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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5장 주석
빌라도의 선고 (마가복음 15:1-14)
산헤드린 공회에서 우리 주 예수에 대하여 유효한 고소를 하기 위하여 의논함. 그들은 이른 아침에 그 문제에 관해서 모였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일 수 있을까 하고 그 방법을 찾아내려고 의논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민란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시간을 놓치지 않고 열심히 일어난 기세를 좇았다. 악한 것을 행함에 있어서 악인들의 지칠 줄 모르는 근면은 선한 것을 행함에 있어서 우리의 비겁함과 태만을 부끄럽게 한다. 그리스도와 당신의 영혼을 대적하는 자들은 일찍이 일어나는데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잠 6:9).
Ⅰ. 그들은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주었다. 예수께서는 귀한 희생 제물이 되어야 하였으며 그렇기 위해서 그는 결박을 당해야만 했다(시 118:27).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속박을 푸시려고 결박당하시었으며, 바울과 실라와 같이 결박당한 가운데도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하시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매임을 당하였을 대에 우리를 위해 결박당하신 우리 주 예수의 결백을 기억하는 것이 좋은 것이다. 그들은 이삼 일 전만 해도 성전에서 가르치면서 존경을 받으시던 예수를 드러나게 하여 경멸을 받게 하려고 예루살렘의 길을 통해서 이끌고 갔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께서 얼마나 비참하게 대우를 받으셨는지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는 대단한 타격과 침 뱉음과 욕을 당하신 것이다. 그들이 예수를 로마의 권세 아래로 넘겨 준 것은 당시 유대교가 얼마나 부패하였나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그 공로를 스스로에게 나타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과 명령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영광인 유형 교회의 상태는 그들에게 오랜 동안 소유되어 왔으나 지금 마땅히 이방인들에게 넘겨진 것이다. 왕을 넘겨줌으로써 그들은 유효하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도 넘겨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말하자면 그들에게서 취하여 다른 나라에 넘겨진 것이다.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넘겨지고, 로마의 욕망을 절제할 수 있었고, 혹은 그에게 관한 그들의 질투심을 진압할 수 있었다면 문제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에게는 이스라엘의 멍에가 되고 이스라엘의 면류관이던 예수를 자원해서 버린 것이다.
Ⅱ. 빌라도에게서 심문을 당하심.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빌라도는 예수에게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현세의 왕으로서 메시야냐고 물었다. "네 말이 옳도다"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었다. 빌라도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는 메시야이지만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그런 메시야는 아니라고 말하였다. 그리스도는 영의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으로 말미암아 다스리고 보호하는 왕이시다. 그리고 계속해서 불신앙 중에 있는 육신적인 유대인들은 제거하시고 형벌 하시는 왕이시다.
Ⅲ. 그리스도를 고소하는 여러 자료들이 제시되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고소와 심문에 침묵을 지키시었다. 대제사장들이 자기들의 위엄 있는 위치도 망각하고 고발자들로 돌변하여 "많은 것으로 그를 고소하였던" 것이다(3절). 그리고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증언을 하였던 것이다(4절).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은 자기들 시대의 제사장들에게 그들의 악함에 대하여 책망을 하였다. 이런 제사장들에 대해서 그들은 잘 예언을 하였다. 에스겔 22장 26절, 호세아 5장 1절, 6장 9절, 미가 3장 11절, 스바냐서 3장 4절, 말라기 1장 6절, 2장 8절을 참고해 보라. 갈대아인들에 의한 예루살렘의 함락은 의인의 피를 흘린 제사장들의 부정 때문이라고 말씀하시었다(애 4:13). 악한 제사장들은 대개 최악의 인간들이다. 좋았던 것이 타락되면 그만큼 나빠진다. 일반적인 신앙 박해자들이 성직자들보다 대개 더 동정적인 것이다. 이 제사장들은 그리스도를 고소하는 일에 있어서 대단히 열심히 있고 요란스러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아무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었다"(5절). 빌라도가 예수에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라고 재촉하였지만(4절) 그리스도께서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시었다(5절). 그러므로 빌라도가 이상하게 생각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빌라도에게 직설적인 대답을 하였다(2절). 그러나 고소하는 자들이나 증언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대답을 아니하시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고소나 증언이 어리석은 거짓말이기 때문이며 빌라도도 그들의 그 거짓말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Ⅳ. 명절을 당하면 죄수 하나씩 특사로 석방시키는 관습에 따라 빌라도가 그리스도를 놓아주어도 좋겠느냐고 백성들에게 물음. 민중들은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원하였다." 그들의 말은 자랑스러운 것이 못된다. 그러나 그들은 전례를 따라 지키고 싶었다.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끌어온 줄을 잘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놓아주고 싶었던 것이다(10절). 고소자들의 열심과 그들의 빈약한 증언을 비교해 보고 그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고 선을 행하였음을, 그리고 어떤 실수나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공을 세우고 영광스런 일을 하였음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쉬운 것이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그리스도가 얼마나 백성들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잘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만일 제사장으로부터 백성들에게 호소한다면 그들이 제사장의 손에서부터 그를 구출해냈음에 대하여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아무런 소요가 일어나지 않게 그에게 특사를 베풀도록 요구하였다. 그리고 빌라도는 그렇게 할 준비를 한 것이다. 그리고 민중들이 예수의 석방을 외친다면 제사장들의 입도 봉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거기에 또 다른 죄수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바라바였다. 그가 민중들에게 인기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예수를 능가하지는 못할 줄로 생각하였다.
Ⅴ. 그리스도를 죽음에 처하라고 특히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이의 없는 군중들의 함성. 빌라도는 백성들이 대제사장들의 영향을 받아 바라바를 석방하고 예수를 처형하라는 함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11절). 빌라도는 가능한한 군중들을 저지하려 하였다.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리스도도 그러면 석방하기를 원하지 않느냐는 뜻으로 빌라도는 물은 것이다. "저희가 다시 소리 지르되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12, 13절). 제사장들이 그들로 그렇게 시켰으므로 그들은 그렇게 주장을 한 것이다. 빌라도가 이를 반대하여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질문에 대답하려고 하지 않고 더욱 큰 소리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라고 외친 것이다. 지금 제사장들은 자신들이나 군중 속에 있는 자기들의 하속들에게 있어서 군중들로 계속 이 잔악한 함성을 외치게 선동하느라 바쁜 중에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빌라도로 하여금 두 가지 방법으로 예수를 정죄한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1. 수 많은 군중들이 그리스도를 반대하여 그렇게 처형하라고 외침으로써 빌라도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범법자임을 믿게 하려고 한 것이다. "확실히 그는 온 세상이 이렇게 싫어하는 나쁜 사람이구나"라고 빌라도가 생각할 것이라고 추측한 것이다. 빌라도는 예수가 백성들 가운데 인기가 있다는 소문이 잘 못 들은 것이로구나. 그는 그렇지를 못한 것이라고 결론짓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바삐 서둘러서 고소를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친지들과 그리스도의 처형을 반대하는 자들은 다른 곳에 모여서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까 몰라 당황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종교에 불명예스런 오염을 씌워서 끝장을 내게 하려는 것이 일반적인 사탄의 술책이었다. 일단 이 종파가 그들이 말하는 대로 어느 곳에서나 배척을 당하고 있으므로 그 원인도 모르고 그것을 정죄하기에 충분하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나 막론하고 그들의 공적과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에 의해 판단을 하여야 하며 일반적인 명성이나 어떤 함성에 의해 판단 짓지 말아야 한다.
