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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호까지 월간山에 ‘파키스탄 히말라야 대탐사’를 연재해온 김창호씨가 지난 여름 100일간의 탐사를 끝내고 귀국했다.
이번 탐사에서 그는 파미르의 딜리상사르(Dehli Sang Sar·6,225m), 힌두라지의 아타르코르(Atar Kor·6,189m)와 하이즈코르(Haiz Kor·6,105m), 그리고 카라코룸의 박마브락(Bakma Brag·6,150m) 등 4개 처녀봉을 단독으로 초등정하고, 아직 사람의 발길이 들어서지 않은 3개 고개를 넘었다. 고독과 죽음에 대한 공포, 피를 쏟아내는 육체적인 시련을 이겨내면서 해낸 100일간의 이야기를 3회에 걸쳐 싣는다.
바위에 걸터앉아 랜턴 불빛에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밤 11시가 지나고 있다. 한참을 기다려도 자일파트너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 친구는 왜 이렇게 늦는 거야.”
혼잣말로 투덜거렸고, 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뒤를 돌아다보았다. 빙하 중앙으로 내려오는 곳에는 어떠한 불빛도, 소리도 없다. 가끔 모레인 언덕 위에서 얼음 사면으로 바위가 미끄러지며 내는 소리만이 정막을 깨고 들려올 뿐이다.
“이봐! 너는 지금 혼자야.”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혼자임을 다시 깨닫고 걷기 시작하기까지는 시간이 꽤나 걸린 것 같다. 납덩이를 달아놓은 듯한 무거운 다리를 옮길 때마다 흐느적거렸다.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지만 허사였다. 스틱을 짚고 있지 않았더라면 수없이 넘어졌을 것이다. 헛구역질은 멈추질 않았다.
남동쪽 능선을 넘어온 달이 환하게 비춰왔다.
“이봐 힘내. 베이스캠프까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또 들렸다. 베이스캠프로 가기 위해서는 빙하 동쪽으로 계속 내려가서 호수와 크레바스가 있는 얼음 절벽 사이를 우측으로 직각횡단하여 빠져나가야 한다. 그 길 하나뿐이다. 기억은 또렷한데 발길은 텐트을 향해 곧장 가고 있다. 결국 길이 끊어져 두 번이나 되돌아왔다. 빙하에 주저앉았다. 졸음이 쏟아졌다. 그냥 누워 잠들어 버리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기가 걷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모레인 언덕 사이로 빠져나가자 텐트가 보였다. 50m쯤 되는 거리였다. 이제 쉴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에 빈 웃음이 나왔다.
“이봐, 자는 거야? 나 돌아왔네. 늦었지?”
쉰 목소리로 텐트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배낭을 벗자마자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딜리상사르 첫 시도는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헛껍데기가 되어 돌아왔다. 7월19일 새벽 12시10분, 서울을 떠난 지 11일째였다.
무사가 결전 전 목검 깎는 심정
오르고 싶었다. 하나의 봉우리를 오르기에는 내 욕심이 허락치 않았고, 모든 것을 무리 없이 해낼 자신이 있었다. 3개월 동안 5개 봉우리를 오르고자 한다. 탐사기간을 제외하면 2주에 하나씩 올라야한다. 원정을 위해서 준비라고 할 것도 없었다. 약간의 장비와 라면 10개를 구입해 배낭 하나를 꾸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쉼 없이 달려갔다. 서울 출발 나흘만에 차푸르산(Chapursan) 계곡의 조오드쿤(Zood Khun·3,350m) 마을에 도착했다. 길기트에서 현지 친구들과 재회하느라 계획보다 하루가 늦어진 셈이다. 3년 전에 만났던 큰 키의 알람 잔 다리요(Alam Jan Dariyo)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동갑내기의 이 멋진 친구를 나는 그냥 잔이라고 불렀다. 그의 딸 사브리나는 훌쩍 커서 7살의 예쁜 소녀로 자라 있었고, 부인은 맛있는 저녁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딜리상사르는 2000년에 이르샤드우윈(Irshad Uwin)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어느 고갯마루에서 우연하게 발견했다. 서면의 모습은 흡사 K2를 축소해 놓은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등반은 하고 싶었지만, 많은 입산료를 내고 이 산을 찾아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다행히 올 봄 파키스탄 정부가 등산규정을 변경해 해발 6,500m 이하의 개방지역 봉우리들은 모두 무료로 등반할 수 있게끔 됐다.
