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남진원 문학관 원문보기 글쓴이: 動友齎
남진원의 시조 평설, 그리고 덧붙이는 말
달빛에 싼 청산 한 채… 4
(고시조는 현대에 맞게 고쳤습니다. 원문은 출전을 참고 하시면 됩니다.)
불욕이정(不欲以靜)
남진원(대한민국 서정시인)
강릉교육문화관의 활동상을 보면 자못 의미가 크다. 어린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평생교육의 역할을 다양하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해오고 있다. 관장님을 비롯하여 직원 여러분들의 노고가 큼은 말할 나위가 없다.
공공기관의 공적 욕망의 성질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개인의 이익이 아닌 공공의 이익을 위한 미적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지극함의 미적 욕망이 시간과 공간적으로 조화를 이루면서 추진해 나가는 공공기관의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이에 구별되는 개인의 이타작인 미적 욕망에 대한 지극함을 살펴보려고 한다. 그것은 순전히 동양적 사고에 기반한 고전을 바탕으로 하였음을 밝혀둔다.
도덕경 37장에는‘不欲以靜(불욕이정)’이란 말이 나온다. 욕망을 가라앉히고 나면 고요함에 이른다는 말이다. 천하를 강압적으로 다스리지 말고 스스로 흘러가게 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도는 무위, 즉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스스로 순리에 따라 흘러가기 때문이다.
도는 늘 일 없이 고요해 보여도
욕망이 없는 것 뿐 안하는 일 하나 없네
고요는 손이 없어도 천하 만물 돌게 하듯.
- 남어수, ‘도’ -
어찌하여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는가? 공자는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 하였다. 그러나 산은 욕망을 가라앉히기는커녕 욕망을 가장 크게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하늘을 찌를 듯이 뾰족한 봉우리를 보라. 또 무수한 나무들과 기암괴석을 독차지 하고 있지 않은가. 어디 그 뿐이랴, 골짜기로는 물을 품었다가 쏟아내고 있으니 가히 천하의 욕심쟁이가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도 공자는 어찌하여 산을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 하였던가.
그렇다. 산은 우뚝하면서도 욕심을 내어 자라지 않으니 욕망이 없는 것이요, 온갖 동식물을 길러도 그들을 품어줄 뿐, 그들로부터 무엇을 빼앗거나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온갖 인간들의 탐심이 산을 마구 파헤치고 산의 보물들을 채취해 가도 못하도록 하지 않는다. 구름과 바람이 찾아와 노닐고 햇빛과 달빛이 산을 어루만져주는 이유이다. 어찌 어진 사람이 찾아오지 않겠는가.
욕망을 가라앉히고 고요함에 깃들어 사는 즐거움이야말로 최고심이다. 이러한 경지에서 시를 쓴 시인들의 글을 대하면 역시 깊은 즐거움에 든다.
그 예를 들 수 있는 작품이 서거정의 ‘추일(秋日)’과 남명 조식 선생의 ‘천왕봉(天王峰)’이다.
추일(秋日)
서거정
茅齋連竹逕(모재연죽경) 초가집은 대숲길로 이어져 있고
秋日艶晴暉(추일염청휘) 갠 가을 날이 아주 고아라
果熟擎枝重(과숙경지중) 익은 열매를 단 가지는 무겁게 휘어지고
瓜寒著蔓稀(과한저만희) 오이는 날이 차서 줄기만 남아있네
遊蜂飛不定(유봉비부정) 벌들은 쉼없이 윙윙대고
閑鴨睡相依(한압수상의) 오리는 한가로이 졸고 있네
頗識身心靜(파식신심정) 자못 심신이 고요함을 알겠구나
棲遲願不違(서지원불위) 물러나 살려던 꿈 이루어졌네.
서거정은 조선 전기 최고의 문장가로 알려졌다. 세조 때부터 성종 때까지 국가의 편찬사업에 참여한 학자이며 행정 관료이다. 대제학이란 직책에 오랫동안 있었고 경국대전, 삼국사절요, 동문선 등은 그가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편찬한 서적들이다. 그는 분주하고 바쁜 국가 업무에 골몰하다보니 조용히 사는 것이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가을날 대숲 길로 이어진 한가한 시골 집. 주변에 온갖 열매들이 익어가고 벌들이 윙윙대며 날아다니는 모습은 얼마나 정겨운 모습인가. 심신이 한가로워지면서 다시 알게 된 사실! 그것은 그토록 꿈에 그리던 전원생활이었다. 관직에서 물러나 시골 마을에서 조용히 살려던 그 꿈을 이루고 고요한 즐거움에 잠긴 모습이 마냥 평화롭다.
