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천혜의 관광지로 봄가을이면 신혼의 단내가 온 섬을 물들이는 남녘의 제주. 세계 어느 나라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빼어난 풍광과 온화한 날씨로 찾는 이로 하여금 이국적인 정취마저 느끼게 하는 섬 제주가 조선 시대에는 중죄인들을 세상에서 격리시키는 유배지였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듯도 싶다.
유명한 백서(帛書) 사건으로 순교한 황사영의 부인 정난주(丁蘭珠, 본명 命連) 마리아, 다산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丁若鉉)의 딸이기도 한 그녀가 남편을 잃은 뒤 두 살 난 아들을 데리고 하염없이 뱃길을 가야 했던 곳이 바로 제주이다.
제주가 맞이한 첫 번째 신앙인으로 기록되는 정난주는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大靜)에서 관비(官婢)가 되어 천수를 다한 뒤 모슬포(慕瑟浦) 뒷산에 묻혔다.
당당한 모습으로 천주를 증거하고 목숨을 바친 남편은 비록 천상의 영복을 누릴 것을 의심치 않았기에 영광이요 환희이기도 했지만 인간적으로는 엄청난 고통과 실의에 빠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거기에 겨우 두 살 난 젖먹이 아들 경한(景漢)을 데리고 떠나는 유배의 길은 너무나도 외롭고 고통스런 일이었다. 죄인으로 제주 땅을 밟은 뒤 자신은 물론 아들마저 죄인의 자식으로 평생을 멸시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궁리를 거듭하던 정난주는 뱃사공에게 뇌물을 주어 매수하고 사공은 다시 두 명의 나졸에게 술을 먹여 역시 그들을 매수한 뒤 젖먹이를 추자도 예초리(禮草里) 서남단 언덕 위에 내려놓는 데 성공했다. 나졸들은 뱃길에서 아이가 죽어 수장(水葬)했노라고 보고함으로써 이 일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추자도에 남은 경한은 오씨(吳氏) 성을 가진 어부의 손에 의해 하추자도 예초리에서 장성하게 되는데 그 후손이 아직도 추자도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경한이 추자도에 떨어뜨려졌을 때 그가 입고 있던 저고리 동정에서 나온 기록에 의해 그가 바로 황경한임을 알게 됐고 오씨의 아들로 키워졌기에 아직도 추자도에서는 오씨와 황씨가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리며 어머니 정씨는 끝도 없이 눈물을 흘렸을 것이 틀림없기에 그의 발자취를 뒤쫓는 순례자의 눈가도 뜨거워지게 된다.
혈혈단신으로 제주목 관비(官婢)로 신분이 추락하게 된 정씨는 제주의 거친 바람결만큼이나 모진 시련을 신앙과 인내로 이겨 냈다. 뿐만 아니라 풍부한 교양과 뛰어난 학식 그리고 굳건하고 깊은 믿음의 덕으로 주위 사람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다. 그래서 그는 비록 노비의 신분이었음에도 ‘한양 할머니'라고 불리며 이웃의 사랑을 받았다.
그 후 37년간을 정씨는 오직 신앙에 의지해 살아가다가 1838년 음력 2월 병환으로 숨을 거두고 이웃들은 그 유해를 바로 이곳 모슬포 뒷산에 묻었다. 비록 그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 삶 전체가 순교자의 생애를 방불케 하는 굳건한 신앙의 증거로 가득했기에 후손들은 그를 순교자의 반열에 올리고 있다. 1994년 9월 5일 순교자 현양 대회 강론에서 김창렬 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신앙의 탓으로 이 고장에 유배된 유일한 증거자인 정 마리아 난주님을 순교자라고 말씀드리는 것에 대해 놀라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우리 보편 교회도 피 흘려 순교하지 않은 이들 중에서 어떤 분들은 순교자로 공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초, 교회사가 김구정과 김병준 신부는 수소문 끝에 정난주의 무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김씨 집안에서 대를 이어가며 무덤을 돌보아 왔기 때문이다. 이 무덤은 1977년에 순교자 묘역으로 단장되었다가 1994년 제주 신자들의 염원을 담은 ‘대정 성지’로 조성되었다.
