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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울명리학당
 
 
 
카페 게시글
도울 왈 스크랩 꿈을 향해 도전 전진 앞으로
도울 추천 1 조회 212 15.03.27 10: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고등학교 졸업 이후 오늘까지

나의 삶은 끝이 없는 도전이었다.

 

 

 

방위가면 경제적인 부담(아시는 분은 아실 것임)으로

현역을 가야 하는데

내 키가 163Cm여서 해병대 만 받아줘서

해병대를 입대했다.

다행히 돈 안쓰고 병역을 필했다.

난 해병대 480기이다!

포항 1사단 33대대 10중대 작전병.

조상님들이 날 살리려고 적전병을 하게 도와 준것 같다.

그러나 훈련은 100% 참여 하는 것이 작전병의 임무다!

 

어려서부터 체력이 약했는데,

선천성 부정맥인줄도 모르고

그 많은 훈련을 견뎌냈다.

훈련은 늘 죽음사이에서 외줄을 타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내가 정신력이 약한 줄 알고 입술에 피가날 정도로 악물고 견뎌 냈는데

제대 이후 44세때 내가 선천성 부정맥인 것을 알았다.

3분 동안 심장이 두번정도 안뛰는...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그래서인지 난 운동이 싫다.

등산도 안한다.

등산후 감기가 보통 일주일 간다.

조금 무리만 하면 감기가 온다.

  

10여년 전에는 5분이상 걸을 수도 없었다.

5분 걷고 앉아서 쉬고

5분 걷다가 앉아서 쉬고

쉬지 않으면 온몸에서 땀이 흘렀다

특히 머리에서...

팔도 들기 힘들 정도로 안 좋았다.

그래서 하루 하루 도전이다!

 

내 나이가 지금 53이지만

제대 이후에도 전우애가 각별하다.

아직도 전우를 만나면 기쁘고 행복하다.

몇일 전도 삼삼열회모임에서

나가자 해병대가를 힘차게 불렀다

다들 50이 넘은 나이들이다!

 

개병대라고 욕도 많이 하지만

제대 이후 애국심은 배로 증가했다.

지금도 전쟁이 발 발 한다면

나는 국가를 위해서 전쟁터로 나갈 것이다.

 

제대이후 세영동화에서 에니메션을 제작에 참여했다.

보조에니메이터(동화)

3년간

디펜더어스

지아이조

트렌스퍼머

등을 제작했다.

 

처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동화멘을 그만두고

아케이드게임제작회사에서

한국최초로 3D에니메이션을 했다.

게임시나리오를 한국최초로 기준을 잡아줬다.

 

그러다

서울우유배달 일을 했다.

전세보증금으로 했다.

처와 같이

그런데 우유값 수금을 하지 못해서

실패를 했다.

지금도 처가 그때 만삭의 몸으로

우유를 배달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가슴이 메인다!

난 늘 최선을 다해서 살았지만,

결과는 늘 무능한 남편이었다.

우유배달장사를 2년만에 접었다.

전세보증금 다 까먹고

월세 보증금 백만원에 월세 20만원세방을 살이를 했다.

아들 우유값이 없어서

몸이약해서 노가다는 못해서

 

당일 돈을 받을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그일은

지하철 1호선 서울역에서 청량리역 구간에서

3년간 신문을 파는 일이다.

신문팔이...

최 하층의 직업

긴급속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내일자 스포츠를 9시간을 외치고 다녔다.

신문 한부팔면 석간은 70원, 스포츠신문은 100이 내 몫이었다.

그렇게 하루에 500여부이상 팔았다.

잘 될 때는 800부도 팔고

그렇게 3을 했다.

 

그때 몸이 많이 망가졌다.

사람이 많아서 이동을 할 수 없는 공간속에서 헤쳐나가며 신문을 팔았다.

아들 우유값을 벌기 위해서

그때 아들이 1

내 나이 31때...

 

그러나 처음으로 노동의 가치가 고귀하다는 것을 알게된 때이다.

의 소중함

돈의 무서움을 알았다.

처음으로 삶을 반성한 시기이다.

언제든지 최선을 다하고 살았지만...

 

그런 후

40살에 인천 부평 산곡동에서 배달 피자집을 했다.

 

난 피자를 좋아했다.

피자광 이어서

점포명도 피자광 으로 했다.

그이름도 거룩한 피자광

 

 

나는 피자를 팔때도 위 사진처럼

홍보용 스피커를 메고 외치며 홍보했다.

 

피자광피자 한번 드셔보세요?