차푸르산 계곡은 1927년 8월,영국인 모리스 대위(C. J. Morris·1895-1980)가 측량국 소속의 토라바즈 칸(Torabaz Khan)과 탐사하며 측량한 지도를 기초로 하고 있다. 이 지도는 1925년 비서(P. C. Visser) 박사 일행이 바투라 빙하를 탐사하고 발간한 지도에 미탐사 계곡으로 남아 있던 계곡을 덧붙여 영국왕립지리학회가 발행한 것이다.
모리스의 지도와 현대의 모든 지도 상에는 산명이 딜리 상 이 사르(Dehli Sang-i-sar·20,424ft)로 나온다. 잔은 산명에 ‘i’가 두 번 반복되고 있어 적절치 않다고 했다. ‘Dehli Sang Sar’가 옳으며, 이들이 사용하는 와키어(Wakhi語)로 ‘중간에 바위가 있는 봉우리’라는 뜻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먼저 산의 정확히 위치를 찾아야 했다. 지도에 불분명한 남동면의 루쿠틱 계곡(Lukutic Zherav)으로 정찰을 시작했다. 4,600m 지점에서 전체 모습을 관찰하고 정상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등반선을 찾았다.
고소적응을 하려고 업다운하는 대신 다른 방법을 찾았다. 이시쿡(Yishkuk) 빙하까지 왕복 6km 거리를 무거운 중등산화를 신고 달리며 서키트 트레이닝을 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할 때까지 심장과 폐에 최대한 부하를 주었다.
다음날 아침 베이스캠프까지 짐을 함께 옮길 샤히드 알리가 왔다. 혹시 그가 낙오할 것에 대비해 작은 배낭을 메는 대신 큰 캐러밴용 배낭에 짐을 나누어 꾸렸다. 식사를 하면서 잔이 말했다.
“자네는 꼭 성공하리라 나는 믿네,”
그는 다른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주저하며 시간을 끌었다.
“킴, 자네 한국 연락처를 적어 주고 가게, 다음에 혹시 자네에게 좋은 탐험계획이 있으면 알려주면 좋지 않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는 설산 등반경험이 있어서 위험도 아는 사람이다. 1999년 차푸르산 계곡이 처음으로 외국인에게 개방되고 그 해 일본팀이 세크르사르(Sekr Sar·6,272m)를 등반했다. 이 팀은 한 달 동안 캠프 3개를 설치하고 거의 정상까지 고정로프를 깔면서 정상에 섰다. 그도 함께 섰다. 단독등반하려는 내가 상당히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두 명의 단출한 캐러밴이 시작됐다. 루쿠틱 계곡은 좁고 바람 한 점 없는 가파른 잡석지대의 연속이다. 달구어진 프라이팬 위를 걷는 듯했다. 얼마 전 길기트의 기온이 56℃를 넘었었다. 절반쯤 올랐을 때 힘들게 따라오던 알리가 숨이 가쁘다면서 자꾸 처진다. 그의 짐에서 무거운 것들을 꺼내 내 배낭으로 옮겼다. 그래도 뒤떨어진다. 4,600m에 먼저 올라 작은 빙하 호숫가에 적당한 캠프지를 잡고 그를 마중 나가서 데리고 왔다.
히말라야 지역에서 반나절에 1,300m 고도를 오르는 캐러밴은 이곳뿐일 것이다. 텐트 자리를 만드는 작업을 도와주겠다는 그에게 약속했던 임금의 두 배를 지불하고 마을로 돌려보냈다.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참아준 그가 정말 고마웠다.
