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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방어 목적상 몇가지 이점 |
1.개전 이래 최초로 이루어진 전투 방어선 이며 2.서쪽 측면 낙동강은 강폭 400-800m으로 형성 되었고 기본 수심 2m-4m 강수면폭 200-400m 형성되어 천연의 방어선 구축 3.낙동강 방어선 안쪽은 거대한 보급창고인 부산으로 부터 대구.포항 영덕.밀양.창녕까지 병참선 발달로 보급과 병력 이동에 유리함 |
북한의 부산 점령하기 위한 전투 작전 개요 4가지 방안 |
1.남강과 낙동강 합류점(창녕 남지교)을 통해서 마산으로 통과하는 방안 2.낙동강 돌출부(박진교)를 통과하여 영산-밀양에서 철도와 도로를 이용하는 방안 3.경부본도와 5번국도를 따라 대구를 통과하는 방안 4.동해안 도로를 따라 남하하는 방안 |
워커라인 두번째 이야기
여름과 겨울 어느게 더 힘들까
포항에서 만나 여관에서 자고 태관님의 아드님이 이곳 도음산 자연 휴양림에 데려다 준다.
전투 위령비 앞에서 한장 담고 기나긴 시간속으로 여행하듯 빨려 들어가보기로 하고
날짜: 1월 4일 07시 부터 1월 8일 저녁 11시 30분 혹한기 무박 113시간동안
추운날이라 땅바닥에서 오래쉬지 못하고 진행해서 빨리 끝남
우리가 지나는길에 만나게 될 전적비와 충혼탑
*천마산 도음산 전투 위령비.(흥해읍) 30km지점
*덕수 공원 충혼탑(덕수동)
*포항지구 전적비.학도 의용군 전승 기념관( 용흥동)
*안강지구 전승비(경주시 강동면)
*기계안강지구 학도 의용군 전적비(육통리)
*안강전투 전사자 위령비(안강 근계리)
*영천 호국원(영천 대첩비.현충탑.) 100km지점
*영천 지구 전적비 126km지점
*신령지구 전승비.국군 6사단 17,014위 충혼비(성환산 공원)
*갑티재
*다부동 전승비
328고지
*왜관지구 전승비
*충혼비/낙동강 작오산 전투/한미 전몰 장병 추모비
*6,25 참전 용사 기념비(달성)
*충혼탑(현풍)
*박진지구 전적비(창념 남지)
*6,25전쟁 경찰 승전탑(대산면)
*처녀 뱃사공 노래비
*661고지 전투산
*서북산 전적비(서북산)
*해병대 전적비(진동)
선덕여왕께서 말년에 피부병으로 고생해서 이곳 천곡사 우물에서 씻고 나았다는 전설이 있는곳이며
6.25전쟁때 북한군 사령부가 자리했던곳이다.
잠시 부처님께 절을하고
전쟁때 모두 불타고 새로 창건한 천곡사
천곡사 옆 도로가에 매화나무에 겨울 매화가 만발했다.
좋은일 있으려나
도음산 산길 좋고
태관님. 정명대장님.
포항지구 전투 도음산.천마산 지구 전투
8월 21일부터 8월 27일까지 국군 3사단과 포항으로 진군하려는 북한군 5사단과 치열한 공방전으로
6차례나 주인이 빠뀐 전투이며 피아간 1천명 이상 전사한곳이다.
비학지맥길 도음산
전쟁 당시 전사한 김소위를 묻어 두고 간곳이라 한다.
포항 고속도로를 지나 다음 산길 오르면 등로는 좋게 이어진다.
비학지맥길에 자리하는 신라 소재상 부인 순절비
포항 용흥동에 자리하는 포항지구 전적비로 오르는 중
포항지구 전적비 앞에서
내용은 다음과 같음
전몰 학도 충혼비
충혼비 앞에서
학도의용군 전승 기념관
하필이면 문닫은날 찾아와서
덕수공원내 승전비에서
덕수공원내 위령비에서
덕수공원에서 옛포항여고 방향으로
포항여중 앞
학도의용군 전적비에서
어리지 않은 우리의 아버지 학도병
학도 의용군:수원에서 조직한 비상 학도대를 시초로 53년 9월까지 전쟁 수행을 기여
교복을 입은채 책대신 총을 메고 전투에 뛰어들어 많은 희생을 당함
소년병:낙동강 전선에서 14-17세로 병역 의무가 없는 어린소년들이 애국충정으로 연대 수색대 및 특공대 요원으로
치열산 전투에 참여
*1950년 8월 11일 경북 포항지구 포항여자 중학교 전투에 참전한 학도병 71명중 48명 전사, 13명 부상
*한국전쟁 당시 학도 의용대로 편성된 16-18세의 학도병들은 부산 육군 제2훈련소에서 3주간 군사 훈련
소총과 담요 군복을 지급받고 군번도 없이 전방에 배치
*1950년 6월27일 한강 방어전투를 시작으로 약 25만명 참전 그중 약 5만명이 직접전투에 참전, 7천명 전사
그동안 정부는 학도병들을 국가 유공자에 포함 시키지 않았다.
*18세 미안 소년병 징집을 금지하는 국제법을 의식해서였다.
정부는 2002년 소년병이라는 이름으로 참전 유공자를 인정
11시간동안 사투
8월 11일, 당시 포항에는 수백 명의 남한군 정규 병력과 함께 비무장 병력인 학도병 71명이 대기 중이었다.
당시 학도병들은 전쟁에 참여할 의무가 없었음에도 자신들이 따르던 정규군 장교를 따라 포항으로 향한 것이었다.
최후의 전선을 지키기 위해 모든 전력을 낙동강으로 집중시켜야 했던 남한군은 학도병들만 남긴 채 현장을 떠났다.
전력 면에서 열세였을 뿐 아니라 북한군의 진격 정보를 알지 못한 포항은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였다.