2. 어리석은 군중들의 선동적인 함성으로 빌라도를 유혹하여 그리스도를 정죄하고 백성들을 기쁘게 하며 백성들을 불쾌하게 함으로써 위험이 따름을 알게 한 것이다. 비록 그가 그들의 의견에 지배를 받아 그가 범법자라는 것을 믿을 만큼 약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들의 노한 함성에 의해 동요를 받아 비록 그리스도가 무죄함을 믿으면서도 그를 정죄할 만큼 약하였던 것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위해 죽으시게 된 희생재물이며 많은 사람의 노에 의해 희생된 것이다.
형장으로 가는 예수님 (마가복음 15:15-21)
Ⅰ. 빌라도는 악한 유대인들을 만족케 하려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 주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게 넘겨 주니라"(15절). 빌라도는 군중들을 조용하게 하기 위해 그들의 원하는 대로 그 나라에 근심과 재난을 가져왔던 바라바는 석방하고 나라에 영광과 축복을 가져온 예수에게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 준 것이다. 빌라도가 저 예수를 채찍질한 것은 그들을 만족케 하기 위함이고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려고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렇게까지 하기에 이른 것이다(눅 23:16). 무죄한 자를 채찍질하는 자가 그 무죄한 자를 십자가에 못박게 됨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 때문이다.
1. "피 흘림이 없는 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피는 생명이다(창 9:4). 피는 영혼과 몸을 연결해 주는 작용을 한다. 그러므로 피를 다 소모해 버리면 생명은 끝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생명을 바치셔야 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이다. 피는 사람의 영혼을 위해 속하게 하시는 것이다(레 17:11). 그러므로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바침에 있어서 먼저 피를 여호와를 위해 제단에 뿌리라고 하시었다. 지금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모양과 방법에 따라 당신의 피를 흘려주신 것이다.
2. 그것은 "고통스런" 죽음이었다. 고통이란 섬세하고 예리한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감각이 예민한 외부를 시켜 핵심체를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죽음을 겪으시려고 죽으셨다. 왜냐하면 그는 제사장과 제물 두 가지가 되시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에 있어서 적극적이었다. 그것은 그가 자기의 생명을 인류의 죄를 위해 속죄물로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툴리(Tully)는 십자가에 못 박힘은 가장 무서운 죽음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무서운 죽음을 죽으셨다. 그럼으로써 그 죽음을 정복하시려 하였다.
3. 십자가의 죽음은 노예들이나 가장 야비한 범인들이 죽는 "부끄러운" 죽음인 것이다. 로마 사마들은 이와 같이 십자가의 처형을 생각한 것이다. 십자가와 수치는 연관성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당신의 영광에 상처를 입으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족케 하려고 자기 자신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잠시 동안 자기의 신성한 본성에 합당한 영광에 내어 주시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 감당할 수 있는 최대의 치욕과 모욕에 자신을 굴복시키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죄악은 아니다.
4. 십자가의 죽음은 저주의 죽음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유대교의 율법이 낙인을 찍어놓은 것이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3). 그것은 하나님께서 특히 불쾌하게 여기시는 것이다. 그것은 사울의 아들들이 그들의 아버지의 피 흘린 집이 사죄를 받게 될 때에 죽은 죽음이었다(삼하 21:6). 하만과 그의 아들들이 죽은 죽음이었다(에 7:10; 9:13). 우리는 구약의 어느 선지자가 그렇게 나무에 달려 죽었다는 사실을 볼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나무에 달리시었다." 그러한 치욕과 저주의 죽음을 도말 하시사, 무죄한 가운데 죽든 죄로 인해 죽던 죽는 자들의 위로가 그것으로 인해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나아가 자기와 같이 나무에 달려서,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하는 자들에게 큰 영광을 더하시게 하기 위한 것이다.
Ⅱ. 빌라도는 로마 군인들의 즐거운 기분을 만족시켜 주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넘겨주어 모욕과 악의적인 취급을 당하게 하였다. 그들은 임무 수행을 위해 대기 중이던 "온 군대를 모았다." 그리하여 그 군대는 홀 안으로 들어갔으며 그곳에서 로마 병정들은 마치 대제사장의 뜰에서 그의 하속들이 예수를 선지자와 구세주로 희롱한 것처럼 여기에서 예수를 왕으로 모욕적인 희롱을 하는 것이다.
1. 그들은 예수에게 "자주색 옷을" 입히었다. 그리스도에게 이런 옷을 입혀 희롱을 당하게 한 일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옷을 장식품으로 입지 않도록 하라는 암시도 되는 것이다(벧전 3:4). 자주옷이나 진홍옷 같은 귀한 값비싼 사치는 그리스도에게 모욕과 수치의 옷이 되었던 것이다. 어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자랑스런 문제가 될 수 있단 말인가?
2. 그들은 또 "예수에게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운" 것이다(17절). 밀짚이나 목피로 남든 면류관도 그를 희롱하기에 넉넉하였을 것인데 가시 면류관이므로 고통도 준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받아 써야 마땅한 가시 면류관을 쓰시어 우리로 하여금 그의 공로로 말미암아 영광의 그러므로 면류관을 쓰게 하신 것이다. 기드온이 가시로 숙곧 사람들을 교훈한 것처럼 우리도 이 가시로 교훈을 삼아 죄를 미워하고 죄 아래에서 불안해하여 가시 중에 백합화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도록 하자. 만일 우리가 어느 때에 "육체의 가시로" 고난을 당하면 우리의 대제사장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체휼하시어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 잘 아심으로 위로를 받도록 하자.
3. 왕은 그 신하들로부터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라고 문안을 받는다. 그들은 그것까지도 흉내를 낸 것이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 그러한 왕과 그러한 백성들은 상호간에 평안할 수 있는 것이다.
