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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상 당선자 스크랩 [월간 수필과비평 2015년 9월호, 제167회 신인상 수상작] 일상의 풍경과 풍경의 의미 : 박귀덕의 ≪잃어버린 풍경이 말을 건네오다≫ - 유인실
신아출판 추천 0 조회 183 15.09.16 18:22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제 문학적 감성과 현실적 삶 사이를 종횡무진 가로지르며 발랄하게 달려올 수 있도록 해 준 수필을 통해 이제 문학연구자로서의 길을 가고자 합니다. 그 길을 열어준 심사위원님과 ≪수필과비평≫에게 감사드립니다. 엄격하고 준열한 통상의 틀에 매이지 않으면서도 분석과 인문적 통찰의 치밀함을 담을 수 있는 글을 만들어 가도록 정진하겠습니다."

 

 

 

 

 

 


 일상의 풍경과 풍경의 의미        -  유인실

    : 박귀덕의 ≪잃어버린 풍경이 말을 건네오다≫

 1.
   박귀덕 작품에서 자주 읽히는 것은 전통과 문화, 생태 그리고 여성이다. 이번에 출간될 두 번째 수필집 ≪잃어버린 풍경이 말을 건네오다≫를 고찰하면서 필자의 머릿속에 얼른 스치는 생각은 평소 그의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자연과 여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이번 수필집에서 얼마나 핍진하게 표현되고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이에 대해 박귀덕은 ‘작가의 말’에서 “전통문화의 도시에 살면서 그동안 겪은 이야기들을 수필 정원에 심어 놓았다. 이 시대를 건너오면서 접했던 생활문화를 담담하고 진솔하게 쓰려고 했다. 먼 훗날 이 땅에서 살았던 여인들의 삶이 궁금한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이다.”라고 하고 있다. 이번 수필집의 성격을 어느 정도 시사하고 있다.
   박귀덕이 이전의 수필집에서 ‘나’, ‘일상’에 대한 ‘말 걸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 방식을 보여주었다면, 이번 수필집에서도 그러한 존재론은 여전히 그의 삶의 존재 방식 속에서 포착된다. 그러나 이번 수필집의 괄목할 만한 변화라면 전체적으로 ‘나’의 삶에 대한 질문이 ‘나’와 ‘일상’을 넘어 ‘여성’, ‘생태’, ‘문화’ 등에 대한 성찰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상의 구체적인 상황과 그에 관련된 기억들을 자잘하게 엮어내는데도 그의 수필은 일상의 신변잡기류에 매몰되지 않고 삶이라는 큰 틀 속에서 포착된다.
   그의 수필이 일반적인 여성 수필에서 발견되는 섬유질적인 과잉 감상 분출도 아니요, 지나친 자의식 고양에서 오는 고고함과 거리가 있는 것은 오랫동안 공직생활을 해 온 데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정년을 맞아 직장 밖으로 튕겨져 나온 그는 ‘아직 더 일할 수 있는데 직장에서 밀려났다는 생각에, 아무 쓸모가 없어져 세상 밖으로 버려진 것 같은 그때의 참담함은 인생을 다 산 느낌이었다.’라고 술회할 정도이다. 누구나 다 같지만 직장은 그의 삶에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수필은 활달함과 스케일이 있다. 또한 삶을 거시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마음이 내재되어 있다. 박귀덕 수필의 읽는 재미, 읽히는 힘도 이런 점에 기인한다.
   남녀불평등이 자연스러웠던 시대에, 그는 공무원 신분이었다. 그러한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보수적인 공무원 조직원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면서 정년을 하기까지 겪었던 무수한 체험들이 그의 연성의 감수성과 결합하여 보여주는 그의 수필세계는 확실히 일반 여성들의 수필세계와는 다른 지평을 형성하고 있다. 우선 개인적 주체의 측면에서 볼 때, ‘나’는 우리 시대의 여성이라는 보편적 존재이면서 여성에 대한 낮은 사회적 평가에 대해 문제의식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개성적 주체로 작동한다.
   그는 당시 동등한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억눌려 지내던 여직원의 입장에서 남자와 평등한 위치에서 평등한 대우를 받고 싶은 갈망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어느 날 동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이 주사님 바꿔주세요.”라고 한다. 분명 ‘주사’의 직책을 가지고 있는 여직원을 바꿔달라고 하는데도 상대방 측에서는 그런 사람은 없다는 답을 해 온다. 남자 직원들에게는 어린 사환도 ‘주사’라고 부르면서, 실제 ‘주사’ 직책을 담당하고 있는 여직원을 ‘○ 양’이라고 불렀던 시대에, ‘○ 주사’라고 불렀으니 그게 웃음거리가 되었다. “오늘날 수화기를 들고 ‘이 주사님 바꿔주세요.’ 하면 껄껄 웃는 남자 직원은 없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수직관계가 아니고, 기차 레일처럼 수평관계로서 영원한 삶의 파트너라는 인식이 자리 잡기까지의 그러한 우여곡절이 있었다.” 라는 내용에서 알 수 있다.
   박귀덕은 당시에 여성적 삶의 양태에 대한 뿌리 깊은 가부장적 가치관에 의하여 공직사회에서조차 사회적 합의가 충분하게 소통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말한다. 요즘 “여성상위시대라고 엄살을 떠는 남자들이 늘어난 사회를 생각하면 납득하기 어렵지만, 우리 사회에 엄연히 존재했던” 남녀불평등에 대한 인식을 실제 경험을 통해 담담하게 말해주고 있다. 이런 글쓰기는 그러한 사회적 모순을 보고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일별하고 말 작가의식은 아니다.