새벽 4시. 학도병만 남은 그곳에 6발의 신호탄이 터짐과 동시에 총성이 들려왔다. 날이 새면서 시야가 분명해질 무렵
포항여중 정문 앞으로 북한군 766부대의 행군종대가 다가오는 것이 눈에 띄었고 이들의 행렬이 50m 전방에 이르렀을
때 대기하고 있었던 학도병들은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다. 이 사격으로 북한군 대열은 순식간에 무너졌지만 잠시 후
전열을 가다듬은 이들은 장갑차 부대를 앞세워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북한군은 학도병들에게 항복을 강요했지만
학도병들은 이를 거부한 채 얼마 되지 않는 실탄이 소진될 때까지 응전했고 실탄이 떨어지자 적이 던진 수류탄을
되받아 던지는 혈전을 펼쳤다.
이날 포항 여중에서의 전투로 북한군 60여 명이 사망했고 학도병 47명이 꽃다운 젊은 목숨을 잃었다.
포항에서 낙동강까지는 2시간 거리. 학도병이 11시간 동안 북한군의 남침을 지연시킨 포항전투는 낙동강 사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어진 국군과 연합군의 반격에 크게 기여했다.
내용은 읽어 보시고
포항여고에서 죽도시장에 들러 물회로 점심식사를 마친다.
바다와 형산강이 만나는 지점
형산강과 포항 제철
워커라인 표시석
연재근과 12용사
형산강 도하작전의 3사단 22연대 1대대 연제근 이등상사와 12특공대
야간을 틈타 형산강을 건너 적진의 기관총 진지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12명 모두 전사
내용은 다음과 같음
6,25참전 명예 선양비
안강 기계 전투지역으로 이동중
안강지구 전승비
안강지구 전승비 앞에서본 형산강
멀리 곤제봉이 눈앞이다.
멋지구만
양동마을로 가는길에
경주 양동마을
어래산으로 가는길에 논으로 진행한다
기계 안강지구 전투 학도 의용군 전적비에서
어린학도병 전사자들에게 자식이 없습니다.
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면
그들의 희생을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습니다.
군복아니 운동화에 교복을 입고 펜대신 총을 메고
철모보다 中자 달린 학생모 쓰기를 더 자랑스러워했습니다.
어래산 전투
17번이나 뺏고 뺏긴 치열했던 전투지역
이곳 지역은 8월 9일 북한군 제 7사단의 기습공격으로 17일까지
국군 수도사단과의 전투로 북한군 2천 3백명 이상 사망한곳이다.
같은날 우리가 지나는 전적비에 경주 시장이 방문해서 하얀 국화꽃으로 헌화를 했다.
어래산으로 진행
어래산 정상
전쟁 당시 어래산 능선은 17번이나 주인이 바뀌었을 정도로 치열했던 교전 장소이다.
지금은 등산객이 찾는 산이지만 ...
인증 담고
낙동정맥길 시티재로 향한다
시간을 보니 아직 국립 영천 현충원에는 문을 열시간이 아니기에 시티재에서 두시간 가량 기다린후
국립 호국원으로 가본다.
호국원 철문은 굳게 닫혀있어 발길을 돌리기도 그렇고 경비실에 전화를 하니 아침 9시에 문을 연다고 한다.
사정사정을 하니 기다리라는 말만 하고 문을 열어줄 기미도 안보이고 20분정도 지난후 다시 전화를 하니
조금만 더기다리란다. 결국 30분정도 기다려서 문을 열어 준다. 추버라...
겨우 들어온 호국 영령분들이 잠들어 계시는 영천 국립묘지
현충문
시티재에서 2시간 이곳 입구에서 1시간 가량
장장 3시간 가량을 기다린끝에 현충문으로 들어가 현충탑 앞에서 호국영령분들께 묵념하고
인증담는다
영천 대찹비 앞에서
영천 국립묘지 앞에서 컵라면으로 아침을 먹고 고경면 사무소에 들러 궁금한것 몇가지 알아본다
이곳에서 포항의 태관님을 집으로 돌아 가시고
정명 대장님과 둘이서 진행한다.
3사관학교를 지나서 영천에 사시는 정맥5차팀의 정다운님을 만나서 인사를 나누고 함께 진행.
영천대접 장소인 고경면 대의동 그당시에는 사과 과수원 이였지만 지금은 포도 밭이다.
9월6일 새벽3시 국군 제 8사단은 북한군 제 15사단의 기습을 받아 영천을 피탈 당하면서
국군은 포항-대구를 잇는 동-서 보급지가 차단되는 최대 위기에 직면하게된다.
유엔군은 한반도로 부터 전면 철수를 계획 하였지만 국군 8사단에 3개 연대 를 증원하여 9월 13일 다시 영천을 재 탈환한다
영천 대전투는 국군 2군단 8사단 ,7사단(1만 5천명)과 북한군 13사단이(1만 2천명) 영천시 고경면 대의동에서 벌인
낙동강 전선 마지막 대전투로서 영천이 함락되어 최악의 상황까지 이르렀으나 반격하여, 영천을 탈환함
북한군 3천 8백여명 사망
국군 29명 전사 48명 실종
정보와의 싸움에서 이김
영천시에 자리하는 충혼비에서
영천 충혼비
이곳에서 신령면으로 진행후 갑령재로 가느냐
화남으로 해서 화산으로 가느냐...
화남면으로 가서 화산 가는길을 택하고 보니 한시간 가량 더 걸어야 하는길이 된다.
정다운님은 댁으로 가시고 ...우리는 가까운곳에 들러 짜장면 한그릇씩 사먹고 진행
육군 3사관학교의 학생들이 유격장으로 유격훈련 갈때 행군하던 길을 무작정 걸어 간다.
화산 오르길에 본 고로댐과 우측의 뱀산
좌측의 옥녀봉이 눈앞에 다가온다.