4. 왕들은 통치의 표로 그 손에 홀을 가지는 것이다. 마치 왕관이 왕의 위엄을 나타내는 것같이 말이다. 그들은 이것을 모방하여 "갈대를 그 오른 손에 들리었다"(마 27:29). 주 예수의 권세를 알아보거나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 멸시하는 자들, 그의 말씀의 교훈이나 그의 진노에 대한 위협적인 경고에 대하여 무관심하였던 그자들이 지금 그의 손에 갈대를 들려주며 희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뿐 아니라,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모욕하는 것이다.
5. 신하들은 왕에게 그들의 충성을 맹세할 때에 그들의 왕에게 입을 맞추는 관습이 있었다. 이것을 그들이 모방하도록 허용 된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입을 맞추는 대신에 그에게 "침을 뱉은" 것이다.
6. 왕 앞에서 신하들은 무릎을 꿇고 절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역시 이것까지도 흉내내며 희롱한 것이다. 그들은 그의 앞에 "꿇어 절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희롱하며 서로들 향하여 웃고 야단들이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수치와 경멸을 받아야 마땅한데, 우리를 거기에서 구원하시려고 우리 주께서 이 수치와 경멸을 당하시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옷을 입으시지 않고 다른 사람의 옷을 입으시고 그처럼 희롱을 당하시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그렇게 수욕을 당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른다 하면서도 동시에 스스로 세상과 육신을 섬기는 자들은 사실로 그리스도를 희롱하면서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이어 평안할 지어다"하고 희롱하는 자들과 다름이 없다. 그리스도에게 무릎을 꿇으면서도 중심에서 절하지 않는 자들은 "입으로는 그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그를 경외하나 그 마음은 그에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그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기" 때문이다(사 29:13).
Ⅲ. 로마 군병들은 정한 시간이 되자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과 같이 예수를 빌라도 법정에서 십자가에 못박을 형장으로 끌고 갔다(20절). 그는 무죄하였지만 죄인들의 손에 이끌리어 형장으로 가시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가 메고 가는 무거운 십자가의 중력에 압사하지 않게 하려고 그들이 의도한 대로 그를 잔인하게 더 끌고 가지 않고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지고 가도록 하였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에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가도록 하였다. 우리에게 갑자기 십자가가 지워지고 우리가 그것으로 당황하게 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지 말도록 하라. 그러나 얼마만이라도 그 십자가를 지게 되면 평상시에는 희미하게 알았던 성서에 기록된 그 이름을 더욱 잘 기억하게 되고 존경을 표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그에 대한 기록도 전파되는 것이다. 같은 방법에 따라 현재의 고통과 십자가에 대하여 기뻐하며, 슬퍼하지 말라. 십자가의 고난을 견디며 승리하는 자들에게는 후에 영광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이다.
못 박히심 (마가복음 15:22-32)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힘에 대하여 볼 수 있다.
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장소. 그곳은 골고다라고 불렀는데 그 뜻은 해골의 곳이라는 것이다. 이곳에서 사형수들이 처형을 당했기 때문에 그런 이름으로 불리워 졌다고들 생각한다. 이곳은 영국의 사형 집행장 타이번(Tyburn)과 같이 평범한 처형장이다.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인지는 모르나 수많은 고대인들은 이곳에서 우리 인류의 시조 아담이 매장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와 일치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들 생각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담 안에서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살기 때문이다. 터툴리안, 오리겐, 크리스스톰, 에피파니어스 등이 그것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사이푸리안은 덧붙여 말하기를 많은 선한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피가 같은 장소에 묻힌 아담의 해골에 흘러내리었다고 믿는다. 더욱 믿을 만한 전설은 이 갈보리산은 모리아 땅의 산이었다고 한다. 그곳은 모리아 땅이었음이 분명한 듯하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주변의 땅을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그 모리아 산에서 이삭이 제물로 드려진 것이다. 수양이 이삭 대신에 드려졌으며, 아브라함이 그곳을 여호와이레(여호와께서 준비하시리라)라 부른 것은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지시고 속죄 제물로 드려지는 이 날을 바라본 한 예언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Ⅱ.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시간은 제 3시였다(25절). 그리스도께서 빌라도에게 나온 때가 제 6시경이었다(요 19:14). 요한이 사용한 로마의 시간 계산법에 의하면 오늘 우리의 시간으로 12시경이다. 그러므로 제 3시는 유대의 시간 계산방법에 따르면 그것은 우리의 시간으로 오전 9시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를 오전 9시경에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다. 라이프푸트 박사의 생가에 의하면 여기에 언급한 제 3시는 제사장들이 악함을 더욱 가중하는 암시를 준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마땅히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화목 제물을 드려야 할 때에, 비록 3시간이나 지났지만 그들은 여기에서 그리스도를 처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교병 절기의 첫날로써 마땅히 성회가 모여져야 할 때인 것이다. 그들이 마땅히 자기들의 의무를 따라서 성도들의 공회를 인도해야 할 중요한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무법한 범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성전에 대하여 열심히 있는 듯 보이면서 그리스도께서 성전에 대하여 참람한 소리를 한다면서 그를 정죄하였던 것이다. 교회에 대하여 열심히 있는 듯 하면서도 교회의 집회에는 잘 참석하지 않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Ⅲ.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 그는 경멸을 당하였다. 그에게 모욕을 주지 않는 듯하면서 그의 수모에 대해서 더욱 가중하는 몇 가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1. 사형을 당하는 사람에게 포도주를 주는 관습이 있다. 그들은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는데 그것은 쓴 것이다. 그는 그것을 맛본 후에 마시지를 않았다. 그는 쓴잔을 마시려고 하였으나 쓴 포도주는 마시지 않으셨다.
2. 십자가에서 처형된 사형수들의 겉옷은 사형 집행관의 임의로 관리하게 되었는데 여기 로마 군인들은 그 겉옷을 나누어 가지려고 제비 뽑았다(24절). 그들은 예수를 비참하게 하면서 즐기고 있었으며 예수께서 고통 중에 달리시었는데 그들은 앉아서 제비를 뽑으며 즐기고 있는 것이다.