 2.
   박귀덕의 문학은 대상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 출발한다. 그의 눈에 포착되는 대상은 이내 하나의 풍경이 된다. 물론 풍경은 대상 그 자체가 아니다. 풍경은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가 전제되어 있다. 풍경은 대상과 시각 주체 사이의 상호관계에서 대상을 선택하고 새롭게 구성하여 시각 주체의 마음에 그려진 대상의 모습이다. 다시 말하면 풍경이란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 주체의 의식 속에 형성되는 심미적 형상이다. 따라서 풍경에는 시각 주체의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다.
   박귀덕 작품을 읽으면서 우리가 받게 되는 일차적인 느낌은 그의 시선에 포착된 역사, 생태, 문화에 대한 문제의식과 두루 맞닿아 있다. 외관으로 보기엔 평범한 일상일지라도 박귀덕의 시선을 통과하면 하나의 풍경으로 재현된다. 작가는 단순하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것 같지만, 독자들은 그 작품을 통해서 작가의 철학과 세계관을 알 수 있듯이, 박귀덕의 일상의 풍경 담기는 그대로 그의 사상과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문학적 장치로 작동한다.
   박귀덕이 포착한 그러한 풍경은 대상에 대한 이면을 보여주기 위한 풍경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묘사된 풍경에는 반드시 문제의식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일본에서 건축 자재를 들여와 지은 2층 목조건물은 그 시대에 상상도 하기 어려운 넓은 창과 금고방, 실내화장실 등이 있고, 잘 가꿔 놓은 정원이 있어 평범한 포목상의 집이라 믿기 어려웠다. 농장을 둘러볼 때, 거처로 사용되었다는 통나무집 별장은 백두산 낙엽송에 박석지붕, 실내 장식은 우리의 온돌방과 일본의 다다미, 서구적인 거실 구조가 혼합된 건축물이었다. 거실 천장의 샹들리에나 가구들은 모두 유럽에서 수입한 것들이란다.

-<잃어버린 풍경이 말을 건네오다>에서

 

   위의 인용문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이 땅에서 누렸던 호화 생활을 보여주는 진술이다. 이 진술은 하나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시간과 사건에 따른 연속적인 흐름이라기보다는 여러 상황을 제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사건의 연속성이 없다는 것은 ‘정지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묘사하면 풍경이 된다. 일제강점기 때 군산에 남은 흔적들이 그의 시선에 포착되어 근대문화 유산의 풍경으로 묘사되고 있다. 아이러니컬하다. 그런데 그 풍경은 단순한 있는 그대로의 풍경이 아니다. 이미 풍경 너머의 그의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기억이 현실의 지각과 상호작용하면서 하나의 새로운 인식으로 작용한다. 즉 풍경을 바라보는 작가의 사유는 현재의 의식이 바탕이 되지만 그 내면에는 과거의 경험과 무의식 같은 요소들이 혼재되어 기억의 저장소에 보관되어 있다가 현재의 지각과 접속이 되면서 현재의 삶에서 살아있는 의식으로 재현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아픈 풍경들을 유산으로 보존하고 있는 군산시는 그야말로 아픔의 땅 통곡의 땅이었다.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시간 속에 빛 바랜 흑백사진 하나가 번개처럼 스친다. 김제만경 넓은 들판에 사시던 내 아버지. 피땀으로 농사지어 놓으면,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빼앗아 소달구지에 쌀을 싣고 가는 모습을 가슴 치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그 모습이 떠오르며 가슴이 먹먹해진다. 울컥하고 치솟는 눈물을 감출 수 없다. 내 아버지가 겪으신 한 맺힌 삶이 풍경이 되어 생생한 기억으로 마음이 저릿저릿 아프다.