베이스캠프 설치는 2인용 텐트 한 동을 치는 30분으로 끝났다. 산 밑으로 가서 장비를 테스트하고 등반 라인에 나타날 같은 경사도의 설벽을 200m 정도 시등해 보았다. 태양열을 받은 설벽은 위험천만이다.
딛고 섰던 발판 하나라도 무너진다면 바닥까지 내동댕이쳐질 것이다. 얼어붙은 밤 시간이 가장 적절했다. 아이스스크류는 한 개만 가지고 왔다. 세락지대 빙벽에서 아발라코프 확보시스템을 연습했다. 폭풍설 속에서도 정확히 두 개의 구멍이 합쳐지게 뚫을 수 있도록 몇 번을 반복해 손에 익히고 넓이와 각도를 기억했다.
7월17일 오후, 산을 면밀히 관찰했다. 산에 관한 모든 지식과 경험을 토대로 계획을 짰다. 몇 백 가지의 질문과 답이 머리 속에서 한 순간에 조합된다. 먼저 올라야할 등반선보다 정상에서 어떻게 안전하게 하산할 것인지를 정했다. 빙하부터 정상까지 유연하게 연결되는 등반루트도 확정했다. 문제는 정상 직전의 바위와 눈으로 된 칼날능선이다. 베이스캠프에서 육안으로는 그 거리와 상태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한 장의 종이에 산을 스케치했다. 구간별로 잘라 예상되는 소요시간과 위치별로 특정한 모양새, 그리고 오르면서 해야할 일을 적어 넣었다. 이 그림이 어두운 밤에 나를 인도할 나침반이다. 오전에 구름이 자욱하던 날씨가 개었다. 밤 10시에 출발해 내일 아침 6시에 일출과 함께 정상에 서고, 베이스캠프에 돌아와서 점심을 먹기로 전체 시간계획이 만들어졌다.
오후 2시, 잠을 자 두려고 누웠다. 눈을 감아도 등반하는 모습이 떠오르면 심장은 요동치고 손에는 땀이 배어 나왔다. 다시 텐트 밖으로 나와 주위를 맴돌았다.
오후 4시, 납작한 돌판을 주워다가 물을 부어가며 피켈의 날을 갈았다. 이미 줄로 날카롭게 갈아놓은 상태였다. 등반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정신을 돌려 보려고 애를 썼다.
무사가 결전에 나서기 전 목검을 깎았던 이유가 바로 이러한 심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에게는 백전백승이 아니라 백전불패여야 한다. 단독등반은 한 번의 사소한 실수라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침착하게, 잠든 저 산이 깨지 않도록 올랐다가 내려와야 한다. 불안, 두려움, 안정이 주기적으로 반복됐다.
정상 직전 날 밝기 기다리다 적기 놓쳐
오후 6시, 별이 떴다. 화장실을 다녀왔다. 오후 7시, 식량 중에 가장 맛있는 메뉴를 골랐다. 선택은 라면. 커피를 끊여 설탕과 소금을 넣어 보온병에 담았다. 식량은 많을수록 짐만 무거워진다. 짐이 무거우면 등반속도는 늦어지고 따라서 위험에 노출되는 비율이 높아진다. 수분, 염분, 당분으로 만족하자. 긴 시간의 히말라야 등반은 결국 자신의 정신적 신체적 에너지를 태워서 오르는 행위다. 아무리 잘 먹어도 체중은 준다.
장비는 6mm 줄 60m, 록하켄 5개, 아이스스크류 1개, 잔에게서 빌려온 50cm 스노바 1개, 프렌드 3개, 기타 슬링을 준비했다. 장비 역시 예비 수량은 없다. 부족함 속에서 난관을 헤쳐나가는 능력을 배워야한다.