감히 말하건대, 조선의 몇 몇 문사들은 세계적인 문호들이다. 김종서, 남명 조식, 임백호, 성삼문, 황진이 등이 바로 그들이라 할 수 있다. 김종서와 성삼문은 따로 지면을 빌어 이야기하고 여기서는 남명 조식과 임백호, 황진이의 작품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남명 조식은 유학의 거봉으로 알려진 분으로 특히 실천 유학에 앞장 선 분이다. 시조와 한시에서 많은 문학 작품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모두 추종을 불허하는 명작들이다.
天王峰(천왕봉)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
請看千石鐘(청간천석종) 청컨대 누가, 천석 종을 보았나
非大扣無聲(비대구무성)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얼마나 큰 공이라야 소리가 날까
萬古天王峰(만고천왕봉) 만고에 우뚝한 저 천왕봉 종을 보라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 하늘 공이가 울리게 해도 미동이 없구나.
천석 종이 얼마나 큰 종인가? 콩 열다섯 말이 한 석이니 그 천배의 콩을 모아놓은 종이다. 이런 종을 치려면 얼마나 큰 공이가 있어야 할까. 만고에 우뚝한 저 지리산의 천왕봉을 보라고 한다. 종을 거꾸로 엎어놓은 그 우람한 봉우리, 그건 자연이 만든 산의 종이다. 하늘이 그 종을 하늘공이로 친다. 날마다 하늘이 하늘 공이로 울리게 하지만 거대한 산은 아무리 쳐도 울리지 않는다. 꿈쩍도 하지 않는다.
‘靜’, 그 고요함이 세상천지 어디에 이보다 더할 것인가! 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하늘과 땅을 뒤흔드는 장엄하고도 깊은 고요함이 들리지 않는가. 그 기상이 가히 천하에 으뜸이다. 남명 조식의 정신과 사상은 우주가 공이로 울려도 꿈쩍도 하지 않는 깊이와 넓이를 가졌으니 그 깊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다. 세계에 어느 시인이 이런 깊이와 정신을 담은 시를 썼는지 나는 여지껏 찾아보지 못하였다.
* (셋째 줄은 ‘爭似頭流山(두류산처럼)’이란 글로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지리산’의 다른 이름이기도하다.)
61살 때 지리산 덕산으로 옮겨 와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시냇가 정자에 써놓은 시.
제목은 ‘題德山溪亭柱(제덕산계정주)’
이제 미적 욕망의 드러남을 볼 차례이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하며 죽은 황진이의 무덤에서 술을 권하려던 조선의 선비, 임백호!
1549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1587에 돌아가기 까지 많은 기행과 글을 남긴 조선의 참다운 선비였다. 세상을 거침없이 노닐었다는 점에서 노자의 ‘도’를 실천한 문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임백호는 죽음을 앞에 두고도 의연하였다. 오히려 풍류적이고 초월적이었다. 그는 시 만시(輓詩)에서 스스로를 위로한다.
自挽(자만:스스로를 애도함)
江漢風流四十春 강한풍류사십춘
淸明嬴得動時人 청명영득동시인
如今鶴駕超塵網 여금학가초진강
海上蟠桃子又新 해상반도자우신
조선에서 보낸 풍류 40년의 생활
널리 사람들이 알게 되었으니
이제는 학을 타고 속세를 벗어나리라
신선 세계에 복숭아를 새롭게 맛 보겠구나
자신의 죽음을 이렇게 희극화 하는 임제, 지극한 도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임제의 아버지가 돌아간 지 2개월 후에 자신도 죽음을 맞는다. 그가 죽음을 맞기 전 자식들은 돌아갈 것을 알고 슬피 울었다.
임제는 자식들에게 시를 써서 일렀다.
四夷八蠻 皆呼稱帝 사이팔만 개호칭제
唯獨朝鮮 入主中國 유독조선 입주중국
我生何爲 我死何爲 勿哭 아생하위 아사하위 물곡
“중국 사방의 오랑캐와 남쪽의 여덟 야만족들이 제각기 황제라고 일컫고 있거늘 유독 조선만이 중국을 주인이라 섬겼으니 내, 이런 나라에서 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겠느냐. 내가 죽거든 절대 곡하거나 눈물을 흘리지 말아라.”
