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세 이조참판 휘 반(양간공파‧의정공파)
1580(선조14)-1640(인조18) 조선중기 문신. 자는 사일. 호는 허주.
아버지는 문원공 장생,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창녕 조씨.
1605(선조39) 생원시 동방진사과에 2등 9인으로 합격하고
1623(인조2) 인조반정후 이조의 추천으로 빙고 별제에 제수되었으나, 부임치 않았다.
이듬해 이괄의 난으로 상감을 모시고 공주로 피난하여 공주에서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바로 성균관 전적을 제수 받고 형조 좌랑을 거쳐 예조로 옮겨 사관으로 기사관을 겸하였다.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 부교리에 승진되었다.
1625년 헌납‧직강을 거쳐 교리가 되었는데
그때 대사헌이 혼조의 척신사객이므로 탄핵하다가 면직되었다.
다시 헌납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그 뒤 교리, 이조 좌랑, 정랑이 되었다.
사간원 집의 외 4종류의 벼슬을
거처 세자시강원 보덕과 홍문관 전한이 되었다.
인조 11년 장악원정과 도감을 겸하였다. 통정대부로 승진되어
대사관, 동부좌우승지를 거쳐 형조 참판이 되었다.
인조 14년 대사간, 대사성, 부제학을 제수 받았으나 부임치 않았다가
다시 대사간으로 부임할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으로 임금을 모시고 화친을 반대하였다.
가선대부로 승진되었다.
예조 병조참판 대사성, 부제학 대사성을 거쳐 한성우윤,
이조참판, 동지성균관사가 되었다.
이때 아우고가 남의 무고로 의금부에 토옥 되었는데
궐문 밖에서 대죄하니,
임금이 무고함을 알고 석방해 주었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 궁중에서 오락이 심함으로
「인군이 정무를 마친 후에는 반드시 경사에 유념하여
흥망의 자취를 근본으로 치정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평소에 화기가 가득하나 일의 시비에 있어서는 의연히 분발하여
외세에 흔들리지 않고 바른 말로 간사한 것을 물리쳤다.
정사(靖社) 영사(寧社)의 원종훈에 책록되고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에 추증.
이조참판 증 영의정 반 신도비명
공의 휘는 반이요,
자는 사일이니 사계 선생의 제자다. 공은 선조 경진년에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영리하여 황강공(계휘; 조부)이 어루만지며
「이 아이가 반드시 우리 집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하더니
점점 자람에 탁연히 조성하여 신독재 집(형)과 함께 쌍벽을 이루었다.
갑자년 이괄의 반란에 상감이 공주로 파천 할 때에
공이 어가를 따라 공주에 있으면서 정시 3인으로 뽑혔고 옥당에 들어가
여러 요직을 거쳐 병조참판 대사관이 되었다.
동부승지에서 형조로 옮겨 병자호란 때 적병이 갑자기 몰려와
상감이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 성이 위급할 때 공이 임금께 아뢰어
수레를 타고 성에 올라 친히 독전하며 삼벽제장과 힘껏 싸웠다.
공의 아들 익희가 독전어사로 남성을 지키는데 공이 가로되「우리는 직책에
죽어야 할 것인데 다만 명백하게 의(義)를 얻기 위하여 이 마음을 밝혀야 한다.」고 하였다.
한편에서는 임금에게 적의 진영에 가서 화친을 청하라고 권하나
정온이 홀로 반대하여 죽기를 맹세하고
공의 의견과 같이 시종 변치 않았으나 화친은 이루어졌다.
한가로운 시간에 강론할 때 시전 운한장(雲漢章)을 인용하여
깨우침이 간절하니 상감이 감동하여 다 가납하고, 대사헌에 옮겼다.
경진(1640)년 4월에 돌아가시다.
명하노니,
선조가 나라를 다스릴 때 군현이 천양하였으니 우계 율곡의
도학이요, 황강의 문장이로다. 연원히 흘러내려
사계(사계선생)를 보았고, 형제가(반과집) 가풍을 이었도다.
세상에 나가면 쓰여 견줄만한 사람이 없었다.
가난한 때를(병자호란) 만나 행한 도가 더욱 굳었도다.
난리에 임금을 모실 적에 대의가 일월같이 빛났고,
간사함을 우정에 빛인 듯 밝아 음사가 스스로 나타나네.
임금의 은정이 두터웠고 선비의 중망이 모였도다.
사헌부의 수반이요, 이조의 차석이다
. 중도에 밝은 자취 천리에 빠른 걸음이었도다.
저 오래된 수풀 속의 융성한 무덤인데,
선인의 도움으로 현당(무덤)이 편안하네.
돌을 깎아 새김에 조금도 꾸밈없다.
내후천년(來後千年)에 군자는 반드시 공경하리.
청음 김상헌 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