-<잃어버린 풍경이 말을 건네오다>에서

 

   인용 글은 실제 눈앞에 전개되는 풍경은 아니다. 일본인들의 호화생활을 담보해 주는 풍경 너머에 오버랩되어 재현되는 풍경이다. 김제만경 들판의 너른 곡창지대에서 피땀으로 지어 놓은 농산물을 일본으로 송출하기 위해 소달구지에 싣고 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작가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과거의 경험이다. 그 한 컷의 풍경만으로도 왜 이곳이 아픔의 땅, 통곡의 땅이 되어야 하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 풍경은 제유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부분적으로는 독자성을 띠는 작가 개인의 아픔이면서 전체적으로는 군산 지역, 나아가 우리 민족의 아픔을 환기시킨다. 이것은 우리의 현실 사회에서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는 잃어버린 시간을 회복하고자 하는 작가의 문제의식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눈에 보이는 경관을 통해 그 너머에 존재하는, 작가가 지향하는 작가 정신을 응시하는 그의 글쓰기 전략으로 볼 수 있다.


   꽃 피는 봄에 무슨 잘못을 했기에 저리도 처참하게 처형을 당한 것일까? 어쩌다가 인간의 눈에 거슬려 소리 한 번 크게 질러 보지도 못하고 사지가 잘려 나가는 고통을 견디고 있을까? 땅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는 저 가엾은 소나무 가지들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고 풀이 죽었다.

-<소나무의 원성>에서

 

   위의 인용의 글에서 서술적 자아인 나는 아파트의 정원수로 심기 위해 옮겨온 소나무에 대한 풍경의 포착이다. 무심코 포착된 이 풍경은 작가의 눈에 몹시 거슬린다. 제자리에서 분수를 지키며 자족하며 살고 있는 나무를, 나무의 생명적 이치와는 아랑곳하지 않고 인간의 이기심에 의해 훼손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 그루 나무의 의미, 아파트 정원수로 심겨진 소나무가 무슨 그리 대단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그러나 박귀덕은 존재 자체로 나무는 제 구실을 하고도 남는다는 점에 착안한다. 비록 말 못하는 식물이지만 거기에도 인간과 똑같은 생물체적 존재로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하면, 그래서 인간의 생명력 못지않게 나름대로의 존재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무 한 그루도 쉽게 보아 넘길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길가의 나무 한 그루를 그냥 바라보고 지나치지만 작가에게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니다. ‘아파트 같은 밀집된 주거 공간에 산소가 필요할 것 같아 산소를 만들어 주고, 인간이 필요 없다고 뱉어 낸 탄산가스는 마시며, 태양이 이글거리던 무더운 여름날엔 잔가지를 늘여서 인간들에게 그늘을 만들어” 준다. 그리고 내 곁에 찾아온 손님에겐 나뭇잎에서 놀던 바람을 선물하며 더위를 잊게 해 준다. 그것뿐인가. ‘둘이서 비밀스런 대화를 나누어도 그 누구에게 토설하지 않으며, 아파트의 미관을 생각해 꽃들과 어우러지도록 푸르게 단장을 하니 아름다운 아파트라고 집값을 올리는 데에도 한몫을 하는 망외의 소득까지 안겨주는’ 역할을 한다.
   나무는 결국 인간에게 이로움을 주는 절대적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한 그루의 나무를 바라보는 데에도 사랑의 마음이 필요하다. 작가는 소나무의 원성을 통해 진정으로 나무 한 그루를 사랑하려면 그의 현재적 소용 가치만이 아닌, 탄생과 죽음, 존재와 부재까지도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박귀덕의 글은 독자에게 이런 사유까지 작동시킨다.

 

   인간과 다툴 생각도 없고, 관계를 불편하게 할 생각도 없으며, 해코지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래서 한쪽 조용한 곳에 위치한 소나무마을에서 자족하며 살았다. (중략)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다짜고짜 내 몸에 톱을 들이대어 풍비박산을 내는 일은 피하고 싶다. 인간들의 이기심에 의해 말을 못한다는 이유로 말 한마디 못하고 무시로 팔이 잘려 나가도 묵묵히 감내해야 하는 우리 식물들의 삶이 싫다.
   인간 사회에서도 형평성을 잃은 공권력에 수난을 당하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약한 민초들, 힘 있는 자들의 밥그릇 싸움에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밀려나는 서민들, 어린이나 노인들, 장애자 등 힘없는 소수자들도 다수자들의 횡포에 말 한마디 못하고 절단 나는 삶을 살아왔는지 모를 일이다.