일몰후에 도착한 팔공지맥길의 화산 유격장
화산 정상에서
발가락 물집과 지난해 부러진 오른쪽 복숭아뼈 조각이 걸을때마다 발목을 건드리니 통증이 너무 심해서 걷기가 힘들
지경이다.
여기서 포기하고 집으로 가고 싶지만 ...홀로 남을 정대장님이 나머지 산길을 이어 가실지
정대장님이 주시는 진통제를 먹고 겨우 겨우 진행해본다.
갑령,신령지구 전투
국군 6사단과 북한군 8사단과의 전투로써 신령 북방 군위의 조림산과 화산 갑령재(영천 안동간 국도) 전투이다.
북한군 8사단의 전차 10대를 육탄 공격으로 막아냄
조림산 전투
조림산은 8부능선 부터 상당한 급경사의 오름이다. 조림산 정상은 적의 수중에 들어 가있는 상태이며
8월 말부터 북한군 제 8사단은 인접 북한군 제 13사단 및 제 15사단과 서로 호응하면서 신녕지구를 돌파한
다음 대구 방면으로 진출하여 보려고 최후의 총공세를 다짐하였던 것인데 이 적을 맞이한 아군 제 6사단은 장병
모두가 일심동체가 되어 대구 외곽선을 끝내 사수하는데 성공하여 적의 야욕을 드디어 분쇄하고 말았다.
발목 통증으로 힘들게 이어온 지맥길 능선을 뒤로 하고
팔공산 정상으로 오르는 정대장님.
사진 찍으면 안된다는곳에 서서 인증담고
팔공산 비로봉이 눈앞이다.
바람이 부는구나
추운바람.따뜻한 바람 오늘밤이면 전반전이 끝나는 바람
지나온 팔공산 군부대
서봉 지나서 바위구간
아이고 배고파라!~~
지나온 산길 감상하고
조망 좋은곳에서 잠시
두건님 아시는분들 만나서 인증 담아 본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한티재 휴게서
이른시간이라 식사는 안되고 어묵 몇개사서 먹고 따뜻한 음료 몇개 산다.
가산 산성
파워풀한 정대장님.
가산정상에서
군군 1사단 11연대가 이곳을 방어 했으며
b29 비행기로 포탄 40톤 투하한 가산산성전투
북한군 14연대와 국군의 치열한 전투는 이어진다.
가산
가산에서 오계산 가는곳은 온통 국군 유해 발굴지역이다.
한발 한발 걷기가 조심스런곳
466 고지가 나의 무덥이라며 지켜낸곳
천평동 삼거리부터 좌,우측의 유학과 가산 오계산 사이 산에서 적인지 아군이지 피아간의 구분할수 없을정도로
병력이 뒤썩인곳이다.
가지고 간 실탄이 모두 소모되면 찌르고 때리는 백병전이 몇날몇일 계곳되었고
8.15일 기준으로 상황은 최고조에 달해
아군과 적군 사이가 너무 가까워 소총보다는 수류탄으로 공격하는 상황이었다.
서로가 전우의 시체를 방패삼아 싸우고 싸우는 처참한 광경이 펼쳐졌고
8월 중순의 날씨속에 전우의 시체 썩는 냄새로 숨 쉴수가 없었다고 전한다.
오계산 466고지 전투지에서
바람이 불어주니 태극기가 펄럭인다.
힘이되어 주는 태극기를 뒤로 하고
유해 발굴지역
많은 전사자가 생긴것으로 판단되는곳이다.
희생자는 늘어나고 신병들은 계곳 사라졌다.
분대장이 자신에게 배속된 분대원들의 얼굴도 모른체 전투에 나섰으며
간략한 이름만 화랑담배 껍질에 쓰여졌지만
분대장이 사망하고 나면 신병들의 죽음은 무명용사로 기록되어
어느곳에도 쓰여지지 않은채 사라진다.
군적도 없이 죽어간 무명용사들.
나라를 지킨 유학산의 다부동 전투
다부동 전투는 8월 1일 부터 9월 24일까지 55일간 이어져
치열한 고지 쟁탈전으로 피 아간에 9번이나 주인이 바뀌었고
아군(국군.미군) 3천 500명 전사, 북한군 5천 690명 전사
다친사람까지 포함하면 북한군 1만 7천5백명. 아군 1만여명
국군 1사단 하루 평균 600-700명 사상자 발생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난 837고지 전투
최대의 격전지로 평가되는 다부동 전투
다부동 낙동강 전승비 앞에서
구국용사 충혼비
다부동 전투 승전비
유학산 전투 내용
유학산 정상 839고지 전투
정상 인증
팥재 휴게소에서 잔치 국수 하나 먹고 다음 산길 열러 간다.
328고지 가는길
328고지 오름길에
낙동강 전투중 최고의 전투지 328고지
328고지 전투 8월 13일부터 8월 23일까지 전투
피아간 주인이 15회 바뀜 서로 양보할수 없는 핵심 거첨인 328고지 전투
북한군 3사단. 105기갑 사단.6천여명
328고지 혈전은 13일부터 23일까지 계속되어 북한군 3사단은 거의 궤멸됨
아군 1사단 15연대 2천명 최종 탈환 23일
피.아간 8천명 사상자
융단폭격
오키나와에서 발진한 B29폭격기 5개편대 98대
폭격시간 26분
모두 3224발 총중량 900톤
포탄으로 환산시 3만발 분량
328고지 전투 내용
서로간의 공격으로 산천초목은 모두 검게 불타고
포탄에 갈갈이 찢겨진 시체와
피가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있고 부상병들의 처절한 울음소리와 비명이 더해간곳
8월의 불볕더위에 갈증은 목을 조르고
이글거리는 태양은 시신의 배를 고무풍선 같이 부풀게 하였고 그냄새는 산야를 진동케 하였다.
불과 2k평방 메타 지역 내 약 2천구의 시체가 겹쳐져 있었다.