3. 그들은 예수의 머리 위의 죄 패에 그를 더욱 부끄럽게 하려고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하였는데 그것은 오히려 예수의 의와 영광을 나타나게 된 서이다. 여기에는 그의 죄목이 기록된 것이 아니고 그의 주권에 대하여 기록된 것이다. 아마도 빌라도는 실패한 왕으로서 그리스도에게 모욕을 주거나 끈덕지게 자기에게 요구하여 양심을 거역하면서 그들이 그보다 더 나은 왕을 얻을 수 없을 만큼 훌륭하게 보이는 그리스도에게 정죄하게 한 유대인들에게 모욕을 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 달리신 그리스도에게까지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선포하게끔 하신 것이다. 빌라도는 마치 가야바가 무엇을 말하는 줄도 모르고 말한 것처럼 빌라도는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면서 그렇게 쓴 것이다(요 11:51).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와 그의 영적인 이스라엘의 왕이다. 그리고 그가 십자가에 달려 있을 때에도 그는 왕답게 자기와 자기 백성들의 원수들을 정복하고 승리하시었다(골 2:15). 지금 그는 자기 자신의 피에다 자기의 율법을 기록하시고 계신 것이며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은혜를 예비하시고 계신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볼 때마다 우리는 그의 머리 위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글을 기억해야 낳다. 그는 우리의 왕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신하들이 되고 참다운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되기 위해 우리 자신을 그에게 드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4. 그들은 두 강도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을 박았다. "하나는 그의 좌편에 하나는 그의 오른편에 있었으며" 그리스도는 그 세 사람 중 가장 나쁜 중간에서 못 박히셨다(27절). 이렇게 하여 그들은 가장 심한 불명예를 그에게 안겨 주려 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방해를 주려고 하였음에도 틀림없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려다 투옥되었던 자들은 같은 감방에 있는 죄수들의 저주와 맹세에 찬 불평소리를 많이 듣게 되었을 것이다. 지금 주께서는 그렇게 그들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생존하여 계실 때에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어 그들에게 선을 베푸시었다. 지금 그가 돌아가시면서도 그는 같은 목적 아래 그들과 더불어 계시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도 세상을 떠나실 때에도 죄인을 구하시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이 복음서 기자는 특히 성경이 응하게 된 말씀을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유명한 예언 가운데 나와 있는 말씀이다(사 53:12). 그는 "불법자로 인정받았다 하는 성경을 응하게" 하신 것이다(29절에 개역에는 난외에 -역주).
5. 구경꾼들과 지나가는 자들도 그리스도께서 고난 당하심을 위로는 못해 드릴망정 그를 모욕하고 희롱하였다. 가장 야비한 행악자들에게도 할 수 없는 야만적이고 비인도적인 예를 그리스도에게 보인 것이다. 그와 같이 악마는 극심한 노를 그리스도에게 보인 것이며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나타날 수 있는 최대의 모욕을 다 당하신 것이다.
(1) "지나가는 자들은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였다"(29절). 만일에 그들의 마음이 그렇게 완고하여 그러한 비참한 장면을 목격하고도 그들의 마음에 동정심이 발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켰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를 못하였을 것이다. 마치 그들은 모든 인정이란 다 메말랐을 뿐 아니라 악마들이 인간의 형체를 뒤집어쓰고 있는 듯 그들은 그를 조롱하고 가장 증오하는 언사를 사용하고 모욕을 주었으며 무수한 그들의 활을 그에게 쏘아댄 것이다. 그것은 대제사장들이 그들을 선동하고 시켜서 그렇게 광대 놀음을 하게 하였던 것이다. "예수를 모욕하고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뛰어내리라"(29, 30절).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그 성전은 지금 헐어져 가고 있다. 그리고 사흘 후에 다시 세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의미하는 것이다. 죄인들이 위험이 지났다고 생각하는 그 안전한 때가 그들을 체포할 준비가 다 된 때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을 부인하여 "어디에 그런 약속이 있나?"하고 말하는 사람에게 주어 날이 도적같이 오는 것이다.
(2) 사람들 중에서 사람들을 위해서 기름부음을 받은 대제사장들은 길 잃은 자들에게 동정을 나타내어야 하고 고난과 죽음을 당하는 자들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마땅한 것인데(히 5:1, 2), 예수의 상처에다 기름 대신에 신 포도주를 붓고 하나님께서 치신 자를 핍박하며 하나님께서 상하게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는 것이다(시 69:26). 그들은 그를 조롱하기를 "제가 남은 구원하고" 낫게 하였으되 자기의 능력으로 구원할 것인데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하였다(31절). 그들은 또한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도 보고 믿게 할지어다"라고 모욕을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살아나는 기적을 나타냈어도 그들은 믿지 않은 것이다. 이 대제사장들은 지금 다른 할 일을 찾은 것이다. 만일 그들이 성전에서 그들의 의무를 행하지 않았지만 다른 할 일을 그들은 반드시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비록 그들이 어떤 위로나 위안을 주 예수에게 주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들은 지금 죽어 가는 강도들에게는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죽음의 순간에 그들에게 마땅히 위로의 말이나 명복을 빌어 줄 수 있을 것이었다.
(3)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그들도 예수를 야유했다(32절). 그들 중 한 사람이 그렇게 그를 모욕하였다. 비참한 순간 죽음의 순간에도 그의 마음이 그렇게 비참하게도 완고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운명 (마가복음 15:33-41)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기사 즉 어떻게 그리스도의 원수들이 그를 괴롭히고, 하나님께서 오늘날 그의 죽음에 있어서 그를 영화롭게 하였나를 접하게 된다.
Ⅰ.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세 시간 동안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다." 이 사실은 구약 성서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해로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케 하며"(암 8:9) "백주에 그이 해로 떨어져서 그로 수치와 근심을 당케 하였느니라"(렘 15:9). 유대인들은 자주 그리스도에게 "하늘에서 오는 표적을" 요구하였는데 지금 그들은 그 표적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표적은 그들의 눈의 어두움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것은 유대 교회와 유대 민족에 임하였고 앞으로 임할 어두움의 표적이다. 그들은 의의 태양을 없애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그리고 그 태양은 지금 지고 있으며 곧 다시 떠오르게 되지만 그들은 결코 소유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때에 그들 중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애굽에 임한 흑암보다 더 어두운 것이 아니겠는가? 이 일이 그들에게 암시하는 바는 그들의 평화에 속하였던 일들이 지금 그들의 눈에 숨겨져 있고 여호와의 날이 임박하였는데 그날은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빽빽한 구름이 끼인 날"이 될 것이다(요 2:1, 2). 그것은 그들이 속하여 있는 흑암의 세력이요 그들이 행하고 있는 흑암의 일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그들에게 합당한 운명인 것이다.