-<소나무의 원성>에서

 

   극도의 인간 위주의 사유는 자연에게 폭력이 된다. <소나무의 원성>애서의 자연은 거대한 인간의 시스템 속의 일부인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 속에서 인간 행위를 바라보는 화자는 주체 중심주의에서 비롯되는 인간중심주의가 절대적 우위를 가지고 어떻게 자연을 타자화 시키고 중심에서 비켜서 있는 주변인들을 폭력적으로 대하는지를 풍경을 통해 응시하게 한다. 자연은 언제나 변함없이 제 모습을 간직하며 그 자리에 있다. 인간에게 해코지할 마음은 더더욱 없다. 그러나 인간의 이기심에 의해 무분별하게 가해지는 폭력은 참기 힘들다. 박귀덕은 이러한 인간과 나무의 관계를 인간의 중심/주변 구도 시스템에서 빚어지는 사회현상에 주목한다. 그래서 권력, 다수의 힘에 짓밟히는 민초들의 삶을 환기시키고자 한다. 바꿔 말하면 그가 추구하는 행복한 삶은 인간과 자연, 중심과 주변, 다수자와 소수자 모두가 함께 더불어 조화롭게 사는 것이다.

 

   징검다리에 왜가리 한 마리가 서 있다. 목을 길게 늘여 주변을 살피다가 다시 움츠린다.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이 졸고 있는 것 같다. 날아가지 않도록 조심해서 앞꿈치로 걸어 조금 더 곁으로 다가갔다. 왜가리는 사람이 접근하는 소리를 못 들었는지, 아니면 살금살금 다가가는 사람의 모습에 익숙해서인지 아무 일 없다는 듯 곁을 내주었다. 더 가까이 다가가도 달아나지 않아 왜가리와 함께 멋진 사진도 찍었다.
   징검다리 주변엔 오리 가족들이 놀고 있다. (중략) 작은 오리들은 먹이를 찾고 있는지 움직임이 부산하다. 오리가 몇 마리쯤 될까 궁금해서 손가락을 짚어가며 헤아려 보다가 빙글빙글 도는 오리 수를 헤아릴 수 없어 금방 포기했다. 오리가 몇 마리인지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오늘 그들과 인연이 되어 즐거웠으면 되고, 마음이 평화로웠다면 그로써 족하다. 감사한 일이다.

-<전주천의 가을>에서

 

   일반적으로 풍경은 바깥의 정경이나 상황을 의미한다. 요컨대 작가의 눈에 비친 풍경은 물리적 실재로서의 풍경이기보다는 작가의 심미적 구조로 재인식한 풍경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가을날 전주천변을 걸으며 왜가리도 만나고 오리 가족도 만난다. 그의 눈에 비친 풍경은 다분히 유토피아적이다. 사람이 접근해도 곁을 내주는 왜가리와 함께 사진을 찍는가 하면, 오리 일가족으로 보이는 오리 수를 헤아려보면서 그들과 함께했던 인연에 행복해 한다.
   박귀덕에게 있어서 유토피아는 다다르지 못하는 환상의 세계가 아니다. 실제로 그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전주천변을 걸으며 자연과 동화된 경지를 맛본다. 그러나 박귀덕에게 자연은 단순한 묘사의 대상에 그치는 단순한 객관적 상관물이 아니다. 그는 자연과 인간이 함께하는 세상을 갈망한다. 그래서 자연을 통하여 인간 중심의 사유가 폭력을 환기시키면서도 인간의 고뇌와 슬픔을 그려내어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묻는다. 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는 자연 속에서 또 다른 존재와의 만남을 이루어내는 것이다. 이는 그에게 있어서 유토피아는 바로 일상적인 것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상의 삶이 자연과 상생하는 것이면 그것이 바로 유토피아라는 사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적인 풍경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풍경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작가의 눈에 보이는 대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박귀덕은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삶의 모습을 가을의 전주천에서 본 사물에 투사시켜 하나의 풍경을 형성시킨다. 이상적인 풍경을 찾는 것은 작가가 추구하는 정신이 거기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식은 <아리울의 봄>에서 박귀덕 나름의 톤을 이룬다.