왜관 호국 평화공원
호국의 다리
이곳에서 전반전 끝나고 왜관 시내에 들러 때늦은 저녁식사를 하고,
여관에 잠시 들러 발가락 물집을 치료하고,대충씻고 나와
지루한 낙동강 방어선인 낙동강 자전거길이 이어진다.
낙동강 방어 전투는 1%의 희망을 가지고 방어한 전투
졸음이 찾아오는 시간
잠이나 좀 자고 갈까해서 정자에 올라오니 추워서 돗자리 하나 펴기도 귀찮아 앉아서 졸다가 일어선다.
밤을 걷는길이 끝나고 어느덧 동녁이 밝아 어둠속에서 고요하게 흐르던 낙동강이 고스란이 눈앞에 펼쳐지는 아침
또 날이 밝았으니 오늘은 어디까지 갈까 이생각으로 하루의 문을 열어본다.
대구 강정보에 아침 손님으로 수행중님이 저녁무렵까지 걸어 보겠노라 찾아 오셨는데
힘빠진 두사람 길안내 하려는지 ...
손님이 찾아 오셨으니 라면 끓여 대접하기는 그렇고
한장 찍고 강정마을에 아침 밥먹을곳을 찾으러 다녀본다.
이른시간이라 문열어 둔곳은 없지만 막무가네로 찾아 들어간 식당주인 아주머니께 밥 좀 해달라고 부탁하니
들어와서 따뜻하게 몸을 녹이라신다.
배부른 아침
화원 유원지에 갯강구 지부장님이 얼굴 보러 오시는길에 곱게 신고 가라며 샌달을 사오셨다.
지부장님 감사합니다.
낙동강 강를 지나며 인증담고 보니 샤방 샤방
작은애가 얼어 죽는다며 챙겨준 목도리가 이번길에 따뜻하게 아버지를 살린듯하다.
저녁 무렵에 도착한 달성보
이곳에서 따뜻한 음료수 사서 마시고 곧바로 통과
달성 논공단지에 자리하는 6,25 참전비
무심코 지난다면 놓치기 쉬운 곳이다.
건립개요 내용은 읽어 보시고
해질녁이라 강바람은 차갑게만 느껴지는데
수행중님이 찾아 오셔서 재미나고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하루를 지키던 마지막 태양은 일몰이란 이름으로 마지막을 장식한다.
수행중님은 현풍 버스터미널로 향하고
수행중님께서는 집으로 가시고 두사람 앞에 다시 심심한 길은 이어진다.
지루한 길이라 잠시 속도를 내보며 도동서원에 도착하니 어둠속에 별로 볼것도 없고
친구가 어느곳으로 얼굴보러 온다고 연락이 온다.
갈길은 급한데 적당한곳에서 만날수가 없어 구지면 이노정 근처 쌍용한식 부페집 인근에서 만나자 약속을 하고
늦은시간에 부페집은 문을 닫았고
쎄레네님.천명님.저,정명님 한장
천명님이 가지고 오신 따뜻한 차한잔 선물로 받고 보니 이번 산길에 첫 지원물품이다.
쎄레네님은 이방면으로 차로 가시고 대진님과 천명님은 잠시 걸어 주시겠다며 앞장 서신다.
이방면에 들러 찾아온 손님들 그냥 보내기도 그렇고 통닭집에 들러 통닭 한마리시켜 손님 대접을 해드리고
우리는 찬바람이 부는 어둠속으로 사리지고...
어딘지 모르겠고 어느마을 앞 버스 승강장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니 추워서 10분을 앉아있을수가 없어 진행
몇시던가?
유어면에 새벽에 도착하니 오리지널 대장님이 찾아 오셔서 커피한잔 끓여 주신다.
따뜻한 커피한잔 하며 우리가 가지고온 라면 3개를 끓여 먹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대장님은 집으로 돌아 가시고...
남지지구 제일전투의 승리 (1950. 8. 18 - 8. 19)
8월 18일 인민군은 박진나루 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자 포병의 포격과 전술 공군의 폭격으로 처절한 소탕전이
전개되었다.
해병대와 미 24사단 보병은 서쪽으로 진격해 나갔고, 포병은 인민군이 달아나자 도하지점인 박진나루를 엄청난
화력으로 강타했다. 8월 18일 어둡기 전에 해병대 3대대는 311고지(구진산) 제34연대는 240고지(고운봉)
제19연대는 강 전면의 223고지(창아지 뒷산)를 탈환했다.
이튿날(8월 19일) 아침 해병대는 미 34연대 장병들과 함께 대곡과 반포를 완전히 탈환하였다.
저녁이 되었을 때 월상에 까지 인민군의 그림자는 찾을 수가 없었다. 남지지구 제1차 전투는 승리로 끝났다.
이 첫 번째 승리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남지지구 제일전투의 승리 (1950. 8. 18 - 8. 19)
8월 18일 인민군은 박진나루 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자 포병의 포격과 전술 공군의 폭격으로 처절한 소탕전이
전개되었다.
해병대와 미 24사단 보병은 서쪽으로 진격해 나갔고, 포병은 인민군이 달아나자 도하지점인 박진나루를 엄청난
화력으로 강타했다. 8월 18일 어둡기 전에 해병대 3대대는 311고지(구진산) 제34연대는 240고지(고운봉)
제19연대는 강 전면의 223고지(창아지 뒷산)를 탈환했다.
이튿날(8월 19일) 아침 해병대는 미 34연대 장병들과 함께 대곡과 반포를 완전히 탈환하였다.
저녁이 되었을 때 월상에 까지 인민군의 그림자는 찾을 수가 없었다. 남지지구 제1차 전투는 승리로 끝났다.
