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 죄와벌
경주에서 포항으로 가다보면 중간 쯤 형산강이 휘감고 돌아가는 삼각주 같은 지형에 둘러 싸여 안
강 평야의 넓은 들판이 끝없이 펼처져 있는 안강읍이 나온다 서쪽엔 도덕 산이 읍내 를 품은 듯 내
려다 보고 있으며 도덕산 밑 옥산리에는 조선중기 문신 이언적(晦齋 李彦迪1491~1551)을 기리는
옥산서원(玉山書院)이 고가(古家)의 품위를 간직한체 산 입구를 지키고 있고 옥산리에서 읍내 쪽
으로 십리쯤 내려가다 보면 구부랑 마을이 나오고 임진왜란 때 장수 이팽수(杜村 李彭壽:1520~))
를 기리는 덕산서사(德山書社)가 자리잡고 있다
그 구부랑 마을에서 산쪽으로 오리(五里) 정도 올라가다 보면 산 아래 열 가구 정도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집성 촌(集姓村) 나오고 그 뒤로 좁은 산길 따라 좀 올라가다 보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한 방한칸 과 정지(부엌:경상도 사투리)만 있는 작은 오두막 한 채에 옆 엔 손 바닥 만한 텃밭 그리
고 싸리 나무로 만든 울타리가 있는 집이 나오고 그 집 옆을 지나 삼리(三里 )정도 올라 가다 보면
도덕산 줄기에서 내려오는 산중턱에 화전(火田)으로 개간한 조그마한 밭과 오두막 한 채가 있다
섣달 추운 북풍이 살을 에듯 몰아치고 올해 따라 눈이 많이 내려 눈 덥힌 도덕산맥이 병풍처럼 마
을 을 감싸고 금방이라도 눈이 나릴듯 낮게 깔린 구름이 마을과 대지를 덥어 구름속에 있는 신선이
사는 마을처럼 보인다
전쟁이 끝 난지 얼마 되지 않아 민초들의 삶은 차마 말로 설명 할 수 없을 정도록 궁핍해 굶어
죽는 이 속출했고 부모 잃은 수많은 고아들 아침이면 집집마다 동양(밥 얻으러 다니는것)하러 다니
는 걸뱅이 들의 깡통소리가 마치 오케스트라 마냥 울려 퍼지고 미국의 원조 아래 그래도 학교에 다
니는 학생들은 옥수수 죽 한그릇 이라도 배급받아 영양실조 는 겨우 면하지만 입학금이 없어 국
민학교 도 못가는 아이들 또한 부지기수 였으니 그 아이들의 생활이야 말하지 않아도 알고 남음이
다.
배우지 못한 대부분의 서민들은 공상주의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개념조차 없었고 하루하루 삶을
그냥 시류(時流)에 뭍혀 따라갈 뿐 누가 정권을 잡든 밥만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해 준다면 더 바랄
것 없을 정도록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다
국민들 안위와 복지를 생각하기는 커녕 오직 권력 잡으려 그리고 잡은 권력 놓치지 않으려 눈만 뜨
면 싸움질 하는 위정자들로 온 국민은 기나긴 식민지 생활도 부족해 전쟁까지 치뤘으니 어느 새월
에 민초들이 밥 굶지 않게 끔 일자리 만들어 줄 수 있으며 평온한 삶을 누릴수 있으리...
어느 듯 하루의 해가 서산에 걸려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 울산 댁은 다 헤어진 옷깃을 두 손으로 꼭
여미며 미끄러운 오솔길 겨우 올라와 사립문을 제치고 마당에 들어서자 불도 없는 어두운 방안 검
은 누더기 이불속에 누워있든 덕 순이 사립문 소리에 벌떡 일어나 방문을 확 열어 재끼며
“엄마야!!”