정난주는 제주에서 관비로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불우한 이웃에 나눔을 실천하며 복음적 삶을 살았던 인물로, 제주교구는 ‘백색 순교자’인 정난주의 모범을 본받기 위해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묘소를 새롭게 단장하고 성역화했다. 묘소 입구부터 야자나무로 이국적 정취를 풍기고, 아치형 돌담에 둘러싸인 내부는 아늑하게 잔디밭으로 꾸며졌고 그 주위로 십자가의 길 14처가 설치되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3년 5월 26일)]
제주 대정 성지 - 유배지에서 부른 신앙의 노래
천주교 신앙이 가장 늦게 전파된 한반도의 남쪽 섬 제주 땅에는 남과 북에 하나씩 사적지가 자리잡고 있다. 정난주(마리아)의 무덤이 있는 '대정 성지'(남제주군 대정읍 보성동)와 제주의 '황사평'(제주시 봉문동)이 그곳이다. 이제서야 버젓한 사적지로 조성되어 순례객들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그 동안 방치되어 오다시피 하여 제주의 신자들조차도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할 정도였다. 이 사적지들은 제주 복음 전래 10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제주의 신자들이 한마음으로 노력하여 일군 탓에 더욱더 신자들의 마음에 깊이 자리잡게 되었다.
정난주(마리아)는 이미 여러 차례 설명한 순교자 황사영(알렉시오)의 부인으로, 양근 땅 마재의 유명한 정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계상으로 마리아는 순교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조카며 정하상(바오로) 성인의 누님이 된다. 18세가 되던 1790년 무렵 16세의 황사영과 혼인을 한 마리아는 서울 아현의 시집에서 생활하였다. 바로 그 해 진사시에 합격한 황사영은 이승훈, 정약종 등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과거를 포기하고 교회 일을 도왔으며, 마리아는 이러한 남편을 도와 아현의 집을 신앙 공동체로 가꾸는 데 노력하였다.
마리아는 혼인 초기에 자주 자식을 잃은 것 같다. 그러다가 1800년에 아들 경한(景漢)을 낳게 되었으나, 이듬해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모든 가족이 수난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황사영이 교회 재건을 위해 제천 배론으로 몸을 숨긴 뒤, 1801년 2월 10일경 아현의 가족들은 모두 체포되어 갖은 문초를 받게 되었다. 이 때 마리아는 특히 어린 경한이를 옥에서 키워야 했으므로 육정에서 오는 또 다른 고통까지 감내해야만 하였다.
7개월 후, 황사영은 배론에서 체포되어 11월 5일(양력 12월 10일)에 능지처사의 판결을 받았다. 이어 11월 7일에는 마리아와 남은 가족들에게도 연좌죄가 적용되어 유배형이 내려졌으며, 시어머니 이윤혜는 경상도 거제부로, 마리아는 전라도 제주목 대정현의 노비로 유배되었다. 다행히도 어린 경한은 두 살이었던 까닭에 역적의 아들에게 적용되는 형률을 받지 않고 전라도 영암군 추자도의 노비로 유배되었다. 이들이 서울을 떠나 유배지로 향한 것은 11월 8일이었다.
마리아와 어린 경한의 유배지인 제주도와 추자도는 조선의 유배지 중에서도 서울 한양에서 가장 먼 곳이다. 이름하여 유배 3천 리. 훗날의 전승에 따르면, '마리아는 유배형을 받은 뒤부터 어린 경한이만은 일생을 노비로 살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사공과 나졸들을 구슬렸다고 한다.
제주도를 향해 오던 중 마리아는 추자도 가까이 왔을 때 뱃사공에게 패물을 주면서 애원하여 경한이만을 살릴 생각으로 '경한이는 죽어서 수장했다'고 조정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패물을 받은 사공들은 나졸들에게 술을 먹여 허락을 받고 추자도에 이르렀을 때 추자도 예초리(禮草里) 서남단 물산리 언덕빼기에 어린 경한이를 내려놓았으니, 마리아의 애간장이 얼마나 탔는지 기절까지 했다고 한다. 추자도에 내려오는 전승을 보면 "어린애 울음소리를 듣고 소를 뜯기던 부인이 가 보니 아기가 있어서 집으로 데려와 저고리 동정에 무엇인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펼쳐 보니, 여기에는 부모 이름과 아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후 아기를 그 집에서 기르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그 곳에 사는 뱃사공 오 씨(吳氏)였다."고 한다. 이후 추자도 오 씨 집안에서는 황 씨를 기른 인연으로 해서 오늘까지도 황 씨와는 혼인하지 않는다고 한다. 예초리 산 위에 가면 경헌이의 묘가 있다(김병준, <황사영 처자의 피난길>, "교회와 역사" 제25호, 1977년 10월호).