오후 8시, 텐트 안에서 스트레칭과 명상을 마치고 물수건으로 몸을 깨끗이 닦았다. 옷을 입고 배낭을 꾸렸다. 오후 9시30분, 등반과 하산루트, 출발과 되돌아오는 일시를 그린 노트는 텐트 안에 돌로 눌러 펼쳐 놓았다. 옆에 여권과 여행경비가 든 수첩을 나란히 놓았다. 이 노트는 내가 제일 먼저 보아야한다. 반드시-. 마지막으로 카메라 가방에서 4년 전 어머니가 선물로 준 조그만 금박 카드를 꺼내 속주머니에 넣었다. 밤 10시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출발했다.
아직 달은 오르지 않았고 공기는 상쾌했다. 랜턴을 켜고 돌밭을 걸어 올랐다. 땀이 날 듯 말 듯, 호흡이 가쁘지 않게 속도를 조절한다. 정찰 때 봐두었던 길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잘 찾아가고 있다. 쉬지 않고 2시간만에 경사가 심해지는 지점에 도착해 장비를 착용했다.
12년째 사용하고 있는 안전벨트의 허리춤을 단단히 조이자 몸은 날아갈 듯하다. 이 벨트는 네 번씩이나 히말라야 나들이를 나와 함께 하고 있다. 색깔이 바래고 낡았지만 이 벨트가 마음이 편하다. 2년 전 등반 때 후배가 이 벨트를 보고 “형 안전벨트 끊어져서 어떻게 됐다는 소리 듣지 말고 새 벨트 가지고 가요”라고 당부했지만, 협찬 받은 새 것은 불편했다.
재킷을 꺼내 입었다. 빌려온 것이다. 안쪽 주머니에서 하얀 종이 조각을 나왔다. 이 친구 빌려주려면 세탁이나 해서 줄 것이지. 버렸다가 다시 주워 들었다. ‘창호형 등반 재미있게 하세요’라고 적혀 있고 달러가 들어 있었다. 웃었다. 벨트를 보고 뭐라 하던 후배였다. 그 원정 당시 나는 받은 돈을 담배갑에 넣어 되돌려준 적이 있었다. 내가 쓴 똑같은 수법에 이번에는 당하고 말았다.
결정하지 못하고 있던 두 개의 루트 가운데 바로 올려치는 1,000m 가량의 쿨와르를 선택했다. 좀더 어려운 루트다. 모두 명희 덕이다. 달이 올랐다. 줄을 반으로 접어서 매달고 힘차게 경사면을 출발했다. 설면은 단단하게 굳어 좋았으며, 등반이 시작되자 모든 신경은 한 곳으로 집중됐다. 몸은 부드럽고 리듬있게 움직여 나아갔다. 드디어 등반의 세계로 빠져든 것이다.
동작은 흡족할 만큼 경쾌했다. 2시간을 올랐다. 능선으로 올라서는 커니스가 보였다. 잠시 커피로 마른 목을 축이며 쉬고 가파른 홈통을 헤엄치듯 오른다. 설빙면 밑에 바위면이 드러나는 걱정은 사라졌다. 오히려 녹으면서 약간의 눈턱이 생겨 긴장된 다리를 풀기에도 적당했다. 능선에 붙은 커니스를 피켈로 무너뜨리고 3시간만에 쿨와르를 빠져나와 바위 지대에 드디어 올라섰다. 남쪽으로 카라코룸 설봉들이 달빛에 빛나고 있다. 온몸은 생기로 가득하다. 시간 계산도 정확했으며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여기서 동봉까지는 2시간, 봉우리 전의 빙벽 구간을 제외하고는 빠르게 올랐다. 동봉 정상에는 깎아놓은 듯한 1m의 바위기둥이 있었다. 새벽 4시45분이다. 이곳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며 1시간 가량을 쉬었다. 그것이 실수였다. 계속 진행하지 않고 쉰 죄로 정상에 오르지 못하게 될 줄이야-.