이 첫 번째 승리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어봉리 능선과 클로버잎고지 후면에서는 북괴군 패잔병들이 낙동강을 향해 서쪽으로 밀려가고 있었으며 북괴군
제4사단의 총퇴각은 누구의 눈에도 뚜렷했다. 다음날 해병대와 제34연대는 강변에서 합류 했으나 강 차안에서는
적의 그림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적 제4사단의 도강 인원은 3,000명 미만이었고 강 차안에서 미군들은 1,200여구의 적 시체를 매장했다.
34문의 포와 수 백정의 자동화기 그리고 수천의 소총을 유기 함으로써 서울 사단의 호칭을 받았던 적 제4사단은
사실상 이 날짜로 소멸된 것이었다.
창아리마을과 박진지구 전투 기념관으로 가보기로 하고 배낭을 삼거리에 가볍게 뛰어 간다.
박진지구 돌출부 전투 안내판
박진지구 전투지역
인민군은 새벽 0시 시남리 이이목나루를 도하한 다음 시남 수개 고곡 등 산야에 은신하고
있었으므로 고곡을 거쳐 대곡까지 진출하려는 미군에게 맹렬한 사격으로 공격을 가하였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미군은 많은 사상자만 내고 월하까지의 진출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때 인민군은 창녕을 향해 두 곳에서 낙동강 도하를 시도하였는데 이곳만 성공했던 것이다).
뗏목을 만들어 강을 건너기도 했으나 대부분 옷과 신발을 벗어 무기와 함께 똘똘 말아 머리위로 높이 이고 어깨까지
차는 강물을 건넜던 것이다. 이때 인민군 제4사단 제 16연대 주력 800여명이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시남리 고개를 넘어 안쪽으로 들어 왔는데 미 34연대 1대대가 시남리 청단고지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몰랐던 것이다.
미군은 이이목지점에 한명의 척후병도 내보내지 않아서 일어난 전투
박진지구 돌출부 전투
박진지구전투는 1950년 8월 6일부터 10월 4일까지 박진나루가 있는 곳에서 벌어진 전투로, 미군 제2사단과
제24사단이 북한군 제4사단과의 치열한 전투
이곳이 무너지면 밀양과 부산은 물론 나라전체가 순식간에 점령당하는 최후의 보루인셈이다.
북한군의 시체가 낙동강물따라 사단병력이 떠내려간곳 이며 박진전투에 승리함으로써 아군이 낙동강을 건너
반격하게 되었으며 결국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과 함께 합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두곡지구 전투(클로버 전투지역)8월 7일-14일
자정이 지나자 적은 다시 4개 지점에서 일제히 도하를 개시하여 다음날(8월 7일) 새벽에는 최초 도하시와는 달리
<낙동강 돌출지역>내의 요지인 어봉리 능선과 두곡리 서편에서 북으로 뻗은 클로버잎 고지(△165)를 신속히
장악하고 말았다.
고지의 모양이 클로버 잎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으며 남북으로 4km나 뻗은 양지고개는 적이 이를 장악할
경우 9km 동쪽의 영산지역은 물론 하남(영산 동남 20km )에 이르는 미제24사단의 주보급로를 깊숙이 감제 관측할
수 있는 중요지형으로써 <낙동강 돌출지역>전투의 승패를 좌우하는 전술적 요충지였다.
8월 7일 아침, 제1대대는 이토록 중요한 양지(兩地) 고개를 탈환하기 위하여 다시 역습을 시도했으나 우세한 적의
병력과 지형적인 불리 그리고 혹심한 더위와 식수 부족 등으로 피해만 증대되어 갈 뿐 아무런 작전의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제1대대의 공격이 난관에 봉착되자 처치장군은 창녕에서 재편성중에 있는 제19연대를 투입하여 양개 고지의 탈환을
다시 시도해 보았으나 점차 증강일로에 있는 적을 격퇴할 수는 없었으며 아군의 피해는 증대되어 갔다. 8월 8일
제34연대의 병력은 1,000명선으로 제19연대는 1,700명선으로 감소되었고 사단의 전투력은 40%로 평가되고 있었다.
영아리 마을 옆 개비릿길로 향한다.
전쟁 당시 개한마리 겨우 지나갈 많큼의 절벽길이였기에 소.우마차. 같은걸 모두 이곳 .창아지.영아지 인근에 버리고
심지어 나이 많은 부모님이나 갓난아이도 버리고 몸만 겨우 지나갔다고 함.
개비릿길
밤새걸어 도착한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지점
아침이련가?
춥기는 드렵게 춥다.
낙동강 전투 최후의 방어선 안내판이 추운 가슴을 뜨겁게 달군다.
화개지맥과 남강 지맥이 만나는 두물머리
남지대교가 눈앞에 펼쳐지고
남지읍에 들러 아침을 먹어야 하지만 어디서 아침을 파는지
겨우 찾아간곳이 묵밥집인데 이른아침이라 장사는 안하지만 겨우 부탁하니
지난밤 손님이 먹다 남긴것 건져서 다시 우리밥상으로 올라온듯 ....
밥 한공기 달라고 해서 기다리니... 쟁반위에 밥모양 보니 식은밥에 완전 떡이다.
밥 숟가락 들기가 민망 할 정도로 ... 아직 배가 부른가 이생각을 하면서도 숟가락 들기가 그렇다.
겨우 몇숟가락 입에 넣고 오물거리길 몇번하고는 대장님과 일어선다.
남지 철교를 지나며
아직은 살만하다.
화개지맥길 용화산 가는 산길에서
힘차게 걸으시는 대장님
용화산
화개지맥길 마지막인 용화산
드디어 날머리 여항산이 멀리 보인다.
저녁이면 저곳에 서리라 생각해 보며
6.25 경찰관 승전탑
이곳에서 잠시 묵념하고
경찰 승전탑을 지나서 처녀뱃사공 노래비에 도착
날씨는 따뜻하고 졸음은 최고 절정에 달한다.
법수면을 지나 모태산(제석산)에 도착한다.
지난번 답사때 달아둔 호국산행 시그널이 반긴다.