박해가 끝난 뒤 마리아와 아들 경한은 오랫동안 잊혀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1909년에 제주 본당의 2대 주임 라크루(Lacrouts, 具) 신부가 전교를 위해 추자도를 왕래하던 중에 황경한의 손자를 만나 이러한 사실들을 알게 되었다. 라크루 신부는 곧 파리의 샤르즈뵈프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순교자 황사영의 아들 경한과 그 후손들의 비참한 생활을 알렸고, 샤르즈뵈프 신부는 이를 전교 잡지에 소개하였다. 그 후 라크루 신부는 프랑스 은인들의 후원금으로 경한의 손자에게 집과 농토를 사 줄 수 있었다.
한편 제주에 도착한 마리아는 그곳에서 대정군으로 배소가 결정되었고, 관비(官婢)의 쓰라린 유배 생활을 시작하였다. 다행한 것은 관비를 담당하던 관리 김씨 집안에서 마리아의 성품을 높이 사서 어린 아들을 맡긴 일이었다. 마리아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집안의 배려로 점차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명색이 관비의 몸이었으므로 아들을 만나러 추자도로 갈 수는 없었다. 그 후 김씨 집안에서는 마리아를 '한양 할머니'라고 부르면서 양모와 같이 봉양하였으며, 1838년 2월 마리아가 사망하자 추자도의 증손자들에게 서한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렸다. 그 서한은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다.
마리아는 유배된 후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비밀리에 기도 생활을 하였다. 김씨 집안에서는 마리아가 신앙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누구도 이를 막지는 않았다. 그의 일상 기도는 30여 년 동안 유배지에서 외롭게 불린 신앙의 노래였다. 마리아는 이처럼 어린 아들을 추자도에 떼어놓았던 생이별의 아픔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였다.
마리아의 무덤은 김씨 집안사람들이 모슬봉 북쪽에 있는 속칭 한굴밭에 조성하였다. 그리고 이로부터 130여 년이 지난 1970년대 초, 교회사가 김구정과 김병준 신부는 수소문 끝에 그 무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김씨 집안에서 대를 이어가며 무덤을 돌보아 왔기 때문이다. 이 무덤은 1977년에 순교자 묘역으로 단장되었다가 1994년 제주 신자들의 염원을 담은 '대정 성지'로 조성되었다. 이제 제주의 신자들은 마리아를 '백색(白色) 순교자'로 공경해 오고 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000년 3월호]
황경한 묘
지금은 천혜의 관광지로 빼어난 풍광과 온화한 날씨로 찾는 이로 하여금 이국적인 정취마저 느끼게 하는 제주도는 조선 시대에 중죄인을 세상과 격리시키는 유배지였다. 추자도는 제주항에서 북쪽으로 약 45km 떨어진 섬으로 상 · 하추자, 추포, 횡간도 등 4개의 유인도와 38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1271년(고려 원종 13년)까지 후풍도(候風島)라고 불렀으며, 그 후 전라남도 영암군에 속하면서 추자도로 개칭하고 1910년 제주에 속하게 되었다. 바로 이곳 하추자도에 황사영의 아들 황경한(黃景漢)의 묘소가 있다.
백서(帛書) 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黃嗣永)은 1790년 진사시에 급제한 해에 다산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丁若鉉)의 딸인 정난주(丁蘭珠, 본명 命連)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여 1800년 아들 경한을 낳았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백서 사건으로 체포되어 11월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후 홀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은 제주도로, 외아들 경한은 추자도로 각각 유배되고, 가산은 모두 몰수당해 한때 명문 세도가였던 가문은 풍비박산 나고 말았다.