세상에서 제1로 맛있는 피자입니다.

맛 없으면 환불해드립니다.

 

은행 갈때도

배달 갈때도 저 복장으로 갔다.

타인이 나를 보면 미친사람으로 봤다.

그러나 나는 내일에 최선을 다 했을 뿐이다.

 

열심히 하니까

SBS인생대역전에도 출연했다.

난 아직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고 거절해도

작가가 출연해 달라고 해서

 

근데 자격 미달이인 내가 인생대역전에 나가서 인지

방송출연 후 부부사이가 나빠졌다.

매출은 오르는데

남는게 적어서

계속 적자 아니면 본전

 

피자 한 판에 9900원 받는데

재료 원가가 5300원이나 나왔다.

재료를 줄일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맛이 있어야 파는 성격이라

그래서 장사는 됐지만

과감히 문을 닫았

3년만에

그때가 2002년 말쯤

 

 

 

 

피자집을 정리하고

1989년부터 공부해온 명리학(역학)으로

상담을 하기 시작했다.

 

주안역 앞 경향프라자에서 철학관을 했다.

위 사진은 출퇴근 할때의 복장이다.

이 또한 나보고 미쳤다고 했다.

그러나 난 내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사주도사이니

나한테 사주보시오?

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난 그 어떤 직업을 하더라도

당당했고 자랑스러웠다.

객관적으로 직업의 귀천은 분명 존재한다.

주관적으로는 직업의 귀천은 없다고 주장한다.

내가 좋아서 하면 그 것이 귀한 직업인 것이다.

 

지금의 나의 명리학 이론은 최고라고 나 스스로 인정한다.

타인이 몰라 주어도 개의치 않는다.

 

누가 감히 천간 열글자가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발표했는가.

천간지지(天干地支) 탄생 이후 단 한명도 없다.

5천년 이상이나 된 원리를 인류 최초로 찾아냈다.

내가 천재여서

내가 똑똑해서 찾아 낸 것이 아니다.

내가 간절히 원해서 찾아 낸 것이다.

이미 천간지지는 어느 학자가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 분이 천재이며 위대한 학자이다.

난 단지 찾아 낸것 뿐이다.

그래서 자랑을 하지 않는다.

 

태호복희씨도 천간지지 생성원리를 밝히지 않았고

주돈이도 밝히지 않았다.

정말로 몰랐었는지

알면서도 밝히지 않았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러나 난 세상에 책으로 공개할 것이다.

인류 역사이래 처음으로 공개되는 천간지지의 비밀을 밝힐 것이다.

빠르면 2015년 말쯤

늦어도 2016년 전반기에 말이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나홀로 십 수 년간 걸어 왔다.

그 길은 고독한 길이었다.

물러 볼 사람도 없고

볼 책도 없었다.

그래서 난 나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지금 은 서울 압구정 로데오에서

한국에서 제일작은 평수의 철학관(도울사주연구원)에서 상담하고 다.

 

꿈이 없는 젊은이들에게

꿈을 디자인해 주는

꿈 디자이너이다.

위 심볼이

심볼이다.

내가 디자인하고

상표등록까지 했다.

 

한글 을 형상한 새로운 상형문자이다.

새종대왕 이후 내가 처음으로

자의 자 하나를 뒤집은 사람이다.

 

꿈을 이루도록 도와주는 SNS를 설립하는 것이 나의 꿈이다.

 

꿈이 없는 자는 동물이고

꿈이 있는 자는 인간이 될 수 있다.

 

누구나 꿈을 정하고

꿈을 이룬 후

홍익인간(弘益人間)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홍익인간의 정확한 해석은

널리 이롭게 하는 인간이다!

 

고조선의 정치이념은

왕이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백성스스로가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하면서 살라는 이념이었다.

 

그래서 고조선의 유적지가 없는 것이다.

왕이라고 해서 큰집에서 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지금의 인류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이념인 것이다.

민주주의도 분쟁을 일으키고

자본주의도 분쟁을 일으키고

사회주의도 분쟁을 일으키고

공산주의도 분쟁을 일으키고

민족주의도 분쟁을 일으키고

제국주의도 분쟁을 일으킨다

 

홍익인간이념 만이 위6가지의 헛점을 극복할 수 있는

인류가 실천해야 할 제1의 이념인 것이다.

 

각자 스스로 널리 이롭게 하는 사람을 살야야 할 때이다.

그럼

국가간 전쟁

지역간 분쟁

이념간 전

종교간 전쟁

계층간 분쟁

세대간 분쟁

남녀간 분쟁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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