제석봉 정상 옆에서
진동에서 여항산-미산을 지나 이곳까지 워커라인 산악지역 방어선이기도 하다.
제석봉에서 내림길은 등로가 없고 온통 가시나무와 도깨비 풀 가시로 가득하다.
심심하던차에 바지에 붙은 도깨비 가시 때면서 진행한다.
남해 고속도로을 건너 삼봉산 오름길에 본 구절초
이녀석은 수많은 국산 야생화 중에서 생명력 하나는 최고다.
제석산에서 내려와 남해 고속도로를 지나서 삼봉산 오름길
한여름에는 못오를것 같은 된비알
발아래는 온통 칡덩쿨과 산딸기나무 그리고 작은 돌이 미끄럽게 만든다.
삼봉산
바람에 펄럭이는 태극기가 왜 이리 반가운지...
이곳에서 보스톤 대장님께 우리가 찾아 왔노라 연락을 드리니 산아래 도로에 찾아 오신다고 하신다.
지난 여름에 뵙고 또다시 워커에서 보니 무착 반가운분 ...보스톤 대장님과 같이 저녁을 먹고 다음 산길 열어 간다.
661고지 전투산 정상에서 일몰이 되어 갈길 급한 산사람을 더욱 급하게 만든다.
피아간 19번 뺏고 뺏긴 661고지 전투산
함안의 법수면에 위치한 남해고속도로 옆 십이당산(삼봉산)에서 장고개-214봉-미봉산-전투산(661고지) 전투산.여항산.
서북산 인성산-옥녀봉-우산봉 은 하나의 산줄기로 형성되어 낙동강 최후의 방어선 이기도 하다
그중 여항산 주변 산세는 함안의 진산이자 마산을 방어하게될 산줄기로써 치열한 교전장소이다.
지도상 고사리 마을은 북한군이 서북산과 인성산 여항산을 오르기 위해서 꼭 빼았아야할 산임에 틀림없고
현지의 고사리(거락리)마을은 인성산으로 오르기 위해서 빼앗아야 할산이다.
전투산-여항산-서북산-인성산 전투
여항산은 함안의 진산이다. 또한 낙남정맥의 주산이기도 하다.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함안은 물이 역류하는 특이한 지세다.
이런 역류지형을 바르게 하고자 훤히 트인 진동만이 함안까지 들어왔다면 천하 제일의 미항이 됐으리라고 여겼
다. 그러기에 배가 다닌다는 뜻으로 남을 여(餘) 배 항(航)자를 써서 여항산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여항산 일대는 최대의 격전지로 꼽을 만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1950년 8월 들어 인민군 6사단은 주공격대상인
마산을 에워싸고 파상공세를 폈다. 이에 맞서 8월 14일 미 제25사단은 가야 서북쪽에 있는 십이당산에서부터 서쪽으로
여항산·필봉·서북산·야반산·옥녀봉을 잇는 능선에다 진지를 구축하고 반격에 나섰다. 이 고지들은 마산을 사수하는 최후
의 방어선이기도 했다.
25사단 24연대는 검안리 남쪽에서 서북산 북쪽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점유했다. 인민군 6사단은 두 차례에 걸친 전투끝
에 수많은 전사자와 군수품 손실로 치명타를 입고 말았다. 이로 인해 강제로 징집한 2000명에 이르는 의용군을 긴급히
보충했다 장비가 태부족인지라 전사자가 생기면 그 총을 회수해 전선에 투입하는데 급급했다.
이 때 어느 의용군의 일기에서는 ‘UN군의 포격과 공중공격은 몸서리치도록 무섭고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견디어야할
이 고난 … 몇 고개를 더 넘어야 마산인가·’라고 생사에 갈림길인 극한상황에 놓인 처지를 적어 놓았다.
미군 또한 험준한 서북산과 여항산 탈취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여항산 정상은 바로 전투 관측과 전방을 이용하
기에 적합한 고지였다. 특히 8월 15일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은 명령 제82호를 하달했다. 그 중 한 대목을 보면 사기
를 진작시키는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유엔군 및 국방군에게 숨돌릴 사이를 주지 말고 새로운 방어선에서 진지를
구축할 여유를 주지 말라! 전력을 다해서 적을 혼란상태로 몰아 넣어 그들의 저항력을 격멸하고 그들의 장비를 파괴하
라! 유엔군 및 국방군에게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라! … ’고 독전했다.
이에 힘입어서인지 18일 밤 방호산 부대는 대대적인 집중 공격으로 나왔다. 3일간의 혈전으로 미군은 작전상 후퇴까지
했다. 무려 19회나 뺏고 뺏기는 백병전을 벌였다.
피아간 5천명 사망
서북산으로 진행
서북산 지나 인성산 오름길 옆 임도로 진행해서 하산하니 창원지부의 철옹성님. 여니고님. 백월님.구경꾼 지부장님이
마중을 오셨고 인사를 나눈뒤에 진동으로 향한다.
날머리 진동 해병대 승전탑에서
해병대 승전탑에서 워커라인 340KM을 마치며 창원지부분들과 함께 마산으로 가서
막걸리 한잔에 모든걸 내려 놓는다.
생각해 보면 113시간의 기나긴 시간도 막걸리 한잔 마시는 시간과 다를게 없을 정도로 짧게만 느껴지지만
이번 산길은 배우고 느끼는 시간이 되어 오래 기억될것 같다.
찾아와주신분들께 감사 드리며 또 다른 배움의 시간이 되도록 더 슬프고 아름다운 길을 기획 해 본다.
이번 워커라인은 책 한권으로 고스란히 만들어 졌네요~~
몇번은 읽어야 겠지요!
훗날 까지 빛을 발하고 또 많은 분들이 걸음하게 될
뜻깊고 의미있는 길 개척하심에 크나큰 노고와 경의를
전합니다.
