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서원
무성서원으로 들어가려면 현가루를 지나야 한다.
무성서원은 정읍시 칠보면에 있다. 고속도로 태인IC에서 나와 동진강을 따라 올라가다 칠보면 소재지에서 우회전해 강을 건넌 다음 은석천을 따라 올라간다. 남서쪽으로 내장산 줄기가 흘러가기 때문에, 은석천, 칠보천 등 하천이 북쪽으로 흐른다. 무성서원은 무성리 원촌마을 안에 위치한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무성서원교를 지나 마을로 들어서면 홍살문이 나온다. 그곳에서부터 무성서원 영역이다. 홍살문 오른쪽에 고직사가 있고, 왼쪽 앞으로 무성서원 현가루(絃歌樓)가 보인다.
현가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외삼문 역할을 하고 있다. 현가는 『미수기언(眉叟記言)』「기려(羈旅)」편에 나오는 현가불철(絃歌不輟)에서 따왔다.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는 뜻이다.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7일 동안 밥을 먹지 못했으나 악기에 맞춰 노래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군자는 예약을 멈추지 않아야 함을 말하고 있다.
현가루 앞에는 6-7기의 비석이 있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이 무성서원 묘정비, 무성서원 중수기념비, 무성서원 사적지정기념비다. 내용적으로는 무성서원 묘정비가 가장 가치 있다. 서원의 역사와 배향인물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무성서원의 시초가 최치원을 기리는 태산사(泰山祠: 1483년)였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이 1615년(광해군 7) 태산서원 설립으로 이어졌다.
당시에는 태산군수를 지낸 최치원과 태인현감을 지낸 신잠(申潛)을 배향했다. 그 후 정극인 등 5명이 추가 배향되고 1696년(숙종 26) 무성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19세기 들어 두 번의 중수가 있었다. 현가루가 지어진 것은 1891년이다. 1929년에는 서원의 모든 것을 정리한 『무성서원지』가 발간되었다. 1997년 서원의 모든 건물에 대한 보수가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가운데 대청마루가 탁 틔어 있는 명륜당
무성서원은 2층 누각인 현가루가 외삼문의 역할을 한다. 현가루 1층을 통해 들어가면 강당인 명륜당이 있기 때문이다. 명륜당을 지나면 내삼문이 있고, 그 안에 사당인 태산사가 있다. 이처럼 강당과 사당이 일직선상에 있다. 그리고 다른 서원에 있는 동재와 서재, 장서각 또는 장판각이 없다. 특이하게도 서원영역 밖 명륜당 동쪽에 남향하고 있는 강수재(講修齋)가 위치한다. 위치나 당호로 봐서 이것이 동재일 수 있겠다. 그러나 동재라 하기엔 건물의 규모가 큰 편이다.
그리고 서원의 서쪽 담밖에 두 기의 비석이 있다. 신용희와 서호순을 기리는 불망비다. 비석은 강수재 앞에도 세 기가 있다. 이 중 두 기는 의조비(義助碑)와 영세불망비고, 한 기는 기적비(紀蹟碑)다. 의조비는 무성서원을 중수한 감역(監役) 정문술을 기리는 비석이다. 기적비는 병오년(1906) 의병을 일으킨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병오의병은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상실한 데 분개해서 일어난 의병이다.
우리는 잠시 명륜당에 들러 건물의 밖과 안을 살펴본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세 칸이 대청이고, 좌우 한 칸이 방이다. 대청마루 아래로는 공간을 만들어 바람이 잘 통하게 했다. 양쪽 방은 앞으로 마루를 내어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방이 대청보다 조금 높게 만들었다. 대청 가운데 처마 밑에는 무성서원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이곳 명륜당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기둥에 걸린 6개 주련(柱聯)이다. 남전향약(藍田鄕約)을 토대로 윤리, 시서예락, 경전 공부, 제향 등의 가르침을 간단하게 표현하고 있다. 첫 번째 주련에 보면 향약의 기본은 권규교휼이다. 이를 풀어쓰면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이다. 이를 다시 우리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착한 일은 서로 권한다. 잘못된 것은 서로 규제한다. 서로 예절을 지킨다. 어려운 일은 서로 돕는다.
