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마태복음 25 : 34 - 40
제목: 하나님 서비스
일시: 2007. 12. 9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우리는 하나님을 주라고 부르고 그에 상응하여 우리 자신을 종이라고 부른다. 종은 영어로 Servant인데 말 그대로 서비스를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 시간 드리는 예배도 영어로는 Worship Service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가끔 보면 실제적으로 우리가 주인이고 하나님이 종이 아닌가 싶을 때가 많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서빙해야 하는데, 오히려 하나님에게 서빙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우리가 아플 때 치료해 달라고, 문제가 꼬였을 때 풀어달라고, 장애물이 있을 때 치워달라고...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하신다. 하지만,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라는 노래 가사가 들리는 것 같지 않는가!
II.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서비스 해드릴 수 있는가? - 간접방법!!!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을 볼 수 없는데 어떻게 그분을 서브해 드릴까? 그분은 거룩하신 분이어서 우리가 감히 함께 있을 수 없는 존재인데 어떻게 서비스를 해 드릴 수 있는가?
한 유대인이 랍비에게 와서 이런 질문을 한다. 랍비여 하나님을 제게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 두 눈으로 보기 전에는 도무지 그분의 존재를 믿지 못하겠습니다. 이때 그 랍비는 이렇게 대답한다. “형제여! 하늘의 태양을 한번 보시오.” 유대인 왈 “아니 하늘의 태양을 어찌 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보는 즉시 몇 분도 안 되어 저는 실명할 것입니다.” 랍비 왈 “형제여! 하늘의 태양도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그것을 지으신 분을 어찌 쳐다 볼 수 있겠는가!”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어떻게 그분을 서빙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의롭고 거룩하신 분인데 불경하고 불의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서브할 수 있는가? 어둠과 빛이 공존할 수 없고 의와 불의가 함께 할 수 없듯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인데 어찌 그분을 위해 서비스할 수 있는가? 추한 우리가 서비스하려고 하면 그만 두라고 아니하실까? 오히려 하나님이 불쾌해 하실 것이다. 더러운 손으로 주님의 어깨에 묻은 먼지를 털어드릴 수 있는가?
또한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신가? 그분은 우리와 이 천지만물을 만드신 분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분이 필요할 게 무어가 있어서 우리의 서비스를 받으시겠는가? 서비스를 하려면 일단 서비스를 받는 분이 뭔가 부족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을 서비스하려고 해도 제대로 뭔가를 해드릴 것이 없다.
그 방법은 40절에 나온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하신다. 작은 자는 누구인가? 35, 36절에 나오는 사람들이다. 주리는 자이고 목이 마른 자이며 쉴만한 집이 없는 나그네이고 옷이 없어 추위에 떠는 자이고 아파 병들어 있는 자이며 핍박을 받든지, 죄를 지었든지 간에 옥에 갇힌 자들이다. 어디서 많이 보던 자들이 아닌가! 낯이 익고 안면이 있지 않는가! 그렇다. 그들은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상대하셨던 사람들이고 주님이 낮아진 자로서 서비스 해 주었던 바로 작은자들었다. 이 작은 자들은 참으로 작아서 무시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고 관심을 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어떻게 서브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주님은 당신의 친구들을 나처럼 대하라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은 변장된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 있는 것이다. 주님의 방법은 간접적인 방법이다.
예)아내를 기뻐하게 해주는 방법이 무엇인가? 장모에게 잘 해드리는 것이다. 장모에게 잘 하면 아내는 자기 자신에게 잘 한 것보다 더욱 좋아한다. 역으로 장모를 기쁘게 해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내와 안 싸우고 잘 살고 사랑해 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장모님이 시집간 딸이 살기를 바라는 것이고 사위에게서 바라는 것이다.
주변을 보라. 작은 자가 보이는가? 내 눈에는 주님을 서빙할 수 있는 기회로 보여야 한다. 단지 우리는 작은 자를 보게 되면 하나님을 섬길 기회를 얻게 되어서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 목회를 하면서 해야 할 일이 많아진다. 문제를 본다. 해 주어야 할 일들이 있다. 돈을 받고 하지 않는다. 아니 돈을 주고 한다. 나는 왜 우리 교우들을 서브하는가? 바로 주님을 서브하는 것이다. 어려운 이를 만나면 피곤하게 생각하지 말고 “드디어 실력발휘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라. “하나님께서 드디어 기회를 주셨구나”라고 생각해야 한다. 내가 형제 자매를 위해서 무엇인가 할 수 있고 내가 교회의 지체로서 무엇인가 할 수 있을 때 그것은 축복의 기회임을 기억하라.
III. 헌신적으로 하라. - 오성호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 그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 꼭 들어가는 형용사는 희생 혹은 헌신적인이라는 단어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희생의 사랑, 헌신적인 사랑이었다. 그러한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새 계명, 즉 사랑의 계명을 주셨다. 이 계명을 지키는데 있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희생적인 사랑이다. 사랑에는 희생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희생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하고 나의 것을 희생하겠노라고 한다. 그러나 정작 내 아내를 사랑하고 내 남편을 사랑하고 나의 바로 옆 나흐바,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일은 잘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세계는 품으면서 내 손길이 닿는 조그마한 이 반경 하나는 품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지극히 작은 자를 서브하라고 말씀하신다. 큰 일을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작은 자에게 한 작은 일을 하라고 말씀하신다. 작은 자에게 한 자그마한 일이지만 그 파워는 크다. 작은 일을 잘하는 사람은 성실한 사람이다. 큰 것은 누구나가 열심히 하지만, 작은 것은 진실되이 일하는 사람만이 한다. 작은 일을 잘하는 사람은 인격이 된 사람이다. 사람을 무시하지 않으니까. 그 사람의 솔직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의도하지 않고 무의식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참되다. 표시나지 않는 일이다. 눈에 보이지 않기에 오히려 순수한 동기에서 하는 것 아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원리를 택하고 계시다. 변장하신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시고 참으로 우리의 헌신과 사랑이 순수한지를 보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계를 품으라고 말하지 않고 작은 자를 위해 헌신하라고 말씀하신다.
