 샘골 연꽃마을은 대청호반과 인근 휴경지 6000여m²에 걸쳐 100여종의 연과 수련 및 각종 수생식물을 가꾼다. 연중 상시 개방하기에 시인과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고, 연꽃이 만발하는 6월경에는 3천여 명의 관광객이 밀려들 정도가 되었다. 문학아카데미 숲속의 시인학교도 여기서 한 두 차례 열렸고, 그 뒤에도 여럿이서 찾아들어 경관을 즐기던 추억이 새롭기 그지없다. 시인은 대전 시내에 주소를 두고 있지만, 여기서 기거할 때가 더 많다고 한다.
이름도 없는 들꽃의 문장을 들여다 보면
단비로 내리는 봄비의 복음을 듣다 보면
불심으로 내리는 가을비의 독경을 귀담다 보면
내 글은 글도 아니다
구절초가 흔들리듯
꽃이 지듯
잎이 바람 따라 허공으로 날리듯
이 세상에 사는 모든 것들의 글을 읽다 보면
나는 아직
꿈속 장자莊子의 나비처럼
오리무중이다
내 글은 아직 안개속이다.
― 장덕천,「오리무중」 전문
시인은 <글사랑 놋다리집>에서 나날을 보내지만, 스쿠터를 장만한 뒤로는 인근 마을까지 산길을 돌아다닌다. 목판에 새겨진 시와 글을 나무와 나무 사이에 걸어놓고 짬짬이 산책과 명상을 하지만 대개는 찾아든 손들의 몫이다. 시인은 스쿠터를 타면서 운신의 폭이 넓어졌다. 그래선가 이번 시집의 낱말들은 초기 시보다 동적이고 양감이 풍부해졌다. 산길 구석구석, 나무며 바위, 여기저기 피어나는 들꽃들을 만나거나 바람이며 비에 몸을 맡기며 자연의 은총을 마음껏 받아들인다. 이제 시인은 온몸 온 마음으로 자연의 문장, 자연의 복음을 읽고 듣는다. 이름도 없는 들꽃이지만 그가 전신으로 보여주는 문장 앞에 문자로 씌여진 글은 한낱 가화에 지나지 않는다. 어디선가 씨가 날아와, 바위 아래 어둠 속에서 혼자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벋어 꽃송이를 환하게 피어내는 들꽃의 문장을 읽으며 누구인들 저 자연의 경이로움을 체감하지 않겠는가. 죽은 땅에서 잠자는 것들의 뿌리를 적셔 잠을 깨우는 단비의 복음, 홀로 바라보며 듣는 가을비의 독경, 모든 것을 태어나게 하고 떠나게 하는 이치를 저마다 들려주는 천지자연의 경전(天地自然經)보다 더 심오한 글이 어디 있겠는가.
“구절초가 흔들리듯/ 꽃이 지듯/ 잎이 바람 따라 허공으로 날리듯” 자연의 이법(理法)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이 세상에 사는 모든 것들의 글”은 시인이 손끝으로 빚어낸 글을 무연하게 만들고 만다. 자연과 달리 삶과 죽음을 속절없이 받아들이고 그때마다 기쁨과 슬픔, 덧없음의 무상함을 뼛속까지 느끼며 사는 인간이기에 시인의 세상살이는 “꿈속 장자莊子의 나비처럼 오리무중”일 수밖에 없다. 시인은 결국 “내 글은 아직 안개속이다”를 되뇌며 글을 맺는다. 그러나 이 작품의 마무리는 반전의 효과를 보여주는 일종의 반어법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이 자연의 이법에 승복하는 순간, 시인 또한 자연에 동화되기 때문이다. 들꽃의 문장이 들꽃의 것이듯 자연과 대립하지 않는 한 시인의 시도 자연의 시가 되기 때문이다. ‘일체유심조’, 모든 것이 한마음의 조화(造化)이듯, 자연의 고전은 읽을수록 시인을 미물로 만드는 동시에 행간에 숨겨진 그 뜻을 받아들이는 순간 삶과 죽음의 구경(究竟)을 깨우치는 계기가 된다. 이 세상 사는 마음을 절망감이 아니라 겸허함으로 받아들이면서 갈등은 다시 화해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이로 하여 시인은 이 세상 사는 행복을 절감한다. 시와 더불어 사는 삶의 지복을 노래한다. 눈을 들어 바라보는 대청호의 푸른 물결소리, “뜰이며 안방까지 채워주는 새소리/ 꽃과 나무들 움트고 잎 맺고 가지 벋어나는 소리/ 꽃과 나무들 파란 옷 노란 옷 붉은 옷 벗어던지는 소리” <글사랑 놋다리집>을 채우는 온갖 자연의 소리, <연꽃마을>을 에워싸는 일대 소리의 향연 속에서 “소리의 눈으로 잠들고 소리의 귀로 일어나는/ 소리의 세월로 생이 꾸며지는/ 소리의 시집”으로 거듭 태어나는 시인, “이 세상 부러울 거 없는” 시인의 절창을 소리로 보고 소리로 듣다보면 슬프되 황홀한 삶의 뜻을 마음에 깊이 새기게 된다
뜰이며 안방까지 채워주는 새소리
꽃과 나무들 움트고 잎맺고 가지 벋어나는 소리
꽃과 나무들 파란 옷 노란 옷 붉은 옷 벗어던지는 소리
삶의 푸른 소리들 내 안에 가득가득 채워
소리의 눈으로 잠들고 소리의 귀로 일어나는
소리의 세월로 생이 꾸며지는
소리의 시집
언젠가 나도 바람의 소리로 남을 것이다
이 세상 부러울 거 없는 나는 소리 부자다
참 부자다.