 

   창 넓은 찻집에서 먼 바다를 본다. 개펄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레질을 하고 있다. 그들의 구럭 속에는 생합과 바지락이 가득 담겨 있다. 새만금 방조제가 건설될 때 삶의 터전을 잃고 도시로 나갔던 사람들이 옛 모습을 되찾은 개펄로 돌아왔다. 그들에게 개펄은 생명의 보물창고였다.
   고개를 돌려 석양을 보니 산호 빛 바다가 아름답다. 돛을 올린 요트들이 모였다 흩어졌다 군무를 춘다. 바닷바람을 가르며 그 곁을 스치고 지나가는 젊은이들의 윈드서핑 놀이가 부럽다. 나는 초호화 유람선을 타고 고군산열도를 휘감아 돌고 있다. 붉은 산호 빛 아리울항의 경치는 천혜의 경관을 자랑하는 한 폭의 수채화다. (중략) 해풍을 맞으며 비옥한 땅에서 자란 화훼와 유기농 채소는 청정지역 생산품이라는 프리미엄을 얻어 외국에 수출되고, 이곳 농부들의 연간 소득이 억대를 넘으니 사람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머물러 있다.
   아리울이 경제특구로 지정되어 외국인 투자자들이 몰려들었다. 인구가 늘어 광역도시가 되더니 시내가 온통 빌딩 숲을 이루었고, 홍콩보다 더 아름답고 화려한 야경 도시라는 입소문이 퍼졌다. 아리울국제공항엔 외국 관광객들이 북적이고, 거리마다 관광인파가 몰려들어 품질 좋은 우리 제품들을 쇼핑한다. (중략) 청년들의 일자리가 늘어나고, 수입이 안정되니 중산층 가정들이 여유를 즐기며 화목하다. 나이가 들다보니, 주변에 숙련된 의료인, 최신의료장비를 갖춘 종합병원과 사회복지제도가 잘돼 있는 도시에 살게 되어 마음 든든하다. 여러 가지 문화 시설의 접근성이 좋아 문화생활이 가능하니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고장이 되었다.

-<아리울의 봄>

 

   인용이 좀 긴 것은 이 작품이 생명력이 넘치는 풍경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서해바다와 만경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새만금방조제가 건설되면서 한때 삶의 터전을 잃었던 작가의 고향이 지상낙원으로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도시로 나갔던 사람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고, 바다 위엔 요트, 윈드서핑, 초호화 유람선이 한 폭의 수채화를 이룬다. 이 지역에서 재배되는 생산물은 모두 청정지역 생산품이라는 이름을 달고 외국으로 수출되기에 농부들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경제특구가 되어 투자자들이 몰려드는가 하면, 밤의 이곳은 홍콩의 야경이 오히려 무색할 만큼 찬란하고 아름답다. 청년들의 일자리가 늘어나고, 중산층 가정들이 여유를 즐기며, 주변에 최신의료장비를 갖춘 종합병원과 사회복지제도가 잘된 여러 가지 문화 시설도 활기를 띠어 안일의 고향으로 변했다.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고장이 되었다.
   작가가 묘사한 아리울의 모습은 지상낙원이다. 이 이상적인 풍경은 실재하는 것이 아닌, 작가가 “봄볕이 따사로워 깜빡 졸”면서 보았던 상상 속의 풍경이다. 아리울(Ariul)은 새만금을 산업과 관광, 국제업무 등이 어우러진 복합도시로 만든다는 의미로 일컫는 글로벌 네임이다. 작가는 이 아리울에 봄이 오리라는 꿈을 가슴에 품고 있다. 방조제를 쌓아 새만금 갯벌을 땅으로 만드는 엄청난 규모의 간척사업을 두고 찬반양론이 분분했고, 그 결과는 예상한 대로 아직은 본래의 개발 목표에 턱없이 못 미치고 있지만 그는 미구에 닥칠 ‘아리울의 봄’을 행복하고 생명력 넘치는 세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서 제시하는 풍경은 단순히 기계문명의 발달만이 아닌, 자연과 문명이 조화를 이루는 이상적인 세상이다. 비록 ‘개발의 힘’에 의해 파괴되고 훼손되어 갔고,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지고 있는 것들에 의해 더 이상 옛 고향의 모습은 찾을 수 없지만, 적어도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잃어버린 지상 낙원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가 글을 지배한다. 이것은 자연과 인간이 공생하는 모습을 통하여 이상사회를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의 미학적 구현이다.