많은 깨우침을 주고 자신을 뒤돌아보는 계기도
되네요 긴~걸음에 고생많았습니다^-^
한북 정맥길에도 치열하게 교전을 한곳이 많은데
조용한 시간에 한번 올라보시면 많은 도움이 될듯 보여 집니다.
글 감사드리구요 이번주 호남정맥길 힘차게 진행 하시기 바랄께요
긴 글, 긴 걸음을 한마디로 뭐라 말씀 드리기에는 부족하고 부족합니다.
더군다나 이 길이 탄생하기 까지의 여정은 두말하면 사족이겠지요.
훌륭하고 훌륭하십니다.
방장님의 산행기는 단순한 산행기 그 이상입니다.
특히 지맥이나 이런 특별한 기획으로 탄생된 산행기는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두고두고 후답자들이 참고하게 된 기록물입니다.
더도덜도 아닌 정리 간결하나 모자람이 없고 걸으시는 걸음처럼 정확하시니... 좋은 중에 좋습니다.
발로 쓴 기록들 잘 보관하시고 정리하셔서 후답자들의 길잡이가 되어 주셔야 하고
길 위의 역사, 그 역사 위에 또 어떤 역사를 기록하는지 한번쯤 생각하는 계기가 되어 주셔야 합니다.
인삿말이 빠졌네요.^^ 참으로 수고 하셨고, 고생 하셨습니다.
상하신 몸 순조롭게 회복 되셔야 할낀데... 걱정입니다.
@수행 중..^^ 장문의 글 감사합니다.
이제 낙동강 방어전투 지역은 조용하게 뭍어두고 또다른 코스를 찾아서 차츰 알리고 싶어집니다.
그길에는 또 무슨 사연이 있을지 배우고 알고 싶어지네요
잠시지만 같이 걸음해 주셔서 고마운 마음 전하구요 시산때 뵙겠습니다.
혹한기 그누구도 섣불리 나설수 없는
그길..
비록 걸음은 함께 할 수 있을지라도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신 순국선열을
기리는 방장님의 숭고한 마음과 정신을 어찌 따를수 있을까요..
많은 시간동안 수집하고 연구한 자료들
그 수고에 보답할 길은 산행기만이라도
자주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참으로 애 많이 쓰셨습니다
그리고 귀중한 자료 감사드립니다~
새벽에 먼길 찾아 오셔서 진한 커피한잔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 고마움으로 긴밤을 잘 이겨내서 걸음 한것 같고
고마운 정으로 날머리에 섰을때 가장 먼저 생각나더군요
그저 고마운 마음 전하며 시산때 뵙겠습니다.
그 수고로움을 어떻게 몇 마디의 글로 대신할 수 있을까 싶군요.
지난 여름에 더위와 고생을 하셨으면 그만할 만도 할텐데, 한겨울엔 어떤가 싶어서 다시 하신 것인지....
많은 자료조사와 발로 걸으면서 진행하신 그 열정을 누가 말릴 수 있을까요.
두분 정말 고생많이하셨습니다.
발목을 제대로 치료하셔야 나이들어서 고생하지 않습니다.
몸을 돌봐가면서 산행을 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수고많이하셨습니다.
진짜 이번이 낙동강 방어전투 코스는 마지막입니다.
이제 또 다른 코스를 찾고 배워야 할 역사가 기다리니 그방향으로 당분간 전진할까 합니다.
고마운 대장님 다은주 시산때 뵙겠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읽어내려가다가.. 아버지를 살린 목도리라는 말에 눈물이 찔끔..UU
방장님 왜 사람을 울리세요~~ㅠㅠ
114시간의 아름다운 시간 후기글을 통해 조금이라도 함께 느낄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함 전합니다~~
아픈 발목 얼릉 쾌차하세요~
항상 느끼지만 넘 대단하세요..!
먼길 나서기전에 애들 일주일 용돈주고 나니
작은애가 목도리를 목에다 감아주며 힘들면 집으로 오라더군요
매일 저녁 무렵이면 살아있나 확인도 해주고
버거퀸님이 보고 싶은 저녁 잘 계시는지 모르겠군요
환한 미소 자주 좀 보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 무거운 짐 지고 340K 호국선행 글 짧은 사람이라 글 표현도 그렿고 고생 무지 하셨습니다...
무거운 짐 보다 발목 통증으로 몇번이나 하산하려고 했는데
그때마다 진통제를 먹으며 진행해야 했습니다.
글 감사드리구요 고맙습니다.
글을 읽어가는 동안에도 많은 생각이 교차 하는데..
추위와 배고품과 통증을 참아 가며 114시간 동안의 마음이 어떠 했을까?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 걸음이셨네요..
그 걸음을 만들어준 이들에 대한 고마움도 다시금 새기게 되고..
늘 많은걸 느끼게 해주셔 감사 합니다.
함께 하신 정명 대장님 태관님께도 감사 드립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먼길 찾아오신다고 연락 왔을때 마음은 참 기쁘더군요
하지만 오고 가는길에 무슨일이라도 생기면 안될것 같아 오시지 말라고 했는데...
언제나 감사드리구요 고마운 마음 잊지 않겠습니다.
사업 대박 기원 드립니다.
다시는 이런슬픈 일들이 없어야 겠지요
호국영령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의미있는 길 수고 많으셨습니다 ^~^
글 감사드립니다.
수년간 자료 찾고 배우고 느끼다 보니 어느새 또 다른길을 찾게 됩니다.
산길에서 만나는 슬픈 역사의 모습을 잊어서는 안되겠죠
정맥길 조심해서 잘 진행 바랍니다.
글로나마 몇번 접하며 지명과 사연들이 익숙해지고
당시를 상상하며 드는 감정도 선명해지니
온히려 글 읽기가 힘이 든다하면 주책이겠지요^^;
위커라인 그 길위의 슬프고 아픈 역사 기억하겠습니다
여튼..