Ⅱ. 이 어두움이 끝날 무렵에 우리 주 예수께서 고통 중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었다. 이 어두움은 인간의 몸을 입은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속죄 제물로 드릴 때에 그를 덮은 현재의 구름을 의미한다. 폭tm(Mr Fox)는 그의 저서 '행적과 기념비들'(Vol Ⅲ,p. 160)에서 메리여왕(Queen Mary) 시대의 순교자였던 훈터(Dr. Hunter)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가 화형을 당하기 위해 나무 기둥에 붙들어 매져 있을 때에 "하나님의 아드님이시여 나에게 빛을 비추소서"라고 짤막한 기도를 드리었고, 그러자 갑자기 하늘의 태양이 검은 구름 사이로 그에게 빛을 비치었다 한다. 그 햇빛이 너무 밝게 비추어서 그는 얼굴을 다른 쪽으로 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일은 그에게 큰 위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예수께서는 반대로 그이 고난에 처해 있을 때에 그에게 밝은 빛이 떠나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비치는 빛이 떠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을 그 무엇보다도 더 불평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는 자기의 제자들에게서 버림을 받은 것에 대해서는 불평하지 않으셨으나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은 일에 대해서는 불평을 나타내시었다.
1. 왜냐하면 이것은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다. 그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다(잠 18:14). 이 일은 물결이 그의 영혼까지 흘러 들어오게 했던 것이다(시 69:1-3).
2. 이렇게 하여 특별히 그는 우리를 위해 죄를 담당한 것이다. 우리의 불의함이 "노와 분으로" 우리 영혼에게 임하게 한다(롬 2:8).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속죄 제물이 되사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대로 많은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그리고 영원전부터 아버지의 품속에 있었고 항상 아버지의 기쁨이 된 그에게 있어서 그것을 참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고난 중에 처해 있는 이 하나님의 진노의 징조들은 특별한 경우에 때때로 하늘로부터 임하여 희생 제물을 사르는 불과 같은 것이었다(레 9:24; 대하 7:1; 왕상 18:38).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으셨다는 표였다. 만일 하나님께서 만족하지 못하시면 죄인에게 떨어지는 불이 제물에 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불이 지금 그리스도에게 임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이렇게 크고 비통한 외침을 하게 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성도들의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자기를 번제로 드릴지라도 그는 기뻐하고 기뻐하리라" 하였다(빌 2:17). 그러나 죄인들의 죄를 위해 희생 제물로 드려지는 것은 다른 것이다. "제 6시"부터 "제 9시까지"해가 특별한 일식으로 어두웠다. 만일에 어떤 천문학자들이 계산하는 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던 그날 오후에 월식이 있었다면 그것은 자연적이고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7 식분(食分)의 월식이었을 것이고, 그것은 오후 5있기에 서 7시까지 계속되었을 것이고 당시의 암흑기를 의미해 주는 깊은 뜻이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해가 어두워질 때에는 달도 그 빛을 낼 수 없는 것이다.
Ⅲ. 그리스도의 기도는 곁에 섰던 자들에 의해 희롱을 당하시었다(35, 36절).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엘리 엘리"하고 불렀는데 그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아람 벙언이다. 그들은 그 의미를 알면서도 그가 엘리야를 부른다 하였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을 버렸거나 하나님이 그를 버렸거나 해서 그가 성도들에게 기도하는 것처럼 표현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더욱 더 미움을 받게 하려고 한 것이다.
Ⅳ. 그리스도께서 다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었다"(37절).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었다. 비록 하나님께서 어떤 "육체의 훈련"에는 감동하시지 않을지라도 큰 힘과 사랑의 열심을 의미하는 이 그리스도께서 외치신 큰 소리로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의 사력을 다해서 우리의 종교적 의무를 수행해야 할 것을 특히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다 기울여 자기를 굴복시키지 않으면 안 됨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비록 그리스도께서 외치신 것 같이 "큰 소리를 지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의 힘이 되시면 우리를 하나님께 굴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죽으셨었다. 왜냐하면 "운명하시"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영혼은 그의 호흡이 끊기고 체온이 식은 몸을 떠나 영계로 들어간 것이다.
Ⅴ.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언덕 위에서 운명하신 그 순간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38절). 이 사실은 많은 의미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1. 믿지 않은 유대인들에게는 두려움을 주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얼마 뒤에 나타날 그들의 유대 교회와 국가의 멸망을 보여주는 전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은총이라 하는 막대기를 자르는" 것과 같았다(슥 11:10). 왜냐하면 이 휘장은 대단히 찬란하고 영광스럽기 때문이다(출 26:31). 그리고 이 일은 "그들이 은 30을 달아서 그 고가를 삼은" 때에 일어났으며(슥 11:12), "이는 유다와 이스라엘 형제의" 언약을 파하는 것이었다(슥 11:14). 그때는 하나님께 부르짓어야 할 때였다. 왜냐하면 "이가봇" 즉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로부터 떠났기" 때문이다. 어떤 자들은 조셉푸스가 언급한 예루살렘성의 멸망 수 년 전에 성전 문이 저절로 열리면서 "여기를 떠나라"는 음성이 들린 것은 성전 휘장이 찢어진 이 일과 동일한 사건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링은 "내가 움켜갈지라 내가 탈취하여 갈지라"(호 5:14)는 말씀에 대하여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이다.
2. 그 일은 모든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한 큰 위로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새롭고 산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는 희생을 의미하는 것이다(히 10:19, 20).
Ⅵ. 형장을 감시하던 로마군 파견대를 지휘하던 백부장이 감동을 받고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하였다(39절). 그를 감동케 한 것은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는" 것이었다. 운명하는 마당에서 그렇게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인 것이다. 이러한 모든 슬픈 광경을 많이 목도한 그에게도 이러한 일은 처음 보는 것이다. 큰 소리로 외칠 수 있는 힘의 여유가 있는 분이 그렇게 갑자기 운명하는 일이 그를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에게 대한 경외감과 그리스도를 희롱하는 자들에게 대한 수치감에서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하였다. 그러나 그가 무슨 이유로 그렇게 말을 하였을까?
1. 그리스도께서 부당한 고난을 당하였고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큰 잘못을 행하였음을 말하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말하기 위하여 고난을 당한 것을 유의하라. 그리고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옳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말한 대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신 모든 사정들이 분명히 보여 주는 대로 그가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였다면 그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 말한 것은 옳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2. 그는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실 때에 하늘이 그에게 영광을 나타내시며 박해자들에게 노하시는 것을 보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은총을 받으시며 전능하신 권세가 그에게 임하였음을 말하고 싶은 이유에서였다. 그는 생각하기를 "확실히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아들이라"하였다. 그는 그와 같은 표현을 통해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의 영원성과 중보자의 직임에 대한 특별한 하나님의 임명을 표현하게 된 것이다. 비록 그가 그런 의도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런 표현을 나타낸 것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당신의 깊은 고난과 굴욕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하나님의 권세를 받은 아들임을 하나님은 선포하신 것이다.