 3.
   박귀덕의 이번 수필에서 드러나는 두드러진 또 다른 특징은 꼼꼼한 비범한 묘사력을 꼽을 수 있다. 그의 작품 면면에 흐르고 있는 묘사력은 대상에 대한 경이감과 절대자를 향한 시선이 함께한다.

 

   똑·똑·똑·또르르, 똑·똑·똑·또르르…….
   목탁 소리가 멎은 후, 법고 앞에 학 한 마리가 절규하듯 엎드려 있다. 하얀 비단으로 지은 장삼을 무대에 깔아 놓고, 삼현육각에 맞춰 천년의 세월을 거쳐서 고개를 든 무희의 조심스런 몸짓과 두 활개를 활짝 펼친 날갯짓, 발사위가 관중의 시선을 제압한다. 모든 동작이 정지된 듯 숨소리도 멎었다. 호흡을 고르고 쪼르르 내딛는 무희의 발돋움새에 객석에서 몰아쉬는 숨소리가 쫀득하다.

-<승무>

 

   사뿐사뿐 내려밟는 발 디딤에 감정을 절제하는 진중함이 스며있어 멋스럽다. 치맛자락을 거머쥐니 겹겹이 받쳐 입은 치마 속으로 하얀 버선코가 드러난다. 푸른 바다를 항해하는 돛대를 닮은 버선코에 시선이 멈춘다. (중략) 한 발을 들어 올리니 버선코의 활기찬 풍류가 돋아난다. 그 풍류를 흥으로 살려 다리를 지나 허리선을 이어오다가 어깨 위 긴 팔로 올려 보내니, 하늘에 떠 있던 손목에 이르러 태극의 실루엣을 만든다. 유연한 손목이 빨갛게 달아오른 귀밑을 휘감아 넓은 하늘에 오색구름을 뿌려놓는다. 어느 도예가가 흙으로 빚어 놓은 달항아리를 물레에 올려놓고 큰 붓을 들어 구름을 그려 나가듯이 무희의 섬세한 손끝이 도도하다.

-<교방무>

 

   승무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민속춤의 하나이다. 민간연향民間宴享에서 깊은 발디딤과 함께 긴 한삼 자락을 천천히 뿌려 모으며 웅크리고 다시 펼치는가 하면 일순간 모아제치며 비상하는 독특한 멋을 가진 장삼놀림의 춤이다. 또한 교방무는 조선시대의 교방에서 추던, 고도의 예술성을 갖춘 기녀의 춤이다. 승무는 불교 의식에서 승려가 추는 춤이 아닌, 민간연향民間宴享에서 무원舞員이 추는 춤인 만큼 부처만을 위해 바쳐진 춤은 아니다. 그런데도 박귀덕의 수필에서 묘사된 승무는 숭고한 종교적 이미지의 한 승화로 나타난다. 가령, 목탁소리, 법고, 장삼 등은 불교적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지만 이들 구성물은 발디딤과 장삼놀림의 춤사위에 흡수되면서 천상의 춤처럼 묘사된다. 독자들은 그의 묘사에 이끌려 마치 자신이 승僧과 속俗의 경계에서 번민하다가 형이상학적 세계로 승화되는 착각을 경험한다. 박귀덕의 <승무>에서 보여주는 숭고함의 경지는 일반적 의미에서의 수필의 주제의식 구현을 위한 서정성이라기보다는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생생하고 감각적인 묘사를 형성함으로써 비허구 산문의 ‘보여주기’의 또 다른 문학적 성취를 거두고 있다.
   이는 교방무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감정을 절제하는 진중한 발 디딤과 푸른 바다를 항해하는 돛대를 닮은 버선코의 활기찬 비상, 유연한 손목으로 빨갛게 달아오른 귀밑을 휘감아 넓은 하늘에 오색구름을 뿌려놓는 손사위, 어느 도예가가 흙으로 빚어 놓은 달항아리를 물레에 올려놓고 큰 붓을 들어 구름을 그려 나가는 듯한 무희의 섬세한 손끝 등의 묘사는 교방춤의 예술성을 한 단계 더 높인다.