―장덕천, 「나는 소리 부자다」 전문
장덕천 시인의 시를 다 읽고 나니 마음속에서 “참 순정하다, 참 아기 같다” 하는 말이 절로 툭 튀어나온다. 그저 흐르는 강물 같고 그 강물에 내려앉는 구름이며 나무그늘 같아 자연스럽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강물의 푸르름, 그 구름의 부드러움, 그 나무들의 초록이 저마다 물살을 촘촘히 떠내는 그물망에서 솟아나오는 빛의 스펙트럼이 놀랍다. “너 잘났다 너 잘났다” 하는 “참새 들새 잡새들”과 같은 미물들의 “시새움”조차 어둠 속에 눌러 앉히는 자연의 푸근한 가슴이 정겹다. 때로는 절창을 이루고, 때로는 동심의 꾸밈없는 일기가 연이어지는 시인의 마음나라를 일주하다본즉 시인의 얼굴이 시와 하나로 겹쳐진다. 시가 곧 삶이고 삶이 곧 시라서 시인 따로 사람 따로가 아니니 굳이 시가 어떻다 따지는 일이 부질없겠다, 참으로 천진불(天眞佛)이 따로 없겠다는 탄성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워즈워스가 말하듯 동심이 시심이라면, 장덕천 시인의 경우는 시심이 천심이고 천심은 다시 동심이 된다. 시인이 보고 듣고 느끼는 일체 자연법이 시법이기 때문이다.
* 2011년 소설을 기다리며 방산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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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시심, 천심, 동심이 어루러진 멋과 맛
자연법의 진면목, 천진불의 시법
이번 시집의 낱말들은 시인의 초기시보다 동적이고 양감이 풍부해졌다. 산길 구석구석, 나무며 바위, 여기저기 피어나는 들꽃들을 만나거나 바람이며 비에 몸을 맡기며 자연의 은총을 마음껏 받아들인다. 어디선가 씨가 날아와, 바위 아래 어둠 속에서 혼자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벋어 꽃송이를 환하게 피어내는 들꽃의 문장을 읽으며 누구인들 저 자연의 경이로움을 체감하지 않겠는가. 죽은 땅에서 잠자는 것들의 뿌리를 적셔 잠을 깨우는 단비의 복음, 홀로 바라보며 듣는 가을비의 독경, 모든 것을 태어나게 하고 떠나게 하는 이치를 저마다 들려주는 천지자연의 경전(天地自然經)보다 더 심오한 글이 어디 있겠는가. 장덕천 시인의 시를 다 읽고 나니 마음속에서 “참 순정하다, 참 아기 같다” 하는 말이 절로 툭 튀어나온다. 그저 흐르는 강물 같고 그 강물에 내려앉는 구름이며 나무 그늘 같아 자연스럽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강물의 푸르름, 그 구름의 부드러움, 그 나무들의 초록이 저마다 물살을 촘촘히 떠내는 그물망에서 솟아나오는 빛의 스펙트럼이 놀랍다. “너 잘났다 너 잘났다” 하는 “참새 들새 잡새들”과 같은 미물들의 “시새움”조차 어둠 속에 눌러 앉히는 자연의 푸근한 가슴이 정겹다. 때로는 절창을 이루고, 때로는 동심의 꾸밈없는 일기가 연이어지는 시인의 마음나라를 일주하다본즉 시인의 얼굴이 시와 하나로 겹쳐진다. 시가 곧 삶이고 삶이 곧 시라서 시인 따로 사람 따로가 아니니 굳이 시가 어떻다 따지는 일이 부질없겠다, 참으로 천진불(天眞佛)이 따로 없겠다는 탄성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워즈워스가 말하듯 동심이 시심이라면, 장덕천 시인의 경우는 시심이 천심이고 천심은 다시 동심이 된다. 시인이 보고 듣고 느끼는 일체 자연법이 시법이기 때문이다. ―박제천(시인, 문학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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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천張德天 시인∥
∙ 시집 :『브람스의 자장가』『책장과 CD룸 사이』『수통골 돌밭』『어둠은 아름답다』『풀벌레에게밤을 내어주고』『아름다운 가난』『세기말 길들이기』『북창서재』『나는 소리 부자다』등
∙ 수필집 :『가을에 떠난 사람』『바람은 흔들림으로 존재한다』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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