남편을 잃은 정난주가 아들을 데리고 하염없이 뱃길을 가야 했던 곳이 바로 제주이다. 게다가 겨우 두 살 난 젖먹이 아들 경한을 데리고 떠나는 유배의 길은 너무나도 외롭고 고통스런 일이었다. 죄인으로 제주 땅을 밟으면 자신은 물론 아들마저 죄인의 자식으로 평생을 멸시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정은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궁리를 거듭하던 정난주가 호송선의 뱃사공에게 뇌물을 주어 매수하고 사공은 다시 두 명의 나졸에게 술을 먹여 역시 그들을 매수한 뒤 젖먹이를 하추자도 예초리(禮草里) 서남단의 황새바위에 내려놓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나졸들은 뱃길에서 아이가 죽어 수장(水葬)했노라고 보고함으로써 이 일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하추자도에 남겨진 경한은 오씨(吳氏) 성을 가진 한 어부의 손에 의해 거두어졌다. 경한이 추자도에 떨어뜨려졌을 때 그가 입고 있던 저고리 동정에서 나온 이름과 생년월일에 의해 그가 바로 황경한임을 알게 되었고 오씨의 아들로 키워졌다고 한다. 오씨의 집에서 장성한 경한은 혼인하여 두 아들 건섭(建燮)과 태섭(泰燮)을 낳았는데, 그 후손이 아직도 추자도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낯설고 외로운 유배지에서 생을 다한 황경한은 사망한 후 신양리 남쪽 산의 중간 산등성이에 묻혔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하추자도에서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추자도에서는 오씨와 황씨가 결혼을 하지 않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하추자도의 황경한이 살던 오씨 집은 1965년 불타 없어졌고, 그때 그 집안에서 간직해온 경한의 젖먹이 때 옷이나 가첩 등도 모두 소실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성록”(日省錄)이나 “사학징의”(邪學懲義) 등에 의하면 황경한이 추자도로 오게 된 것은 “나이가 2세 이하로 어려 법에 따라 교수시키지 않고 영광군 추자도에 노비로 유배시킨다”는 판결문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정난주는 젖먹이 아들이 평생 노비로 사는 것을 피하고자 유배를 가던 도중 추자도 예초리의 바닷가 바위 위에 아들을 남겨 놓았고, 다행히 오씨 집안사람에게 발견되어 그 집에서 성장하게 된 것이다.
1900년에 제주 선교를 위해 파견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라크루(Lacrouts, 具瑪瑟) 신부가 추자도를 왕래하던 중 1909년 황경한의 손자를 만나 전후사정을 알게 되었다. 라크루 신부는 샤르즈뵈프(Chargeboeuf, 宋德望)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순교자 황사영의 아들 경한과 그 후손들의 비참한 생활을 알렸고, 샤르즈뵈프 신부는 이 사실을 전교잡지에 소개했다. 그 후 라크루 신부는 프랑스 은인들의 후원금으로 황경한의 손자에게 집과 농토를 사주었다.
1908년 5월부터 선교사가 들어와 전교한 기록이 남아있는 추자도에는 1956년부터 제주중앙 성당 관할의 공소가 시작되었다. 1988년 추자 공소는 서문 성당 관할로 이관되었고, 상추자도 항구 인근에 위치한 추자 공소 신자들은 황경한 묘소를 돌보아 왔다. 제주교구는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하추자도에 있는 황경한의 묘소 주변 부지 600여 평을 매입하여 소공원을 조성하는 성역화를 추진했다.
추자 공소는 매 주일 오전 공소예절을 하며, 미사는 기후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한 달에 한 번 서문 본당 신부가 방문해 집전하고 있다. 제주교구는 추자도의 전교와 육지에서 방문해오는 신자들을 위해 새 공소 성당 건립을 추진하였다.
1975년 건립된 낡은 공소 건물이 2001년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은 후 그 해 7월 기공식을 갖고 건축을 시작해 2003년 6월 30일 지하 1층 · 지상 2층 규모로 완공된 새 성당의 축복식을 가졌다. 새 공소 성당은 어린이 집과 영안실을 갖추고 있고, 20여 명이 머물 수 있는 방과 식당도 마련되어 육지에서 오는 순례객들을 위한 숙소로 이용하고 있다. [최종수정 2011년 11월 14일] [사진제공 : 서울대교구 염수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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