 

   세상은 온통 새하얀 눈으로 덮였다. 우뚝우뚝한 바위와 높은 산 계곡에서는 폭포가 쏟아진다. 꿈틀거리는 용이 구름 날개를 달고 승천하려는 듯한 그 생명력이 경이롭다. 새들이 군무를 춘다. 지휘자의 손짓에 따라 칸타타를 연주하듯 그 날갯짓이 상승과 급강하를 느림과 빠름을 조절하며 다양하게 날고 있다. 그리그의 피아노 콘체르토 16번을 감상하는 듯 풍요롭고 생기발랄한 자연이 가슴에 안겨 온다. 그 가슴속으로 밤의 정령이 오로라의 신비를 선물한다. 지구 곳곳마다 아름답고 생동감이 넘친다. 과학을 응용한 영상의 발달은 북극에 가지 않고도 강의실 의자에 앉아서 북극의 아름다운 비경에 취하게 만든다. (중략)
   바다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새끼에게 젖을 물리는 어미가 안쓰럽다. 지구의 기온이 매년 높아져 물개들의 놀이터인 얼음 면적은 해마다 감소하고, 조각난 얼음은 서로 부딪치며 갈라진다. 그 사이로 이리저리 헤엄치며 먹이를 찾아 헤매는 곰이 힘겨워 보인다. 기후 변화로 먹이사슬에 적응하지 못하는 종은 결국 멸종하게 될 것이다.

-<북극곰 가족 세상살이>에서

 

   박귀덕에게 자연은 인간의 또 다른 형태의 생명체이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대자연의 풍광이 유려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는 이 작품은 결국 지구의 온난화로 인해 북극의 어미곰의 죽음을 예보한다. 박귀덕은 자신이 호명하는 자연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자연 위주의 혹은 인간 위주의 일방향성의 삶이 아닌,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상생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그의 이 같은 사유의 글쓰기는 바로 자연과 인간에 대한 생태학적인 철학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사소하게 보이는 일상에 대해서도 시선을 떼지 않는다. 일상의 작은 소재들이 그의 시선에 포착되면 이내 타자와의 관계들을 만들고, 그 이면을 성찰한다. 그런 다음 상상력을 통해 깊고 새로운 의미를 추출한다. 그는 이 세상은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듯, 어떤 의미에서는 이면을 응시하는 과정에서 피사체가 또 다른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박귀덕은 이 암울한 삶의 현실을 냉철하게 응시하고 있지만 수많은 삶의 풍경들을 독자적인 심상을 통하여 내적으로 승화시켜 가고 있으며, 이 풍경을 주체로부터 해방시키는 가운데 인간 존재의 의미를 새로운 차원으로 열어가고 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세계와 자아, 대상과 주체간의 슬픔과 기쁨을 관조한다.


 4.
   박귀덕의 수필은 때로 우리 시대의 상실과 아픔을 이야기하면서 존재들의 진정한 이해의 가능성에 관해 보여주고 있다. 현재 우리 시대에 목도하고 있는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수많은 고리들은 비단 나와 타자 사이의 간극의 문제뿐만 아니라 근원적 이해 결핍의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작품에서는 우리의 사회 현실에 대한 민낯이 곳곳에서 거침없이 산견된다.


   선뜻 손을 내밀어 물건을 골라 시장바구니에 담기가 주저된다. 배추 값이 아무리 올라도 가족들 밥상에 김치를 빼놓을 수는 없는데, 채소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고추도 금고추 되고, 무·호박·감자·가지·대파 등 안 오른 것이 없으니 예년과 같은 비용으로 추석상차림은 어림도 없을 것 같다. 농민들은 수입이 줄어들어 한숨만 깊고 서민들의 시장바구니 속에서도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중략)
   천재지변으로 오르는 채소 값은 그런다손 쳐도, 인재로 인해 오르는 고기 값마저 상차림을 어렵게 하고 있다. 의술이 발달되었다지만 지금도 인수공통전염병이 지구촌에 존재하고 있다. (중략) 요즈음 새로운 병원체의 출현으로 예방약과 치료약을 알 수 없어 인간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 조류독감, 구제역의 출현은 마을과 마을의 통행을 단절시키고, 사람과 사람들의 만남을 공포로 몰아가는 세상으로 변화시켰다.
   TV뉴스에서 소를 생매장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고삐 쥔 손에 이끌려와 구덩이로 내몰릴 때, 그 상황에서 벗어나보려고 발버둥치던 소의 눈망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어느 지방이든 구제역이 퍼지면 소와 돼지를, 조류독감이 퍼지면 닭과 오리를 모두 매장시켰다. 방역이라는 이름으로 한꺼번에 수십만 마리씩 매몰처분했다.
   생선들도 방사능에 오염되어 밥상에 오를 수 없게 됐다. 일본의 원전사고로 바닷물 속의 물고기들이 모두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방사능 물질 속에는 발암물질이 있어 인체에 해를 끼친다고 하니 거저 줘도 밥상에는 못 올릴 형편이다.