반가움에 고함치다 들어오는 엄마가 빈손인 것 보곤 갑자기 실망하는 빛이 역력하다
힘없이 방문턱에 앉아 한숨을 쉬며 산허리에 쌓인 눈들이 노을빛에 반사 되어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경치를 말없이 바라 본다
자연은 사람 마음과 과 달리 언제나 변치 않음에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울
산 댁도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하곤 한다
오늘도 하루종일 이집저집 기웃 거렸지만 아무 소득없이 시간만 때우고 집으로 왔다
“엄마 배고파~”
그래도 엄마는 말이 없다
“엄마.. ”
그제 서야 딸을 쳐다보며
“배 고푸제.. 조금만 참아라 금방 해줄게”
엄마 말에 딸이 고개를 끄덕이며 울음이 금방 터질듯 삐쭉 삐죽 거리든 입을 다문다
이 북풍 설한 아무도 없는 산중턱 오두막에 어린딸이 하루 종일 집에 있었으니 얼마나 배고프며 무
서웠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진다
몇 년째 흉년이 들어 다들 힘든데다 올해 따라 매일 눈이 내려 몇 일째 마을에 내려가 일거리 찾았
지만 일은 고사하고 밥 한끼 제데로 얻어먹지 못하고 돌아오고 흉년이 말해주듯 동네 인심도 점점
얄팍해저 밥때가 되어서 가면 방문도 안 열어준다
이제 남은 식량이라곤 보리쌀 한 말 쯤에 감자 와 밀가루 조금 뿐이다 이것으로 봄까지 견더야 한
다고 생각하니 울 산댁 막막하기 이를 데 없다.
딸년은 오늘 아침 감자밥 한 그릇 먹인 게 전부니 저 어린 것이 얼마나 배가 고플까 눈물이 흐르지
만 그렇다고 얼마 남지 않은 양식 배불리 먹일 수도 없고 산다는 것이 너무 힘에 부쳐 가끔은 모든
짐 그냥 놓아 버리고 싶지만 그러나 딸린 자식 때문에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괴로움만 더할 뿐
이다
부엌에 들어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이 겨울에 남편 없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
인지 뼈저리게 느낀다. 차라리 죽었다는 소식이라도 오면 마음이라도 접을 수 있으련만 행여 나타
날까 매일 매일 먼길 바라보지만 떠난 님 은 소식이 없고 가슴만 타 들어간다
서러움에 외로움에 그리고 너무나 고통스러움에 또다시 눈물을 흘린다.
겨우 아빠 알아보는 딸을 두고 보급 병으로 전쟁터로 나간 남편 행방불명되어 전쟁이 끝난 지도 몇
년이 흘렀지만 아직 소식조차 모르고 재산 이란 곤 이 산중턱 오두막 집 하나 뿐이기에 그동안 어
떻게 살아왔는지 울산댁 조차 믿을수 없다.
남의 집 경조사나 뒷일은 말할 것도 없고 온갖 허드렛 일이며 가을이면 추수 끝난 논에 모녀가 벼
이삭도 주으며 겨우 입에 풀칠하고 살아 왔지만 두 해 연속 흉년이 들자 그나마 허드렛일 조차 사
라져 하루하루가 먹을 것 걱정 안하고 살아가는 날이 없다
자식이라야 딸년 하나지만 지금은 자식하나 먹여 살릴 수 있는 일조차 없다는 것에 대해 무능한 자
신이 너무 비참함을 느끼며 있을 땐 몰랐는데 남편의 빈 자리가 이렇게 클 줄이야...
“무심한 사람 같으니...”
혼자 중얼 거리다 눈시울 훔치며 보리 쌀 한웅 큼 꺼내 씻어 솥에 넣고 끊인다
그래도 지아비가 있었을 땐 가진 것 없었지만 행복했고 겨울엔 넉넉히 먹지는 못했어도 굶지는 않
았건만 전쟁을 터지고 부터 겨울이면 거의 굶다시피 했고 더구나 딸년이 커가자 점점 앞날에 대한
걱정이 파도처럼 밀 려 온다.