Ⅶ. 그리스도를 가까이 따르며 섬기던 그의 다정한 벗들 특히 선량한 여인들이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었다(40, 41절).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다"(40절). 폭도들이 대단히 성나있었으므로 남자들은 감히 따라오지 못하였던 것이다. "성난 노도 앞에서는 비켜서라"는 말은 좋은 충고라고 그들은 생각하였을 것이다. 여인들도 감히 가까이는 오지 못하고 멀리 서서 슬픔에 사로잡혀 바라보고 있었다. 이 여인들 중에 더러는 여기에 그 이름이 나타나 있다.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라는 이름이 나와 있다. 그 여인은 병든 환자였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능력과 선으로 말미암아 일곱 마귀의 속박으로부터 구원받았으므로 그는 지금 크게 위로를 받고 기뻐하며 그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보답하려 감사함으로 주를 섬기며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또한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라는 이름이 나와 있다. 작은 야고보는 그의 호칭이 말하듯이 삭개오와 같이 키가 작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 마리아는 글레외바 곧 알페오의 아내였으며 동정녀 마리아의 자매였다. 이 여인들은 비록 그들이 제자들만이 참석한 만찬회에는 초대를 받지 않았었지만 갈릴리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를 따라서 여기까지 온 것은 그리스도의 현세의 왕국이 곧 수립될 것으로 생각하고 그들과 그들의 친척이 그리스도를 가까이서 받들려는 좋은 자리를 위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는 그러하였던 것이다(마 20:21).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왕위에 오르시는 것을 볼 줄 알았는데,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더욱 실망하였는지 모른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의 종교에 대한 고백으로 말미암아 출세를 해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곧 실망하여 슬픔에 빠진 자신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무덤에 묻히심 (마가복음 15:42-47)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 주 예수의 장례, 즉 엄숙하고 슬픔에 잠긴 장례에 참여하게 된다. 오 !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런 영광스런 장례를 지내지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말이다.
Ⅰ. 그리스도의 시체를 돌려주기를 간청함. 처형된 죄수들의 시체들은 로마의 정부에서 처분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도록 서두른 사람들은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어" 있도록 계획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어"있도록 계획하신 것이다(사 53:9).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볼 수 있다.
1. 그리스도의 시체를 돌려달라고 간청하게 된 것은 그의 시신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렇게 잘 장사지내기 위함이었고 그 장례를 그렇게 서두른 것은 다음의 말씀대로이다. "이 날은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42절)였다. 유대인들은 어느 다른 절기보다도 안식일을 준수하는 일에 더욱 엄격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날이 비록 유월절 절기였지만 안식일 전날 저녁이므로 그들은 이 날을 더욱 종교적으로 예비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들은 화려하고 즐거웁게 안식일을 엄수하기 위해서 그들의 집에서 식탁 등을 그 예비일에 다 예비하는 것이었다. 안식일 전날은 우리의 집이나 식탁보다도 우리의 심령이 안식일을 맞을 준비를 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가능한한 우리의 심령이 세상의 근심이나 사업에서 해방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감사를 드릴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안식일에 그러한 봉사가 이루어지고 그런 유익을 얻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안식일 전날에 그런 일을 예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아니 온 한 주간 동안을 지난 안식일로부터의 증진과 돌아오는 안식일을 위한 준비 속에 보내야 되는 것이다.
2. 그 예수의 시체를 달라해서 장사지낸 사람은 누구였나? 그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인데 그는 "존귀한 공회원"이었다(43절). 그는 인격적이고 신중한 사람이었으며 공신력을 갖춘 관원이었다. 그는 빌라도의 고문관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는 오히려 교회 안에서도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유대인의 의회의 한 사람이었다. 진실로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 권세와 신뢰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은 양심껏 자기의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며, 그들의 그런 처신이 그들로 하여금 더욱 출세하게 한다. 그런데 여기에 그의 인격에 더욱 빛을 발하게 하는 것이 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하였다(43절). 그는 하나님의 나라, 지상에 있는 은혜의 왕국, 메시야 왕국을 기다리는 자였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 그리고 그 나라의 특권에 있어서 이익을 바라는 자들은 그 소망이 좌절되고 낙심될 때에도 그리스도와 그 나라를 위해서 그들의 전진을 보여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존귀한 공회원들" 중에도 몇 사람, 적어도 이 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의 신앙이 다른 모든 자들의 불신앙에 대해서 정죄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에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이 필요한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을 일으켜 세우신 것이다. 그 제자들 중에는 아무도 이 일을 감히 서둘거나 추진하거나 관심이나 용기를 갖지 못하였던 것이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43절). 그가 비록 그 일이 얼마나 대제사장들의 비위를 거스리는 일이며 그가 그리스도에게 대하여 보이는 존경을 그들이 보고 그를 비난할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용기를 가지고 이 어려운 일을 추진한 것이다. 아마도 처음에는 그가 약간 두려워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tolmh,saj ─즉 그 일에 대하여 심사숙고하였다. 그는 주 예수의 남은 유골에 대하여 이 같은 존경을 보여드릴 것을 결심하였다.
3. 그리스도께서 이미 운명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빌라도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어다(빌라도는 어쩌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구하고 십자가에서 뛰어 내려올 것을 기대하였을 것이다). 범인 이상의 힘을 소유한 것으로 보이는 그가 그렇게 쉽게 죽음 앞에 굴복하여 그가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겼던 것이다"(44절). 그리스도의 죽음은 매사에 놀랄 만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불리운 것이다. 어떤 자들은 빌라도가 예수께서 아직 살아계신가 이미 죽었는가 의문을 가진 것은 예수가 죽었다고 위장하여 그를 산채로 내려가지 않도록 위함이요, 그렇다면 선고가 내린 대로 궂을 때까지 그대로 매달려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 오래냐"고 물은 것이라는(44절) 것이다. 아직도 그에게 어떤 생기가 남아 있는지 그리고 호흡과 감각이 남아 있는지 확인해 보고 회생될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결론 지으려고 한 것이다. 백부장은 그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특빌히 "예수께서 운명하시는"것을 묵도하였기 때문이다(39절). 그리스도의 죽음을 빌라도가 확인하는 이 일에도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 계시는 것이다. 빌라도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확실히 조사하고 확인하였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산채로 무덤에 묻히었다는 구실을 잡지 못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진리를 무효케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이 너무나 명백하게 입증되었으므로 반박이 일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진리가 때로는 그 원수들에게까지도 확증되는 것이다.