동봉과 주봉 사이 안부로 암벽을 타고 내려섰다가 점점 좁아지는 설릉을 올랐다. 태양이 떠올랐고 등반속도는 점점 늦어졌다. 샤프트를 눈속에 꽂아가며 힘겹게 나아간다. 동봉에서 볼 때 상어 등지느러미처럼 생긴 20m 높이의 설탑 앞에 도착했다. 오전 9시30분. 이미 눈 상태는 약해져 내 체중을 지탱하지 못했다. 설탑을 우측으로 돌아갔다.
그곳도 무릎까지 빠지는 눈에서 버둥거렸다. 정상으로 이어지는 긴 능선을 볼 수는 있었다. 북벽도 남벽과 마찬가지로 수직에 가까운 절벽이었고, 그 칼날능선 위에 설탑이 열 개도 넘게 연결되고 있었다.
안부로 되돌아왔다. 등반이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다. 내려갈 것인가, 오늘밤이 되어 눈이 다시 얼어붙을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나는 후자를 택했다. 인내를 시험하는 기다림이다. 눈이 녹은 잡석 위에서 졸았다. 태양열은 뜨겁다. 어지러웠다. 돌을 쌓아 스틱 두 개를 세우고 카메라를 쌓던 하얀 면천으로 차양막을 만들었다.
다시 졸다가 깨어났다. 나는 차양막 밑에 있지 않았다. 그곳에는 자일파트너가 자고 있어야 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아무도 없다. 오후 5시가 되어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자 바람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바위턱 밑에 새로운 자리를 만들고 앞에 눈턱을 쌓았다. 몸을 은박천으로 감쌌다. 그래도 춥다. 눈이 굳었는지 점검하려고 가끔 설면으로 나가 밟아 보았다.
날이 어두워진 오후 7시15분에 다시 정상으로 향했다. 그러나 더 이상 오를 수 없었다. 샘솟던 우물이 바닥을 드러낸 기분이었다. 열정도, 정신적인 힘도, 육체적인 힘도 모두 소모됐다. 되돌아섰다. 올라온 만큼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하산길이 남아 있었다.
7월23일 새벽 3시50분 딜리상사르 초등
텐트로 내려온 날 바로 마을로 갔다. 되돌아오기로 약속한 날이다. 잔은 정상에 오르고 내려온 줄 알고 벌써 양 한 마리도 잡아놓았다. 저녁은 많은 동네 사람들이 방문하여 제물로 바쳐진 양고기로 파티를 했다. 잔의 아버지도 바바군디 지아랏에서 왔다. 그는 성자의 무덤을 지키며 노래를 만들면서 시타르를 연주하는 유유자적한 사람이다. 3년 전에 뵌 적이 있었다. 그는 구전으로 전하는 전설을 이야기해 주었고 줄거리는 이러했다.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얘기라네. 자리인 이시쿡(Zareen Yishkuk)이라는 곳이 있었지. 그곳은 넓은 초원에 양과 야크, 말들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뛰어 놀고, 젖과 버터가 넘쳐났지. 집은 화려한 카페트와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사람들은 아무 걱정 없이 평화롭게 산다네. 몇몇 사람이 그곳을 갔다 왔으나, 언제부터인가 고개로 넘어가는 얼음문이 닫혀 더 이상 갈 수 없게 됐네.”
잔이 옆에서 덧 붙였다.
“샹그릴라, 또는 행복의 땅(Happy Valley)이라고 할까. 후에 많은 사람들이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모두 헛수고였지.”
와키 사람들은 원래 아프간 파미르에서 유목생활을 하다가 이 계곡으로 와서 정착한 사람들이다.
“자네는 믿나?”
아버지가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물었다.
“예.”
이야기를 마친 잔의 아버지는 등반할 때 가져가라고 나무로 깎아 만든 실감개를 선물로 주고 갔다. 이 황당하고, 어쩌면 책에서나 나올 법한 이 전설을 믿고 싶었다. 다음 날 아침 잔을 꼬드겼다.