권규교휼이 남전의 옛 향악이니 勸規交恤藍田故約
덕업을 일신하고 효제충화하라. 德業日新孝悌忠和
문예를 때로 익혀 시서예락하며 文藝時習詩書禮樂
춘추로 사서삼경의 뜻을 공부해라. 春秋講磨經義四子
초하루보름 참배하고 남정에 제향하며 月朔參拜享禮南丁
겸손하게 들고남이 행단의 가르침이라. 揖讓進退杏壇遺敎
두 번째 주련에 보면, 윤리의 핵심은 매일 덕을 베풀고 효제충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효제충화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윗사람에게 공손하고, 나라에 충성하고, 부부간 화목한 것이다. 세 번째 주련에 보면, 문예를 익혀 시서예락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문학은 시서를 말하고, 예술은 예악을 말한다.
네 번째 주련에서 보면, 공부는 사서삼경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다섯 번째 주련에 보면, 초하루 보름에 사당에 참배하고 춘추에 향사에 참례할 것을 권한다. 마지막 여섯 번째 주련에서는, 명륜당에 드나들 때 읍하고 겸양의 미덕을 보여줘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주련의 내용은 무성서원에서 시행된 강습례(講習禮)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명륜당 밖에 강습례를 보여주는 주련이 걸려 있다면, 안쪽 벽 위에는 서원의 역사를 알려주는 수많은 편액이 걸려 있다. 무성서원중수기, 무성서원 원지(院址)복구기, 무성서원 장원(牆垣)중수기, 무성서원 원규, 무성서원 원지(院誌)개간기 등이 그것이다. 그 중 무성서원 중수기가 가장 많은데, 그것은 여러 번 서원을 중수했다는 뜻이 된다. 무성서원 원규는 총 17개 조항으로 되어 있다. 그 중 금하고 방지하는 것(禁防)으로는 주색과 잡기가 있다.
이곳에서 최치원 선생의 영정을 볼 줄이야!
명륜당을 지나 뒤로 가면 내삼문이 나온다. 그런데 이곳 신문(神門) 양쪽 기둥에 주련이 있다. 내용을 보니 ‘성조액은(聖朝額恩) 사림수선(士林首善)’이다. 풀이하면 “ 성조(숙종)께서 사액의 은전을 베푸시니 사림의 으뜸이다”가 된다. 내삼문 안쪽으로는 배향인물의 위패를 모신 태산사가 있다. 태산사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사당 안에는 모두 일곱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가운데 주향으로 문창후(文昌侯) 최치원 선생을 모셨다. 위패 뒤 벽에는 최치원 선생 영정도 모셨다. 그리고 양쪽 좌우 벽으로 세 분씩 위패를 모셨다. 불우헌 정극인, 영천 신잠, 성재 김약묵, 눌암 송세림, 묵재 정언충, 명천 김관이 그들이다. 이처럼 최치원 선생 영정을 볼 수 있었던 것은 황길지(黃吉枝) 해설사 덕분이다.
우리가 팔봉서원에서 왔는데 사당에 참배하고 싶다고 말하니 그 청을 흔쾌히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고직사에 근무하는 직원에게 부탁해 열쇠를 가지고 온 것이다. 최치원 선생 영정이 무성서원에 온 것은 1784년 지리산 쌍계사(雙磎寺)로부터다. 영정을 봉안하는 과정은 필사본 『무성서원 중수일기』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 영정은 1831년 태인현감 서호순에 의해 개모(改摹)되었고, 1923년 화사 채용신이 다시 한 번 개모하였다.
서호순에 의해 개모된 것은 1968년부터 국립 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채영신이 개모한 것은 정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곳에 있는 영정은 복사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치원 선생의 영정을 본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다. 영정을 통해 기를 서로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치원 선생의 얼굴은 이지적라기보다는 부드럽고 순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흔히 보던 영정과는 기법이나 채색이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다.
병오창의기적비 왜 이곳에 있을까?
강수재 앞에 있는 세 개의 비석 중 하나가 병오창의기적비다. 이 비석이 어떻게 이곳에 세워지게 되었을까? 1906년(丙午) 면암 최익현(崔益鉉)과 둔헌(遯軒) 임병찬(林炳贊)이 이곳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최익현은 1906년 무성서원에 모여 강회(講會)를 열고 김영삼 등 서원 사람들과 함께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렸다. 그리고 80여명의 의사, 100여명의 의병들과 함께 태인 정읍 곡성 순창을 점령했다. 6월 19일 창의에 가담한 의병은 900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6월 20일 순창에서 왜군 진위대의 공격을 받아 임병찬 등 13명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들은 모두 재판을 받고 복역했고, 최익현은 대마도에 감금되어 11월 17일 순절했다. 임병찬은 출옥 후 거사를 다시 한 번 시도했으나 체포되어 거문도로 유배되어 순절했다. 이러한 의사들의 공적을 흠모하고 기리고자 1992년 정읍시에서 창의비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