-<추석 장보기>

 

   해마다 가을이 되면 태풍이 들판의 농작물을 모질게 휩쓸어 간다. 그런데 그들이 남기고 간 크고 작은 피해들은 고스란히 농부들이 감당해야 할 몫으로 남는다. 이러한 태풍과 같은 자연 재해나 전염병, 구제역으로 인한 가공할 만한 위협은 갈수록 심해지는 문명의 발달과 인간의 끝없는 욕망 때문이다. 박귀덕은 태풍이 지나간 후 추석 장보기를 위해 시장에 나왔다가 그 여파를 피부로 절감하게 된다. 천정부지로 솟는 채소 값이며, 전염병, 조류독감 등으로 마음 놓고 안전한 식재료를 고를 수 없어서 방황하는 자신을 통해 인간의 이기적인 편리 추구의 결과가 마침내 부메랑이 되어 고스란히 인간이 감당해야 할 위협으로 다가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인간의 안락하고 편리한 삶만을 좇는 생활은 지구의 온난화를 초래하고, 또 다른 대안으로 개발되는 화학 연료 등의 무분별한 사용은 방사능 유출 위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세상을 만들고 있다.
   박귀덕이 추구하는 아름다운 사회는 돈과 권력이나, 과학과 기술에서 찾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인간들이 ‘진즉에 자연의 소중함을 알고 살았더라면 오늘과 같은 시장에서의 방황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라는 소박하고 원초적인 반성을 깨우친다. 비허구 산문의 교술성敎述性의 수행이다.
   ‘식물과 가축은 자랄 때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그것들이 우리 몸속에 쌓여, 그것을 식품으로 섭취한 인간에게 인체에 해를 끼칠 염려가 있’듯이 인간이 잘살기 위해서는 자연도 아프지 않아야 공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박귀덕의 이번 수필에서는 이밖에도 다루어야 할 작품들이 적지 않다. 가족간의 끈끈한 사랑을 보여주는 <볼라벤 고마워>, <아버지의 곶감>, <양이 같은 사랑>, 우리의 전통차 문화에 대한 다양한 생활 경험을 다룬  <햇차 잔칫날>, <연꽃 들차회>, <백련차> 등도 함께 음미해 볼 만한 작품이다. 이에 대한 고찰은 다음 과제로 남겨둔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인간과 자연이 공생한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박귀덕의 수필에서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언제나 삶에 대한 따뜻함을 문제로 삼는다. 그의 작품세계는 파문처럼 퍼져 나가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유인실  ----------------------------------------------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문학박사, 계간 ≪문예연구≫ 시 등단(1997). 주요 논저: <백석 시의 로컬리티 연구>, <고정희 시의 탈식민주의 연구> 외. 저서: ≪한국 현대문학과 탈식민성≫, ≪사랑의 시, 여행에서 만나다≫ (공저) 외. 시집: ≪신은 나에게 시간을 주었다≫.

 

 

당선소감


   수필문학의 현장에서 수필과 함께한 시간이 20년 가까이 되어 갑니다. 문학에의 첫발을 시詩로 내디디는 바람에 수필엔 따로 적을 올리지 않았지만, 제 삶과 수필을 분리시켜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내 삶 영역의 모든 동선은 수필과 연결되어 있었고, 수필을 통해 넘치는 사랑과 격려와 위로를 받았음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수필과 교섭해 온 삶이 이제는 제 개인의 역사에서 중요한 페이지가 되었습니다.
   제 문학적 감성과 현실적 삶 사이를 종횡무진 가로지르며 발랄하게 달려올 수 있도록 해 준 수필을 통해 이제 문학연구자로서의 길을 가고자 합니다. 그 길을 열어준 심사위원님과 ≪수필과비평≫에게 감사드립니다. 엄격하고 준열한 통상의 틀에 매이지 않으면서도 분석과 인문적 통찰의 치밀함을 담을 수 있는 글을 만들어 가도록 정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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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5.09.17 09:20

    첫댓글 유인실 주간님의 평론신인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당선소감을 보니 당찬 포부가 비칩니다. 문학연구자로의 길에 나서는
    주간님께 응원 보냅니다.

  • 15.09.17 16:38

    유인실 주간님, 수필과 함께 한 이 십 년,
    그 내공을 치밀한 분석과 인문적 통찰의 지혜를 담은 평론으로 엮어내시길 기대합니다.
    문학연구자로서의 멋진 출발을 축하드리며 힘찬 응원의 박수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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