“어제 자네 아버지가 해 준 얘기를 나는 믿고 싶다네. 함께 찾아보지 않겠나.”
“자네와 함께라면 못 갈 것도 없지.”
흔쾌히 그가 승낙했다. 우리는 온 방에 영국, 미국, 일본, 러시아, 스위스에 발행된 이쪽 지역의 모든 지도를 펼쳐놓고 예상되는 빙하와 고개를 찾았다. 그리고 아무도 넘지 못한 고개 하나를 찾아냈다. 지도에 그곳은 바투라 빙하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제 지도에 대한 내 생각은 바뀌었다. 제발 이 지도가 틀려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고개 너머에 새로운 세상을 기대했다. 포터 고용, 식량 구입 등 준비는 잔이 하기로 하고 준비비를 주었다.
베이스캠프로 다시 올라갔다. 등반에 대한 두려움은 어려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모른다는 사실에서 온다. 첫번째 시도할 때보다 마음은 훨씬 편안했다. 저녁 6시에 출발했다. 동봉을 지나 안부까지는 스치듯 지났다. 상어 등지느러미 설탑을 우측으로 돌아 능선으로 올라서지 않고 북벽으로 직등을 시도했다. 표면의 약한 눈으로 다시 되돌아와 설탑 뒤를 횡단해 능선에 올라붙었다. 뾰족한 설탑을 10여 개 더 넘어 7월23일 새벽 3시50분 정상에 섰다.
정상부는 몇 사람이 설 정도의 넓이에 단단한 눈으로 덮여 있었다. 약속대로 정상 5m 밑 바위에 실감개를 매달았다. 먼 하늘에 여명이 밝아오고 있다. 기다렸다가 그 광활한 파노라마를 보고 싶었지만, 바람이 점점 거세지고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베이스캠프까지는 거의 뛰다시피 5시간만에 내려왔고, 바로 짐을 꾸려 배낭 두 개를 메고 마을로 내려왔다. 동네 사람들 모두가 축하해주었고, 양젖, 계란, 버터 등의 선물도 받았다. 이 날 또 한 마리의 양이 쓰러졌다.
전설 속의 샹그릴라 자리인이시쿡을 찾아서
하루동안 몸을 추스르고 10일치 식량과 장비를 준비해 마을을 출발했다. 우리 팀은 5명으로 구성됐다. 나와 잔, 그리고 일본 NHK TV와 와키족 노래를 취입한 경험이 있는 감미로운 목소리의 소유자 시린 수도(Shirin Sudo), 폴란드의 유명 산악인 크리스토프 비엘리키를 닮은 이프티카르(Iftikhar), 그리고 슈(Shu)다.
슈는 사람이 아니다. 이 동네 어느 주인에게서 버림받은 양몰이 개다. 검은 털에 40kg이나 되는 덩치와 사납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온순한 놈이다. 매일 잔의 집에 와서 음식을 얻어먹곤 했다. 이름이 없어 검은 색이라는 이들 말을 빌려 ‘슈’라고 부르기로 했다. 큰 체구에 먹는 것이 부족했던지 가축을 지켜야할 수호자가 양 새끼를 잡아먹은 것이 쫓겨난 이유였다. 주인은 고개 너머 되돌아오지 못할 곳에 버려달라고 부탁했다. 조오드쿤에 유일한 개였고, 동네 사람들도 싫어했다. 막내 팀원이 된 슈에게도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우리는 비슷하게 20kg씩 짐을 나누어 졌다. 첫날은 키트키제랍(Kit Ki Zherav), 이틀째는 빙하를 건너 루프가르피르(Luphgar Pir·5,190m) 고개로 오르는 입구에서 밤을 지냈다. 캠프지에 도착하면 이들이 텐트를 치고 빵을 구워 식사를 준비했다. 나는 이제 할 일이 없었다.