Ⅱ. 어떻게 그리스도의 시체가 장사되었는가? 빌라도가 요셉에게 예수의 시체를 내려 마음대로 하라고 허락한 것이다. 대제사장들이 먼저 서둘러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허락 받아 길로 끌고 다니며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정도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남은 노가 그렇게 폭발되는 것을 막으시고 예수의 시체를 잘 장례 지내 드리는 일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를 잘 아는 요셉으로 하여금 그 일로 인해 비할 수 없는 귀중한 상급을 얻도록 하게 위함이었다. 제사장들도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장사지내는 일을 막지 못하였다. "우리는 그의 시체를 장사지내는 것을, 만일 그를 다시 살게 하려는 어떤 준비가 아닌 이상, 반대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한다.
1. 요셉은 그러한 경우에 헌 세마포도 좋다고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예수의 시체를 싸려고 새 세마포를 사왔던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경의를 표하려고 하면 우리는 더욱 관대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최선의 것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려고 하는 것이다.
2. 그는 상처가 낫고 수척해진 예수의 시체를 내려서 값진 보배와 같이 세마포로 쌌다. 우리 주 예수께서 성만찬을 통해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와 찢기신 살을 기념하라고 명령하시었다. 우리는 그러한 방법을 통해서 우리 주 예수의 몸과 피를 받는 것이며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주 예수께 우리의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3. 그는 예수의 시체를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었다." 우리는 때로 유다 왕들의 이야기에서 악한 왕들의 치욕을 나타내기 위해 열왕들의 묘실에 장사지내지 않은 사실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비록 악을 행치 않으시고 많은 선을 행하시고 그의 조상 다윗의 왕위가 그에게 주어졌지만 그는 범인들의 무덤에 장사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세상이 아니고 저 나라에 있기 때문이며 그의 남은 자들이 영광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무덤은 요셉에게 속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아무 토지를 갖지 못했지만 매장지는 소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매장지 조차도 없었다. 이 무덤은 "바위 속에 판 무덤"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에게 피난처가 되는 무덤을 만들기 위해 죽으셨다. 그리고 튼튼한 피난처가 되기 위해 바위 속에 무덤을 판 것이다. "주는 나를 음부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가 쉴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기억하옵소서 !" (욥 14:13)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몸소 피난처가 되시며 모든 양떼들이 쉴 만한 그늘이 되는 것이다.
4. 그는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장사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풍습이었기 때문이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갔을 4에도 그가 그 속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돌문으로 입구를 막았던 것이다. 여기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에도 돌문으로 봉하였다. 그러나 두 가지 경우 모두 그들을 찾아온 천사들의 방문을 막지 못하였던 것이다.
5. 어떤 선량한 여인들이 예수의 장례식에 참예하였다. 그리고 "예수를 둔 곳을 보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장에는 시간이 허용되지 않음으로 안식후 첫날에 무덤에 찾아와 예수의 시신에 유향을 바르기 위함이었다. 유대교회에 중보자였고 율법을 전해 준 모세가 장사되었을 때에 아무도 그 무덤을 아는 자가 없도록 했다(신 34:6). 왜냐하면 그의 인격에 대한 사람들의 존경은 대단해서 그와 더불어 죽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중보자이시며 복음의 선포자이신 주 예수께서 장사지내지자 특별한 주의가 그의 무덤에 집중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었기 때문이다. 그의 몸에 대한 관심은 그리스도 자신이 자기의 몸이신 교회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심을 말하는 것이다. 비록 죽은 시체와 같이 보일지라도, 골짜기에 마른 뼈와 같을지라도 부활을 위하여 교회를 보존하시는 것이다. 성도들의 죽은 시체도 그의 먼지 하나도 잊혀지지 않으리라는 언약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장례에 대한 우리의 명상은 우리 자신의 장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며 그 무덤에 대하여 친숙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며, 멀지 않아 우리가 어두움 속에 마련할 우리의 침실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우리의 빈번한 생각은 그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과 공포를 덜어 줄뿐만 아니라, 무덤은 언제나 우리를 위해 예비 되어 있고, 무덤을 위한 준비를 해야 됨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 있는 것이다. 무덤에 묻히심 (마가복음 15:42-47)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 주 예수의 장례, 즉 엄숙하고 슬픔에 잠긴 장례에 참여하게 된다. 오 !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런 영광스런 장례를 지내지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말이다.
Ⅰ. 그리스도의 시체를 돌려주기를 간청함. 처형된 죄수들의 시체들은 로마의 정부에서 처분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도록 서두른 사람들은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어" 있도록 계획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어"있도록 계획하신 것이다(사 53:9).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볼 수 있다.
1. 그리스도의 시체를 돌려달라고 간청하게 된 것은 그의 시신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렇게 잘 장사지내기 위함이었고 그 장례를 그렇게 서두른 것은 다음의 말씀대로이다. "이 날은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42절)였다. 유대인들은 어느 다른 절기보다도 안식일을 준수하는 일에 더욱 엄격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날이 비록 유월절 절기였지만 안식일 전날 저녁이므로 그들은 이 날을 더욱 종교적으로 예비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들은 화려하고 즐거웁게 안식일을 엄수하기 위해서 그들의 집에서 식탁 등을 그 예비일에 다 예비하는 것이었다. 안식일 전날은 우리의 집이나 식탁보다도 우리의 심령이 안식일을 맞을 준비를 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가능한한 우리의 심령이 세상의 근심이나 사업에서 해방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감사를 드릴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안식일에 그러한 봉사가 이루어지고 그런 유익을 얻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안식일 전날에 그런 일을 예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아니 온 한 주간 동안을 지난 안식일로부터의 증진과 돌아오는 안식일을 위한 준비 속에 보내야 되는 것이다.
2. 그 예수의 시체를 달라해서 장사지낸 사람은 누구였나? 그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인데 그는 "존귀한 공회원"이었다(43절). 그는 인격적이고 신중한 사람이었으며 공신력을 갖춘 관원이었다. 그는 빌라도의 고문관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는 오히려 교회 안에서도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유대인의 의회의 한 사람이었다. 진실로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 권세와 신뢰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은 양심껏 자기의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며, 그들의 그런 처신이 그들로 하여금 더욱 출세하게 한다. 그런데 여기에 그의 인격에 더욱 빛을 발하게 하는 것이 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하였다(43절). 그는 하나님의 나라, 지상에 있는 은혜의 왕국, 메시야 왕국을 기다리는 자였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 그리고 그 나라의 특권에 있어서 이익을 바라는 자들은 그 소망이 좌절되고 낙심될 때에도 그리스도와 그 나라를 위해서 그들의 전진을 보여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존귀한 공회원들" 중에도 몇 사람, 적어도 이 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의 신앙이 다른 모든 자들의 불신앙에 대해서 정죄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에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이 필요한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사람을 일으켜 세우신 것이다. 그 제자들 중에는 아무도 이 일을 감히 서둘거나 추진하거나 관심이나 용기를 갖지 못하였던 것이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43절). 그가 비록 그 일이 얼마나 대제사장들의 비위를 거스리는 일이며 그가 그리스도에게 대하여 보이는 존경을 그들이 보고 그를 비난할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용기를 가지고 이 어려운 일을 추진한 것이다. 아마도 처음에는 그가 약간 두려워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tolmh,saj ─즉 그 일에 대하여 심사숙고하였다. 그는 주 예수의 남은 유골에 대하여 이 같은 존경을 보여드릴 것을 결심하였다.