이 얼마나 호쾌하고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말이냐? 한 마디 언어의 검으로 자주적이지 못한 조선의 임금과 관리들을 단번에 베어버렸으니 ….
이 한수로 임백호는 세계적인 문호가 되었다. 중국의 당송8대가의 작품을 보아도 이렇게 장대하고 거대한 시성(詩性)을 찾아보기 힘들다.
조선의 남성은 이렇게 장부의 쾌기(快氣)가 있고 조선의 여성은 사랑의 깊이와 지극함이 또한 우주적이고 세계적이다.
이루지 못하는 사랑은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다. 인간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랑의 슬픔이 강물위의 물방울처럼 스러졌던가. 절망적인 사랑의 노래가 불리어지며 심금을 울리고 있는 시 한 편이 있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바람에 꽃이 지니 세월 덧없어
만날 길은 뜬구름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위 시는 ‘동심초(同心草)’라고 불리는 노래이다. 중국 당나라 촉(蜀) 땅에 살던 여류시인 설도(薛濤 770 ? ~ 832 ? )의 시 춘망사(春望詞) 네 수 중에서 세 번 째 수를 안서 김억이 번안하여 작사하였다. 이를 김성태가 곡을 붙여 널리 불려지게 되었다.
설도는 장안 출신으로 지금의 산시성 서안이다. 아버지는 설운(薛鄖)으로 당나라 관리로 지적 수준이 높았다. 그는 외동 딸인 설도를 몹시 사랑하여 어릴 때부터 시문을 가르쳤다. 설도는 총명하고 시재가 있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시를 짓고 대구를 하게 했다.
아버지는 마침 마당에 선 오래된 오동나무를 보고 시를 지었다.
庭除一古桐(정제일고동) 마당에 한그루 오래된 오동나무
聳干入雲中(용간입운중) 가지가 높이 솟아 구름 속에 있네
이 시에 설도가 대구를 지었다.
枝迎南北鳥(지영남북조) 가지는 남북에서 오는 새들을 맞이하고
葉送往來風(엽송왕래풍) 잎은 왕래하는 바람을 손 흔드네
이 시를 보고 아버지는 왜 슬퍼했을까. 대구를 한 시를 보면 가지와 잎을 표현하였는데 새들과 바람의 왕래를 표현하였다. 새들이 오고 가고 바람이 드나드는 것에서 아버지는 사랑하는 딸의 운명에 대한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갔다. 아버지 설운은 매우 강직한 성품이었던 모양이다. 설도의 나이 14세에 촉(蜀, 쓰촨성)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그 후 몇 년 뒤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이렇게 되니 가세는 기울고 설도는 일락천장이 되었다. 그녀는 18세에 악적(樂籍:음악을 하는 기생의 명부)에 오른다.
기생이 되면서 당시 유명한 문사들과 교류가 있었다. 위고(韋皐), 원진(元稹), 백거이(白居易), 두목(杜牧) 등이 그들이다. 이 중에서 위고는 특별하였다. 덕종(재위 779-805)때 위고가 사천안무사(四川按撫使)로 지낼 때 설도를 좋아하였다. 주연이 베풀어진 자리에서 시를 짓게 한 후 여교서(女校書)란 이름으로 불렀다. 후일 기생을 뜻하는 말인 ‘교서’라는 것도 여기서 생긴 말이다. 위고는 많은 재산가였는데 위고가 죽을 때 유언으로 재산을 설도에게 남겼다. 그래서 설도는 그 후 기적에서도 나오고 평생을 곤궁하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설도의 나이 40이 될 무렵을 전후하여 그녀는 젊은 시인, 원진과 사랑에 빠진다. 원진은 9세에 시를 짓고 15세에 과거에 급제하는 천재시인이다. 백거이와는 아주 친했다고 한다. 원진(779-831)과의 사랑을 하며 쓴 시가 100여 편에 이른다고 하는데 현재 전하는 것은 88편이라 한다. 그녀는 자신의 나이보다 11살이나 아래인 원진을 만났다. 원진은 31세, 감찰어사의 신분이었다. 설도의 명성을 듣고 직접 쓰촨성까지 찾아왔던 것이다. 석 달 간 아름답고도 달콤한 사랑에 빠졌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헤어진다. 원진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고 일생을 홀로 보내다가 64세에 세상을 떠난다.