넷이 키트키제랍 빙하 위를 걸어가는 뒷모습은 대규모 탐사대에 부럽지 않았다. 고개는 쿡사르(Kuk Sar·6,943m) 북벽을 바라보며 빙하를 거슬러 올라 동쪽 원류에 있었다. 두 개의 안부 중 남쪽(5,193m) 고개는 500m의 암설벽으로 되어 있어 우리가 가진 장비로는 엄두도 못 낼 정도였고, 북쪽 고개(5,200m)쪽으로 몇 시간을 더 올랐다. 그곳도 200m 설벽과 바위지대라서 만만치 않아 보였다. 이들은 전혀 암벽등반 경험이나 장비를 사용해본 적이 없다. 잔도 말이 등반이었지 설사면을 오르내린 정도였다.
얼음 평원에 섬처럼 솟아 있는 모레인의 바위들을 네 명이 힘을 합쳐 밀쳐내고 캠프지를 만드는 데 두 시간이나 걸렸다. 슈는 빙하를 건널 때마다 뒤를 유심히 바라보는 습성이 있었다. 되돌아갈 길을 기억하려는 것일까. 마을에서는 잠만 늘어지게 자던 놈이 눈밭만 나타나면 신나게 뛰어다녔고, 경사진 곳에서 누워 미끄럼을 탔다. 혼자 신났다. 식사시간에는 이프티카르가 한 사람분의 음식을 따로 챙겨 주었다.
내일 고개를 넘는다. 저녁을 먹기 전에 두 시간 동안 등반훈련을 시켰다. 먼저 안전밸트와 아이젠 착용법, 의사소통이 안 되는 시린 수도와 이프티카르를 위해 영어, 우르두, 와키 말을 섞어서 우리들만의 의사소통 언어를 즉석해서 만들었다. 등반순서는 내가 선등해 줄을 고정시키면 두 사람은 프루지크 매듭과 티블록을 이용해 오르고 마지막으로 잔은 슈를 데리고 나의 확보를 받으며 따라 오기로 했다. 놀이동산에 온 아이들처럼 즐겁게 배우고 놀았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몇 가지를 당부했다. 고개를 넘을 때까지는 우리는 서로를 믿어야 하며, 문제가 발생하면 내가 내린 결정과 지시에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내용을 한 명 한 명에게 번갈아 가며 확답을 받았다. 그리고 벽에서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내 허락 없이는 확보줄을 풀어서는 안 된다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반복했다. 새벽에 출발하기로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저쪽 텐트에서 이프티카르가 아이젠을 베개로 쓴다는 시린 수도의 말에 양쪽 텐트 모두 난리가 났다. 우리는 이런 사소한 것에도 웃으며 떠들어댔다.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몇 배 즐거움이 있었다. 침낭 속에 얼굴을 묻고 누운 잔에게 말을 건넸다.
“자리인이시쿡에는 예쁜 공주들이 있다는데, 만약 찾게 된다면 나는 되돌아오지 않을 작정이네. 자네들은 마누라와 아이들이 있는데 어떻게 할 텐가?”
그는 아무 대꾸도 없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먼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초롱초롱하다. 서둘러 벽으로 향했다. 첫 60m 빙설면을 올랐다. 슈도 발톱을 아이젠처럼 이용하며 잘 따라왔다. 바위지대인 두번째 마디에서 슈는 올라오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 무거운 놈을 업을 수도 없다. 슈는 한 번 더 우리에게서 버림받았다.
잔이 위로 올라와 버리자 평소 짖는 소리와 달리 서럽게 울부짖었다. 그리고는 우리를 볼 수 있는 빙하로 뛰어내려갔다. 잔은 걱정 말라고 했다. 캠프지에 빵을 남겨두고 왔고, 오늘 내로 마을로 돌아갈 것이란다. 3일 걸어온 거리였다. 세 마디를 더 등반해 고개에 설 때까지 저 아래에서 슈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슴이 아프다.
고개 반대면은 하강하지 않아도 됐다. 우리는 서로를 축하하며 돌탑을 쌓았다. 그리고 가장 힘들어했던 시린 수도의 환상적인 노래가 울려 퍼져 나갔다.