춥고 아프고 졸립고 배고프고 서글픈 기인 긴 시간들
무사히 마쳤으니 다행입니다
다행입니다
지원은 절대불허라 하셔서 전 맘편히 여행다녔습니다~^^
놀러 오셨으면 제가 밥은 사드릴수 있었는데 ^^
시작부터 발목 통증과 발가락 물집이 애들 먹이더니 결국은 화산에서 중탈을 결심하고
왜관에서도 중탈을 결심하고 진통제로 걸었나 봅니다.
글 감사드립니다.
114시간 ㅠ 방장님은 사람이 아니여요 ,...
소백산에 가신줄 알았더니 안가신것 같습니다.
시간되시면 지부 산행에 자주 오십시요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
그 무거운 짐을 지고 고되고 힘든 여정길을
걸으신 방장님 정신력에 새삼 감탄합니다
한발한발 걸을때마다 불편한 다리는 걷는
발걸음을 더 힘들게 했을것 갔고 한밤중
추위에 잠시 쉬기도 불편했을텐데 무엇이 그
힘든 길을 걷게 했는지...
호국 선열들의 피로써 지켜내 이나라 이땅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겠습니다
한밤중에 자리깔고 누워보니 하늘에 별이 그렇게 많고 아름답더군요
그리고 다시 하늘이 안보이게 모든걸 뒤집어 쓰고 누워보니
다리가 시려 오래 누워 있을수도 없고
무작정 걸음 하는게 상책이라 판단되어 걸은것 같습니다.
글 감사드리구요 매년마다 많은 후원금 감사 합니다.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할 비극~ 하지만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속에 남.북으로 갈라져 살아가고 있는 우리네 현실~~..ㅜㅜ
그저 뭐라 말로 표현할수 없네요.. 아무나 쉽게할수없는 어려운 발걸음 하셨습니다..
정명대장님 방장님..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두분의 발걸음을 따라 저두 훗날 뒤따를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감히 가슴에 새겨봅니당..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얼굴 보러 와주셔서 힘이 났구요
열심히 산에 다니시다가 보면 언젠가 산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 가실거라 생각하며
많이 걷는것 보다 많이 깨닫는 산행 하시면 좋겠습니다.
시간나시면 커피 한잔 하러 오시구요
다부동전투,승전비,전적비,충혼비,328고지,유해발굴지...
340키로능선에서 잊혀졌던 6.25 충혼의 감동이 되살아납니다.
중도에 포기하고싶었지만 홀로남은 정명대장님 걱정에 아픈다리로 계속 진행했다는말에
고통의 과정과 진한 동료애를 느끼게됩니다.
무.도의 기나긴 워커길 완주 축하드리며 고생많이 하셨읍니다.
오늘도 병원에 다녀왔는데 발목에 뼈조각이 있고 우측 인대는 늘어나서 수술을 해야 한답니다.
그래도 정명대장님 외롭지 않게 같이 걸어서 다행이구요
제 역활을 다해서 기분 좋습니다.
글 감사드리구요 대전에 가면 연락 드릴께요
아참 시산제 꼭 오세요
@배병만 고통없는 환희가 무슨 감동이 있겠는지요.
포기하고싶었을때 그때 포기했으면 몸은 보존했겠지만 같이하지못한 아쉬움에 아마 마음의 병을 얻었을것입니다.
선택의기로에서 나를 이긴다는게 얼마나 어렵다는걸 새삼 실감케합니다.
방장님, 치료잘하셔서 전사의모습으로 다시뵙기바랍니다.
방장님 걱정입니다 발목이 괜찬아야 할텐데
워커라인 2번 가면서 생각지도 못한 공부많했습니다
방장님과 걸으며 많은이야기 세로운 세계 많이 보았습니다
고맙구요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발목이 아파서 중간에 몇번이나 중탈 할생각을 하였는데
모처럼 시간내 오신 대장님께 차마 집에 가겠노라 말씀은 못 드리겠고
주신 진통제로 잘 버티긴 했지만 지금 그 후유증이 심하네요
발목 복숭아뼈는 부서져 발목부위에 박혀있고 인대는 늘어지고
수술을 해야 한다는데 걱정입니다.
그래도 배울수 있는 슬픈 역사가 담긴 길 함께 걸어서 좋았습니다.
광복절날 심하게 걸어 봅시다.
일찍부터 아픈 발목을 이끌며 다니신114시간의 승전고와 동료애에 숙연해집니다. 산행기를 읽으며 이 땅을 몹시도 사랑한 이들의 숭고한 뜻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이 땅의 빚을 지고사는 이로서의 몫도 다시 돌아보게됩니다. 발걸음을 통해 아픈 역사와 후손들에게 남겨준 교훈을 다시 생각하게 한 방장님과 정명대장님의 노고에 큰 경의를 표합니다.
글 감사합니다.
아픈 역사를 올바르게 보고 숭고한 흐ㅟ생을 다시한번더 생각해보는 이간이였습니다.
낙동강 방어 전투는 후답자에게 넘기고 이제 또 다른 슬픈 역사를 배워 보려고
멀리 충남 홍성으로 독립투사분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 보려하며 자료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대간길 잘 이어 가시구요 시산제때 뵙겠습니다.
워커라인의 의미를 알게해주는 의미있는 후기입니다.
기나긴 여정, 그 먼길~~
대단하시고, 정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그동안 많은 산길을 지났으면서도 의미있는 산길에 많은 분들을 모시고 가지 못했던건
세월이 흐른많큼 나라사랑했던 그분들을 잊혀져 간다고 보여집니다.
글 감사드리며 이제 남은 건 다음산길을 열어갈 후임이 나타날때까지
조용한 기다림이 있어야 겠죠
워커라인 자유대한민국을 가능 하게한 숭고한 희생의 지역이네요.
후기를 보면서 한국전쟁과 현재의 배방자님의 숭고한 마음이 느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