그녀는 위고 덕분으로 기적에서 나온 후 성도의 완화계[백화담(白花潭)이라고도 함]에 기거했다. 그곳은 시성 두보가 만년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설도는 송화지(松花紙)와 소채지(小彩紙)를 만들어 그 종이에 시를 쓰고 종이를 선물하기도 했다. 그녀가 만든 종이라 하여 후세에 사람들은 ‘설도전(薛濤箋)’이라 불렀고 그녀가 종이에 물을 들이기 위해 길었던 우물을 설도정(薛濤井)이라 부르고 있다.
설도는 시를 지어 사랑하는 정인 원진에게 주고 싶었다. 슬픔과 비애의 감정을 담아 눈물로 쓴 시가 ‘춘망사’라는 명시이다.
花開不同賞 (화개불동상) 꽃 피어도 함께 기뻐할 수 없고
花落不同悲 (화락불동비) 꽃이 져도 함께 슬퍼할 수 없으니
欲問相思處 (욕문상사처) 그대, 어디 계시나 묻고 싶어라
花開花落時 (화개화락시) 꽃은 저리 붉게도 피고 지는데
攬草結同心 (남초결동심) 풀 뜯어 한 마음으로 매듭을 지어
將以遺知音 (장이유지음) 님에게 보내려 마음먹으려니
春愁正斷絶 (춘수정단절) 애절한 그리움에 내 마음 끊어지나니
春鳥復哀吟 (춘조부애음) 봄새도 결에 와서 애달피 우네
風花日將老 (풍화일장로) 바람에 꽃잎은 날로 시들고
佳期猶渺渺 (가기유묘묘) 아름다운 기약은 아득하여라
不結同心人 (불결동심인) 한마음 그대와 맺지 못하고
空結同心草 (공결동심초) 헛되이 풀잎만 하나 되는가
那堪花滿枝 (나감화만지) 어쩌나, 꽃은 피어 만발하였는데
煩作兩相思 (번작양상사) 괴로워라 사모하는 이 마음
玉箸垂朝鏡 (옥저수조경) 아침 거울에 떨어지는 눈물을
春風知不知 (춘풍지불지) 봄바람은 아는지 모르는지.
떨어지는 꽃잎은 설도의 모습인가, 지나가는 바람은 정인의 숨결인가. 홀로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더욱 비련에 젖는 여인.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이 단절된 채 눈물이 앞을 가린 그리움과 아픔의 시라고 하겠다.
시를 너무도 잘 썼기에 그녀는 당나라 4대 여류시인[(유재춘(劉采春), 어현기(魚玄機), 이야(李冶)]으로 알려졌다.
재주가 비상하여 촉 땅에 4대 재녀 ‘촉중사대재녀[(蜀中四大才女: 탁문군(卓文君), 화예부인(花蕊夫人), 황아(黃娥), 설도)’로도 이름을 올렸다.
설도의 나이 64세로 생을 마감했는데, 이듬해에는 고급관리를 지낸 단문창(段文昌)이 그녀를 위해 직접 묘비에 ‘서천여교서설도홍도지묘(西川女校書薛濤洪度之墓)’라고 썼다.
말년에 그녀는 쓰촨성 청두(成都)시의 서쪽 교외에 있는 완화계로 거처를 옮겼다가 다시 벽계방(壁鷄坊)으로 옮겨 음시루(吟詩樓)라는 누각을 짓고 여생을보냈다.
청두시의 망강루공원(望江樓公園)에 설도의 무덤과 그녀의 이름을 딴 우물 ‘설도정(薛濤井)’이 있다. 설도정의 물로 술을 빚었는데 ‘설도주(薛濤酒)’라고 불려오고 있다.
중국을 대표하는 여류 시인을 들라고 하면 당나라 시대의 설도와 송나라 시대의 이청조를 든다고 할 만큼 뛰어난 설도는 시재(詩才)가 있는 시인이었다.
설도가 중국의 여류 시인이라면 황진이는 조선의 여류시인이다. 두 사람 모두 기생이란 신분이지만 설도의 사랑과 황진이의 사랑을 보면 매우 큰 차이점이 있다.