이런 사람들이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것은 창세로부터 그들을 위하여 예비된 나라이다. 그 나라에는 어떠한 사람이 있는가? 바로 헌신하고 서비스에 익숙한 사람만이 있는 곳이다. 지난 주에는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복지국가이며 선진국이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서비스가 좋은 나라임에 분명하다. 천국은 서비스의 천국이다.
예) 들은 얘기인데, 호텔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서비스라고 한다. 별이 낮은 호텔에서는 서비스가 형편이 없다. 그러나 별이 많은 호텔에서는 서비스가 좋다. 서비스는 무엇인가? 손님이 불편한 곳이 없는가를 잘 알아서 챙기는 것이다. 이왕이면 웃고 이왕이면 편리하게 해주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연구를 한다. 어떻게 하면 손님을 편안하게 해 주겠는가? 손님을 예의주시하면서 무엇이 불편하지 않았는지를 묻는다. 프라하의 어느 호텔에서 밥을 먹으려고 하는데 가방을 둘 데가 없어서 두리번 거리다가 옆에 놓으려고 했다. 바로 그때 어느 틈엔가 가방을 놓는 적절한 받침대를 가져다 놓아주었다. 그것은 참으로 기분이 좋은 것이었다.
천국은 몇 성 호텔이겠는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배된 나라를 상속하는 사람들은 바로 서비스를 잘하는 사람들이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도 관심과 헌신적인 사랑을 기울이는 사람들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모인 나라는 서비스가 좋은 나라임이 틀림없다.
IV. 모든 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걸고 해야 하는 것이다. - 결론은 버킹검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시는데, 그 의미는 우리의 삶 자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삶이요 예수님이 인정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일이 크든 작든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냐 아니냐가 중요하다. 우리가 주린 사람을 먹이고 목마른 사람을 마시우고 헐벗은 사람을 입히고 억울한 사람을 위로하고 아픈 사람을 간호한다 할찌라도 그것이 주의 이름으로 하면 거룩한 일이요 귀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조차 그 중심에 예수님이 빠지고 우리가 중심이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란 이름 아래서 살고 있다는 의미이다. 삶 자체가 주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어야 한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삶 자체를 보면서 큰일 작은 일을 판단한다. 중요한일 사소한일을 규정한다. 좋고 유익한일 안 좋고 무익한일로 구분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작은 자에게 하는 일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기 원하신다. 영광을 받으실 때 바로 내게 한 것이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행위는 모두가 그리스도의 명예를 걸고 하는 일이다. 우리가 하는 무슨 일에든지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표자로서 책임을 지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과 한 팀이 되어 일해야 한다.
예)아프카니스탄에 23명의 인질이 잡혔던 다음에 풀어주었다. 40여일을 잡혀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놓아줄 때 조건 중에 하나는 아프카니스탄에서 선교활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봉사활동을 하러 가지 않았는가? 주린 사람들, 목마른 사람들, 아픈 사람들, 벗은 사람들 눌린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간 것이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였는가? 문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딜레마는 봉사를 하여도 그것이 그리스도이름으로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 했는데, 그 봉사조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과 관련되었는데 어찌 구분이 가능하단 말인가! 봉사를 갔다가 복음을 전하는 것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봉사를 하는 것과는 무엇이 다른가? 만일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이 내게 한 것으로 인정한다면 그 구분이 없어지는 것이다.
어디에서 시작하든 예수님으로 결론이 나야 한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할 때 앉은뱅이가 걷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결론이 나는 것이다.
사도행전 8장에서도 이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재무장관 내시가 이사야를 읽다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그때 빌립이 길을 걷다가 그를 보고 이사야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고 있다.
요한복음 9장에서도 날 때부터 소경된 자로부터 시작하지만, 예수님으로 결론이 난다.
우리는 어디서부터 시작하든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결론이 나야 한다. 우리의 삶의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 우리 삶의 제목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여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닮은 자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예)결론은 버킹검이라는 말이 있다. 양복선전이다. 다른 양복집에 가서 고르고 골라도 결론은 버킹검이라는 것이다. 그 말을 만들어 낸 사람은 소비자들의 심리를 잘 알고 있었다. 백화점의 남성의류코너에는 많은 회사들의 제품이 몰려있다. 결정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지만, 결론은 버킹검은 우리의 의식속에 박혀 그들의 의류판매를 촉진시키고 있는 것이다. 인생의 결정들에 있어서 우리는 인생의 결론은 버킹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의 갈등은 잠재워질 것이다.
V. 오늘 제직들이 임명되었다. 집사님들이 임명되고 팀장들이 임명된 것이다. 어제와 오늘이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잘 보시면 알겠지만, 이미 그렇게 일하고 계시다. 우리 교회는 서비스가 좋은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서비스는 하나님을 티텔로 걸어놓은 서비스이다. 그런 서비스가 넘치는 교회는 헌신적인 사랑이 있는 교회이다. 2008년도를 바라보면서 세계를 품고 원대한 비젼을 갖기 전에 먼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 이사가 있으면 좀 도우라. 카페에 뭐가 올라가면 시원하게 답도 써 주시라. 경제사정이 어려운 이가 있으면 좀 나누어 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