아직 학교에 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학교는 보내주고 싶었는데 그래서 어미처럼 살지 않도록 해주고 싶었는데 지금으로 선
입에 풀칠 왜 그 어떤 생각도 선택도 할 수 없기에 가슴이 더 타내려간다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자 갑자기 돌아 오지 않은 남편이 보고 싶고 그리움이 밀려와 미치고 싶다
머슴살이 하든 남편을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고 어릴적 부터 남의 집 식모 살이 하든 나에게 짝을
지어줘 물만 떠놓고 식 올리고 살았지만 외롭게 자란 남편 나를 너무나 아껴주고 나 또한 받들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는데 그놈의 전쟁 때문에 우리가정 모든 것 무너져 버렸다.
전쟁만 나지 않았어도 지금쯤 작은 논밭이라도 장만하며 살았을 텐데...
겨우 눈물을 훔치곤 텃밭에 묻어놓은 무우하나 꺼내어 파란 부분 뚝 잘라 밥 줄때까지 먹으라며 딸
년에게 준곤 한번 끓인 보리쌀 다시 채로 썰 은 무를 위에 얹어 밥 짓는다
반찬이라고 해봐야 고춧가루 몇 개 더덕더덕 붙어 있는 무김치에 간장 그리고 들깨기름 이 전부지
만 이제 열 세살 한창 먹을 나이인 딸년은 무밥도 맛있는지 정신없이 먹어댄다 얼마나 배가 고프
면...
벌써 젖가슴이 봉오리 마냥 볼 속 올라오고 서서히 처녀의 티가 나기 시작하는걸 보면 정말 잘먹여
야 될 나이지만 하루 두끼 먹이기도 힘이 드니..
게 눈 감추듯 지 밥그릇 비우곤 부족한지 남은 무밥에 간장 넣어 비벼 먹는 내 바가지 쳐다보자 말
없이 먹어 라며 주고 밖을 나오자 살을 에는 듯 밤 공기가 너무 차갑고 문고리 잡자 쩍 하며 달라
붓는다.
아무래도 군불을 더 때야 될 것 같아 정지에 들어가 아궁이 불을 지피며 얼마 남지 않은 땔감을 보
며 내일은 나무를 해와야겠다 생각 하지만 이젠 나무 하기도 점점 어려워 진다
산이라곤 사람들이 땔감으로 나무를 모두 베어버려 벌거숭이 된지 오래고 거기다 오랜 전쟁으로
더욱 황폐해 땔감 으로 쓸 나무 눈 을 씻고 찿아 봐도 없다
그나마 나무가 조금 있는 곳은 산지기(산을 지키는 사람)들이 눈을 벌겋게 뜨고 지키고 있어서 아
무데나 가서 나무를 할 수도 없다
군불 다 때고 설거지 마치고 방에 들어오니 딸년 벌써 잠들어 있다
하루 종일 추위에 헤매다 이제 겨우 방에 들어간 울산 댁 옷도 벋지 않은 체 지친몸 그대로 쓰러져
잠에 빠진다.
산중턱 외딴 오두막 은 고요에 묻히고 내린 눈은 달빛에 반사되어 어둠을 걷어가고 어디선가 들려
오는 산 짐승 소리만 메아리 되어 적막을 깨뜨린다.
산에 조금만 올라가 봐도 여기저기 포탄 파편 그리고 터지지 않은 불발탄들이 안강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설명하고 기나긴 전쟁이 가지고온 황폐와 굶주림 수많은 고아와 이산가족...
여기 저기 길가 사람이 굶어 죽어 있어도 누구하나 거떨어 보지도 관심도 가지지 않으며 민심은 오
직 굶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생존 본능만이 살아있는 사람을 지배하고 한줌의 논 밭떼기도 없는 수
많은 사람들 지금 모두가 울산 댁 처럼 굶주림으로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기나긴 밤 잠 못 이루
며 눈물 흘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