설도는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매우 애닲아 하는 극히 여성적인 시인이라면 황진이는 초월적이고도 넉넉한 뱃심 있는 사랑을 한, 오히려 반도에 살지만 대륙적인 시인의 면모를 볼 수 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베어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정든 임 오시날 밤이여든 굽이굽이 펴리라.
위의 시조는 황진이의 작품이다. 사랑에 대한 극진함이 멋들어진다. 사랑의 교감을 나누는 장면 묘사는 하나도 없지만 기나긴 밤을 춘풍 이불 아래 넣었다가 굽이굽이 펴리라는 시어 몇 마디로 사랑의 전부를 황홀감 있게 드러냈다.
황진이는 조선 중종 때 사람으로 개성의 명기로 알려져 있다. 기생인 신분이었지만 많은 선비들은 황진이의 눈에 들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황진이의 눈에 들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그만큼 황진이의 재색은 당대 최고였다. 또한 기예는 물론이고 학문의 세계 또한 깊었던 것. 어느 누구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어느 날, 종실의 한 사람인 벽계수는 황진이 때문에 안달이 났다. 친구인 이달을 찾아가 어찌하면 좋으냐고 털어놓았다. 그러자 이달은 진이의 집을 지나 루에 올라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한 곡 타라고 했다. 그러면 황진이가 옆에 올 것인데 그때 슬쩍 일어나 본체만체하고 말을 타고 가라고 일렀다. 어떤 일이 있어도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벽계수는 이달의 말을 명심하여 듣고 루에 올라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탔다. 그러자 절세미인 황진이가 벽계수의 옆으로 오는 것이 아닌가. 벽계수는 말을 하려다가 이달이 당부하던 말이 생각났다. 미련을 애써 참으며 황진이를 본체만체, 자리를 박차고 유유히 일어나 걸어 나왔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 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여 쉬어 간들 어떠리
- 황진이 -
갑자기 옥을 구르는 듯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한 번 가면 다시 오기 어렵다고 은근히 자신을 노래로 유혹하는 것이 아닌가. 벽계수는 그만 창졸간에 말을 타고 달아나려다가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러다가 말에서까지 떨어지고 말았던 것.
그 모습을 본 황진이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명사인 줄 알았더니 풍류객이었구려.” 하며 돌아갔다고 한다.
벽계수와의 이야기를 봐도 황진이는 이미 남녀 간의 사랑의 본질과 속성을 훤히 꿰뚫은 여인이었다. 이에 비해 설도는 그야말로 여성적이었다. 남정네들이 사랑하고 싶은 귀엽고 단아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중국이란 거대한 땅덩어리에서 태어난 여성이지만 그야말로 여성적인 설도였다. 한 편, 조선이란 반도에서 태어났지만 황진이는 사랑에 있어서, 우주를 품고도 남을 만큼 대륙적 기질을 갖춘 대범하고도 아름다운 멋이 있는 시인이요, 가객이었던 것이다.
중국의 시인 보다 조선의 시인들이 더욱 대륙적이고 기개가 호방하였음을 문학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어디 그 뿐이랴, 사랑에 대한 감정의 최고의 백미는 세계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한국 남녀의 사랑은 최고조였다.
고려시대 만전춘 별사는 속요로써, 세계에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최고조의 사랑에 대한 감정이 드러나 있다. 조선조 황진이가 은근함의 사랑을 지극하게 그려냈다면 고려여인의 사랑은 혼백을 담은 깊은 열정의 사랑이었다.
얼음 위에 댓잎 자리 보아
임과 내가 얼어 죽을망정
이밤 더디 새오시라
더디 새오시라.
우리네 선비들은 지조와 충절 앞에서 죽음을 하찮게 여겼고 배달 겨레의 여인들은 사랑 앞에서 죽음을 초개같이 여겼다. 이처럼 철학과 감정을 문학 작품 속에 육화시킨 조상들의 모습에서 우리 민족의 기상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었다.
또한 몇 편의 작품을 살펴보았지만 느끼는 것은 미적 욕망을 다스리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선인들의 작품을 통해 보았듯이 가라앉힐 때와 드러낼 때를 헤아릴 수 있다면 좋은 인생이라 할만하다. 이를 통해, 후학들의 글쓰기가 어떠해야 할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다행으로 여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