“가자, 자리인이시쿡으로!”를 외치며 뛰다시피 빙하를 내려갔다. 맑은 물이 샘솟고 작은 호수들과 야생화들이 즐비하게 피어있는 육시고즈(Yuksh Goz)에 들어갔다. 지금까지 지낸 캠프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남쪽으로 바투라(Batura·7,794m)가 바라다보였다. 지도는 틀리지 않았다. 이제 파수(Pasu)로 가는 수밖에 없다.
풀밭에 누워 여유를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잔이 이름을 부르더니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우린 모두 함성을 질렀다. 슈가 언덕을 내려오고 있지 않은가. 이 놈은 우리에게는 관심도 없다는 듯 지나쳤다. 호숫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난 후에 텐트쪽으로 왔다. 이프티카르가 기다렸다는 듯 밀가루 반죽을 던져 주었다. 너무나 미안해서 그 놈 눈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도대체 암벽을 어떻게 올랐을까?
룹두르(Lupdur)를 거쳐 야시피르트(Yashpirt)에서 3년 전 도움을 받았던 구체삼(Guchesham)의 니사 할머니와 쿡힐(Kukhil)에 계시던 할머니들을 다시 만났고, 초대받은 세 집에서 세 번의 저녁식사를 먹었다. 신선한 생크림, 버터, 과일, 빵들이 쏟아져 나왔다. 과식으로 숨쉬기조차 힘들어졌다.
최초 횡단 고개 ‘육시고즈우윈’이라 명명
7일째, 파수로 가는 탐험 마지막 날이다. 바투라 빙하를 횡단하여 우드물(Wudmul)로 갔다. 빙하 남안을 따라 물룽힐(Mulunghil)로 내려섰다. 몸 상태가 엉망이더니 결국 구토를 하자 피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연이어 변으로도 쏟아졌다. 다행히 세 사람은 이 모습은 보지 못했다. 모래밭에 쓰러졌다. 그렇게 나는 두 시간 반 동안 사경을 헤맸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주위에는 물도 없었다. 시린 수도가 빙하에 들어가 떠 온 물 한 통을 다 마셨다.
세 사람을 위해서라도 걸어야했다. 꼬부랑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가는 모습으로 스틱에 의지해 걸었다. 인내에도 한계가 있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어리석게도 나는 내 배낭을 메고 가기를 끝까지 고집했다. 물론 무거운 것은 그들이 져 주었다. 날이 어두워진 오후 7시에 빙하 말단을 빠져나와 파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세 명과 포옹을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담배를 나눠 피웠다.
“몸은 어떤가?”
“이제 살만하네, 모두 축하하네.”
“자네도. 아마 어제 저녁에 먹은 살구 때문이 아닌가 싶네.”
“잔, 자네는 자리인이시쿡이 어디 있다고 생각하나?”
“우리들 마음속에….”
“….”
슈도 옆에서 배를 깔고 엎드려 있었다.
“이 놈은 어떻게 할 건가?”
“파미르로 보내줄 걸세.”
“마을로 또 돌아오면?”
“자네도 잘 알지 않나. 와키인들은 원래 파미르에 살던 사람들이네. 내 아버지도 나도 그곳에 가고 싶어하지. 슈도 내 마음과 같을 거야.”
우리 팀은 자리인이시쿡은 찾지 못했지만, 인간으로서는 처음으로 서부 카라코룸을 관통하는 길-바투라빙하와 키트키제랍 빙하를 연결한 100km 루트-을 만들었다. 나는 그 고개에 육시고즈우윈(Yuksh Goz Uwi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국으로 귀국하기 바로 전, 잔과 슈에 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비자가 필요 없는 슈는 이르샤드우윈(4,925m) 고개를 통해 아프간 대파미르로 보내져 돌아오지 않았으며, 잔은 내가 길기트에 도착하던 날 파미르를 가기 위해 카불로 떠났다고 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