3. 그리스도께서 이미 운명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빌라도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어다(빌라도는 어쩌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구하고 십자가에서 뛰어 내려올 것을 기대하였을 것이다). 범인 이상의 힘을 소유한 것으로 보이는 그가 그렇게 쉽게 죽음 앞에 굴복하여 그가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겼던 것이다"(44절). 그리스도의 죽음은 매사에 놀랄 만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불리운 것이다. 어떤 자들은 빌라도가 예수께서 아직 살아계신가 이미 죽었는가 의문을 가진 것은 예수가 죽었다고 위장하여 그를 산채로 내려가지 않도록 위함이요, 그렇다면 선고가 내린 대로 궂을 때까지 그대로 매달려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 오래냐"고 물은 것이라는(44절) 것이다. 아직도 그에게 어떤 생기가 남아 있는지 그리고 호흡과 감각이 남아 있는지 확인해 보고 회생될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결론 지으려고 한 것이다. 백부장은 그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특빌히 "예수께서 운명하시는"것을 묵도하였기 때문이다(39절). 그리스도의 죽음을 빌라도가 확인하는 이 일에도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가 계시는 것이다. 빌라도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확실히 조사하고 확인하였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산채로 무덤에 묻히었다는 구실을 잡지 못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진리를 무효케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이 너무나 명백하게 입증되었으므로 반박이 일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진리가 때로는 그 원수들에게까지도 확증되는 것이다.
Ⅱ. 어떻게 그리스도의 시체가 장사되었는가? 빌라도가 요셉에게 예수의 시체를 내려 마음대로 하라고 허락한 것이다. 대제사장들이 먼저 서둘러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허락 받아 길로 끌고 다니며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지 않은 것은 이상한 정도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남은 노가 그렇게 폭발되는 것을 막으시고 예수의 시체를 잘 장례 지내 드리는 일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를 잘 아는 요셉으로 하여금 그 일로 인해 비할 수 없는 귀중한 상급을 얻도록 하게 위함이었다. 제사장들도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장사지내는 일을 막지 못하였다. "우리는 그의 시체를 장사지내는 것을, 만일 그를 다시 살게 하려는 어떤 준비가 아닌 이상, 반대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한다.
1. 요셉은 그러한 경우에 헌 세마포도 좋다고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예수의 시체를 싸려고 새 세마포를 사왔던 것이다.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경의를 표하려고 하면 우리는 더욱 관대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최선의 것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려고 하는 것이다.
2. 그는 상처가 낫고 수척해진 예수의 시체를 내려서 값진 보배와 같이 세마포로 쌌다. 우리 주 예수께서 성만찬을 통해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와 찢기신 살을 기념하라고 명령하시었다. 우리는 그러한 방법을 통해서 우리 주 예수의 몸과 피를 받는 것이며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주 예수께 우리의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3. 그는 예수의 시체를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었다." 우리는 때로 유다 왕들의 이야기에서 악한 왕들의 치욕을 나타내기 위해 열왕들의 묘실에 장사지내지 않은 사실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비록 악을 행치 않으시고 많은 선을 행하시고 그의 조상 다윗의 왕위가 그에게 주어졌지만 그는 범인들의 무덤에 장사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세상이 아니고 저 나라에 있기 때문이며 그의 남은 자들이 영광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무덤은 요셉에게 속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서 아무 토지를 갖지 못했지만 매장지는 소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매장지 조차도 없었다. 이 무덤은 "바위 속에 판 무덤"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에게 피난처가 되는 무덤을 만들기 위해 죽으셨다. 그리고 튼튼한 피난처가 되기 위해 바위 속에 무덤을 판 것이다. "주는 나를 음부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가 쉴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기억하옵소서 !" (욥 14:13)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몸소 피난처가 되시며 모든 양떼들이 쉴 만한 그늘이 되는 것이다.
4. 그는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장사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풍습이었기 때문이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갔을 4에도 그가 그 속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돌문으로 입구를 막았던 것이다. 여기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에도 돌문으로 봉하였다. 그러나 두 가지 경우 모두 그들을 찾아온 천사들의 방문을 막지 못하였던 것이다.
5. 어떤 선량한 여인들이 예수의 장례식에 참예하였다. 그리고 "예수를 둔 곳을 보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장에는 시간이 허용되지 않음으로 안식후 첫날에 무덤에 찾아와 예수의 시신에 유향을 바르기 위함이었다. 유대교회에 중보자였고 율법을 전해 준 모세가 장사되었을 때에 아무도 그 무덤을 아는 자가 없도록 했다(신 34:6). 왜냐하면 그의 인격에 대한 사람들의 존경은 대단해서 그와 더불어 죽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중보자이시며 복음의 선포자이신 주 예수께서 장사지내지자 특별한 주의가 그의 무덤에 집중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었기 때문이다. 그의 몸에 대한 관심은 그리스도 자신이 자기의 몸이신 교회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심을 말하는 것이다. 비록 죽은 시체와 같이 보일지라도, 골짜기에 마른 뼈와 같을지라도 부활을 위하여 교회를 보존하시는 것이다. 성도들의 죽은 시체도 그의 먼지 하나도 잊혀지지 않으리라는 언약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장례에 대한 우리의 명상은 우리 자신의 장례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며 그 무덤에 대하여 친숙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며, 멀지 않아 우리가 어두움 속에 마련할 우리의 침실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우리의 빈번한 생각은 그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과 공포를 덜어 줄뿐만 아니라, 무덤은 언제나 우리를 위해 예비 되어 있고, 무덤을 위한 준비를 해야 됨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 있는 것이다.
첫댓글 25일 성탄절에는 기독교의 명절이라 도와주시는 분이 계실줄
알았는데 한분도 도움이 없어서 이대로 카페를 운영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연말인데도 후원이 없습니다 공과금과 지병에대한 약을 사야하고
인슐린을 사야합니다 모두 어려운 시기라고 하지만 통신료를 내야하고
치료를 받아야 카페도 운영 할 수 있습니다 작은 나눔으로 카페지기에게
용기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평안하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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